소프라노 김영미 간증: 우울증 극복과 신앙의 힘 이야기
절망을 넘어 희망을 노래: 소프라노 김영미 간증
"절망을 넘어 희망을 노래하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김영미 권사의 감동적인 신앙 간증"
안녕하십니까,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김학중 목사입니다. 옆에는 김정희 님과 함께합니다. 저희는 오늘 특별한 시간을 준비했는데요, 경상도 사투리의 묘미를 살려 "좀"이라는 단어 하나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좀 하지마", "좀 가만히 있어 봐", "아, 좀!" 등, 짧은 단어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느껴지시나요? 마찬가지로, "주님"이라는 단어 또한 우리의 다양한 감정과 상황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 "주님…" 탄식하며 매달리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축복에 "주님!" 환호하며 감사하기도 합니다. 오늘 새롭게하소서에서는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지만, 주님을 통해 치유받고 세계적인 소프라노로 다시 일어선 김영미 권사님의 간증을 통해 깊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영상을 통해 김영미 권사님을 만나보시겠습니다.
[음악]
소프라노 김영미 권사님은 세계 무대에서 한국 성악의 위상을 드높인 자랑스러운 분입니다. 어린 나이에 성악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수많은 국제 콩쿨에서 1위를 석권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1977년 베로나 국제 콩쿨 1위를 시작으로, 자코모 푸치니 국제 콩쿨 1위, 마리아 칼라스 국제 성악 콩쿨 최고상 수상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합니다. 특히,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국제 성악 콩쿨에서 입상하며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을 섭렵하며 극찬을 받았지만, 그녀의 삶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랜 유학 생활의 외로움과 결혼 후 겪었던 가정 문제로 인해 깊은 마음의 병, 즉 우울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캄캄한 터널 속에 갇힌 듯한 시간 속에서, 주님은 그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말씀과 찬양을 통해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셨고, 이후 귀국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주님을 찬양하는 복음의 통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의 회복과 승리의 비결은 오직 주님뿐이라고 고백하는 김영미 권사님을 모시고,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음악]
오늘 귀한 자리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김영미 권사님을 모셨습니다. 권사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권사님께서는 "세계적인 소프라노"라는 수식어를 정말 많이 들으셨을 것 같아요. 이제는 좀 익숙하실 법도 한데요.
네, 뭐… (웃음)
"하나님이 낳으신 최고의 찬양 사역자"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들도 권사님의 간증을 통해 큰 은혜를 받으실 것 같습니다. 직접 시청자분들께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인생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권사님께서는 무대 위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관객들을 압도하시는 분인데요, 실제로 뵈니 소녀처럼 수줍은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마치 무대 위의 화려한 디바와 평범한 인간 김영미 사이의 간극을 보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무대 밖에서는 평범한 사람으로 지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대 위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평범한 일상을 즐기시는군요.
네, 평범한 시민들과 함께 웃고 울며 살아가는 것이 저의 삶의 태도입니다.
무대 의상을 입고 화려하게 꾸민 모습과는 달리, 수수한 모습으로 다니셔서 알아보는 분들이 없을 것 같아요.
네, 전혀 못 알아보세요. 전문가 행사장에 가야 겨우 알아보시는 정도입니다.
무대 위에서의 압도적인 존재감과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집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저는 소프라노 김영미입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이시자,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계신 교수님이시기도 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신 지 벌써 25년이나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초창기 멤버로 합류하여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느끼는 보람도 크실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시나요?
학생들 개개인의 개성과 재능을 발견하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과정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학생들은 각자 다른 목소리와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레슨을 통해 함께 호흡하고 교감하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볼 때, 마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고유한 달란트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듯한 기쁨을 느낍니다. 잘 안 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발전시키는 모습을 보면, 마치 주님께서 우리에게 치유와 성장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제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학생들이 놀랍게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 또한 주님께서 주신 또 다른 달란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개인 레슨을 공개적으로 재현하는 듯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혹시 즉석 레슨도 가능할까요? (웃음)
글쎄요… (웃음) 방송 중이라 조금 곤란합니다.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25주년 기념 특별 연주회에서 교수님들과 함께 베르디 레퀴엠을 연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베르디 레퀴엠은 소프라노에게 매우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있는데, 망설임은 없으셨나요?
사실 베르디 레퀴엠은 소프라노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곡입니다. 나이가 들어 체력적으로도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과연 내가 이 어려운 곡을, 그것도 학교를 대표해서 연주할 수 있을까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영미야, 네가 언제 혼자 힘으로 노래했느냐?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듯했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권사님 정도의 경력에도 여전히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신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저희는 변함없이 권사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혹시 즉석에서 짧게라도 저희를 위해 노래 한 소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의 욕심일까요? (웃음)
아… (웃음) 죄송합니다. 이틀 전까지 계속 연주 일정이 있어서 목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쉽지만, 다음에 기회를 다시 만들어보겠습니다. 지금도 아름다운 목소리와 영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계신데요, 권사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의 김영미를 만나본다면 어떨까요?
어린 시절 저는 애교가 많고 활발한 아이였습니다. 할머니께서 저를 무척 예뻐하셔서 "살살 녹인다"는 의미로 "살살이"라는 별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콩쿨에 나가면 항상 1등을 하곤 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 대표로 콩쿨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노래를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제가 음악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셨습니다.
집안 자체가 음악과 인연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4대째 기독교 집안이라고 하셨는데, 음악적인 분위기도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은 4대째 기독교 집안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습니다. 6남매 모두 음악을 좋아했고, 특히 여자 형제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언니는 피아노, 저는 첼로, 동생은 바이올린을 전공했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연주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음악은 저희 가족에게 일상 그 자체였습니다.
6남매 모두 음악을 했다니, 정말 특별한 가족입니다. 혹시 부모님 중에 음악을 하신 분이 계신가요?
외할아버지께서 안기영 선생님이라고, 한국 초창기 작곡가 겸 테너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운 강남", "마의 태자" 등 유명 가곡과 오페라를 작곡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 또한 피아니스트셨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음악 DNA가 남다르네요. 청소년 시기에 일찍 유학을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신 건가요? 본인의 선택이었나요, 아니면 부모님의 권유였나요?
제가 유학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LP판으로 듣던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도 저렇게 세계적인 가수가 될 수 있을까?"라는 꿈을 키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께서 이탈리아 유학을 권유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영미, 너는 이탈리아에 가서 성악을 공부해야 한다. 본고장에서 제대로 배우는 것이 중요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이탈리아 유학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이 유학을 결심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부모님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부모님께서는 처음에는 유학을 반대하셨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혼자 타국에서 어떻게 지내려고 하느냐"며 걱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탈리아 유학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컸습니다. 고등학교 입시 필기시험 때 일부러 답안지를 백지로 제출했습니다. 부모님께서 학교에 오셔서 이유를 물으셨을 때, 이탈리아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부모님께서는 저의 간절한 소망을 받아주시고 유학을 허락해주셨습니다.
19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길에 오르셨다니, 대단한 결심입니다. 부모님께서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머니께서 피아니스트셨기 때문에 음악 교육에 대한 이해가 깊으셨습니다. 한국에서 음악 교육을 받는 것보다 이탈리아에서 본고장의 음악을 배우는 것이 딸에게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딸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에 대한 걱정도 크셨겠지만, 저의 재능과 열정을 믿고 지지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의 걱정 속에서 홀로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르셨는데, 타지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언어, 문화, 외로움 등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이탈리아에서의 유학 생활은 정말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였습니다. 이탈리아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유학을 갔기 때문에, 마치 귀머거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고 외로웠습니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문화 차이도 컸습니다. 음식, 생활 방식, 사람들 성격 등 모든 것이 한국과 달랐습니다. 외로움과 문화 차이, 언어 장벽까지 겹쳐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언어 문제 외에 음악적으로 어려움은 없었나요?
음악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1학년 때는 레슨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저보다 먼저 유학 와서 활동하던 선배 성악가들이 많았는데, 교수님들은 주로 그 선배들을 먼저 챙기셨습니다. 레슨 시간에 선배들이 찾아와 레슨을 부탁하면, 제 레슨 시간이 줄어들거나 아예 취소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차별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선배들이 이미 현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님 입장에서는 그들을 우선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서운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선배들의 레슨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간접 레슨' 효과를 얻으신 셈이네요. 하지만 어린 나이에 차별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텐데요.
물론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선배들의 레슨을 통해 교수님의 지도 방식, 발성법, 곡 해석 등 다양한 노하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선배들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 스스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배들의 레슨 덕분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터득하는 지혜를 얻었다고 할까요?
역경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신 긍정적인 태도가 놀랍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좌절하고 포기했을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배우려는 자세가 대단합니다. 동양에서 온 어린 유학생이 겪었을 어려움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2년 정도 시간이 흐르자, 교수님께서 제 실력을 인정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를 들어보시더니 "이제 콩쿨에 한번 나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콩쿨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3년이면 서당개도 풍월을 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웃음) 저도 3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훈련받으니 실력이 많이 늘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출전한 첫 콩쿨에서 1등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결과입니다.
베로나 국제 콩쿨에서 1위를 수상했습니다. 이후 푸치니 콩쿨, 마리아 칼라스 콩쿨 등 권위 있는 국제 콩쿨에서 연이어 입상하면서 세계적인 성악가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칼라스 콩쿨에서는 6명의 최고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600명이 넘는 참가자 중에서 파트별로 최고 연주자에게 주는 상이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그때 "아, 이제 좀 길이 보이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등이 제일 쉬웠어요! (웃음)
연이은 콩쿨 1위 수상은 정말 대단한 쾌거입니다. 이탈리아, 성악의 본고장에서 한국인 소프라노가 인정받았다는 것은 한국 음악계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생활을 접고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마리아 칼라스 콩쿨에 어머니께서 함께 오셔서 제 콩쿨 과정을 지켜보셨습니다. 콩쿨 마지막 날, 투표 결과를 보고 어머니께서 제게 "너는 여기서 안 되겠다. 미국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콩쿨 투표도 이탈리아 국민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는데, 한국인인 제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이탈리아의 보이지 않는 차별 장벽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더 큰 무대를 위해 미국행을 권유하신 거군요. 하지만 이탈리아는 스칼라 오페라 극장 데뷔를 꿈꿔왔던 곳인데,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스칼라 오페라 극장은 제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무대였습니다.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고,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시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불안함과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우울증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순종과 노래에 대한 갈망, 미래에 대한 불안함 등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마음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국 우울증에 빠져 몸과 마음이 지쳐갔습니다. 노래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중에 문득 "어머니께 순종해야 한다"는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미국행을 결심하고 한 달 만에 짐을 싸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선견지명이 놀랍습니다. 미국은 이탈리아보다 더 큰 기회의 땅이었을까요? 미국에서 화려하게 데뷔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은 확실히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오페라 극장도 많고, 다양한 무대가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국제 콩쿨이 막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이미 1차 예선이 끝난 상황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콩쿨 사무국에 연락해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의를 해서 1차 예선을 다시 치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전화하지 않았다면, 파바로티 콩쿨에 참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머니 말씀에 순종했던 것이 행운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역시 어머니의 예감이 적중했네요! 파바로티 콩쿨에서도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으셨겠죠?
파바로티 콩쿨에서도 1등을 수상했습니다. 4차까지 진행된 콩쿨에서 최종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콩쿨 과정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긴장감 때문에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고, 탈락하는 사람도 속출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콩쿨을 통해 제 실력을 인정받고, 오페라 무대에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파바로티 콩쿨 우승 후, 오페라단에서 두 작품의 주역으로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묘약", 다른 하나는 "라 보엠"이었습니다. 하지만 "라 보엠"은 다른 소프라노에게 배역이 돌아갔습니다. 알고 보니 오페라단에 스폰서가 붙었는데, 스폰서가 원하는 소프라노에게 배역을 준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기업 후원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사랑의 묘약"으로 미국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파바로티 씨가 저에게 와서 "언젠가 꼭 너와 '라 보엠'을 함께 하고 싶다"라고 위로해주셨습니다.
세계적인 테너 파바로티에게 실력을 인정받으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행복한 나날이 펼쳐질 것 같았는데, 결혼 후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셨나요?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결혼 후 아이를 갖기를 원했지만, 9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어렵게 딸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결혼 생활은 여전히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결혼은 늦게 하신 편이신가요?
30살에 결혼했습니다. 남편과는 어머니들끼리 아는 사이였습니다. 남편 어머니도 피아니스트셨고, 저희 어머니와 친분이 있으셨습니다. 어머니들끼리 "우리 아들, 딸 한번 만나보게 할까?" 하시면서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종의 '소개팅'이었죠.
어머니들의 주선으로 만난 '엄친아' 남편이셨군요! 남편분은 어떤 분이셨나요?
남편은 회사원이었습니다. 당시 LA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남편이 뉴욕으로 와서 저희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소개팅 후 바로 결혼까지 이어진 건가요? 연애 기간이 짧았을 것 같은데요.
네, 연애 기간은 짧았습니다. 소개팅 후 몇 번 만나고 바로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만나 결혼생활을 하다 보니, 의견 충돌이 잦았습니다. 성격 차이도 컸습니다. 결혼 초에는 많이 다투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혼 생활 2년 만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저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말 큰 슬픔이었을 것 같습니다. 결혼 생활의 어려움과 어머니의 죽음까지 겹치면서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텐데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마음이 너무 허전했습니다.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할 이유가 뭘까?'라는 회의감도 들었습니다. 문득 제 믿음을 점검하게 되었고, 제 마음속에 여전히 우울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울증 극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남편이 LA 지사로 발령받으면서 온 가족이 LA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LA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치유해주세요. 이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영미야…"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벅찬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는데, 주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제가 얼마나 믿음이 부족했으면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실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는데, 너는 나를 믿느냐?"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의 고통과 외로움, 절망감을 말씀하시면서, 저의 고통을 모두 이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믿지 못하고 네 의지로만 힘겹게 버티려고 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 모든 죄와 불신앙을 회개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랫동안 저를 짓눌렀던 우울증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이 가득 차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용기가 생겼습니다.
정말 드라마틱한 치유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시고 우울증이 치유되었다니, 놀라운 간증입니다. 그 이후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나요?
우울증이 치유된 후, 삶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마음은 장애인과 같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를 마치자마자 전화가 왔습니다. LA의 한 목사님이셨는데, 장애인 선교센터를 운영하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장애인들을 위한 집을 짓고 싶은데, 후원 연주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제가 기도한 지 몇 분 만에 응답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직접 들으시고 응답해주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자, 마음의 평안을 얻고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장애인들을 위한 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셨군요. 음악 활동도 계속 이어가고 계신가요?
물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인 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제 욕심과 명예를 위해 노래했다면,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노래합니다.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제 음악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음악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음악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마음의 공허함이, 하나님을 만난 후 완전히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제 삶의 전부입니다.
권사님의 간증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체험적인 신앙,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권사님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신 거죠?
네,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건강해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연주회나 여행 갈 때, 제가 직접 운전해서 데려다주고 새벽 2~3시까지 함께 놀다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또 다른 일정을 소화하곤 합니다. 제자들이 "선생님은 도대체 어떻게 에너지가 넘치시냐"고 놀라곤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붙잡아주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저를 강건하게 붙드시고, 늘 새로운 힘을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행복한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권사님의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행복을 나누고 싶어서 일본 전도 집회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은 선교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도가 어려운 곳인데, 일본 전도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일본 전도는 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 하용조 목사님께서 생전에 저를 일본 선교 집회에 초청해주셨습니다. 당시 저는 일본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었지만, 1년 전부터 이상하게 일본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그냥 "일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전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계속 나왔습니다. 하 목사님께서 일본 선교를 제안하셨을 때,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일본으로 보내시려는구나'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하 목사님께 "제가 1년 전부터 일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렸더니, 목사님께서 "잘 됐다"며 함께 일본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일본을 방문하여 전도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소나타'라는 이름으로 일본 전도 집회를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많은 기적과 은혜를 경험하셨을 것 같습니다.
일본 전도 집회를 통해 정말 많은 기적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집회에 참석하는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불신자들입니다. 3~4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찬양하고 간증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혹시 실수하면 어쩌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어쩌나' 걱정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안에 있는 모든 욕심과 불안을 내려놓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제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일본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해주세요." 기도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고, 담대하게 무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찬양을 시작하면, 제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제 목소리가 마치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합니다. 집회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본 전도를 통해 '내려놓음'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내 욕심과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일본 전도는 제 삶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셨는데, 앞으로 더 서보고 싶은 무대가 있으신가요?
이제는 제 개인적인 욕심으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것입니다. 25주년 기념 연주회 때 베르디 레퀴엠을 연주했던 것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무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무대에 서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오늘 권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소녀처럼 해맑은 모습 뒤에 깊은 신앙심과 굳건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음악적 재능과 신앙의 뿌리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셨는데요, 천국에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천국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제일 먼저 "엄마, 첼리(딸 이름) 왔어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엄마, 보고 싶었어요. 엄마 덕분에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어요. 엄마의 기도 덕분에 제가 이렇게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어요."라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제가 힘들 때마다 곁에서 격려해주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 덕분에 제가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청개구리처럼 행동할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늘 묵묵히 저를 믿고 지지해주셨습니다. 천국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엄마, 제가 엄마 속 많이 썩였죠? 이제는 엄마의 기도에 어긋나지 않게,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약속드리고 싶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이 지금의 권사님을 만드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롭게하소서 시청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기도 제목도 함께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앞으로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후배들에게도 성경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싶습니다. 세상을 향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 사역자가 되도록 돕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제가 가진 음악적 재능을 활용하여 후배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싶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후배 양성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의 기도 제목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생명 다하는 날까지, 주님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저의 부족한 간증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모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귀한 간증 나눠주신 김영미 권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권사님의 삶은, 세상적인 성공과 명예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혹시 지금 삶의 어려움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권사님의 간증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잠시 멈춰서서 주님께 돌아오십시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저희 새롭게하소서와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영미 권사님께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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