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교회와 바벨탑 비교, 새 성전 의미와 영혼 구원 메시지
새 성전, 방주를 세우다: 영혼 구원
리메이크 (28) - 방주교회와 바벨탑 교회 (2021-02-28 주일예배) - 박한수 목사 상세 정리 및 노하우 소개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세 가지 생각을 떠올리는데요, 이는 누가 시켜서도, 습관 때문도 아닌, 제 안에서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다음으로 교회, 마지막으로 우리 성도님들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저에게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결코 이상하거나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신앙 안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를 가지기에 교회가 아프면 함께 아파하고, 교회가 기쁘면 함께 기뻐하며, 교회가 힘들면 함께 힘들어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주인이 아프다면 여러분도 아픈 것이고, 주인이 힘들면 여러분 또한 힘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이시기에, 그분께 속한 교회 또한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G2 성전에서 첫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요, 이 자리를 위해 수고해주신 모든 성도님들과, 기도해주시고 밤늦도록 음향과 영상을 맞추고 청소해주시는 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헌신해주신 분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첫 예배를 드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어떤 분들은 교회 안팎에서 축하 인사를 건네주셨습니다. 물론 축하받는 것이 나쁜 일이나 슬픈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일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돌잔치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이 머리 되시는 교회는 엄밀히 말해 우리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마치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의 심정과 같아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순간적으로 기뻤겠지만, 중요한 것은 받는 것에만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기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인의 기대를 생각하며 땀 흘려 노력해야 했습니다. 만약 받는 것에만 기뻐하고 말았다면 책망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 화폐 가치로 30억이라는 큰돈인 다섯 달란트를 주인이 믿고 맡긴 이유는 단순히 기뻐하라고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묻어두거나 자랑하라고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에 묻어 두었지만,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칭찬받은 이유는 이윤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받은 달란트만큼 이윤을 남겼습니다. 30억이라는 큰 돈으로 30억을 더 남기기 위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을 쏟았겠습니까? 남들이 잠잘 때 잠 못 자고, 놀러 갈 때 놀러 가지 못하며 얼마나 수고하고 애썼겠습니까? 그 결과 얻은 결실이 바로 다섯 달란트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바로 그 다섯 달란트를 받은 것입니다. 물론 기쁜 일이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새 성전 건축을 마치고 첫 예배를 드리기까지 기뻐하고 축제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그런 분위기를 끝내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떡을 나누는 것과 같은 축하 행사도 잠시 미룬 것은 코로나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이 떡을 나누며 축하할 때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떡을 나누며 잔치를 벌일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첫째, 우리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머물러 쇠퇴할 것인가? 둘째, 더욱 무르익고 성숙한 공동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자라나지 못하고 멈춰 설 것인가?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진정한 주인이 되셔서 이끌어 가실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는 인간적인 교회가 되어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인가? 이 두 가지 선택지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고, 음식점이라고 다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며, 자식이라고 다 제 역할을 하는 자식이 아닌 것처럼, 교회라고 해서 다 똑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교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목사가 정통 신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다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건물이 웅장하다고, 목사가 있다고, 성도가 많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제 역할을 감당해야 비로소 교회라고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보자면, 첫째,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육체로 끝나는 갈라디아 교회와 같은 유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도로 뜨겁게 시작했지만, 결국 인간적인 싸움과 갈등으로 끝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망해버리는 교회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통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며 엄중하게 꾸짖었습니다. 이는 "너희가 성령으로 그토록 멋지고 훌륭하게 시작하더니, 이제는 육체로 끝맺으려 하는가? 인간적인 갈등, 욕심, 명예욕만 가득 채우다 망하려 하는가?"라는 질책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헤롯 성전과 같은 교회입니다. 헤롯은 하나님을 믿는 순수한 마음으로 성전을 건축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서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렇기에 헤롯 성전은 진정한 성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름부터 불행하게도 '헤롯 성전'이라 불리는 이 성전은 세 번째 지어진 성전이었지만, 후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헤롯 성전을 성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하나 남지 않고 철저하게 파괴되어 거대한 쓰레기 더미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는 애초에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교회의 말로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세 번째 유형은 한때 뜨겁고 충만했지만, 첫사랑을 잃고 그저 그런 존재로 전락하여 주님께 책망받는 에베소 교회와 같은 교회입니다. 처음의 열정과 사랑이 식어지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뜨거울 수만 있겠으며, 오래 하다 보면 열정이 식을 수도 있고,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해 주님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강력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단순히 격려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를 지었다고 단정하며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향해 "회개하라, 첫사랑을 잃어버린 죄를 회개하라"며 엄중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와 여러분은 시간이 갈수록 더 안전해지고 있습니까? 더 뜨거워지고 있습니까? 더 성숙해지고 있습니까? 더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까? 더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열정이 식어가고 있다면, 지금은 비상벨이 울려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깨닫고, 어디서부터 처음의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 예배의 열정,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모함이 식어버렸는지 되돌아보고, 그 자리로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네 번째 유형은 처음에는 미약하고 과정도 미약하며 지금도 여전히 미약하지만, 세상적인 힘도 없고 사람도 많지 않으며 재정도 부족하고 세상적인 권세도 없는, 심지어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교회입니다.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작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 기념비적인 새 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리는 오늘, 우리는 과연 지금까지 어떤 교회였으며 앞으로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를 이 자리로 인도하시고 다섯 달란트를 맡기신 주님의 마음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그 기대에 어떻게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까요? 이 질문들을 오늘 이 첫 시간에 반드시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교회밖에 없습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좋은 교회와 나쁜 교회, 뜨거운 교회와 미지근한 교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단 두 종류의 교회만이 존재합니다.
그 첫째는 사람이 주인 노릇 하는 교회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여기서 교회의 머리라는 말은 교회가 머리 되신 주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든 머리가 존재합니다. 가정에는 가장, 회사에는 사장, 단체에는 대표 등 머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이 땅의 모든 교회의 머리, 우두머리, 대장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론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들 인정하고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교회 안에 들어가 보면 목사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신학을 공부할 때,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칭찬을 받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제 마음에는 두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교회라니, 너무 당연한 이름을 이제야 누가 쓰기 시작했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다 주님의 교회인데..."라는 생각과, "왜 이제야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쓰는 교회가 나타났을까? 그동안은 왜 들어보지 못했을까?" 하는 의아함이었습니다.
본질적이고 당연한 이름을 이제야 사용하는 교회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교회는 당연히 예수님의 교회, 주님의 교회여야 하는데, 굳이 '주님의 교회'라고 이름을 지어야만 했을까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이 땅에 예수님이 진정으로 주인 노릇 하시는 교회를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시장통에 가면 '원조 족발집'이라는 간판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진짜 원조 족발집은 단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가짜인 경우가 많습니다. '원조'라는 말 자체가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교회', '사랑의 교회', '제자 교회'와 같은 이름들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색합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당연히 좋은 교회여야 하고, 사랑의 교회여야 하며,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제자 교회'라는 이름은 굳이 붙일 필요가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과거 초대교회는 지역 이름을 붙여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 교회' 등으로 불렸습니다. 당시에는 '사랑의 교회', '믿음의 교회'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가 사랑을 실천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믿음의 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다면, 오히려 "저 교회는 믿음이 얼마나 부족하면 저렇게 이름을 지었을까?"라는 놀림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이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왜 우리는 이렇게 새삼스럽게 당연한 이야기를 에너지 낭비처럼 반복해야 할까요? 그만큼 지금 교회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주님의 교회, 즉 소유격으로 표현되는 이 당연한 교회의 본질을 다시 강조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 제작왕성교회라는 이름보다 더 본질적인 교회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하지만 이름만 그렇게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그러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두 종류의 교회를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원하시는 미래의 교회, 꿈꾸시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방주와 바벨탑이라는 두 건축물이 등장합니다. 이 둘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공통점 중 하나는 둘 다 인간이 만든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점입니다. 방주의 크기는 엄청났으며, 바벨탑은 말할 것도 없이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당시 바벨탑 건축 기술은 오늘날 20세기 컴퓨터 발명에 비견될 정도로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벽돌 제조 기술과 역청을 이용한 접착 기술은 거대한 건축물 축조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방주 역시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이었습니다.
방주와 바벨탑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시고 운영하시는 방법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특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직접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전도조차 직접 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직접 전도하신다면,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오늘 당장 예수님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뻗어 하늘에 글씨를 쓰시고, 구름을 피로 물들이고, 해를 없애버리신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방법 대신,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전도가 얼마나 비효율적인 방법인지 아십니까? 10년을 전도해도 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직접 역사하시지 않고,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를 세우셔서 전도하게 하시고, 우리의 미련함으로 전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방주도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짓게 하셨고, 바벨탑도 니므롯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시날 평야에 짓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을 것입니다.
방주와 바벨탑은 중요한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차이는 방주는 철저히 사람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방주는 유람선이나 화물선이 아니라, 오직 구원을 위한 배였습니다. 장차 닥칠 홍수로 인해 멸망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지어 사람들을 태우라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8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방주를 지었지만, 결국 구원받은 사람은 단 8명뿐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방주를 짓는 노아를 어리석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주가 지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저 거대한 배는 무엇이며, 그 많은 자재와 기술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노아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품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동물들이 때가 되자 방주 안으로 줄지어 들어오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는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짐승들이 암수 한 쌍씩, 그것도 며칠 동안 끊임없이 방주로 향해 들어오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장관이었습니다. 사자 암수가 들어오는데 등 위에 토끼가 앉아 있는 모습은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노아가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 것은 아닐까? 저 사람들이 다 어리석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해봐야 합니다. 길거리에서 욕을 먹으면서도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도 멀쩡한 사람이고, 정신 나간 사람은 아닐 텐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렇게 자발적으로 나와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욕을 먹으면서까지 전도를 하는 것일까?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벨탑 역시 나름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바벨탑 건축자들의 외침은 놀랍게도 그들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홍수가 또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자기들끼리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벨탑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었던 반면, 방주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시고, 우리를 모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차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세상에서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영혼들을 이곳으로 인도하여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미국 휴스턴 서울침례교회를 목회하셨던 최영기 목사님은 가정교회 목회로 유명해지셨습니다. 그 교회는 매주 주일 아침마다 침례식을 거행했는데, 매주 2-3명씩 침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매주 침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매주 새로운 영혼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매주 2-3명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미국은 교포 사회의 연합이 잘 되어 있고, 지역 교회 간의 교류도 활발합니다. 휴스턴 서울침례교회는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고, 지역 교회들과 친교 모임도 자주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묘한 경쟁 심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교회와의 체육대회에서 이기려고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동원하려고 하는 경쟁심 말입니다. 그런데 휴스턴 서울침례교회는 그렇게 큰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체육대회에 참여할 때 빈손으로 왔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왜 그렇게 큰 교회가 도시락 하나 준비해오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면,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 없고, 영혼 구원에만 관심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주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얼마나 귀한 교회입니까?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 영혼 구원에 집중하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새 신자가 교회 문턱을 넘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은 엄청난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지난날 그런 시간을 겪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왔을 때, 어떻게든 교회에 적응하고 함께 어울리기 위해 몸부림쳤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체육대회를 한다면 기웃거려 보고, 봉사활동을 한다면 쓰레기라도 주우며 함께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나는 일은 기존 교인들이 새 신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여러분 모두, 말과 행동을 할 때는 주변을 한번쯤 살펴봐야 합니다. 저에게 와서 혈기를 부리고 욕설을 퍼붓는 것은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용서하지 못해서 때려 죽이고 싶을 때도 있지만... 농담입니다.) 저에게는 어떤 행동을 해도 괜찮지만, 연약한 새 신자 앞에서는 절대로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때문에 연약한 영혼이 실족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성경에서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 단호하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강력한 경고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영혼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새 신자가 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공동체에 속하려고 할 때, 기존 교인들은 따뜻하게 맞아주고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조심스럽게 다루듯, 새 신자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새 신자를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주고 쫓아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새 신자가 족구를 하고 싶어 교회에 왔는데, 기존 교인들이 실력 부족을 탓하며 냉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 신자는 상처받고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족구 실력이 부족한 것은 작은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작은 행동들이 쌓여 교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새 신자들도 다 압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중에 성장하고 영적으로 성숙했을 때, 받은 사랑과 섬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똑같이 섬기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주인 노릇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파벌이 생기고 당파 싸움을 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파벌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단을 경계하고 엉뚱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돈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목사 가족들이 교회에서 지나치게 권력을 휘두르거나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그것 때문에 상처받는 성도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텃세를 부려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연약한 자들이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섬기십시오. 양보하십시오. 헌신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숙한 교인의 자세입니다.
마지막으로 방주 교회와 바벨탑 교회, 이 두 유형의 교회를 통해 우리 자신을 진단해봐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혹시 바벨탑 교회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진정으로 방주 교회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두 교회의 결정적인 차이점 중 두 번째는 바로 방주 교회는 하나님께서 운전하시고 세우시고 계획하시는 교회라는 점입니다. 방주를 지은 것은 노아이지만, 방주 설계의 아이디어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크기까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셨습니다. 방주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방주에는 방향키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주에는 동력도 필요 없었습니다. 엔진도, 노도 필요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엔진이 없었겠지만, 작은 배에도 노는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방주는 마치 사과 상자처럼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직사각형 상자 안에 곡식과 짐승, 노아의 가족들이 타고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흘러갈 뿐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새를 날려 보내 육지를 확인했을까요? 새가 돌아오지 않으면 육지가 없다는 뜻이고, 돌아오면 아직 육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며칠이고 며칠이고 캄캄한 방주 안에서 답답하고 힘들고 불안했겠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안전하게 구원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운전하시는데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도, 어디서 살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배가 부서질까 염려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벨탑은 달랐습니다. 바벨탑은 철저히 인간의 설계, 인간의 지혜, 인간의 재정, 인간의 방법, 인간의 힘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습니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건축물이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바벨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망했지만, 노아의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 동물들을 살리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방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새 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리니 기쁘기도 하지만,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성전이 커져서, 여러분과 제가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아 걱정됩니다. 몸은 멀어져도 마음까지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커졌다고 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저절로 커질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새 성전에 많은 사람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부흥은 양적인 부흥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 즉 '변화의 부흥'입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얼마나 더 무르익고 성숙해질 것인가, 얼마나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다섯 달란트의 엄중한 책임을 기억하고,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고 인간이 주인 노릇 하는 바벨탑을 절대로 세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채우시고 공급하시고 함께하시는 방주 교회를 만들어,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신실하고 순전하게,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눈물과 감격이 끊이지 않는 살아있는 생명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교회를 굽어살펴주시옵소서. 우리 교회가 주님께서 맡기신 다섯 달란트를 받았나이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감사만 할 수 없습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하나님, 이 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이 달란트를 가지고 우리끼리만 좋아하며 잔치하는 교회가 되지 않게 하시고, 이 다섯 달란트를 기반으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여 영혼을 살려내는 방주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모든 성도들을 기억하시고, 인간의 칭찬에 귀 기울이기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갈망하며,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초월하여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아름다운 성도들, 아름다운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 더 엄중한 마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며, 더 눈물로 기도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겠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