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과 100% 믿음: 성경의 진리와 현대 교회의 신앙 문제
성경대로 믿으라: 재림은 반드시 온다
"재림이 아직도 농담으로 들리십니까?" - 박한수 목사 설교 상세 내용 정리: 미래, 믿음, 그리고 성경의 중요성에 대한 심층적 고찰
오늘부터 우리는 앞으로 두 번에 걸쳐 '재림'의 실체, 즉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확실한 약속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미래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과거를 되돌아보기 위해서만, 혹은 단순히 현재를 위해서만 공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오늘만을 위해 산다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결코 현재의 쾌락에만 매몰되지 않습니다. 미래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굳건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숙제이자 질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행적이나 현재의 모습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말, 행동, 심지어 미래까지도 믿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행위, 자녀의 미래를 믿고 아낌없이 지원하는 부모의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미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이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99%를 믿고 1%를 의심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믿을 때도 100%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은 100% 믿을 만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특정 부분만 선택적으로 믿거나, 일부를 의심하는 것은 결국 믿지 않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지식과 지혜가 월등히 발전했지만, 역설적으로 성경을 의심하고 성령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과거 믿음의 선배들보다 오히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을 답답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교회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과 말씀을 후대의 과장된 산물로 치부하거나, 제자들의 허황된 이야기로 폄하하는 신학자, 설교자, 성도들이 증가하는 현상은 참으로 개탄스럽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한 교회에서 벌어진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이 인터넷과 기독교 매체를 통해 보도되며 논란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해당 교회에는 두 명의 교육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여성 교육자였습니다. 교단에서는 여성 목사 안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여성 교육자는 여성 목사 안수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교단 측 노회는 이 두 교육자에 대한 조사 결과, 교단의 신학적 노선과 맞지 않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교회에 권고사직을 권고했습니다.
교회는 평신도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고, 전 교인 투표를 통해 노회의 권고를 거부하고 두 교육자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결정의 이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단순히 남의 교회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례는 앞으로 우리 교회, 더 나아가 한국 교회 전체에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음을 울리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겉으로 드러난 교단과 교회의 갈등이 아니라, 교회 내 성경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에 있습니다.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지 않아 문제가 된 목회자의 고백은 더욱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그는 노회의 결정을 비판하며 "지금의 교회는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시대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강변했습니다. 과거의 낡은 경전으로 오늘날 엄연히 존재하는 동성애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평소에도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성경에 동성애를 죄라고 단정하는 구절은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교단의 비민주적 강압이나, 성도들의 민주적 의사결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그릇된 태도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 말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확신 있게 믿고 가르치지 못하는 상황은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위협입니다. 결국, 교인들이 성경을 어기는 목회자를 옹호하기 위해 교단을 탈퇴하는 결정은, 민주적 의사결정이라는 포장 아래 성경 말씀에 대한 불신앙을 드러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세 시대의 종교 재판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제 개인적인 기준이나 잣대로 성도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동성애를 죄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위배되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동성애를 죄라고 부정하는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성경의 내용을 시대착오적인 과거의 산물로 폄하하는 태도는 결국 성경 전체에 대한 불신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의 부활, 홍해 기적,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이 모든 성경의 핵심 가르침들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공중에서, 구름 가운데,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입니다. 만약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의 교묘한 가르침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 사건을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교훈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핵심은 단순히 예수님의 긍휼심이나 나눔의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마음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정한 핵심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을 만큼, 예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능력에 있습니다. 기적은 간과한 채, 인간적인 의미만 찾으려는 해석은 성경의 본질을 흐리는 위험한 시도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은혜롭게 들릴 수 있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 예수님의 능력을 인간적인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부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부활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줍니다. 그러나 일부는 예수님의 부활을 육체적 부활로 믿지 않고, 사회적 부활, 즉 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이 사라지고 정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왜곡하여 해석합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인간적인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너무 많이 배우고, 세상의 지식에 매몰되면 오히려 성경 말씀을 믿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말솜씨에 속지 말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으십시오. 이러한 성경 해석의 오류는 매우 교묘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럴듯한 말에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이러한 회색빛 해석에 익숙해지면, 성경의 진실을 믿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조차 교리가 아닌 사실임을 잊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실재입니다. 지금은 음부와 낙원으로 존재하지만, 주님 재림 이후 최후 심판 후에는 우리가 영원히 거해야 할 실체적인 장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 천국과 지옥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인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대로 믿지 못하고, 멸망의 불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예수님의 재림 사상이 유대인들의 '정말 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 메시아를 대망하던 유대인들의 염원이 재림 사상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현혹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주목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언급했던 교묘한 거짓 가르침, 진리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 성경을 왜곡하는 시도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존재하며,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과 재림을 전파한 것이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크신 위엄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재림의 약속은 확실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3절과 4절에서도 유사한 경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말세가 되면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예수 재림 약속이 어디 있느냐,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느냐"며 비웃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주님의 재림이 농담처럼 들리십니까? 성경에서 윤리적, 도덕적 교훈,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만 귀에 들어오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기적,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는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잠언 말씀을 읽으며 은혜를 받고, 일상생활에 적용되는 교훈에는 쉽게 공감하지만, 성경의 기적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언서의 지혜로운 말씀도 중요하지만, 성경은 단순히 도덕 교과서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한번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얼마나 믿으십니까? 99% 믿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부분은 믿고, 어떤 부분은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오늘날의 관점으로만 해석하여,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고, 사회적 부활로만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은 교묘한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100% 믿어야 합니다.
예수 재림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초신자뿐만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공부하고, 직분을 맡은 사람 중에도 예수님의 재림을 여전히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롯은 천사의 경고를 믿었지만, 그의 아내는 믿지 않았고, 두 사위는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결국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고, 두 사위는 멸망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노아 시대 홍수 심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며 심판을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결국 홍수로 멸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라도 우리 주님이 오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예배가 끝나기 전에, 바로 이 순간에도 주님은 재림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돈을 벌고,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가더라도,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마지막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성도 여러분께 분명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께서 천사들과 함께, 먼저 죽은 성도들을 부활시키시고, 우리를 공중으로 들림 올려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혹시 다른 것은 믿겠지만, 예수님의 재림만은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으십니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믿겠지만, 재림은 믿을 수 없다는 분은 없으십니까? 재림을 믿어야, 그날에 들림 받을 수 있습니다. 재림을 믿는 사람은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사람은 전쟁을 준비합니다. 마찬가지로, 재림을 믿는 사람은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재림을 믿어야, 오늘날 우리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재림과 연결시켜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립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는데, 내가 이렇게 세상에 빠져 살아도 되는가?" 스스로 질문하며, 다시 경건한 삶을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믿음은 세 단계를 거쳤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불신앙의 단계였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에서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은 있었지만, 연약한 믿음의 단계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고, 예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도 믿었지만, 핍박과 고난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저는 이 두 번째 단계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와 부활, 재림도 믿지만, 핍박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 타협하거나, 베드로처럼 순간적으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님이 나를 이해하실 거야"라고 합리화하며,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된 단계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을 받은 후,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고, 핍박과 고난 앞에서도 십자가에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강철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은, 더 나아가 한국 교회 성도들은 과연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교회는 다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적인 욕망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 즉 믿음은 있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세 번째 단계, 강철 같은 믿음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재림을 비롯한 성경 말씀의 일부만 믿고, 일부는 믿지 못하는 불완전한 신앙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는 가짜 믿음일 수 있습니다. 99%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100%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은 우리가 왜 성경의 기적을 믿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을 다 기록할 수 없었기에, 몇 가지 대표적인 기적들만 선별하여 기록했습니다. 기적을 기록한 이유는 단 하나,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기적을 믿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가 필사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만 믿고, 일부는 믿지 않는다면, 어떤 심판을 받게 될까요? 오늘날 교회 안에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이야기, 세상적인 지혜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지만, 성경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은 애써 외면하거나 부정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인간적인 위로와 교훈을 얻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영생을 얻기 위해 예배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 특히 기적과 관련된 말씀을 의심 없이 믿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 마십시오. 개인적인 감정이나 지식, 잣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판단하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에 맞으면 믿고, 시대에 맞지 않으면 안 믿는 식으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입니다. 말씀은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경고가 주어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8절에서 20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믿고 전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어느 한 말씀도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다가 시대에 맞지 않는 기적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능히 행하실 수 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며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느 교회학교 교사가 성경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홍해 기적을 설명하면서, 홍해는 원래 바다가 아니라 갈대밭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대밭을 걸어서 건넜다고 가르쳤습니다. 한 학생이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갈대밭에서 어떻게 애굽 군대가 다 빠져 죽을 수 있어요?" 교사는 당황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홍해 기적의 핵심은 단순히 바다가 갈라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갈대밭이라는 단어는 홍해 주변에 갈대가 무성했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 뿐, 홍해 자체가 갈대밭이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성경을 믿으십시오. 혹시 성경을 공부하다가 헛된 지식에 현혹되어 성경의 진리와 기적을 의심하게 된다면, 그 공부는 당장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성경을 믿기 위함입니다. 성경 연구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연구하기 전에 먼저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준비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교회 안에 세상 지식과 마귀의 속임수에 속아 이성으로 납득되는 부분만 믿고, 성경의 기적들을 믿지 않는 인본주의적인 성도들과 신학자들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우리는 재림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마다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는가' 의심하며 받아들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주 예수여, 우리 인생 가운데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우리 이름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게 하여 주셔서, 우리 삼일교회 모든 성도들과 오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이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아니하고 들림 받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