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을 잊은 군대: 교회의 영적 전투와 진짜 싸움의 의미
싸움을 잊은 군대, 다시 싸우라!
싸움을 잊은 군대: 리메이크 (2021-10-17 주일예배 설교 상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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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학창 시절에 ‘종교’ 과목 시간에 불교, 유교, 기독교에 대한 내용을 배우셨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아마 대부분 한 번쯤은 배우셨을 텐데요. 그때 불교는 ‘자비의 종교’, 유교는 ‘인의예지의 종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배웠던 것 같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의 종교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8) 라고 말씀하고 계시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인간적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정말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여순반란사건 때 두 아들을 잃었지만, 그 슬픔 속에서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 청년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으셨죠. 감옥에 보내지 않고 용서하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인데, 심지어 양아들로 입적시켜 함께 살았다는 것은 정말 ‘1억 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누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도 결국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런 ‘극진한 사랑’ 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단지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조차 몰랐을 때’, 심지어 ‘온갖 악한 행동을 하며 살아갈 때’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확증하셨나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 으로 말입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측량할 수 없는지’ 조금은 느껴지시나요?
그런데, 이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 께서 우리에게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36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집안 식구끼리 불화하게 하려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은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 아니었나요? 오히려 싸움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인가요? 그것도 원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끼리 싸우게’ 하신다니, 정말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부모와 자식, 심지어 딸과 어머니까지 싸우게 된다니, 누구 때문에 싸운다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 때문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우리는 아마 “사이비 교주”라고 손가락질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사랑의 예수님’ 이십니다. 십자가에서 그 ‘극심한 고통’ 을 겪으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데에는 분명 ‘깊은 뜻’ 이 있을 겁니다. 그 ‘까닭’ 이 무엇일까요?
그 ‘까닭’ 은 바로 마태복음 10장 39절에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여기서 ‘목숨’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쉬케’(ψυχή)인데, 단순한 생명, 목숨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혼’, ‘참된 자아’, ‘영원한 생명’ 까지 포함하는 깊은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물론 ‘목숨’ 입니다. 아무리 돈, 명예, 권력이 중요하다고 해도, 결국 목숨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숨’ 은 단순히 이 땅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목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 ‘천국에서의 영생’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는 말씀은,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이 땅에서의 목숨, 즉 ‘자기 욕심, 자기 편안함, 자기 전부’ 를 포기하는 사람은, 오히려 ‘영원한 생명’ 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 혹은 세상적인 성공과 쾌락을 쫓아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자’ 는, 겉으로는 잘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국 ‘영원한 지옥 불’ 에 떨어져 ‘영원히 죽게 될 것’ 이라는 ‘경고’ 입니다. 정말 ‘단호하고 분명한’ 말씀이지요. 결국 오늘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 때문에,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자’ 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예수님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일어날 수 있다’ 고 했는데, 혹시 경험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가족들과 갈등을 겪거나, 심지어 싸움까지 벌어진 경험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예배드리러 오신 여러분들은 이미 ‘싸움에서 이기고’ 오신 분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가족 중 누군가가 “오늘 교회 가지 말고, 가족들과 나들이 가자!” 라고 했다면, 여러분은 그 ‘유혹’ 을 ‘단호히 뿌리치고’ 예배 자리에 나오신 것입니다. 어쩌면 가족들은 ‘못마땅한 표정’ 을 지을 수도 있고, 심지어 ‘화를 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여러분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 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예배를 포기하고’ 가족들과 나들이를 간 사람은, 당장은 ‘즐겁고 행복할지’ 모르지만, 결국 ‘영원한 평화를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적당히 타협’ 하며 살아갑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도 ‘좋게 좋게’ 맞춰가려고 하죠. 시어머니가 제사를 지내라고 하면 ‘쫓아가서 제사’ 를 돕고, 시어머니가 외국여행 가자고 하면 ‘기꺼이 따라’ 나섭니다. ‘세상 사람’ 들에게는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물 흐르듯이’,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 는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제사를 지내자고 할 때, “죄송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시어머니는 아마 ‘격렬하게 반발’ 하겠죠.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독실하게 예수를 믿었느냐? 부모도 없느냐? 조상도 없느냐?” 며 ‘비난’ 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너를 며느리로 반대했던 이유가 바로 그거다! 예수 믿는 것들 딱 질색이다! 당장 집에서 나가!” 라고 ‘격노’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때문에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원수’ 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싸움을 붙이러 오셨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죠? 바로 “싸움을 잊은 군대” 입니다. 지난주에는 ‘수술하지 못하는 교회’ 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는 ‘영혼의 병을 고치는 병원’ 이 되어야 하고, 둘째는 ‘세상과 맞서 싸우는 군대’ 가 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기능을 ‘균형 있게’ 갖추고 있어야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 만 강조하고 ‘세상과 싸우는 일’ 을 소홀히 하면, 마치 ‘수술은 하지 않고 붕대만 감아주는 병원’ 과 같습니다. 반대로, ‘세상과 싸우는 것’ 만 강조하고 ‘사랑과 치유’ 를 잊어버리면, 사람들을 살릴 수 없고 오히려 상처 입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교회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초대교회를 통해 예수님의 약속이 ‘실현’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전’ 은 분명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즉 ‘사탄의 권세, 어둠의 권세와 맞서 싸워 승리하는 교회’ 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군대’ 에 비유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 세상에 ‘마귀’ 가 없고 ‘죄’ 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교회를 세우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전쟁이 없는 세상에 군대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군대’ 는 ‘필요악’ 입니다. ‘교회’ 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온 세상이 다 천국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천국’ 에는 교회가 필요 없습니다. ‘천국’ 에는 성경도 필요 없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천국은 ‘빛’ 이 쓸 데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체가 빛’ 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어둡고 죄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마귀와 악한 영들이 득실거리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 는 왜 존재할까요? 단순히 우리끼리 밥 먹고 교제하고 친목 도모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 가 왜 존재합니까? 군대 식당에서 밥을 맛있게 먹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 밥을 먹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군화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관물대를 칼같이 정리정돈’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강’ 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폼 잡으려고’ , ‘보여주기식’ 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에서 청소를 깨끗이 하라고 하는 것도, 훈련을 ‘실전처럼’ 하는 것도, 모두 ‘전쟁’ 을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만약 군대가 ‘본래의 목적’ 을 잃어버리고 ‘청소만 열심히 하고’, ‘훈련은 대충대충’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적’ 이 나타났을 때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싸움을 잊은 군대’ 는 ‘무용지물’ 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세상과 싸워야 하는 본질적인 사명’ 을 잊어버리고 ‘교인 수 늘리기’, ‘헌금 많이 걷기’, ‘건물 웅장하게 짓기’ 에만 혈안이 된다면, ‘영적인 싸움에서 패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무작정 싸우는 것’ 이 능사는 아닙니다. ‘제대로 된 싸움’ 을 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 속에는 ‘잘못된 싸움’ 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십자군 전쟁’ 입니다. 중세 시대에 교황은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으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 고 선동하여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근거’ 가 없는 ‘잘못된 싸움’ 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결국 예루살렘 성지를 완전히 되찾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슬람 세계와의 갈등’ 만 심화시키는 ‘역효과’ 를 낳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슬람 사람들이 기독교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십자군 전쟁 때문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마녀사냥’ 이라는 ‘끔찍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단’ 으로 몰아붙여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교황 제도’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마리아 숭배’, ‘고해성사’ 등도 모두 ‘비성경적인 교리’ 입니다. ‘종교개혁’ 이 일어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잘못된 교리’ , ‘부패한 교회’ 와 싸우기 위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에도 ‘잘못된 싸움’ 은 계속되었습니다. ‘구교’ 와 ‘신교’ 간의 ‘종교 전쟁’ 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같은 ‘신교’ 안에서도 ‘교파 간의 갈등’ 이 심했습니다. 1572년 프랑스에서는 ‘성 바르톨로매 축일 학살’ 이라는 ‘끔찍한 사건’ 이 벌어졌습니다. 구교 신자들이 신교 신자들을 ‘일주일 동안 10만 명이나 학살’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싸움의 결과’ 입니다. 오늘날에도 ‘과거의 잘못’ 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잘못된 싸움’ 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싸움’ 을 해야 합니다. ‘작은 싸움’, ‘시시한 싸움’, ‘방향을 잘못 정한 싸움’ 은 ‘지양’ 해야 합니다. ‘절’ 에 찾아가 ‘불상’ 을 깨부수거나, ‘학교’ 에 몰래 들어가 ‘단군상’ 을 톱으로 잘라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 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비웃을’ 것입니다. 다음날 언론에는 “기독교, 또 만행!” 이라는 ‘비난 기사’ 가 쏟아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이미지만 실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기도’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복음’ 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이 ‘우리를 우습게 여기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싸움’ 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6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과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대통령’ 을 왜 미워합니까? 대통령 ‘뒤에 역사하는 마귀’ 를 미워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장로’ 를 미워하고, ‘목사’ 를 미워하고, ‘권사’ 를 미워하고, ‘집사’ 를 미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것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 에 불과합니다. ‘진짜 싸움의 대상’ 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력’ 입니다.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앉아 있는 마귀’, ‘세상을 어지럽히는 어둠의 영들’ 과 싸워야 합니다. ‘정사’ 와 ‘권세’,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이 바로 우리의 ‘진짜 싸움 대상’ 입니다. 사도 바울은 ‘명쾌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의 대상은 혈과 육이 아니다!” ‘며느리’ 를 왜 미워합니까? ‘시어머니’ 를 왜 미워합니까? 시어머니 ‘뒤에 역사하는 어둠의 영’ 을 미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70명의 제자들이 ‘전도 여행’ 을 마치고 돌아와서 ‘기뻐하며’ 외쳤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누가복음 10:17)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누가복음 10:18)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자’,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 을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눈’ 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과 싸우라’ 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를 박해하거든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나오라.” (마태복음 10:14) 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싸우는 것’ 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어둠의 권세와 싸워야’ 합니다. 제자들이 ‘제대로 된 싸움’ 을 했기 때문에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미움’ 이 사라지고, ‘살인’ 이 멈추고, ‘우상 숭배’ 가 ‘무너지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가 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승리’ 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싸움’ 을 해야 합니다. ‘부와 권세’ 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어둠의 권세’ 와 싸워야 합니다. ‘사람’ 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조종하는 악한 영들’ 과 싸워야 합니다. ‘제대로 된 싸움’ 을 해야 ‘진정한 승리’ 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싸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 (히브리서 12:4) 는 말씀처럼, ‘목숨 걸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는 ‘순간의 달콤함’ 을 주지만, 결국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파괴하는’ 무서운 속성이 있습니다. 죄와 싸우다가 ‘재산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다가 ‘손해’ 를 볼 수도 있습니다. 죄와 싸우다가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식이 원하는 대기업에 ‘불합격’ 할 수도 있습니다. 남들 다 하는 ‘스펙 쌓기’, ‘허위 이력’ 을 ‘거부’ 했다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와 타협’ 하면 ‘영원한 멸망’ 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로마서 6:23) 는 말씀처럼, 죄는 결국 ‘영원한 죽음’ 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것은 져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죄와의 싸움’ 에서는 ‘절대로 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죄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셨다’ 는 것을 ‘전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것은 단순히 ‘억울하게 죽으신 것’ 이 아닙니다.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 피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 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 를 ‘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죄와 싸우라’ 고 ‘도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예수님처럼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목숨 걸고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다가 ‘재산을 잃을 수도’, ‘명예를 잃을 수도’,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 을 얻기 위해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요셉’ 은 죄와 싸우기 위해 ‘젊음을 걸었습니다’. 주인 마님의 ‘유혹’ 을 ‘단호히 거절’ 했을 때, ‘죽을 수도 있는 위험’ 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죄와 싸워 승리’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 의 ‘억울한 누명’ 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결국 ‘하나님의 은혜’ 로 ‘애굽의 총리’ 가 되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눈앞의 쾌락’ 에 눈이 멀어 죄와 타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비참한 인생’ 을 살았을 것입니다.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 길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습니다.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 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의 길’ 이지만, ‘생명의 길’ 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저와 여러분이, ‘죄를 무서워하고’, ‘죄와 치열하게 싸워왔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죄와 처절하게 싸워 이겼다면’, 세상은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 를 ‘별 볼 일 없는 존재’ 로 여기고, ‘목사’ 를 ‘돈만 밝히는 속물’ 로 여기고, ‘교인’ 을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집단’ 으로 ‘비난’ 하는 소리를 왜 듣고 있습니까? 결국 ‘죄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자신부터 다시 한번 ‘굳게 결심’ 합니다. ‘지난 과거’ 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 합시다. ‘삭개오’ 처럼, 지난날 ‘세리’ 로서 ‘온갖 악행’ 을 저질렀더라도, 이제부터 ‘새 삶’ 을 살 수 있습니다. ‘과거의 죄악’ 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의 소망’ 을 바라보며 ‘죄와 싸워 이깁시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이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는 ‘죄와 싸워야 하는 사명’ 을 가진 ‘군대’ 입니다. 세상에 어떤 기관이 ‘죄와 싸우는’ 기관입니까? ‘대기업’ 은 ‘돈’ 과 싸우고, ‘학교’ 는 ‘입시 경쟁’ 과 싸우고, ‘공공기관’ 은 ‘탁상행정’ 과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죄와 싸우는 기관’ 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음부의 권세’, ‘사탄의 역사’, ‘귀신의 세력’, ‘어둠의 영들’ 과 싸우는 것은 ‘교회’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인맥’, ‘학벌’, ‘재력’ 도 ‘죄의 권세’ 앞에서는 ‘무력’ 합니다. ‘교회’ 가 없으면 ‘죄를 이길 수 있는 기관’ 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눈에 불을 켜고 교회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현실’ 이 ‘눈에 보이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죄와 싸우십시오’. ‘오랜 인내’ 로 싸우십시오. ‘피 흘리기까지’ 싸우십시오.
두 번째로, ‘마귀의 계획과 싸워야’ 합니다. ‘마귀의 계략’ 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8) 사람들에게 ‘더러움을 주고’, ‘음란을 조장하고’, ‘거짓을 퍼뜨리고’, ‘사기를 치고’, ‘탐욕을 부추기고’, 끊임없이 ‘죄악을 퍼뜨리려고’ 합니다. 마귀의 손에 ‘한번 잡히면’, ‘많이 배운 사람도’, ‘잘난 사람도’, ‘아름다운 여인도’ 순식간에 ‘죄의 도구’ 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악한 짓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 가 ‘자신이 파멸로 치닫고 있는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는 ‘전 세계적으로 마약을 퍼뜨리고’, ‘미디어를 장악하여 악한 문화를 전파하고’,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차별금지법’ 을 만들어 ‘교회의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네덜란드’ 는 ‘세계 최초로 마약과 대마초를 합법화’ 했습니다. ‘미국’ 의 여러 주에서도 ‘마약이 합법화’ 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세수 확보’ 와 ‘개인의 자유’ 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본질적으로는 마귀의 역사’ 입니다. 마약 합법화 이후 ‘노숙자가 급증’ 했다는 ‘통계’ 도 있습니다. ‘동성애 합법화’ 도 마찬가지입니다. ‘네덜란드’ 에서 ‘최초로 동성애를 합법화’ 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합법화’ 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동성애 가정’ 에서 ‘자녀를 입양’ 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고, ‘동성애자 총리’ 가 ‘동성 배우자와 결혼’ 하는 장면이 ‘공중파 방송’ 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에서도 ‘동성애 퀴어 축제’ 가 ‘버젓이 열리고’, 심지어 ‘초등학생’ 들까지 ‘동성애 옹호 교육’ 을 받는 ‘현실’ 입니다. ‘유림’ 은 왜 이렇게 ‘조용할까요’? ‘간통죄 폐지’ 때는 ‘그렇게 난리’ 를 치더니, ‘동성애 합법화’ 에는 왜 ‘침묵’ 하는 것일까요? ‘미국’, ‘호주’, ‘대만’, ‘스위스’ 등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합법화’ 가 ‘급속도로 확산’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도 ‘동성애 합법화’ 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이 통과되면, ‘동성애’ 를 ‘비판’ 하는 것은 ‘불법’ 이 됩니다. ‘교회’ 는 ‘더 이상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영국’ 의 ‘윌리엄 윌버포스’ 는 ‘노예제 폐지 운동’ 을 ‘20년 넘게’ 펼쳤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의 ‘위험성’ 을 ‘미리’ 알고 ‘교회들을 깨웠지만’, ‘단 한 명의 목사도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차별하지 않는 세상’ 을 만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 했습니다. 결국 ‘영국’ 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을 통과시켰고, ‘무서운 세상’ 이 되었습니다. 지금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폐해’ 를 ‘절감’ 하고, ‘가정주부’ 들이 ‘들고 일어나’ ‘법 폐지 운동’ 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이 아직 통과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대학교’ 에서는 ‘성인지 교육’ 이 ‘의무화’ 되어 있고, ‘유치원’ 에서는 ‘동성애를 미화하는 동화책’ 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0년 후’ 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 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아들을 낳으면’ ‘걱정’ 하고, ‘딸을 낳으면’ ‘안심’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여자 친구는 괜찮아도, 남자 친구는 절대 안 된다’ 고 ‘자녀에게 당부’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농담’ 이 아니라, ‘현실’ 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는 지금 ‘포괄적 차별금지법’ 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 이 ‘대표 발의’ 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 에 ‘17명의 국회의원’ 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 입니다. ‘지난 1년 사이’ 에 ‘무려 5번이나’ ‘차별금지법안’ 이 ‘발의’ 되었습니다. ‘유엔 인권이사회’ 와 ‘국가인권위원회’ 가 ‘수년간 법 제정을 권고해왔기 때문’ 이라는 ‘명분’ 을 내세우고 있지만, ‘거짓말’ 입니다. ‘유엔 인권이사회’ 는 ‘그렇게 강하게 권고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는 ‘동성애 옹호 단체’ 와 ‘연대’ 하여 ‘법 제정을 압박’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로 인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하며, 차별을 예방함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는 것’ 을 ‘목적’ 으로 한다고 ‘포장’ 하고 있지만, ‘본질’ 은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 비판을 금지하려는 것’ 입니다. ‘성적 지향’ 과 ‘성별 정체성’ 을 ‘차별 금지 사유’ 에 포함시켜, ‘동성애’ 와 ‘트랜스젠더’ 를 ‘옹호’ 하고, ‘비판’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 하려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청구’ 에 따라 ‘차별 행위 중지 가처분’ 을 내릴 수 있고, ‘징벌적 손해배상’ 까지 ‘청구’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목회자’ 가 ‘설교’ 중에 ‘동성애는 죄’ 라고 말하거나, ‘동성애 퀴어 축제’ 를 ‘비판’ 하는 발언을 하면, ‘차별금지법 위반’ 으로 ‘고발’ 당할 수 있고, ‘수천만 원’ 에서 ‘수억 원’ 에 이르는 ‘손해배상’ 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는 ‘더 이상 진리를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 가 올 수도 있습니다. ‘지방의원’ 이 ‘차별금지법’ 과 ‘유사한 인권 조례’ 를 ‘통과’ 시키려고 ‘앞장’ 섰다가, 나중에 ‘법의 위험성’ 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 했다는 ‘간증’ 도 있습니다. ‘알고 모르고’ 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만약 포괄적 차별금지법’ 이 통과되면 ‘우리나라’ 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낙동강 전투’ 에서 ‘패배’ 했다면, ‘인천상륙작전’ 이 ‘실패’ 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 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루의 결정’ 이 ‘나라의 운명’ 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흘려야 할 땀과 눈물’ 을 ‘회피’ 한다면, ‘10년 후’ 에는 ‘피눈물’ 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지 마십시오. ‘남의 이야기’ 가 아닙니다. ‘내 자식의 이야기’, ‘내 손주의 이야기’, ‘우리 교회의 이야기’, ‘이 나라의 장래 이야기’ 입니다. ‘깨어 일어나 싸워야’ 합니다. ‘평당 1000만 원’ 에 ‘땅’ 을 팔고 ‘좋아할 때가 아닙니다’. ‘대마초 재배’ 를 위해 ‘땅’ 을 사려는 사람에게 ‘팔아넘기는 어리석은 짓’ 을 해서는 안 됩니다. ‘눈앞의 이익’ 에 ‘눈이 멀어’, ‘영적인 안목’ 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포장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에 ‘속지 마십시오’. ‘먼 미래의 일’ 이라고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 으로 ‘방관하지 마십시오’. ‘큰 자’ 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지난 8월 30일’ 에 ‘5번째 차별금지법안’ 이 ‘발의’ 되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 이 ‘대표 발의’ 했고, ‘17명의 국회의원’ 이 ‘동참’ 했습니다. ‘장애인’, ‘여성’, ‘청년’, ‘인권 단체’ 등이 ‘찬성’ 하고 있습니다. ‘교회’ 와 ‘기독교 단체’ 들은 ‘반대’ 하고 있지만, ‘힘이 부족합니다’. ‘이상민 의원’ 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의 ‘문제점’ 을 ‘10가지’ 나 ‘지적’ 했습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 는 ‘징벌적 손해배상’ 과 ‘입증 책임 전환’ 입니다. ‘차별 행위’ 를 한 것으로 ‘의심’ 되는 사람이 ‘스스로 무죄’ 를 ‘입증’ 해야 하는 ‘불합리한 법’ 입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 을 ‘정면으로 위반’ 하는 ‘악법’ 입니다. ‘이 법 뒤에 누가 있습니까?’ 저는 ‘마귀’ 가 있다고 ‘확신’ 합니다. ‘시간 낭비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가려서 그렇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겨우’ 얻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속담’ 은 ‘진실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죽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진리 편에 서십시오’. ‘확고하게 서서 싸우십시오’. ‘남의 이야기’ 가 아닙니다. ‘내 자식의 이야기’, ‘내 손주의 이야기’, ‘우리 집안의 이야기’, ‘우리 교회의 이야기’, ‘이 나라의 장래 이야기’ 입니다. 이것을 ‘명심’ 하시고, ‘싸울 때’ 는 ‘싸워야’ 합니다. ‘영적 군사’ 로서 ‘사명’ 을 감당하십시오. ‘모르면 기도하십시오’. ‘마음으로 응원하십시오’. ‘기도로 후원하십시오’. ‘알면 깨어나서 앞장서십시오’. 이 ‘거룩한 싸움’ 에서 ‘승리’ 하는 ‘십자가의 군병’ 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 이 땅의 교회를 지켜주시옵소서. ‘당장 내가 먹을 것이 있다고’, ‘당장 내가 어렵지 않다고’, ‘당장 내 신앙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잠잠하면’, ‘우리가 에스더처럼’ ‘궁궐 안에 갇혀서’ ‘소리 없이 죽어갈 것입니다’. ‘주여, 나라가 없는데 교회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없는데 내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망가지고 없어지는데 내가 밥이 넘어갑니까?’ ‘주여, 깨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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