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종착역, 천국과 지옥의 진실과 구원의 길
영혼의 종착역: 천국인가 지옥인가?
내 영혼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 리메이크 설교 상세 정리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요? 박한수 목사님의 설교 "리메이크 (5) - 내 영혼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2020-09-20 주일예배)를 통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영원한 종착역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 설교는 우리가 흔히 잊고 살아가는 중요한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며, 현대인의 삶 속에서 놓치고 있는 영적인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설교는 예수님께 찾아와 재산 분배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사나이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시며,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누가복음 12:14) 라고 반문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재판관이나 분배자가 아니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 땅에 재산 문제나 세상적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더욱 근본적이고 영원한 문제, 즉 인간의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사나이의 요청은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역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오늘날 우리 역시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는 걸까요? 우리의 기도 제목과 삶의 목적은 과연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물질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경계하시고자 유명한 부자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 속 부자는 밭의 소출이 풍성하여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큰 풍년을 맞이합니다. 그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누가복음 12:17) 하며 새로운 창고를 지을 계획을 세웁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부자는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의 고민을 "위험한 고민", "잘못된 고민"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사람은 관심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재산에 관심이 있는 부자는 재산을 늘리고 관리하는 데만 골몰하며, 정작 중요한 영혼의 문제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 역시 세상의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를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은 근심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죽이는 근심"과 "살리는 근심"입니다. 죽이는 근심은 세상의 일에만 매달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우리를 영적으로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 이끌 뿐입니다. 반면 살리는 근심은 영적인 문제,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평가받을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근심입니다.
부자는 재산이 늘어날수록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기보다 오히려 세상적인 욕심에 더욱 매몰되었습니다. 그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누가복음 12:19) 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는 영혼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육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시며,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2:20) 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부자는 세상적으로는 똑똑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는 재산을 불리는 데는 능했지만,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지혜는 부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세상적인 성공에만 매달려 영적인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둘째,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는 말씀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 영혼을 잠시 맡아 살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영혼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언젠가 그분께 영혼의 행적을 보고해야 합니다.
셋째, 부자는 "잘못된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곡식을 쌓아 둘 창고는 열심히 준비했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을 위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적인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지만, 영원한 미래를 위한 준비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전도서 12장 7절은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흙으로 지어진 육체는 결국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진리이며, 우리는 이 진리를 기억하고 영원한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귀신을 믿는 사람들도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만, 영혼의 종착역에 대한 분명한 답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뉩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먼 미래의 일로 여기고, 자신에게는 예외일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죽음은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공경한 손님"과 같습니다. 오늘 부자처럼, 우리 역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영혼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 안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메시지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은 천국에 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꺼려하거나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 역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가 단순한 커뮤니티 장소나 세상적인 정보 교환의 장으로 변질되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목적지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천국과 지옥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영원한 장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천국과 지옥을 증언하셨고,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 역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이를 증명했습니다. 이 명확한 증거들 앞에서 우리는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일방통행" 길입니다.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여정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잃고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사무엘하 12:23) 고 고백하며 죽음의 불가역성을 탄식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영원한 세계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특별한 증인들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실상을 드러내십니다. 버마의 불교 승려 파울로는 임사 체험을 통해 지옥을 목격하고 돌아와 충격적인 간증을 전했습니다. 그는 지옥에서 유명한 고승과 숭배했던 부처, 심지어 존경받는 정치인까지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세상적인 업적이나 선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국 불교의 거목이었던 성철 스님 역시 임종 직전에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외치며 지옥의 고통을 토로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평생 참선과 고행을 했지만, 결국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고 절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요?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착함이나 선행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착하고 선하게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핵심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세상의 헛된 욕심에 속아 영원한 종착역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디 어리석은 부자의 전철을 밟지 마시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매일매일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며,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