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콘텐츠로 건너뛰기

죽은 신앙과 산 신앙, 효도와 복의 성경적 의미 어버이주일 설교

요약

죽은 신앙인가, 산 신앙인가? 어버이 주일, 효도를 통해 묻다

리메이크 (38) - 죽은 자와 산 자 (2021-05-09 어버이주일예배) - 박한수 목사

동영상 링크

지난주에 이어 오늘은 어버이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린이 주일은 20년에 한 번만 해도 괜찮겠지만, 어버이 주일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해야 할 정도로,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부모 중심이 아닌 자녀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가정의 중심이 부모님이었고, 부모님의 시간과 편의에 맞춰 모든 것이 돌아갔기 때문에 가정은 안정되고 질서가 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자녀 중심으로 바뀌면서 가정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는데, 이는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러분, 성경대로 살아야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고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복을 주시고, 누구에게 고통을 주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복을 받을 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영적으로 큰 복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을 받고 살아가는 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복 받는 가장 쉽고 보편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부모 공경은 단순히 부모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적 근거를 요한복음 6장 2절과 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약속이 있는 첫 번째 계명"이라는 표현입니다. 무엇을 약속한다는 것일까요? 바로 축복을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그 축복은 구체적으로 장수와 형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펌프질을 할 때 마중물이 필요하듯이,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바로 부모 공경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제자 공동체의 모든 성도들은 성경 말씀대로 부모님을 잘 공경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복을 충만히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한 젊은이가 어렵게 입사 원서를 내고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습니다. 최종 면접만 통과하면 꿈에 그리던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면접 당일, 회사 사장과 임원들이 직접 면접을 진행했습니다. 예상대로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사장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자네는 부모님 발을 닦아 드린 적이 있는가? 혹시 며칠 전에 닦아 드린 적이 있는가?" 당황한 청년은 솔직하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속으로 '이번 면접은 망했구나'라고 생각하는 찰나, 사장은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자네, 합격일세. 내일부터 출근하게. 그런데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부모님 발을 정성껏 닦아 드리게나. 그렇게 할 수 있겠나?" 청년은 기쁜 마음으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면접장을 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청년은 어머니께 발을 닦아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하시던 어머니는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발을 내미셨습니다. 따뜻한 물에 어머니의 발을 담그려던 청년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발은 뽀얗고 부드러운데, 어머니의 발은 검고 거칠었던 것입니다. 발을 닦으면서 만져보니, 사람의 피부가 아니라 마치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청년은 자신이 얼마나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는지 깨달았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어머니의 발을 정성껏 닦아 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이제부터 제가 더 잘할게요." 아들의 진심 어린 말에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괜찮다, 아들아.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밤, 청년은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하며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면접장에 다시 나타난 청년에게 사장은 "시킨 대로 부모님 발을 닦아 드렸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예, 사장님. 덕분에 제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그래, 발을 닦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청년은 "제가 반드시 성공해서 어머니를 평생 편안하게 모셔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라고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사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주 좋네. 합격했으니, 앞으로 회사에 뼈를 묻을 각오로 열심히 일하게나"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발을 씻겨 드린 작은 효행이 아들에게 큰 복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효도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부모님께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 부모님의 근심거리를 덜어드리는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이나 가정의 달을 맞아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소에 부모님께 효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단순히 용돈을 드리고 선물을 사드리는 것 이상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야 한다고 핑계 대며 부모님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효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토요일에 부모님을 찾아뵙고 용돈도 드리고 저녁 식사도 함께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부모님께 "어머니, 아버지, 내일 아침 일찍 교회에 가서 봉사해야 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다음 주에 또 찾아뵐게요."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용돈도 받고 자녀가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효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일마다 에너지가 넘쳐서 여기저기 쏘다니고 자랑만 늘어놓는 자녀는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될 뿐입니다. 용돈보다, 물질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언제나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기쁘게 해드리는 효도를 실천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 또한 효도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수많은 행실 중에서 효도가 으뜸이며, 모든 선행의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효심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효도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거나 불성실하게 살지 않습니다. 효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와 같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가 될 수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주의 종이 좋은 주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인정받고 세상에서 유명세를 떨친다 해도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성도가 되어야 하고, 성도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됨"의 기준은 바로 효도입니다.

이제 오늘 설교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산 자와 죽은 자"입니다.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숨이 멎었다고 해서 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육신의 생명을 기준으로 '살았다', '죽었다'를 판단하지만, 주님의 관점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잠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죽은 사람을 깨우러 간다고 오해하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도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며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나는 과연 살아있는 신앙인인가, 아니면 이름만 살아있는 죽은 신앙인인가?" 여러분은 모두 '나는 살아있다'고 대답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죽은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병들었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사형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는 산 자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과 2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진실로'라는 말씀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진짜', '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진실로'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신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이 말씀은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는 미래형이 아니라,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과거 완료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천국에 완전히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지옥에 갈 자 또한 죽어서 갑자기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셔서 "산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미국에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듯이, 천국에 가려면 우리 안에 "영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영생을 가진 자를 "산 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을 강조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리고 25절 말씀처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중에, 세상에 속해 있을 때는 죽은 자와 같았던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말씀 앞에 회개하여 새롭게 거듭난다면, 그는 "산 자"가 되어 예배당을 나갈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언제나 살아있는 자라고 믿고 싶습니다. 부족하지만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모두 "산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죽은 자"도 있습니다. 죽은 자는 교회를 다녀도 "헛다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성경을 읽어도 "건성으로" 읽습니다. 죽은 자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사데 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교회의 크기, 교인의 많고 적음, 부흥과 쇠퇴 등은 인간적인 기준일 뿐입니다. 주님의 관점에서는 "산 교회""죽은 교회"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사데 교회는 겉으로는 "살아있는 교회"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이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 이 말씀은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열심인 것처럼 보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어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좋을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의 실상을 "죽었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사데 교회 안에 "일부"는 살아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숨을 쉬면 살아있고, 숨이 멎으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바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보십니다. 사데 교회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 행위가 내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은 "행위의 온전함"입니다. 행위가 온전하면 산 자이고,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면 죽은 자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은 산 자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성경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산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오직 "행위의 온전함"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위를 온전하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내 말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우리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행위가 온전해지고, 행위가 온전해져야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함"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쉽게 흘려들을 수 있지만,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함"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이전의 죄 된 행실을 버리고 "온전함"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죽은 자에서 산 자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즉, "회개"해야 합니다. 3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네가 무엇을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굳건한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가치관이 변화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나가야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면, 우리는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해 책망하셨지만, 어쩌면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이 책망 앞에서 자유롭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 칭찬만 받은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뿐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도 온전한 칭찬을 받은 교회는 30%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교회는 어떠할까요? 우리 자신은 "산 자"일까요, "죽은 자"일까요? 우리의 행위는 변화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우리가 산 자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는 수많은 "이름뿐인" 신자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믿는 자라고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고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밤새 세상 문화에 취해 흥청망청 놀다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가장 경건한 장로교 교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인디애나 주에서, 주일 오후에 음란물 사이트 접속이 폭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주일 오전에 교회에 가서 경건한 척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음란물을 탐닉하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사람은 여전히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과연 미국 교회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라고 다를까요? 여러분의 직장 동료나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압니까? 여러분이 집사, 권사, 장로라는 직분을 맡은 것을 압니까?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똑같습니까? 여러분은 수없이 많은 예배를 드리고, 셀 수 없이 많은 교회 봉사를 해왔지만, 과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났습니까?" 그렇다면 "산 증거"는 무엇입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든지, 아니면 말씀을 거부하고 교회를 떠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어중간한 "미지근한"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16절에서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경고하신 것처럼, 미지근한 신앙은 오히려 "저주"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미지근한 신앙을 청산하고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 거듭나는 역사가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 해먼드 제일 침례교회의 제럴드 웬델 목사님은 성도들의 죄와 세상 죄악에 대해 강력하게 책망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얼마나 설교가 강렬했던지, 성도들이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젊은이가 설교를 듣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목사님을 향해 총을 쏘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다행히 총알은 빗나갔지만, 그 후 교회 강대상에는 방탄유리가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방탄유리 뒤에서 복음을 외쳤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과 벗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서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과 짝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세상과 멀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고 지킬 때,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는 것은 "취미""교양" 때문이어서는 안 됩니다. "경건심" 때문에 와서도 안 됩니다. 교회를 오는 이유는 오직 "살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죽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교회 밖에, 세상에 속해 있을 때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살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고, 그 첫걸음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가장 효과적이고 쉬운 방법은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때, 찬송가 가사처럼 "모든 죄 사함 받고"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죽은 상태로 교회에 왔습니다. "살기 위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병원에 병을 고치러 온 사람에게 병을 낫게 해줘야 하듯이, 교회는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에 오는 이유는 "내 영혼이 살기 위해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불편해도, 힘들어도 "살기 위해서" 교회에 와야 합니다. 교회는 "생명의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 생명의 길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죄를 버리고 회개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이유는 질병 때문도 아니고, 가난 때문도 아니고, 오직 "죄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죄 때문에 죽었던 존재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우리가 죽게 된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의롭게 될 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 살아난 영혼은 이 땅에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수한을 다 살고, 사명을 감당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입니다.

죽은 사데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처방하신 것은 바로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옷을 더럽히지 마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 안에도 옷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4절과 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여기서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이기는 자", "생명책에 기록된 자",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자"는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겨야" 합니다. 무엇을 이겨야 할까요?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죄"를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왕"인 사탄을 이겨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요셉은 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주인의 분노와 억울한 누명을 감수해야 했지만, 죄를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이겼다고 해서 당장 축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직장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고,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는 자"를 주님께서는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최고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의의 옷"을 입고, 그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흰옷을 입으면 음식을 먹을 때도 조심하게 됩니다. 죄에 물들지 않도록 늘 깨어 조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데 교회처럼 옷을 더럽힌 자가 되지 말고, 흰옷을 입은 자로서 세상을 이기고 "산 자"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거룩한 자"가 "산 자"입니다. "의의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가 산 자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자, 거짓말, 음란, 살인, 시기, 질투, 우상숭배, 온갖 두려움을 이기는 자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말하는 "생명수의 강가"에 나아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는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산 자"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제자 공동체의 모든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잠자는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나태해졌는지, 언제부터 죽게 되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갔고, 모세는 호렙 산을 찾아야 했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에게도 "회복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햇수가 늘어갈수록, 나이가 많아질수록, 세상이 더욱 악해질수록, 우리는 주님을 향해 더욱 간절한 심령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많은 눈물이 있어야 하고, 더 많은 의로움이 있어야 하고, 더 큰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 된 교회가 더욱 뜨거워지고, 우리 성도들은 더욱 순전해지고, 우리의 예배는 더욱 강렬해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 처음 사랑을 잊지 말고, 날마다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천국에서 "산 자"로 영원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입만 무성합니까, 아니면 경건한 믿음의 열매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행위의 온전함을 찾으신다고 하셨으니, 주여, 이 눈이 온전해지게 하소서. 이 귀가 온전해지게 하소서. 이 입술이 온전하게 하소서. 이 손과 발이 온전하게 되어 죄에서 돌이켜 죄를 버리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 산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2. 너무나도 중요한 소식 (불편한 진실)

3. 당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4.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7. 신의 증거(현실적인 증거)

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ChatGPT, 유튜브 프리미엄, 넷플릭스 구독료 80% 할인 받는 법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