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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의미와 삶의 변화로 천국 가는 길 마태복음 설교 핵심

요약

회개, 삶의 변화로 천국을 증명하라

리메이크 (1): 회개를 보이라 - 2020년 8월 23일 주일예배 설교 상세 정리 및 핵심 노하우 소개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가치와 교훈들이 멀리 있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가까이에, 그리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임을 종종 잊고 살아갑니다. 사실 이러한 중요한 내용들은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들어왔던 것들인데요, 문제는 우리가 그 내용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릴 때마다 듣는 당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거창한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침밥은 꼭 챙겨 먹어라,”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차 조심하고, 신호 잘 지켜라,” “안전벨트 꼭 매라” 와 같은 일상적인 당부를 반복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십 년째 들어온 이러한 당부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진리는 결코 어렵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익숙하고 평범한 것들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왜 다닐까요? 궁극적으로 천국에 가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30년 넘게 다녀도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메시지는 특별하고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반복해서 듣지만, 여전히 삶 속에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불일치 때문에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문제는 우리가 대단한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익히 듣고 알고 있었던 기본적인 진리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에 우리 스스로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은 매우 중요하고 위중한 시기입니다. 흔히들 “지금은 팔 때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당장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고, 세상 질서가 유지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위기를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쌓여가고 있으며, 이러한 데미지가 누적된다면 내년, 내후년에는 더욱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만 모르고 있을 뿐, 현재 상황은 매우 위급하며 중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특별하고 새로운 메시지보다, 우리가 그동안 중요하게 여겨왔던 기본적인 메시지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리메이크” 라는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단순한 반복이나 재탕이 아니라, 과거에 중요하게 여겼던 메시지를 현재 상황에 맞게 재조명하여,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새롭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지라도, 흘려듣지 마시고, 마음 깊이 새겨 삶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처음 듣는 말씀처럼, 마지막으로 듣는 심정으로 말씀을 경청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 입니다. 회개와 천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제 신앙생활을 돌이켜보면, 처음 교회를 나왔을 때 구원과 천국에 대한 메시지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회개에 대한 메시지는 상대적으로 덜 들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회개를 통해 믿음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 회개와 믿음, 회개와 천국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짐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한번 회개와 천국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며, 회개 없이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천국에 간다는 것은 곧 회개를 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회개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태복음 3장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이르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세례 요한만의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외치신 첫 마디가 바로 이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 이는 회개와 천국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외에는 다른 중요한 메시지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머지 모든 가르침은 이 두 가지 핵심 메시지를 보충하고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천국, 이 두 단어는 결코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긴밀하게 연결된 단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외치셨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 모두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해서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진정한 회개가 여전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합시다. 회개해야 믿을 수 있습니다. 회개해야 천국 갑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는데, 바로 믿는다는 것의 전제 조건은 바로 “회개” 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라는 말씀을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마치 시험 날짜가 다가오니 “공부해라, 공부 열심히 해라, 시험 날이 얼마 안 남았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말도 이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회개” 라는 단어보다 “천국” 이라는 단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공부를 못하는 친구들이 시험 날짜만 정확히 적어놓고, 디데이 카운터만 세면서 “일주일 남았네, 3일 남았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날짜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공부” 를 해야 하는 것처럼,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회개” 를 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공부해라, 시험 날짜 얼마 안 남았다” 라고 말할 때,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시험 날짜” 가 아니라 “공부” 입니다. 공부만 제대로 하면 시험 날짜가 오늘이든 내일이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회개만 제대로 하면 천국에 가는 것이 왜 어렵겠습니까? 회개만 제대로 된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회개가 안 된다면 천국도 우리가 갈 수 없는 매우 위중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 가 무엇일까요?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회개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요? 진정한 회개를 알려면, 먼저 회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가 아닌 것을 통해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아닌데 회개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고백” 입니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행위를 회개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5절과 6절을 보면,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회개일까요? 물론 죄를 고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남들이 모르는 죄, 나와 하나님만 알고 있는 죄를 덮어두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감춰진 죄를 드러내는 것이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단계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죄를 고백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완성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마치 몸에 묻은 때를 인지하고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때를 인지하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때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를 씻어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이지, 회개의 완성이 아닙니다. 요단강에 와서 세례 요한에게 죄를 고백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것만으로 회개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고백하는 것을 회개의 전부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분명히 외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 진정한 회개는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거짓된 회개, 피상적인 회개를 멈추고, 진짜 회개, 열매 맺는 회개에 집중해야 합니다. 회개의 열매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세례 요한에게 특별히 책망을 받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왜 그토록 심한 책망을 받았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마태복음 3장 8절에 나와 있듯이,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회개를 외쳤지만, 실제 삶에서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회개의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책망의 이유는 마태복음 3장 9절에 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선민의식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영적인 자긍심만은 대단했습니다.

저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 또한 교회에 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만세 전에 택하심을 받았다” 라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긍심이 착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삶이 힘들고 고난이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으니 나는 복 받은 사람이야” 라고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좋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로가 과거의 추억에 머무르게 하고, 현재의 삶은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해주시고 천국에 보내주실 거야” 라는 잘못된 확신에 빠져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바로 그러한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만약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아니라 이방인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다면, “큰일 났구나, 우리가 이렇게 악한 자들이었구나, 우리는 정말 큰일 났다” 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러한 자기 성찰 과정을 전혀 거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저주받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 처음부터 십자가, 예수님, 믿음, 천국, 구원, 회개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 또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회개한 적도 없고, 제대로 믿은 적도 없는데, 스스로 “나는 믿음이 있어, 나는 천국에 갈 거야, 나는 십자가 안에 있어,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 와 같은 영적인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치 죄에 취해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 바로 이러한 착각입니다. 이러한 착각에서 속히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뱀의 자식들아, 이 강가에 슬그머니 내려와서 무엇을 하려 하느냐? 너희 뱀 가족의 몸을 물에 헹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바꾸어야 할 것은 너희 가족들이 아니라 너희의 삶이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내세우면 다 통할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흔해 빠진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중요한 것은 너희의 삶이다. 내가 이 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너희의 삶을 바꾸어 천국의 삶을 준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볼까요? “너희들이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만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해서 변화되었다고 착각하지 마라. 너희들만 택함 받은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이 오늘 우리에게 온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까요? 그 질문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고백” 은 말로 하는 것이라면, “회개” 는 무엇일까요? 회개의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 인데, 이는 “마음” 을 뜻하는 “메타(meta)” 와 “변화, 바뀜” 을 뜻하는 “노이아(noia)” 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회개는 “마음의 변화” 를 의미합니다. 마음이 바뀌는 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삶이 바뀝니다. 제 간증을 잠시 하겠습니다. 저는 원래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새벽 6시에 눈이 번쩍 떠지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1년 넘게 계속해서 아침 6시에 눈이 떠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냥 그 시간에 잠이 안 왔을까요? 계속 자고 싶은데 눈이 떠졌을까요? 만약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면, 눈을 뜬 상태로 그냥 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 친구와 싸우고 화해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학교에서 친구와 싸웠는데, 선생님께 혼나고 억지로 화해하는 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매를 들고 “서로 악수하고 화해해” 라고 시키면, 억지로 손을 잡고 “미안해” 라고 말합니다. 상대방도 “나도 미안해” 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사이좋게 놀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고, 쉬는 시간만 되면 또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억지로 하는 화해는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변화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화해는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선생님 앞에서 억지로 “미안하다” 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만약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다면,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갈 때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미안하다, 용서한다” 라는 말에 대한 진정한 열매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바뀌지 않은 채 억지로 손만 잡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화해가 아닙니다. 메타노이아, 즉 회개는 내 마음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게 되었을까요?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왜 죄를 버리고 믿음으로 살기로 결심했을까요? 어느 날부터인가 세상이 싫어진 것입니다. “회개(repentance)” 라는 단어를 한자로 풀이해 보면, “돌이킬 회(回)” 와 “고칠 개(改)”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돌이킬 회(回)” 는 “마음 심(心)” 과 “마을 읍(邑)” 이 합쳐진 글자로, 마음을 마을로 돌이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칠 개(改)” 는 “칠 복(攵)” 과 “몸 기(己)” 가 합쳐진 글자로, 자신을 쳐서 잘못된 것을 고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한자어 “회개” 는 마음을 돌이켜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펴는 것처럼, 한두 번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고쳐나가는 과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누가복음 3장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는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누가복음 3장에는 마태복음 3장에 생략된 내용이 추가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회개 촉구를 들은 무리들의 반응입니다. 누가복음 3장 10절을 보면,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라고 질문합니다. 회개에 대한 설교를 듣고, 무리들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반응입니다. 설교의 열매는 바로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말로만의 고백이 아닌 행위로 드러나는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강조하자, 무리들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반응한 것은 설교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기도에 대한 설교를 했다면, 설교의 열매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과 함께 교회 안에 기도 운동이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를 했다면, “첫사랑을 회복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과 함께 성도들의 삶 속에서 사랑의 실천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설교가 능력이 없는 것일까요? 예배가 능력이 없는 것일까요? 강단에 능력이 없는 것일까요? 회개 설교를 들었다면,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합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입니다. 무리들이 바로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무리들의 질문에 대해 세례 요한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합니다. 누가복음 3장 11절에서 세례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라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이 옷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 쉬울까요? 저는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소유물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부끄러워서 못 줄 수도 있지만, 소유물을 나누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 쉽지 않을까요? 말로는 쉽기 때문입니다. “밥 잘 챙겨 먹어라,”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힘내라” 와 같은 말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겉옷을 벗어서 어깨에 걸쳐줄 수는 없지만, 말로는 얼마든지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회개는 아닙니다. “네 옷을 나눠주어라” 라는 세례 요한의 말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세금 외에는 더 걷지 마라” 라고 말합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당시 세리들에게는 매우 혁신적인 요구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 즉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관행을 버리라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리들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관행을 멈추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는 세리들에게 “죽으라”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을 하는 경우, 계약이 잘 안 될 때 리베이트를 줘야 할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리베이트를 주는 것은 불법이고 죄라는 것을 알지만, 당장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리베이트를 주는 것은 죄짓는 것 같고, 안 주자니 계약이 날아갈 것 같고,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리베이트를 주는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그렇다면 리베이트를 안 주고 사업을 하기가 쉬울까요? 눈앞에서 거래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제 아는 사업가 한 분이 이러한 고민을 상담해 온 적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한 후, 리베이트를 주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세금계산서를 낮춰서 발행해 주는 관행도 멈추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가장 큰 거래처가 나가떨어졌습니다. 리베이트를 안 주면 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출이 50%나 줄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려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길이 좁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천국 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회개를 외치지만, 주님께서 오실 때 회개의 열매가 없다면, 회개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해야 천국에 간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에게는 “너희는 강포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라고 말합니다. 군인들에게 월급에 만족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은 당연한 요구처럼 들리지만, 당시 군인들에게는 매우 힘든 요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몸에 굳어진 악습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쉽습니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목사로서 제 자신에 대해 한심함을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설교는 설교대로 웅변적으로 해놓고, 세상에 나가서는, 특히 목사님들끼리 모이면 설교 내용과는 전혀 딴판으로 엉뚱한 소리를 하고 행동을 보일 때입니다. 그런 무리 속에 섞여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몹시 실망감을 느낍니다. 큰 죄는 아니지만, 설교단에서 주님의 재림, 십자가, 엄중한 심판을 이야기해 놓고, 일상생활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속물적인 대화를 나누고, 세상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내가 이러고도 설교자인가?’ 라는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설교와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회개를 입으로만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입으로는 회개를 외치고 울면서 기도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전혀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와 회개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엄청난 은혜입니다. “네 죄를 없이 하겠다” 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간음한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 예수님은 그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죄를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제 조건을 다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의 용서는 조건 없는 은혜이지만, 동시에 변화된 삶을 요구하는 강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진정으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이 여인은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다시는 간음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용서가 헛되지 않고, 이 여인의 깨달음과 회개가 진정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쉽습니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이후 여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열매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말로만 하지 말고, 회개를 삶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를 듣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수백, 수천 명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마음이 열려 질문하는 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박보영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겠습니다. 박 목사님이 캐나다에서 집회를 인도했을 때, 담임 목사님께서 집회 시작 전에 간곡하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이번 집회에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딱 한 사람만 바꿔주십시오.” 박 목사님은 부담감을 느꼈지만, 담임 목사님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그토록 간절하게 변화되기를 원했던 사람은, 교회에 출석하는 연세가 있는 성공한 기업가였습니다. 그분은 캐나다 경제인 협회 회장까지 지낸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교회 안에서는 문제아였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교회에 오는데, 기분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예배가 끝나고 교회 마당에서 부인을 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내 각종 모임에서도 항상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분만 나타나면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말 그대로 ‘문제적 인물’ 이었습니다. 그래서 박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집회 기간 내내 그 기업가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집회가 시작되었지만, 그 기업가는 예배 내내 눈도 감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설교를 들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저 사람은 안 되겠다, 틀렸다’ 라고 생각하며 집회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난 후, 놀랍게도 그 기업가가 박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를 제게 적용해 보니, 저는 지금 죽으면 지옥 갈 사람입니다. 목사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 권사님의 남편분이 어느 날 설교를 듣고 아내에게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나니, 나는 지금 상태로는 지옥 갈 사람이야” 라고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고백만 하고 변화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의 기업가는 달랐습니다. 박 목사님을 찾아와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즉시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교회에 올 때 지팡이를 갖고 오지 마십시오. 둘째, 교회 내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서도 발언하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셋째, 재산이 많으시다고 하니, 그 돈을 정리해서 내일부터 길거리에서 전도하십시오. 전 재산을 털어 전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업가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기업가는 세 가지 약속을 모두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집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집회에서 변화된 사람은 오직 그 노인 한 분뿐이었습니다. 그 후 1년여 동안, 기업가는 거리에서 전도하며 변화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고, 결국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그분이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집회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용기를 내어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 교회에도, 이 영상을 시청하는 성도님들 중에도, 이러한 심각한 영적 위기에 놓인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합니다. 열매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를 보이기 위해 억지로 행동을 바꾸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서 메타노이아, 즉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면, 회개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농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이 “저 집은 올해 풍년이네” 라고 알아봅니다. 열매는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전에도 교회가 비판받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느끼는 비판의 강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변화된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교회에서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비난했습니다. 물론 교회 특성상 밀집도가 높고,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하철이나 식당 등 다른 장소에서도 감염될 수 있는데, 유독 교회만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의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음의 열매를 맺어, 천국 시민으로서의 삶을 증명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입으로만 하는 고백을 넘어, 삶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진정한 회개를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십자가의 좁은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내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는 입으로만 회개하고, 귀로만 회개를 듣고, 머리로만 회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메타노이아, 마음의 변화가 우리 마음 중심에서부터 일어나, 진정한 회개가 삶의 아름다운 열매로 맺혀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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