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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의미와 증거: 교회 출석과 진정한 신앙의 차이

요약

## 거듭남: 교회를 다니는가, 그리스도를 믿는가?

리메이크 (7) - 진정 거듭났는가, 거듭났다고 생각하는가? 설교 상세 내용 정리

오늘, 여러분에게 던져볼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마음속으로 진지하게 답변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기 위해 교회를 다니고 계십니까? 아니면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척하고 계십니까? 너무나 당연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교회를 다닌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교회 다니는 행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함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교회에 다니기 위해 예수를 믿는 척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증거는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거나, 실족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다가, 혹은 다른 어떤 일을 하다가도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이 생깁니다. 심지어 사소한 이해관계 속에서도 특별히 부딪히게 되면, 교회를 쉽게 떠나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은 엄청난 영적 힘이 필요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저러한 이유로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되는데, 안타깝게도 떠나는 일이 발생했을 때, 단순히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까지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했던 모든 봉사와 헌신, 예배와 열심, 기도 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했던 행위가 아니라, 단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했던 일들에 불과했다는 증거가 되어버립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왜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에 대한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만약 이 우선순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면, 결국 교회를 떠나는 순간 예수를 떠나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새로워짐의 경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세상에 있을 때의 성격과 습관, 가치관 그대로 교회만 다녔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과 갈등이 닥쳐도 쉽게 무너져 버리고, 예전의 습관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교회 안에서 분쟁과 시련, 시험이 닥친다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흔들릴 수는 있어도, 뿌리째 뽑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억지로 세상과 단절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예전처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기가 더 힘들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미 의식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기 전처럼 죄를 짓고, 세상적인 욕망을 쫓으며 사는 것이 더 이상 편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귀라면, 믿는 자들을 어떻게 공격할까요? 제 생각에는 교회 다니는 행위 자체를 크게 건드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다니도록 내버려 두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부추길 것입니다. 심지어 봉사나 헌신도 장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바로 '거듭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모든 힘을 쏟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도,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국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지옥"이라는 절망적인 선고를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바로 '거듭남'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주의 깊게,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나는 과연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인가? 아니면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실제로 '거듭난'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피상적인 변화만 나타날 수 있지만, 실제로 거듭난 사람은 삶의 근본적인 변화, 즉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억지로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르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는 것은 율법주의적인 삶이며, 매우 피곤하고 힘든 길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넘어지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예전의 '나'라는 존재, 옛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나면,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다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본래 엄청난 혈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박해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던 흉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성경은 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세상의 꿈과 야망, 욕심을 쫓아 맹렬하게 질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극도로 싫어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변화가 누군가의 가르침이나 협박으로 가능했을까요? 혹은 단순히 '나도 이제부터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자기 다짐과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였을까요? 결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그토록 극적인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진짜로 '새로운 피조물', '다른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제2의 니고데모'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은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거듭나지 못한'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거듭나라!'고 강력하게 외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장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1절은 니고데모를 매우 간략하지만, 핵심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 중에서도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지도자'라고 번역했지만,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아르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아르콘'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통치자', '지배자'와 같은 매우 권위 있는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즉, 니고데모는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최고 의결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몇 안 되는 '으뜸'가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은 기본적으로 세상과 구별되어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неоднократно 책망하셨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두 지도자 '급'에 속하는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니고데모의 나이가 예수님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높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려면 상당한 나이와 경륜이 쌓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추정됩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종교적인 영향력 등 여러 면에서 볼 때, 니고데모와 예수님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큰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니고데모는 존경받는 지도자였고, 예수님은 그저 '떠오르는 신흥 종교 지도자' 정도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는 니고데모2절에서 아주 '정중하게' 예수님을 '밤'에 찾아와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선생님, 랍비여"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유대교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신흥 종교 지도자인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행보였습니다. 더욱이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라며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과 능력까지 인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인격적'이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분명히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며,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만약 니고데모가 오늘날 우리 교회에 왔다면, 아마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의심 없이 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환영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으로는, 니고데모는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목은 달랐습니다. 3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 속에는 니고데모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네게 이르노니"라고 '특정'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는데,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니고데모, 너는 지금 거듭나지 못했다. 너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이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하며, 나에게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 존경심을 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거듭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니고데모에게 매우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품성''거듭남'전혀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과 상관없이, 본래 성품이 '선한 사람'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착하고, 인격적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본래 '선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를 떠올려보면, 가끔 한두 명씩 그런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법 없이도 살 만한' 친구, 항상 성실하고 바르고,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악하게 대하지 않는 그런 친구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사회생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도 예수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목사인 저보다 인격적으로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데도, 오히려 저보다 훨씬 더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선한 행위'를 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니고데모종교적인 높은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지도층 인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정도로 철저하게 '위장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주일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교회 봉사, 헌금 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큐티, 새벽기도, 심방, 전도 등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다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감 있게 항변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과연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아마도 "그래, 네가 겉으로는 참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은 내가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정말로 말하고 싶은 '본질적인' 것이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는데,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만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때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시자, 그 의미를 '단순히' '다시 태어나야 한다''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내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이미 한 번 태어났는데, 지금 저에게 다시 태어나라고 하시니, 제가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두 번 태어난다'는 의미로 '오해'하고, '비논리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물론 니고데모도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은 과연 무엇일까요?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야 한다',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두 번 태어나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실 때, 헬라어 원어로는 '아노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아노덴'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두 번째'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로부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니고데모는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두 번 태어난다'는 의미로 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고 싶으셨던 '거듭남'"너는 지금 '땅'에서 났지만, 이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땅'에서 난 존재입니다. 육체의 혈통을 따라, 이 땅에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땅'에서 난 존재로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볼 수 없습니다. 반드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즉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노덴'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3장에 또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3장 31절입니다. 함께 찾아보실까요? 요한복음 3장 3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할 때, 여기서 '위'는 단순히 '높은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곧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질문하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신 분',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으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높이며, 자신은 낮아져야 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위치'를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그토록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가 교만하고, '성도'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겁'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정말로' 만난다면,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존귀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과연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까요?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의 소중함을 모르고, 교회에서 함부로 행동하며, 봉사를 가볍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피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두렵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인격적으로' 만난다면, 과연 지금처럼 '세상'과 '똑같이' 살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정확하게 증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나신 분', 즉 '본질적으로' '하늘에 속한 분'이십니다. '위'에서 나셨기 때문에, 이 땅의 '권세'와 '죽음'에 매일 수 없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이치'가 이해가 되십니까? '위'에서 나셨기 때문에, '이 땅'에서 '죽음'으로 끝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셔서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승귀'라고 합니다. 그렇게 본래의 '보좌'에 다시 앉아 계시다가, 스데반이 순교할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앉아 계시다가'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위로부터 오셨다'고 할 때 '위로부터'라는 말이 바로 '아노덴'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이 땅'에서 난 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난 자, 이 사람을 일컬어 '거듭났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하늘'에서 날 수 있을까요? 반드시 하나의 '필수적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 땅'에서 '죽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의 생명', 물론 이 생명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이 '육체적 생명'만으로는 '거듭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육체적 생명'만 가지고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종종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 번' 죽는다." 무슨 말일까요? '한 번' 태어난 사람,'육체'로만 태어난 사람'육신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적인 가치관을 쫓으며 살다가 죽으면, 육신의 죽음 이후에 '영원한 죽음','사망' 가운데 들어가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사람,'거듭난 사람''한 번'만 죽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육체'로 태어났지만,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면', '두 번째' 태어난 것이 됩니다. '두 번째' 태어난 사람'육신의 죽음'은 맞이하지만,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 번 태어난 사람''한 번'만 죽는 것입니다. 제 말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

그리고 '두 번'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번의 죽음'을 겪어야 합니다. 그 중간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신비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거듭남의 비밀'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모두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쉬운 성경'으로 번역된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함께 들어보시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고백할 때가 대략 AD 50년 중반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약 2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놀라운 영적 진리'를 깨닫고 고백합니다. "2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그 십자가 사건은 바로 '오늘' 살아있는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정말로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2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나'는 무엇이고, 지금 '살아있는' '나'는 무엇일까요? 20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버린 것은 바로 '옛사람', '예전의 나'입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있는' '나'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살고 계시는' '새로운 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유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겉모습은 '나'이지만,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나', 즉 '옛사람'이 살아있을 때의 '나'는, 오직 '나'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았습니다.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어 버렸습니다.' 단순히 기절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죽어서' 다시 살아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새롭게 된 나'는 누구일까요?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담아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내 안에 '진짜'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까요? 바로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는 과정''필수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결코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듭났다'는 것은 곧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엄청난' 선언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데', 함부로 술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데', 여전히 세상 쾌락을 쫓으며 음란한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예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존귀한 그릇'인데, 함부로 거짓말을 늘어놓고, 탐욕을 부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도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안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결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실수'로 죄를 짓게 될 수는 있지만, 죄를 짓고 나면 '괴로워서'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죄를 짓고도 '괴롭지 않다면', 여러분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옛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죄일지라도, 성경적인 기준으로 볼 때 '죄'에 해당한다면, 거듭난 사람'양심의 가책'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심히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니 애초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억지로 '달라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미국 사람한국 사람처럼 살 수 없고, 한국 사람미국 사람처럼 살 수 없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르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위'에서 난 자, 즉 '거듭난 사람''이 땅'의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난', '거듭난 사람들의 '증거'가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되어 있는 '산상수훈'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성경에는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 성경에는 산상수훈의 각 단락마다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천국 시민의 삶"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곧 '천국 시민'의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천국 시민은 곧 '위에서 난 사람', '거듭난 사람'입니다. 오늘 설교 주제와 연결시켜서 표현하자면, '거듭난 자들의 행동 지침'이 바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 즉 '산상수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수훈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세상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내용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니?',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원수만 안 갚아도 다행이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도대체 '오른뺨을 맞았는데 왜 왼뺨을 돌려대야 하지?'", "'바보' 같은 짓 아닌가?"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른뺨을 맞았을 때 왼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결코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이 '살아가야 할 '법도'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야만' 구원을 얻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구원'받기 위해 억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니고데모는 '겉으로는' 훌륭한 종교 지도자였지만, 실상은 '거듭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중요한 것''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다르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거듭난다'는 것은 곧 '위에서 나는 것', 즉 '하늘로부터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난 사람', 즉 '거듭난 사람'에게는 '분명한 '증거'가 나타납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바로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최종적인 질문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씀은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도구'는 바로 '물과 성령'입니다. '성령'은 워낙 '영적인 영역'이라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물'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순히 '물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일까요? 물론 물세례도 중요한 '기독교 의식'이지만, 물세례 자체가 '거듭남'의 '본질'은 아닙니다. 물세례는 '상징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물'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물'에 대해 신학자들의 다양한 주장과 해석이 존재하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해석''물'은 곧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단순히 '성경''부지런히 읽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말씀 암송'을 열심히 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베드로전서 1장 23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여기서 "너희"이미 '거듭난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즉, 베드로 사도는 이미 '거듭난 성도들'에게 "여러분, 여러분이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 즉 '육체의 혈통'이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썩지 아니하는 씨', 곧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라고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베드로전서 1장 22절 말씀을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22절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 여기서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곧 '영혼이 의롭게 된다', '영혼이 구원받는다', '영혼이 거듭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순종함'으로 내 영혼이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라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거듭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 모태신앙인 것, 헌금을 많이 하는 것, 종교적인 열심을 내는 것, 이 모든 것은 다 '썩어질 씨'와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고,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영원한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만이 '썩지 아니할 씨'이며,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틴 루터'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놀라운' 표현을 했습니다. "성경은 나에게 '살아있어서' '말'을 한다." 우리가 '성경책''눈으로' 읽는 순간에도, 놀랍게도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우리의 '양심''강렬하게' '울려 퍼진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삶의 방향''제시'해 줍니다.

또한, 마틴 루터"성경은 '발'이 있어서 나를 '쫓아다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죄'를 지으려고 할 때, '성경 말씀'이 마치 '쫓아오는 발걸음'처럼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그 길로 가면 안 된다!", "돌이키라!" 성경 말씀은 마치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죄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틴 루터"성경은 '손'이 있어서 나를 '붙잡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성경 말씀'이 마치 '붙잡는 손길'처럼 우리를 '강력하게' '붙잡아', '죄악된 행동''중단'하도록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멈추라!", "그만 하라!" 이것이 바로 '진리에 순종하는 삶'이며,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마틴 루터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씀의 능력''삶 속에서' '생생하게' 경험했고, 그것을 저렇게 '역동적인' 표현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다 보면 '내 본능'대로, '내 욕심'대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본성', '옛사람의 '생명'입니다. 본능대로, 욕심대로 하고 싶은 것은 곧 '내 기질', '내 성격', '내 고집'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옛사람''여전히'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거듭나게 된 '새로운 나'는 더 이상 '내 기질', '내 성격', '내 관습'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의 말씀''지시'대로 '움직여'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삶의 '최우선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느 '간호사'의 '작은 경험'을 담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지난해 3월, 4인 병실에 74세 된 할아버지께서 새로운 환자로 들어오셨습니다. 키도 크고, 겉모습은 제법 젠틀해 보였지만, 간호하던 할머니에게는 '고압적'이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일삼았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갑질'하는 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가끔 '치매'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치매 증세를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는 '투덜거리면서''헌신적으로' 시중을 모두 들어주고 계셨습니다. 병상에서 어색한 며칠이 지나고, 할머니와 저는 제법 가까워졌습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49년 동안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아픈 이야기'를 저에게 털어놓으신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49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함께 산 세월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고향은 가평인데, 할아버지는 결혼하여 첫 아들을 낳았지만, 첫돌이 지나기 전에 '군대'에 '강제로 징집'되어 입대하셨고, 몇 년 만에 '휴가'차 잠시 집에 들러 '둘째'를 임신시키고, 군 복무를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소식이 끊겼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생사'도 알 수 없는 할아버지를 '49년 동안' '기다리면서' 온갖 '허드렛일''행상'을 하며 '힘겹게' 아들을 키우고, 교육시키며 살아오셨습니다.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남편'을 기다리며,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기나긴 49년'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식들을 이제 '훌륭하게' 잘 키워내고, '두 다리 뻗고' 편히 쉴 만하자, 어느 날 '병든 몸'을 이끌고 '낯선' 할아버지'달랑'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군대 입대하면서 '총각' 행세를 하고, 부대 근처에서 '새로운 여자'를 만나 '재혼'하여 '세 자녀'를 낳았고, 그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출가'까지 시키면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병들자, '후처''온갖 구박'을 하며 '밥'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서 '굶어 죽게' 되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본처'를 찾아 '49년 만에' '돌아왔다'는 기가 막힌 사연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과연 그 같은 '기가 막힌' 상황에서 남편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할머니는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 말씀' 때문에 '할아버지'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어떻게 뵐 수 있겠는가?"라는 '믿음'으로, 할머니는 '놀랍게도' '남편'을 '다시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기가 막히고', '분노'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저렇게 뻔뻔하고, 염치없이 행동하는 '나쁜' 할아버지를 왜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거지? 오히려 '호되게' '벌'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세상적인 생각'이 제 마음속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그 '온전한 믿음''숭고한 헌신' 앞에서, '세상적인 가치관'에 젖어있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할머니가 '파렴치한 남편'을 '다시 받아준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동정심'이나 '연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세상에도 '동정심'이나 '연민' 때문에 '힘든 상황''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듭남'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적인 '선행'일 뿐입니다. 할머니의 경우는 '차원'이 '다른' '사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예전의 '옛사람'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남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에 '온전히 순복함'으로써 '거듭난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 안에서 '진정으로' '남편'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며,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거듭남' 자체가 무엇인지, 이러쿵저러쿵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이것만은 꼭 '기억'하고 '실천'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의 말씀''온전히 순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최우선 '기준'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게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옛사람'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천국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 시민'으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육신'은 '죽을지라도', '영원히 죽지 않는'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거룩하고도 '과도한' 욕심'을 '하나' 품고 싶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기 전에는 '여전히' '옛사람'의 '생명' 가운데 살아가며,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이었다 할지라도, 오늘 예배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 '진정으로' '거듭난 '영혼'이 꼭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거듭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듭났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기만'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진정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우리 심령 가운데 일어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하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니고데모'조차도 '거듭나지 못했음'을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우리 또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의 말씀'에 '온전히 반응'하고 '순종함'으로써, '날마다' '천국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간구,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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