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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 묵상: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과 하나님의 은혜, 참된 구원의 비밀

요약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다양한 기준이 존재하겠지만, 단언컨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바로 지옥으로 향하는 사람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에는 크게 두 가지 갈래가 존재하는데요, 첫째는 믿을 수 있는 분명한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차버린 경우이고, 둘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척박한 환경과 조건 때문에 믿음 자체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경우입니다. 흔히 남한에 태어난 것을 북한보다 훨씬 복이라고 칭송하지만, 만약 남한에서 온갖 풍요를 누리다 죽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 사람은 북한에서 고통받다 지옥에 간 사람보다 훨씬 더 비참한 운명에 놓이는 것입니다. 교회 바로 옆집에 살면서 평생을 다닌 사람, 심지어 교회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봉사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옥에 간다면 그 얼마나 억울하고 통탄할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설교자인 저는 과연 안전할까요? 만약 제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서 3장을 묵상하며 로마서와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요. 마치 로마서를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자, 갈라디아서 3장 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사실을 그토록 분명하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다시 어리석음의 늪에 빠져 망할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려 하는가? 도대체 누가, 어떤 악한 세력이 우리를 꾀어 이토록 어리석은 길로 이끄는 것일까요? 바로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분명하게 전했었습니다. 그가 잠시 떠나 있는 사이, 거짓 교사들이 교묘하게 파고들어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달콤한 속삭임으로 교인들을 현혹했습니다. "예수님만 믿는다고 구원받는다고? 천만에! 우리에게는 오랜 전통과 율법이 있지 않은가! 율법도 철저히 지켜야만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날짜, 절기, 음식 규정 등 율법의 세세한 조항들을 교묘하게 덧붙여, 순수한 복음을 ‘짝퉁 복음’으로 변질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율법에 얽매여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본질을 호도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인지한 사도 바울은, 분노와 안타까움을 담아 갈라디아서를 써 내려갔습니다. 다시 한번 강력하게 외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셨는데, 어찌하여 그 크신 은혜를 걷어차고 다시 율법의 굴레로 돌아가려 하는가? 도대체 왜 스스로 유혹에 빠지려 하는가!" 바울은 믿음의 근거는 결코 율법이 될 수 없음을 논증하기 위해, 성령의 역사와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두 가지 강력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문단 시작 볼드체) 이제 2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 분명히 성령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켜서 얻은 결과인가요?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받은 것인가요?" 이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를 떠올려 보십시오. 제자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성령이 임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간절히 기도하며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릴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와 놀라운 열매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언급하며, 갈라디아 교회 안에 분명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초대교회는 그야말로 뜨거운 성령의 역사로 가득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고, 병든 자가 치유되는 역사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묻습니다. "갈라디아 교인 여러분, 냉철하게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체험한 성령의 역사는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까? 혹은 복음을 듣고 믿음이 생겨 성령이 임하셨을 때 나타난 역사입니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답은 후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 성령이 강림하신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령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의 질문은 그야말로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강력한 팩트였습니다.

(문단 시작 볼드체) 바울은 3절에서 더욱 강력하게 질책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어찌하여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 성령으로, 은혜로 시작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율법, 즉 육체로 끝내려 하느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령을 갈망하고 간구한다고 해서, 우리의 열심만으로 성령이 임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우리의 간절한 사모함에 응답하시기도 하지만, 우리의 태도와 마음을 보시며 역사하십니다. 심지어 성령님은 떠나가시기도 합니다! 성령님을 불쾌하게 하거나, 환영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성령님은 떠나실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도, 안타깝게도 성령을 소멸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결국 성령이 떠나가시는 비극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사울 왕을 보십시오. 한때 성령이 충만했던 사울이었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반복적으로 범했을 때, 성령이 그를 떠나셨습니다. 삼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났을 때,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두 눈이 뽑히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면, 성령님은 떠나가실 수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위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은 에베소교회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은,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려도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천 명이 모여도, 성령의 불이 임하지 않고, 말씀을 전해도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앙상한 껍데기만 남은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성령의 촛대가 우리 교회에서, 우리 심령에서 옮겨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간절히 사모해야 할 때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빚 때문에 절망에 빠진 사기꾼이 교회에 왔다가 성령을 체험하고 변화되어 목사가 된 간증이 실제로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변화될 수 없는 악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강력한 역사 앞에서는 완전히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적인 예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여러분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노력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해서 성령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 자체가 성령을 받게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로 계획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4)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성령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받을 자는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은 120명의 문도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믿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선언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자체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선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을 능하게 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고 고백합니다. 바울보다 더 충성된 사람은 얼마든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자신을 충성되게 여겨주시고, 복음 전파의 막중한 직분을 맡겨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것, 이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획득한 것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얻어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음대로, 제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단 시작 볼드체) 만약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야만 합니다. 단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전체를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경고합니다. 율법은 부분 점수가 없습니다. 100점 만점이 아니면 0점과 똑같습니다. 운전면허 시험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는 운전면허 1종 시험에서 80점 이상을 받아야 합격했습니다. 79점은 아깝게 떨어진 것이 아니라, 0점과 마찬가지로 불합격입니다. 세상의 법도 이처럼 엄격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율법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결코 율법을 대충 지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다면,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절망해야 할까요?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의롭게 되는’ 다른 길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례를 제시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도리를 설명합니다. 6절부터 8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는 창세기 15장 6절에 기록된 분명한 성경적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강조했지만, 성경은 분명히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이전 시대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사실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첫째, 아브라함은 율법 시대 이전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시대는 율법이 주어지기 약 430년 전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의롭게 되는 길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율법 이전 시대의 아브라함은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다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의롭게 되었을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둘째, 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만약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면, 이방인들은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알 수도 없고, 안다 해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 즉 이방인까지 복을 받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세상적인 복, 물질적인 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인 복,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 즉 ‘의롭게 됨’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진정한 복은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역시 인간적인 연약함과 부족함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에 어긋나는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은 네 몸에서 날 자라"(창세기 15:4)고 약속하시며,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 또한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완전히 합치되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으로 볼 때, 아브라함 역시 책망받아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칭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 심지어 이방인까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약속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민족을 포함하는 약속입니다. 모든 민족이 받을 복은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입니다. 복 중의 복, 최고의 복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부와 명예, 권력, 건강, 장수일까요? 물론 이러한 것들도 귀하지만, 가장 큰 복은 바로 ‘의롭게 됨’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가 이 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을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문단 시작 볼드체)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몽학선생’(몽학선생)이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은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몽학선생은 오늘날로 말하면 ‘개인교사’, ‘가정교사’와 비슷한 역할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녀 교육을 위해 몽학선생을 두었습니다. 몽학선생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일상생활을 지도하며 기본적인 예절과 학문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몽학선생은 ‘참된 스승’은 아니었습니다. 참된 스승, 본래적인 의미의 교사는 따로 있었습니다. 몽학선생은 아이들을 참된 스승에게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습니다. 율법의 역할이 바로 몽학선생과 같습니다. 율법 자체로는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의 죄인 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우리의 얼굴에 묻은 더러움을 보여주지만, 스스로 더러움을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지만, 스스로 죄를 해결할 능력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율법의 이러한 부정적인 기능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 사람은, 진정으로 구원자를 갈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구원자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서 율법에 정통한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하나님께 열심을 다해 섬겼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갈증과 영적인 불안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죄성과 연약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도저히 참된 평안과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도를 질문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은 마치 끊임없이 목마름을 일으키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만 심해질 뿐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참된 구원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물은 회개를 상징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성령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참된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절망에 빠뜨리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율법은 마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 독촉과 같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입니다. 우리의 죄 역시 일만 달란트 빚처럼, 우리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짐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음대로, 제멋대로 살아도 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단 시작 볼드체) 일만 달란트 빚 탕감받은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주인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은 마땅히 감사하며, 주인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빚 탕감받은 자는 은혜를 망각하고,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크게 노하여, 그를 다시 옥에 가두고 빚을 갚을 때까지 고통을 받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십자가 은혜를 깨닫고, 구원의 감격을 누린다면, 결코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분명한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입맛대로,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억지로, 억압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고,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상급을 바라거나, 벌이 두려워서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사는 삶의 본질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억압하고 정죄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변화시킵니다. 율법은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복음은 ‘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절망하게 하지만, 복음은 죄 사함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줍니다. 율법의 사람은 억지로 율법을 지키려 하지만, 복음의 사람은 사랑으로 자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율법의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만, 복음의 사람은 은혜 아래 있습니다. 물론 복음으로 사는 삶에도 넘어짐과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가 다시 넘어지고 실패할 때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주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고,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우리를 채우시는 하나님은 풍요로우십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우리는 율법의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굳게 붙들고,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갈라디아서 3장 말씀을 통해 우리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깊이 묵상해보았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절망에 빠뜨리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굳게 믿고, 날마다 복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제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기도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다시 한번 묵상하며,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보십시오. 혹시 아직도 율법의 굴레에 얽매여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눈물이 마르지 않는 회개의 기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기도,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 올려 드립시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아침에도 저희를 깨워주시고, 귀한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는 너무나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율법에 얽매여 어리석은 삶을 살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저희 역시 율법주의에 빠져, 참된 복음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저희를 율법의 사람이 아니라, 온전히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십시오. 저희 심령에 성령의 뜨거운 불을 부어주셔서, 냉랭하고 무감각한 심령이 변화되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여주십시오. 저희 삶에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넘쳐나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십시오. 벌이 두려워서 억지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변화되게 하여주십시오. 이 은혜를, 이 성령의 능력을 저희에게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여, 주여, 주여!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했습니다.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왔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희 심령을 깨끗하게 씻어주십시오. 저희를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삼아주셨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