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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들은 무엇을 거부하는가? 조던 피터슨 신 개념 논쟁과 철학적 통찰 총정리

요약

무신론자들은 과연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가: 조던 피터슨의 신에 대한 철학적 통찰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중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인데요. 저명한 임상 심리학자이자 토론토 대학교 교수, 작가 겸 팟캐스터인 조던 피터슨 박사는 그의 강의에서 "무신론자들은 신을 거부하지만, 그들은 정작 무엇을 거부하는지 모른다" 는 강렬한 주장을 펼칩니다. 이 주장은 단순히 종교적 믿음에 대한 논쟁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과 삶의 목적, 그리고 진리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피터슨 박사는 스물다섯 명의 무신론자들과 둘러앉아 이 대담을 시작하며, 그의 핵심적인 주장을 던집니다. 이는 무신론자들이 단순히 '신'이라는 개념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그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의 본질적 의미와 복잡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들이 거부하는 대상을 축소된 형태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대담에 참여한 무신론자들, 특히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 즉각적인 반론을 불러일으킵니다.

신앙의 깊은 경험을 가진 무신론자의 반박과 피터슨의 재정의

대담에 참여한 한 무신론자는 자신이 전통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수년간 공부했으며, 매일 미사와 묵주기도를 드리고, 오랜 영적 수련과 교리 교육, 성경 해석학을 깊이 탐구했다고 밝힙니다. 그는 이러한 깊은 종교적 경험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피터슨 박사의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거부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주장에 반박합니다. 이에 대해 피터슨 박사는 그가 사제 수련 중에 무언가를 놓쳤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지금도 여전히 그 목표가 어긋나 있을 수 있다고 받아칩니다. 이러한 답변은 다시금 상대방에게 "진정한 스코틀랜드인이 아니라면 논리적 오류" 와 같은 인상을 줍니다. 즉, 피터슨 박사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목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자의적인 판단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은 피터슨 박사가 자신을 만나보지도 않고 자신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합니다.

피터슨 박사는 자신의 주장이 특정한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신론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임을 명확히 합니다. 그는 무신론자들이 신을 거부한다는 주장 또한 일반적인 주장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무신론자들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매우 환원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종교적인 사람이나 종교적 체계, 혹은 심지어 신 그 자체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무신론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러한 경험이 그들에게 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피터슨 박사가 무신론을 너무 환원주의적으로 바라본다고 반박합니다. 피터슨 박사가 종교를 '삶의 목표를 가지는 모든 것', '문화적 원형', 혹은 '은유적 기저를 가지는 것' 등으로 너무 광범위하게 정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무신론은 마치 '완벽한 살인을 꿈꾸는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로만 한정하여 정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제기합니다. 이에 대해 피터슨 박사는 상대방에게 자신이 거부하는 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정의하는지 역으로 질문합니다.

무신론자는 일반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전능하고 완벽하며 세상사에 개입하는 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현현한 로고스(말씀)를 통해 지혜를 구하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그는 피터슨 박사 역시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믿는 방식의 종교를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그는 세상에는 신자의 수만큼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며, 각자 서로 배타적인 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피터슨 박사는 만약 모두가 신에 대해 서로 배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며, 소통의 사실 자체가 공통된 가정과 정의를 전제한다고 반박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원형적 발현도 동등하게 종교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상대방의 주장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피터슨 박사는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하기 위해 성경 속 예시를 듭니다. 그는 모세 이야기에 나오는 한 가지 하위 서사, 즉 모세가 신의 모습을 잠시 엿보게 되는 장면을 예로 들어 신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신이 묘사되는 방식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모세는 신의 충실한 종이자 선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신은 모세를 두 절벽 사이에 세워두고 겨우 틈새로 신의 등만 볼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이는 신적인 존재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하며,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현실의 근원을 이루는 포괄적인 비전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들이 종종 신을 '단순한 인격화된 존재'나 '하늘에 있는 늙은이' 정도로 축소하여 정의하는 경향이 있는데, 모세 이야기에 나오는 신은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 신은 그 본질이 알 수 없고 압도적이어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그 전체를 인지하거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피터슨 박사는 무신론자들이 이러한 복잡하고 심오한 신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이 훼손하려 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신을 환원적으로 정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마치 유한한 존재가 최종적으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고, 그 전체를 인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이에 대해 반박하며, "하나님을 믿느냐"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에서조차 저자들이 하나님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았는지 불분명하며, 야훼(Yahweh)는 역사적으로 초기 폭풍의 신에서 진화하여 다양한 신 개념을 포괄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육체성을 가지는지 아닌지조차 명확하지 않다고 덧붙입니다. 만약 피터슨 박사의 정의대로 종교를 '목표를 가진 사람', '미지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려는 사람'으로 정의한다면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며, 이는 피터슨 박사가 무신론을 환원적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를 환원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무신론자를 '교리적으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정기적으로 종교 예배에 참석하지 않거나 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양측 모두 상대방의 견해를 축소하여 바라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화가 비논리적이고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방식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거부인가, 무지의 무관심인가: 로노 신 이야기

대화는 두 번째 무신론자, 데이비드와의 질의응답으로 이어집니다. 피터슨 박사는 데이비드에게 폴리네시아의 신 '로노'(Lono)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묻습니다. 데이비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하자, 피터슨 박사는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거부하는지 모른 채 무언가를 거부하고 있다" 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자신이 로노에 대해 무지한 것이지, 로노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그는 피터슨 박사에게 "내가 모르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고 전제하는 것인가"라고 역으로 질문하며, 이러한 전제가 타당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데이비드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동시에 모든 것을 알아야만 자신의 주장이 유효하다는 뜻이냐고 반박하며, 피터슨 박사에게 자신의 주장(무지=거부)이 타당하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피터슨 박사는 데이비드가 로노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계속해서 로노를 믿는지 여부를 묻습니다. 데이비드는 "내가 모르는 것을 거부한다는 당신의 전제가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답할 수 없다"고 응수합니다. 이는 '무지'와 '거부'는 다른 개념이며, 무지하다는 이유로 특정 신념을 거부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그의 논리를 보여줍니다. 데이비드는 무신론자들이 종교나 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거부한다고 주장하는 피터슨 박사의 논리를 역으로 적용하여, 피터슨 박사와 다른 종교인들도 자신이 거부하는 것(혹은 믿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피터슨 박사는 "내가 로노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다고 말한 적은 없다. 로노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했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데이비드는 더욱 핵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피터슨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무신론자들이 종교나 신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거부한다고 하는데, 자신은 종교학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기독교와 지중해 전통을 전공했다고 밝힙니다. 그는 자신 외에도 퓨리서치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이 실제 신자들보다 종교와 종교적 이야기, 그리고 근본적인 원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피터슨 박사는 이 연구 결과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는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종교적이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깊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적인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의 정의적인 특성 중 하나가 바로 '깊은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거의 종교의 정의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전통을 따르고 그 근본적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피터슨 박사의 정의는 오히려 종파적인 것(sectarian)에 가깝다고 반박합니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자신을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영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예로 들며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만, 시간 제약으로 인해 대화는 중단됩니다.

다의적 의미의 신(神) 개념과 양심의 역할

세 번째 무신론자 그렉과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그렉은 피터슨 박사의 주장이 단어에 여러 가지 관련 의미가 있는 '다의어'(polysemy) 개념과 관련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감동적'이라는 단어는 그림이 감정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고, 고속도로에서 물리적으로 위치가 변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모나리자가 매우 감동적이다'라고 말했을 때, 만약 상대방이 '그것은 벽에 박혀 있으니 감동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렉은 주장합니다.

그는 이러한 비유를 신의 개념에 적용합니다. 그렉은 신에 대한 많은 개념이 존재함을 인정하며, 피터슨 박사가 말하는 융(Jung)적인 계층적 개념이나 은유적 혹은 상징적 개념에 익숙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신'이라는 개념을 거부할 때, 그것은 전지전능하고 전지하며 개입하는 초자연적인 존재, 아들을 보냈고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는 문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개념의 신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합니다. 즉, 신의 다의적인 의미를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이 거부하는 것은 가장 일반적이고 문자주의적인 형태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피터슨 박사는 그렉에게 "사물의 근본적인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합니다. 과학자들이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찾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하나의 포괄적인 이론으로 통합된다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렉은 물리학자들이 '모든 것의 이론'을 찾는다고 알고 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흥미롭고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피터슨 박사는 과학자들이 물질세계와 시공간이 보편적인 법칙과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는 것처럼, 상상력과 가치를 포함하는 더 넓은 영역에도 근본적인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는 이러한 질문이 자신이 신을 정의하는 방식과 관련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피터슨 박사는 그렉에게 "당신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무엇이 당신을 안내한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합니다. 그렉은 논리, 기억, 추론, 감각 정보를 통해 진실을 판단한다고 답합니다. 피터슨 박사는 거짓된 것에 지배되지 않고 어떻게 진실을 분별하는지, 그리고 어떤 원칙으로부터 추론하는지 묻습니다. 피터슨 박사는 "당신의 양심이 당신을 안내한다" 는 것이 합리적인 질문인지 묻고, 그렉은 자신의 양심은 공감 능력과 이성에서 비롯된다고 정의합니다. 그는 양심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신의 감각이며, 이는 공감하는 타고난 능력과 그 능력을 키우는 것의 이점을 인식함으로써 진화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러한 공감 능력은 이성에 의해 제약을 받고 안내된다고 덧붙입니다. 그는 도로에 새끼 고양이가 있을 때 공감적으로 구하고 싶지만, 이성적으로는 차에 치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윤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예로 듭니다.

피터슨 박사는 사람들이 공감적인 반응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한 사람의 공감적 반응과 다른 사람의 공감적 반응이 다를 때 누가 옳은지를 알려줄 수 있는 매개 원칙이 있는지 묻습니다. 그렉은 그러한 상황에서는 서로 대화하고, 각자의 관점을 설명하며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고 답합니다. 그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친구와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거나 정책을 결정할 때 항상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피터슨 박사는 구약성경의 예언자 엘리야가 신을 '내면의 양심의 소리'로 정의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요나서에서도 신이 그렇게 정의된다고 덧붙입니다.

피터슨 박사는 그렉이 양심을 자신의 안내자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양심은 구약성경에서 신을 정의하는 특성 중 하나이므로, 그렉이 자신이 거부한다고 주장하는 신을 실제로는 자신 안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렉은 자신의 신 개념이 대중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의미와 관련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피터슨 박사는 대중적인 의미는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이 근본적인 것을 다루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렉이 신의 다의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현재 논쟁의 핵심과는 무관하며, 자신이 제시한 '신은 양심과 관련이 있다'는 정의가 그렉이 거부한다고 가정하는 신의 정의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명확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렉은 피터슨 박사가 '의미론적 안개' 속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피터슨 박사는 자신이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진하고 있다고 맞섭니다. 짧은 대화 끝에 둘은 인사를 나누고 대담은 마무리됩니다.

결론: 무의식 속의 신적 원형

조던 피터슨 박사의 주장은 무신론자들이 표면적으로는 신을 거부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거부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을 단순히 인격화된 존재나 초자연적인 힘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의 양심, 진리 추구의 안내자, 그리고 우주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통일성의 원리 등 다양한 심오한 의미로 재정의합니다. 그는 구약성경 속 모세의 이야기와 예언자 엘리야의 정의를 통해, 신이 본질적으로 알 수 없고 압도적이며, 인간의 내면에서 옳고 그름을 안내하는 양심의 소리로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무신론자들은 피터슨 박사가 제시하는 신의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여 대화의 맥락과 맞지 않거나, 자신이 거부하는 신의 개념과는 다르다고 반박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거부하는 것은 문자주의적이고 개입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신이며, 자신의 무지가 곧 거부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피터슨 박사는 무신론자들이 종교적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질수록,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종교적인 성향을 띠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적인 원형(archetype)을 삶의 안내자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담은 '신'이라는 단어의 다의적인 의미와 함께, 믿음과 무신론이라는 신념 체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지를 보여줍니다. 피터슨 박사는 무신론자들이 의식적으로는 신을 거부할지라도, 무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질서, 진리, 양심 등과 같이 신과 연관된 개념들을 삶의 근본 원리로 삼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궁극적으로 그는 무신론자들이 자신들이 거부하는 대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신적 원형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현재 하버드, MIT, 칼텍, 스탠포드, 프린스턴을 포함한 전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공학, 생물학, 의학을 가르치는 1,000여 명이 넘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다윈 진화론의 과학적 허구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여기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의 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지능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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