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ZAC 군단의 용맹과 희생: 갈리폴리 전투부터 토브룩 공방전까지
갈리폴리에서 토브룩까지: ANZAC 군단의 용맹과 희생
ANZAC 군단의 기원과 갈리폴리 상륙작전의 배경
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는 제1차 세계대전 중 1914년 12월에 창설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연합군입니다 [1]. ANZAC 군단은 지중해 원정군 (Mediterranean Expeditionary Force, MEF)의 일부로서, 영국 제국의 일원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습니다. 20세기 초,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새로운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었으며, 대영제국에 대한 충성심과 함께 자신들의 독립적인 역할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ANZAC 군단에게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국제 무대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1915년 초, ANZAC 군단은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에 투입됩니다. 갈리폴리 상륙작전은 영국 해군의 주도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오늘날의 이스탄불)을 점령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목표로 계획되었습니다 [2]. 그러나 이 작전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오스만 제국군은 독일의 지원을 받아 갈리폴리 반도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지형 또한 매우 험준했습니다.
1915년 4월 25일 새벽, ANZAC 군단은 아리 부르누 (Ari Burnu) 해안, 훗날 ANZAC 코브 (Anzac Cove)로 불리게 되는 작은 만에 상륙했습니다. 상륙 지점은 예상보다 북쪽으로 벗어났고, ANZAC 군단은 가파른 절벽과 좁은 해변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상륙 초기의 공격은 좌절되었고, ANZAC 군단은 좁은 지역에 갇힌 채 참호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8개월 이상 지속되었으며, ANZAC 군단은 극심한 더위, 질병, 식량 부족과 싸우면서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론 파인 (Lone Pine), 네크 (The Nek), 처눅 바이어 (Chunuk Bair) 등 주요 전투에서 ANZAC 군단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15년 12월, 연합군은 갈리폴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전략적으로는 실패였지만, ANZAC 군단에게는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ANZAC 군단은 뛰어난 용맹과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었으며, ANZAC 정신이라는 독특한 군인 정신을 확립했습니다. ANZAC 정신은 전우애, 용기, 인내, 자기 희생 등의 가치를 강조하며, 오늘날까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3]. 갈리폴리 전투는 ANZAC 군단에게 쓰라린 패배였지만, 동시에 그들의 용맹과 희생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ANZAC 정신은 이후의 전투에서도 ANZAC 군단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의 주요 전투와 ANZAC의 희생
갈리폴리 전투는 수많은 격렬한 전투로 점철되었으며, ANZAC 군단은 이 과정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1915년 4월 25일 상륙 작전 직후, ANZAC 군단은 오스만 제국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했습니다. 좁은 해변에 갇힌 ANZAC 군단은 참호를 파고 방어에 나섰지만, 지형적인 불리함과 보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상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론 파인 전투 (Battle of Lone Pine, 1915년 8월 6일 - 10일)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입니다 [4]. 이 전투는 ANZAC 군단이 오스만 제국군의 주요 참호선을 공격하기 위해 감행되었습니다.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졌으며, 양측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습니다. 론 파인 전투에서 ANZAC 군단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오스만 제국군 또한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론 파인 전투는 ANZAC 군단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드러내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네크 전투 (Battle of The Nek, 1915년 8월 7일)는 론 파인 전투 다음 날 벌어진 공격으로, ANZAC 기병 연대가 오스만 제국군의 참호선을 정면으로 돌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5]. 그러나 이 공격은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었고, 오스만 제국군은 완벽하게 방어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ANZAC 기병 연대는 기관총 세례를 받으며 단 몇 분 만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네크 전투는 잘못된 정보와 무모한 공격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입니다.
처눅 바이어 전투 (Battle of Chunuk Bair, 1915년 8월 6일 - 10일)는 ANZAC 군단이 갈리폴리 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처눅 바이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시도한 전투입니다 [6]. ANZAC 군단은 고지 정상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의 강력한 반격과 보급 부족으로 인해 결국 고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처눅 바이어 전투에서도 ANZAC 군단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고지 점령 실패는 갈리폴리 전투의 전체적인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갈리폴리 전투 기간 동안 ANZAC 군단은 총 6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중 약 8,700명이 전사했으며, 19,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7]. 사망자 중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약 8,141명, 뉴질랜드군은 약 2,779명이었습니다 [8]. 갈리폴리 전투의 높은 사상자 수는 전쟁의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ANZAC 군단의 용맹함과 희생정신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갈리폴리에서 흘린 ANZAC 군단의 피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국민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ANZAC 정신을 굳건히 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전간기 ANZAC 정신의 심화와 국가적 기억
갈리폴리 전투 이후, ANZAC 정신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갈리폴리에서의 희생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닌, 새로운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전간기 동안 ANZAC 정신은 국가 기념 행사, 문학 작품, 예술 작품 등을 통해 끊임없이 되새겨졌으며,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ANZAC 데이 (ANZAC Day, 4월 25일)는 갈리폴리 상륙작전 기념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일 중 하나입니다 [9]. ANZAC 데이는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고, ANZAC 정신을 기리는 날입니다. 매년 4월 25일 새벽, ANZAC 코브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새벽 추모식 (dawn service)이 거행됩니다. 새벽 추모식은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시작된 시간을 기념하며, 전몰장병들을 기리는 묵념, 헌화, 추모사 낭독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ANZAC 데이는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ANZAC 정신을 계승하고 국가적 단결을 다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갈리폴리 전투 참전 용사들의 귀환은 ANZAC 정신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참전 용사들은 전쟁의 경험을 통해 얻은 전우애, 용기, 인내심 등을 사회에 기여했으며, ANZAC 정신의 살아있는 증거로서 존경받았습니다. 참전 용사들은 퇴역 군인회 (Returned and Services League of Australia, RSL)와 같은 단체를 조직하여 전우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전쟁의 기억을 보존하며, 사회 봉사 활동을 펼쳤습니다 [10].
문학과 예술 또한 ANZAC 정신을 심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를 배경으로 한 소설, 시, 영화 등은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용기를 생생하게 묘사하며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특히 존 윌리엄슨 (John Williamson)의 노래 "앤드 더 밴드 플레이드 월칭 마틸다 (And the Band Played Waltzing Matilda)"는 갈리폴리 전투의 비극과 참전 용사들의 고통을 노래하며 ANZAC 정신을 대표하는 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1]. 이처럼 다양한 문화적 노력들을 통해 ANZAC 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국민 정신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토브룩 공방전과 "토브룩의 쥐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ANZAC 군단은 다시 한번 영국 제국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이번에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ANZAC 군단의 용맹이 빛을 발했습니다. 특히 1941년 리비아의 항구 도시 토브룩 (Tobruk)에서 벌어진 토브룩 공방전 (Siege of Tobruk)은 ANZAC 군단의 용맹과 투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습니다 [12].
1941년 4월, 독일 아프리카 군단 (Deutsches Afrikakorps)의 에르빈 롬멜 (Erwin Rommel) 장군이 이끄는 추축군은 토브룩을 포위했습니다. 토브룩은 지중해 연안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추축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연합군의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토브룩에는 호주 제9사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호주 제9사단은 약 14,0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단장 레슬리 모스헤드 (Leslie Morshead) 소장의 지휘 아래 토브룩 요새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토브룩 공방전은 240일 동안 지속된 장기전이었습니다.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끊임없이 토브룩을 공격했지만, 호주 제9사단은 강력한 방어로 추축군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사막의 혹독한 환경, 식량과 물 부족, 쉴 새 없는 포격과 공습 속에서도 호주군은 ANZAC 정신을 발휘하며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참호와 벙커를 파고 철조망과 지뢰를 설치하여 방어선을 강화했으며, 뛰어난 사격술과 용감한 역습으로 적을 격퇴했습니다.
토브룩 수비대는 "토브룩의 쥐들 (Rats of Tobruk)"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별명은 독일군의 선전 방송에서 유래되었는데, 독일군은 토브룩 수비대를 "쥐처럼 땅굴 속에 숨어있는 비겁한 녀석들"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호주군은 오히려 이 별명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으며, 자신들의 끈기와 투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토브룩의 쥐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연합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토브룩 공방전은 1941년 12월 영국군의 반격 작전으로 끝이 났습니다. 영국 제8군은 토브룩 포위망을 뚫고 토브룩 수비대를 구출했으며, 추축군은 토브룩에서 철수했습니다. 토브룩 공방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북아프리카 전선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토브룩에서 보여준 ANZAC 군단의 용맹과 희생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토브룩 공방전의 ANZAC의 역할과 "토브룩의 쥐들"의 유산
토브룩 공방전에서 호주 제9사단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4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토브룩 요새를 굳건히 지켜냄으로써, 추축군의 북아프리카 진격을 저지하고 연합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만약 토브룩이 함락되었다면, 추축군은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까지 진격할 수 있었을 것이며,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호주군의 방어 성공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레슬리 모스헤드 사령관의 뛰어난 리더십입니다. 모스헤드 사령관은 강력한 방어 전략을 수립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며 토브룩 수비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습니다. 둘째, 호주군의 뛰어난 전투력입니다. 갈리폴리 전투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단련된 호주군은 사막전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습니다. 셋째, 토브룩 요새의 지리적 이점입니다. 토브룩은 천연의 항구를 갖추고 있으며, 주변 지역은 험준한 사막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방어에 유리했습니다.
"토브룩의 쥐들"이라는 별명은 토브룩 수비대의 용맹과 끈기를 상징하는 불멸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이 별명은 처음에는 조롱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곧 긍정적인 의미로 바뀌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토브룩의 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는 군인들의 표상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토브룩 공방전에서 호주군은 약 842명이 전사하고, 1,99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941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13]. 총 3,779명의 사상자는 갈리폴리 전투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지만, 토브룩 공방전의 전략적 중요성과 "토브룩의 쥐들"이 남긴 유산은 ANZAC 군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토브룩에서의 승리는 ANZAC 정신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했으며, ANZAC 군단의 용맹과 희생은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결론: 갈리폴리에서 토브룩까지 이어진 ANZAC 정신
갈리폴리에서 토브룩까지, ANZAC 군단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갈리폴리에서는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지만, 용맹과 희생정신을 통해 ANZAC 정신이라는 독특한 군인 정신을 확립했습니다. 토브룩에서는 "토브룩의 쥐들"이라는 불멸의 별명과 함께 전략적 승리를 거두며 ANZAC 정신의 건재함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ANZAC 정신은 단순히 전쟁터에서의 용맹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우애, 인내, 희생, 유머 감각 등 다양한 가치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ANZAC 정신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국민들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으며, 국가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ANZAC 데이는 매년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기념하며 ANZAC 정신을 되새기는 날로,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동시에 국가적 단결을 다지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갈리폴리와 토브룩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ANZAC 군단의 용맹과 희생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전투 모두에서 ANZAC 군단은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었으며,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갈리폴리에서의 희생은 ANZAC 정신의 씨앗을 뿌렸고, 토브룩에서의 승리는 ANZAC 정신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ANZAC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미래 세대에게도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전우애를 바탕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희생정신으로 공동체에 봉사하는 ANZAC 정신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갈리폴리에서 토브룩까지 이어진 ANZAC 군단의 이야기는 용맹과 희생, 그리고 불굴의 정신이 어떻게 한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미래를 만들어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ANZAC 군단의 발자취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전쟁사에도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Carlyon, L. (2006). Gallipoli. Pan Macmillan Australia.
Fewster, K., & Basarin, V. K. (2015). Gallipoli: The Turkish Story. Viking.
Grey, J. (2008). A Military History of Austral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Hamilton, J. (2014). Gallipoli: The Fateful First Day. NewSouth Publishing.
Haythornthwaite, P. J. (2004). Gallipoli 1915: Frontal Assault on Turkey. Osprey Publishing.
Hickey, M. (2017). Gallipoli. John Murray Press.
Inglis, K. S. (1990). Anzac Day. Melbourne University Press.
Lake, M., & Reynolds, H. (2008). Drawing the Global Colour Line: White Men's Countries and the International Challenge of Racial Equal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McKernan, M. (2006). Gallipoli: A Battlefield Guide. Allen & Unwin.
Pedersen, P. A. (2015). ANZACs in the Middle East: Australian and New Zealand Soldiers in Egypt, Palestine, and Syr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Stanley, P. (2017). Bad Characters: Sex, Crime, Mutiny, Murder and the Australian Imperial Force. Pier 9 Press.
Thompson, P. (2001). Pacific Fury: How Australia and New Zealand Survived the Japanese Onslaught of World War II. Northrup Books.
Wilson, P. (2009). Tobruk 1941: The Desert Siege. Osprey Publish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