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육군 항공대 전략 폭격 임무의 역사와 진화: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략적 변화와 영향
하늘의 요새들: 미 육군 항공대(USAAF)의 전략 폭격 임무
서론: 전략 폭격의 부상과 미 육군 항공대의 탄생
20세기 초, 항공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전쟁의 양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군사적 개념, 즉 전략 폭격(Strategic Bombing)의 등장을 예고했습니다. 전략 폭격은 적국의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군사 시설뿐만 아니라 산업 기반 시설, 교통망,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의 사기까지 파괴함으로써 전쟁 수행 능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군 작전 개념입니다. 이러한 전략적 공습은 지상군의 직접적인 전투 없이도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강력한 수단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주요 강대국들 사이에서 전략 폭격의 잠재력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습니다.
미국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미 육군 항공대(United States Army Air Corps, USAAC)는 1926년에 육군 항공대의 명칭 변경을 통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며, 이후 1941년 6월 20일에 미 육군 항공군(United States Army Air Forces, USAAF)으로 재편되면서 독립적인 군종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 초기 미 육군 항공대는 전략 폭격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술 개발과 조직 편성에 주력했습니다. 특히, "폭격기가 항상 방어망을 뚫을 수 있다(The bomber will always get through)"라는 신념 하에, 중무장과 고고도 비행 능력을 갖춘 B-17 플라잉 포트리스(Flying Fortress)와 B-24 리버레이터(Liberator)와 같은 4발 중폭격기를 개발하여 전략 폭격 능력의 핵심 전력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중폭격기들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의 집약체였으며, 미 육군 항공대가 구상하는 전략 폭격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미 육군 항공대는 주간 정밀 폭격(Daylight Precision Bombing) 독트린을 핵심 전략으로 채택했습니다. 이는 폭격기가 주간에 고고도로 비행하여 적의 방공망을 회피하고, 노든 조준기(Norden bombsight)라는 첨단 장비를 사용하여 군사적 목표물을 정밀하게 타격함으로써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 수행 능력을 효과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다는 이론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노든 조준기는 당시 최고의 기술력이 집약된 비밀 병기로, 이론적으로는 고고도에서 작은 목표물까지 정확하게 폭격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간 정밀 폭격 독트린은 미 육군 항공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쟁 발발 이후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에서 실제로 적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현실은 이론과는 달랐습니다. 특히 유럽 전선에서 독일 공군의 강력한 방공망과 전투기 요격은 미 육군 항공대의 주간 정밀 폭격 작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초기 작전에서 높은 손실률을 기록하면서, 미 육군 항공대는 주간 정밀 폭격 독트린의 수정과 새로운 전략 모색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미 육군 항공대는 전략 폭격 임무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인 전략 폭격 능력을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본 보고서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미 육군 항공대가 수행한 전략 폭격 임무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고자 합니다.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의 주요 작전들을 배경, 과정, 결과 측면에서 상세히 살펴보고, 전략 폭격이 전쟁의 흐름에 미친 영향과 그 한계를 다각적으로 조명할 것입니다. 또한, 미 육군 항공대의 전략 폭격 독트린의 변화와 발전 과정을 추적하고, 기술 발전, 전술 변화, 그리고 전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전략 폭격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분석할 것입니다. 방대한 양의 통계 자료와 최신 연구 결과들을 인용하여 논지를 뒷받침하고, 독자들이 미 육군 항공대의 전략 폭격 임무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하고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초기 전략 폭격 독트린과 유럽 전선의 도전: 주간 정밀 폭격의 한계
미 육군 항공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부터 전략 폭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주간 정밀 폭격을 핵심 독트린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는 칼 스파츠(Carl Spaatz), 아이라 이커(Ira Eaker), 헨리 아놀드(Henry H. Arnold)와 같은 선구적인 공군 지도자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전략 폭격이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2]. 주간 정밀 폭격 독트린은 다음과 같은 핵심 원칙에 기반했습니다.
정밀 타격: 노든 조준기와 같은 첨단 장비를 사용하여 군사적 목표물만을 정확하게 타격함으로써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한다.
주간 작전: 주간에 시계가 양호한 조건에서 폭격함으로써 조준 정확도를 높이고, 아군 폭격기의 상호 식별을 용이하게 한다.
고고도 폭격: 고고도에서 폭격함으로써 적의 대공 포화와 전투기 요격으로부터 폭격기의 생존성을 향상시킨다.
자체 방어 능력: 중무장한 B-17, B-24 폭격기의 자체 방어 능력을 활용하여 호위 전투기 없이도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독트린은 이론적으로는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전쟁 발발 이후 유럽 전선에서 독일 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면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1942년부터 시작된 미 육군 항공대의 유럽 폭격 작전은 초기부터 높은 손실률과 낮은 폭격 정확도라는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1942년 8월 17일, B-17 폭격기 12대가 프랑스 루앙-레삭(Rouen-Les Essarts)의 철도 조차장을 공격한 것이 미 육군 항공대의 유럽 전선 첫 폭격 작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이 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지만, 이후 독일 본토 깊숙이 침투하는 작전에서 미 육군 항공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43년 8월 17일의 슈바인푸르트-레겐스부르크(Schweinfurt-Regensburg) 작전은 주간 정밀 폭격 독트린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4]. 이 작전에서 B-17 폭격기 376대는 독일의 베어링 공장과 항공기 공장을 목표로 출격했지만, 독일 공군의 집중적인 요격으로 인해 60대의 폭격기가 격추되고, 138대가 손상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격추율이 16%에 달하는 심각한 손실이었으며, 이는 미 육군 항공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노든 조준기의 성능에도 불구하고 실제 폭격 정확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악천후, 구름, 그리고 독일군의 연막 차장 등으로 인해 목표물을 정확하게 식별하고 조준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폭탄은 목표 지점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43년 10월 14일, 제2차 슈바인푸르트 작전은 더욱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5]. 이번 작전에서 B-17 폭격기 291대가 슈바인푸르트의 베어링 공장을 재차 공격했지만, 독일 공군의 더욱 강력해진 방공망에 가로막혀 77대의 폭격기가 격추되고, 121대가 손상되는 최악의 피해를 기록했습니다. 격추율은 26%를 넘어섰으며, 이는 사실상 작전 지속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러한 연이은 참패는 미 육군 항공대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주간 정밀 폭격 독트린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불가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초기 유럽 전선에서 미 육군 항공대가 겪은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독일 공군의 강력한 방공망: 독일 공군은 숙련된 전투기 조종사와 강력한 대공 포화망을 구축하여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 작전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특히, Fw 190과 Bf 109와 같은 독일 전투기들은 B-17, B-24 폭격기보다 속도와 기동성이 우수하여 요격에 효과적이었습니다.
호위 전투기의 부재: 초기 미 육군 항공대는 장거리 호위 전투기의 부재로 인해 폭격기가 독일 본토까지 깊숙이 침투하는 동안 전투기 호위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P-47 썬더볼트(Thunderbolt)와 P-38 라이트닝(Lightning)과 같은 초기 호위 전투기들은 항속 거리가 짧아 폭격기를 목표 지점까지 호위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노든 조준기의 한계: 노든 조준기는 이론적으로는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지만, 실제 작전 환경에서는 악천후, 구름, 연막 등으로 인해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독일군의 전파 방해 기술도 노든 조준기의 정확도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폭격 편대 전술의 문제점: 초기 미 육군 항공대는 폭격기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컴뱃 박스(Combat Box)라는 밀집 대형을 사용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 전투기에게 좋은 공격 목표를 제공하고, 폭격기의 기동성을 제한하는 단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미 육군 항공대는 전술과 기술, 그리고 전략적 접근 방식에 있어서 대대적인 변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특히, 장거리 호위 전투기 개발과 야간 폭격으로의 전환 등이 중요한 변화의 방향이었습니다.
전략의 전환과 기술 발전: 야간 폭격과 장거리 호위 전투기의 등장
1943년의 연이은 손실은 미 육군 항공대에게 주간 정밀 폭격 독트린의 재검토를 강요했습니다. 특히, 호위 전투기의 부재는 주간 폭격 작전의 가장 큰 취약점이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육군 항공대는 두 가지 중요한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하게 됩니다. 첫째는 야간 폭격의 도입이고, 둘째는 장거리 호위 전투기의 개발과 투입입니다.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RAF Bomber Command)는 이미 전쟁 초기부터 야간 폭격을 주력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야간 폭격은 주간 폭격에 비해 폭격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독일 공군의 전투기 요격과 대공 포화로부터 폭격기의 생존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또한, 야간에는 독일 전투기의 요격 능력이 제한되기 때문에 폭격기의 손실률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미 육군 항공대는 이러한 영국 공군의 경험을 참고하여 야간 폭격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야간 폭격 전략의 핵심은 지역 폭격(Area Bombing), 즉 목표 지역 전체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여 광범위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주간 정밀 폭격과는 달리 군사 시설과 민간 시설을 구별하지 않고, 도시 전체를 목표로 삼는 전략이었습니다. 야간 폭격은 정밀 조준이 어렵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민간인 피해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연합군은 독일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미 육군 항공대는 야간 폭격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H2X 레이더(Mickey)와 같은 새로운 항법 및 조준 장비를 개발하고, 폭격 편대 전술을 야간 작전에 맞게 조정했습니다. H2X 레이더는 지형지물을 레이더 영상으로 표시하여 야간이나 악천후 속에서도 항법과 목표물 식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비였습니다. 이를 통해 미 육군 항공대는 야간에도 독일 본토 깊숙이 침투하여 폭격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간 폭격으로의 전환만으로는 주간 폭격의 어려움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주간 정밀 폭격은 여전히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독일의 주요 산업 시설과 군사 기지를 정밀 타격하기 위해서는 주간 폭격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미 육군 항공대는 주간 폭격의 손실률을 줄이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 즉 장거리 호위 전투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P-51 머스탱(Mustang) 전투기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개발된 혁신적인 전투기였습니다 [6]. 롤스로이스 멀린(Rolls-Royce Merlin) 엔진을 장착한 P-51 머스탱은 뛰어난 고고도 성능과 긴 항속 거리를 자랑했으며, 기존의 P-47, P-38 전투기보다 월등한 성능을 발휘했습니다. P-51 머스탱은 보조 연료 탱크(drop tank)를 장착하여 폭격기를 독일 본토 깊숙이 호위할 수 있었으며, 독일 공군 전투기와의 공중전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1944년 초, P-51 머스탱 전투기가 유럽 전선에 본격적으로 투입되면서 미 육군 항공대의 주간 폭격 작전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P-51 머스탱의 호위를 받으며 B-17, B-24 폭격기들은 독일 본토 깊숙이 안전하게 침투할 수 있었고, 독일 공군의 요격 전투기에 맞서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P-51 머스탱의 등장으로 인해 독일 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기 시작했으며, 제공권은 점차 연합군에게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P-51 머스탱 외에도 P-47 썬더볼트 전투기의 항속 거리를 늘린 개량형 모델과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야간 전투기 버전 등 다양한 호위 전투기들이 개발되어 미 육군 항공대의 작전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근접 신관(Proximity Fuze)의 개발은 대공 포화의 효과를 획기적으로 높여 독일군의 방공망을 더욱 무력화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근접 신관은 목표물 근처에서 자동으로 폭발하는 신관으로, 기존의 시한 신관이나 충격 신관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피해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기술 발전과 전략 전환에 힘입어 미 육군 항공대는 1944년부터 본격적으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키기 위한 대규모 전략 폭격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44년 2월 20일부터 25일까지의 빅 위크(Big Week) 작전은 독일 공군 전투기 생산 시설을 집중적으로 파괴하여 독일 공군력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7]. 빅 위크 작전에서 미 육군 항공대는 3,800회 이상 출격하여 독일 전투기 공장을 맹렬하게 폭격했으며, 독일 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전력 약화를 면치 못했습니다.
빅 위크 작전 이후, 미 육군 항공대는 독일의 석유 시설, 수송망, 그리고 주요 산업 시설을 목표로 지속적인 전략 폭격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특히, 석유 시설 폭격은 독일군의 기동력을 약화시키고, 전쟁 수행 능력을 심각하게 저하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44년 말부터 시작된 석유 시설 폭격은 독일군의 연료 부족을 심화시켰고, 이는 전선에서의 작전 수행 능력 저하, 전투기 훈련 부족, 그리고 군수 물자 수송 차질 등 광범위한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전략 전환과 기술 발전은 미 육군 항공대가 유럽 전선에서 전략 폭격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야간 폭격과 주간 정밀 폭격, 그리고 장거리 호위 전투기의 효과적인 조합은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점차 마비시켜 나갔으며,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유럽 전선의 주요 전략 폭격 작전: 목표, 과정, 그리고 영향
미 육군 항공대는 유럽 전선에서 다양한 목표를 대상으로 전략 폭격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초기에는 독일의 산업 기반 시설, 특히 항공기 공장과 베어링 공장 등이 주요 목표였지만, 전쟁 중반 이후에는 석유 시설, 수송망, 그리고 군사 시설 등 더욱 광범위한 목표를 대상으로 폭격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유럽 전선의 주요 전략 폭격 작전들을 목표, 과정, 그리고 영향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항공기 공장 폭격: 전쟁 초기부터 미 육군 항공대는 독일 공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독일 전투기 공장을 주요 목표로 삼았습니다. 1943년 1월의 킬(Kiel)과 함부르크(Hamburg) 폭격, 1943년 8월의 레겐스부르크-슈바인푸르트 작전, 그리고 1944년 2월의 빅 위크 작전 등은 모두 독일 전투기 생산 시설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8]. 이러한 폭격 작전은 독일 전투기 생산에 일시적인 차질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독일은 곧 생산 시설을 재건하고 분산 배치하여 폭격 피해를 최소화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폭격은 독일 공군의 전투기 생산 능력을 점차적으로 약화시켰으며, 특히 빅 위크 작전은 독일 공군력 약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어링 공장 폭격: 슈바인푸르트 베어링 공장 폭격은 미 육군 항공대의 주간 정밀 폭격 독트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전입니다. 베어링은 기계 장치의 핵심 부품으로, 베어링 생산이 중단되면 독일의 기계 산업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슈바인푸르트의 베어링 공장이 주요 목표로 선정되었습니다. 1943년 8월과 10월의 두 차례에 걸친 슈바인푸르트 폭격 작전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베어링 생산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습니다. 독일은 베어링 재고를 확보하고 있었고, 생산 시설을 분산 배치하여 폭격 피해를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슈바인푸르트 폭격 작전은 주간 정밀 폭격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석유 시설 폭격: 1944년 중반부터 미 육군 항공대는 독일의 석유 시설, 특히 합성 석유 공장을 주요 목표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9]. 독일은 천연 석유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석탄을 액화하여 합성 석유를 생산하는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합성 석유는 독일군의 연료 공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석유 시설 폭격은 독일군의 기동력을 약화시키고 전쟁 수행 능력을 저하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습니다. 플로레스(Ploesti) 유전 폭격은 1943년에 루마니아의 플로레스티 유전을 목표로 수행되었지만, 큰 손실만 입고 효과는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1944년부터 시작된 독일 본토의 합성 석유 공장 폭격은 독일군의 연료 부족을 심화시켰고, 이는 전차, 항공기, 그리고 함선의 작전 수행 능력 저하로 이어졌습니다. 1944년 말에는 독일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훈련 시간 부족, 연료 부족으로 인한 전투기 출격 횟수 감소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석유 시설 폭격은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수송망 폭격: 독일의 수송망, 특히 철도와 운하를 폭격하여 군수 물자 수송과 병력 이동을 방해하는 작전도 중요한 전략 폭격 목표였습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미 육군 항공대는 프랑스 북부와 독일 서부 지역의 철도망을 집중적으로 폭격하여 독일군의 증원군 이동을 지연시키고, 보급 물자 수송을 차단했습니다 [10]. 특히, 철도 조차장, 교량, 그리고 철도 차량 기지 등을 정밀 폭격하여 독일군의 수송 능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수송망 폭격은 독일군의 작전 수행 능력을 제한하고, 연합군의 진격을 용이하게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도시 폭격: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미 육군 항공대는 독일의 주요 도시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지역 폭격을 감행했습니다. 특히, 1945년 2월의 드레스덴(Dresden) 폭격은 대표적인 사례로, 수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낸 대규모 폭격 작전이었습니다 [11]. 드레스덴 폭격은 군사적 목표보다는 도시 자체를 파괴하고 독일 국민들의 사기를 꺾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시 폭격은 군사적 효용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독일 국민들의 전쟁 의지를 약화시키고, 종전을 앞당기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고한 민간인 희생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윤리적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작전이기도 합니다.
유럽 전선에서의 미 육군 항공대 전략 폭격 작전은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고,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석유 시설 폭격과 수송망 폭격은 독일군의 기동력과 보급 능력을 저하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주간 정밀 폭격의 한계, 야간 지역 폭격의 민간인 피해, 그리고 도시 폭격의 윤리적 문제 등 전략 폭격의 그림자 또한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태평양 전선의 전략 폭격: B-29 슈퍼포트리스와 일본 본토 공습
태평양 전선에서 미 육군 항공대의 전략 폭격 임무는 유럽 전선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일본은 유럽의 독일과는 달리 산업 기반 시설이 상대적으로 취약했고, 도시 구조 또한 목조 건물이 많아 화재에 취약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특성을 고려하여 미 육군 항공대는 태평양 전선에서 B-29 슈퍼포트리스(Superfortress)라는 새로운 전략 폭격기를 투입하여 일본 본토 공습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B-29 슈퍼포트리스는 당시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전략 폭격기로, B-17, B-24보다 항속 거리, 폭탄 적재량, 그리고 고고도 성능이 월등했습니다 [12]. B-29는 최대 항속 거리 5,830km, 최대 폭탄 적재량 9톤에 달했으며, 최대 9,700m 고도까지 상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능은 B-29가 일본 본토 깊숙이 침투하여 폭격 작전을 수행하고, 일본 전투기의 요격과 대공 포화로부터 생존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태평양 전선에서 B-29 폭격 작전은 초기에는 중국 대륙의 기지에서 시작되었지만, 1944년 6월 사이판(Saipan), 티니안(Tinian), 괌(Guam) 등 마리아나 제도에 B-29 기지가 건설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13]. 마리아나 제도는 일본 본토까지의 거리가 약 2,400km로, B-29의 항속 거리에 적합한 위치였으며, 일본 본토 공습 작전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 B-29 폭격 작전은 유럽 전선과 마찬가지로 주간 정밀 폭격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기상 조건은 매우 변덕스러웠고, 고고도에서 강한 제트 기류가 불어 폭격 정확도를 떨어뜨렸습니다. 또한, 일본군의 방공망과 전투기 요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초기 주간 정밀 폭격 작전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손실만 늘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B-29 폭격 작전의 지휘관으로 부임한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장군은 전략 폭격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14]. 르메이 장군은 고고도 주간 정밀 폭격에서 저고도 야간 지역 폭격으로 전략을 변경하고, 소이탄(Incendiary Bomb)을 사용하여 일본 도시를 광범위하게 불태우는 화염 폭격(Firebombing)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3월 9일 밤, 도쿄 대공습(Bombing of Tokyo)은 화염 폭격 전략의 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