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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 슈퍼포트리스의 기술적 발전과 일본 본토 폭격의 역사적 영향력

일본 본토 폭격의 주역: B-29 슈퍼포트리스와 원자폭탄

태평양 전쟁의 격화와 일본 본토 폭격 결정

태평양 전쟁의 격화와 일본 본토 폭격 결정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의 진주만 기습 공격은 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 기습은 미국을 전쟁에 참전하게 만들었고, 초기에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역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과달카날 전투(1942년 8월 ~ 1943년 2월)를 거치면서 전세는 점차 연합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1]. 특히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 전력을 궤멸시키면서 태평양 전쟁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Parshall and Tully, 2005).

1943년부터 미국은 본격적으로 일본 본토를 압박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본토는 지리적으로 미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중국 대륙에 기지를 건설하여 폭격기를 운용하는 방안이 고려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내륙 기지에서 발진하는 폭격기는 항속 거리의 제한으로 인해 일본 본토의 핵심 지역을 타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 기지는 일본군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었습니다 (Crane, 1994).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B-29 슈퍼포트리스(Superfortress)라는 새로운 장거리 폭격기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B-29는 당시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폭격기로, 기존 폭격기에 비해 월등한 항속 거리와 폭탄 탑재량을 자랑했습니다. B-29의 개발은 일본 본토 폭격 작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1944년 초, 미국 육군 항공군(USAAF)은 제20공군(Twentieth Air Force)을 창설하고 B-29를 본격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0공군은 마리아나 제도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고, 이곳에서 B-29를 발진시켜 일본 본토 폭격 작전을 감행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리아나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약 2,400km 거리에 위치해 있어 B-29의 작전 반경 내에 있었고,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습니다 (Nalty, 1997).

1944년 6월 15일, B-29는 최초로 일본 본토 폭격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사이판에서 발진한 B-29 47대는 규슈 섬의 야하타 제철소를 폭격했지만, 폭격의 정확도는 매우 낮았고, 전과도 미미했습니다. 초기 B-29 폭격 작전은 기술적인 문제와 작전상의 미숙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고고도에서 강한 제트 기류와 잦은 기계 고장은 B-29의 작전 수행 능력을 저하시키는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Tilford, 1991).

하지만 미국은 B-29 폭격 작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B-29의 운용 노하우를 축적하고, 폭격 전술을 개선하면서 점차 일본 본토 폭격의 강도를 높여갔습니다. 1945년 3월부터는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장군의 지휘 아래 B-29는 저고도 야간 소이탄 폭격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여 일본의 주요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B-29 슈퍼포트리스의 개발과 기술적 특징

B-29 슈퍼포트리스의 개발과 기술적 특징

B-29 슈퍼포트리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이 개발한 4발 중(重)폭격기입니다. 보잉(Boeing)사에서 설계 및 제작한 B-29는 당시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항공기로, 기존 폭격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B-29의 개발은 일본 본토 폭격 작전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인 요소였습니다 (鳥養鶴雄, 2009).

B-29 개발 계획은 1939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육군 항공군은 유럽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장차 벌어질 전쟁에 대비하여 장거리 폭격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보잉, 콘솔리데이티드(Consolidated), 더글러스(Douglas), 록히드(Lockheed) 등 미국의 주요 항공기 제작사에 새로운 폭격기 개발을 의뢰했습니다. 이 경쟁에서 보잉사의 XB-29 시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어 B-29 개발이 본격화되었습니다 (Hansen, 2000).

B-29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들이 대거 적용되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가압식 객실이었습니다. B-29는 고고도에서 작전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되었는데, 고고도에서는 기압이 낮고 온도가 매우 낮아 승무원들이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가압식 객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객실 내부의 기압을 지상과 유사하게 유지시켜주는 기술이었습니다. B-29는 가압식 객실 덕분에 9,000m 이상의 고고도에서도 쾌적한 환경에서 작전 수행이 가능했습니다 (Sherry, 1995).

B-29는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여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습니다. B-29에 탑재된 엔진은 라이트 R-3350-23 와스프 메이저(Wright R-3350-23 Duplex-Cyclone) 18기통 공랭식 엔진 4기였습니다. 이 엔진은 각각 2,200마력의 출력을 낼 수 있었으며, B-29는 이 엔진 덕분에 최대 속도 574km/h, 항속 거리 6,430km (최대 항속 거리 약 9,000km)에 달하는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B-29는 최대 9톤에 달하는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습니다 (Ethell, 1996).

B-29는 방어 무장도 강화되었습니다. B-29에는 12.7mm 기관총 12정20mm 기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으며, 원격 조종 포탑 시스템을 통해 사각지대 없이 적 전투기에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B-29의 방어력은 당시 전투기들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Freeman, 1990).

B-29는 개발 과정에서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엔진 과열과 화재는 B-29의 초기 운용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끊임없는 기술 개량을 통해 B-29의 신뢰성을 높여갔고, 전쟁 후반기에는 안정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B-29는 총 3,970여대가 생산되었으며, 태평양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Craven and Cate, 1983).

B-29의 제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2]:

  • 전장: 30.2m

  • 전폭: 43.0m

  • 전고: 8.5m

  • 자체 중량: 33.8톤

  • 최대 이륙 중량: 62.1톤

  • 엔진: 라이트 R-3350-23 와스프 메이저 18기통 공랭식 엔진 4기 (2,200마력 x 4)

  • 최대 속도: 574km/h

  • 순항 속도: 450km/h

  • 항속 거리: 6,430km (최대 항속 거리 약 9,000km)

  • 상승 한도: 10,000m

  • 폭탄 탑재량: 최대 9톤

  • 무장: 12.7mm 기관총 12정, 20mm 기관포 1문

B-29는 뛰어난 성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일본 본토 폭격 작전에서 B-29는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으며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B-29는 단순한 폭격기를 넘어 미국의 기술력과 생산력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Dean, 2014).

일본 본토 소이탄 폭격 작전의 참상

일본 본토 소이탄 폭격 작전의 참상

1945년 3월부터 B-29는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지휘 아래 저고도 야간 소이탄 폭격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여 일본 본토 주요 도시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의 고고도 주간 폭격은 명중률이 낮고 효과가 미미했기 때문에, 르메이 장군은 폭격 전술의 전환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일본 도시의 건축 구조가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소이탄을 사용하여 도시 전체를 불태우는 전략을 구상했습니다 (藤田覚, 2005).

1945년 3월 9일 밤, 도쿄 대공습은 새로운 폭격 전술의 위력을 전 세계에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300여대의 B-29는 도쿄 시내에 M-69 소이탄을 쏟아부었습니다. M-69 소이탄은 네이팜탄의 일종으로, 투하되면 수많은 작은 화염 덩어리로 분산되어 넓은 지역을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드는 무서운 무기였습니다. 당시 도쿄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소이탄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번져나갔습니다 (Rhodes, 1993).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도쿄 시내의 약 40%가 잿더미로 변했고, 약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사망자 대부분은 불에 타 죽거나 연기에 질식사했으며, 일부는 화재를 피하려다 강물에 뛰어들어 익사하기도 했습니다. 도쿄 대공습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단일 폭격 작전으로는 최대 규모의 인명 피해를 낸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국민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으며, 종전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Frank, 1999).

도쿄 대공습 이후, B-29의 소이탄 폭격은 일본 전역의 주요 도시로 확대되었습니다. 나고야, 오사카, 고베, 요코하마 등 일본의 주요 공업 도시들이 B-29의 융단 폭격에 의해 차례로 잿더미로 변해갔습니다. 미군은 폭격 목표를 군사 시설뿐만 아니라, 민간인 거주 지역까지 포함시켜 일본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 데 주력했습니다. 1945년 5월까지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대부분 초토화되었고, 일본의 산업 생산력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Holloway, 1994).

B-29 소이탄 폭격의 특징은 무차별적인 파괴력이었습니다. 소이탄은 넓은 지역을 한꺼번에 불태우기 때문에, 군사 시설과 민간인 거주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파괴했습니다. 특히 일본 도시의 밀집된 목조 건물 구조는 소이탄 폭격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B-29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집과 재산을 잃고 목숨을 잃었으며, 일본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Davis, 2006).

소이탄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단순히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폭격으로 인해 도시 기능이 마비되고, 식량과 생필품 공급이 끊기면서 일본 국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연일 계속되는 폭격은 일본 국민들의 정신력을 갉아먹고 전쟁에 대한 의지를 꺾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B-29 소이탄 폭격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Walker, 2005).

하지만 B-29 소이탄 폭격은 윤리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B-29 폭격이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전략 폭격 교리 자체가 민간인 지역에 대한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논란은 더욱 커졌습니다 (Grayling, 2006).

원자폭탄 투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

원자폭탄 투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

1945년 7월,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트리니티 실험으로 명명된 이 실험은 원자폭탄의 엄청난 파괴력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원자폭탄을 사용하여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는 방안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康熙奉, 2003).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투하했습니다. 리틀 보이는 우라늄-235를 이용한 핵분열탄으로, TNT 13~18킬로톤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폭탄은 히로시마 시 중심부 상공 600m 지점에서 폭발했고, 엄청난 열선과 폭풍이 도시 전체를 휩쓸었습니다 (Wellerstein, 2006).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해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약 7만 명이 즉사했습니다. 폭발 당시 열선에 노출된 사람들은 피부가 벗겨지고 몸이 타들어갔으며, 폭풍에 날아가 건물 잔해에 깔리거나 파편에 맞아 죽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폭발 후에도 방사능 낙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폭되었고, 수년 동안 암, 백혈병 등 방사능 후유증에 시달리다 사망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한 총 사망자 수는 약 14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Lifton, 1987).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8월 9일, 다시 한번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두 번째 원폭 투하 목표는 나가사키였습니다. 8월 9일 오전 11시 2분, B-29 폭격기 박스카(Bockscar)는 나가사키 상공에 원자폭탄 팻 맨(Fat Man)을 투하했습니다. 팻 맨은 플루토늄-239를 이용한 핵분열탄으로, TNT 21킬로톤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팻 맨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보다 폭발력이 더 강했지만, 나가사키는 지형적인 특성상 피해 규모가 히로시마보다는 적었습니다 (Rezelman, Stoff, and Mahoney, 1999).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약 4만 명이 즉사했고, 총 사망자 수는 약 7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나가사키 역시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폭발 직후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방사능 낙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습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일본 정부에게 항복을 결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織田和雄, 2005).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실전에서 핵무기가 사용된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원자폭탄의 엄청난 파괴력은 전 세계에 핵무기의 공포를 각인시켰고, 핵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원폭 투하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종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핵무기의 윤리적 문제와 핵무기 경쟁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Alperovitz, 1995).

일본의 항복과 폭격의 역사적 평가

일본의 항복과 폭격의 역사적 평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항복 조칙을 발표했고, 이로써 태평양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일본의 항복은 제2차 세계 대전 전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宮里政玄, 2005).

일본의 항복에는 B-29 폭격, 특히 소이탄 폭격과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B-29 폭격은 일본의 주요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고 산업 기반을 붕괴시켰으며, 국민들의 전쟁 의지를 꺾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 지도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항복을 결심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폭격은 일본에게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Sherwin, 2003).

하지만 일본 본토 폭격, 특히 소이탄 폭격과 원자폭탄 투하는 윤리적인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무차별적인 소이탄 폭격과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과도한 무력 사용이었으며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원자폭탄 투하는 전쟁의 윤리, 민간인 보호, 핵무기의 위험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깊이 있는 논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Selden and Selden, 2004).

일본 본토 폭격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전후 세계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B-29 슈퍼포트리스와 원자폭탄은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기술력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전후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원자폭탄의 등장은 핵 시대의 개막을 알리며, 국제 정치와 안보 환경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일본 본토 폭격은 전쟁의 참혹함과 함께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Hogan, 1996).

폭격의 윤리적 논쟁과 후대의 영향

폭격의 윤리적 논쟁과 후대의 영향

일본 본토 폭격, 특히 소이탄 폭격과 원자폭탄 투하는 전쟁의 윤리, 민간인 보호, 그리고 핵무기의 사용이라는 심각한 윤리적 딜레마를 제기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은 전체주의 국가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일본 본토 폭격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전쟁의 목적과 수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희생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Nagl, 2005).

소이탄 폭격은 전략적으로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무차별적인 파괴력으로 인해 민간인 거주 지역까지 초토화시켰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습니다. 특히 1945년 3월 9일 도쿄 대공습은 단일 폭격 작전으로는 최대 규모의 인명 피해를 낸 사건으로, 전쟁 범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당시 미군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민간인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충분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Piehler, 1995).

원자폭탄 투하는 더욱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원자폭탄은 소이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며, 투하 당시뿐만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고통을 야기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행위로, 국제법 위반 논란과 함께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는 측에서는 일본의 완강한 저항과 막대한 미군 희생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원폭 투하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 그리고 원폭 투하가 정말로 일본의 항복을 결정적으로 이끌어냈는지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Bernstein, 2007).

일본 본토 폭격은 전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원자폭탄의 등장은 핵무기 경쟁 시대를 열었고, 냉전 시대 동안 핵 억지 전략은 국제 질서 유지의 핵심 요소가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 본토 폭격은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과거에는 군인 중심의 전쟁이었지만, 일본 본토 폭격 이후 민간인도 전쟁의 주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습니다. 현대 전쟁에서는 민간인 보호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으며, 국제법과 인도주의적 개입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Orend, 2005).

일본 본토 폭격은 과거의 역사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전쟁의 참혹함, 무력 사용의 윤리적 문제, 그리고 핵무기의 위험성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일본 본토 폭격의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Dower, 1986).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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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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