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의 명곡 "Blue Suede Shoes" 탄생 비화와 칼 퍼킨스의 로커빌리 유산
💋 칼 퍼킨스의 "Blue Suede Shoes" 이야기: 조니 캐시의 영감을 받고 엘비스 프레슬리에 의해 불멸의 명곡이 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대표곡 중 하나인 "Blue Suede Shoes"는 1956년 발매되자마자 미국에서만 50만 장 이상 판매되며 그의 데뷔 앨범 오프닝 트랙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이 곡은 사실 8개월 전 Sun Records의 샘 필립스가 프로듀싱한 칼 퍼킨스의 작품이었습니다.
퍼킨스 버전도 결코 무명이 아니었습니다.
컨트리 아티스트 최초로 R&B 차트 3위 기록,
하루 2만 장 판매 돌파 ,
발매 4개월 만에 100만 장 판매라는 기염
그런데 어떻게 이 곡은 "로큰롤의 왕" 엘비스의 상징이 되고,
작곡가 퍼킨스는 로커빌리 매니아와 어떤 4인조 밴드(비틀즈)만 아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미시시피 주 애머리까지, 런던을 거쳐 전 세계로 퍼진 로큰롤 클래식의 탄생 비화와
로커빌리 전설 칼 퍼킨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엘비스 프레슬리의 데뷔 앨범과 "Blue Suede Shoes"의 이야기
엘비스 프레슬리의 데뷔 앨범의 오프닝 트랙은 사실 그의 곡이 아니었습니다. 이 곡은 칼 퍼킨스(Carl Perkins)가 8개월 먼저 작곡하고 발표한 "Blue Suede Shoes"였죠.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Well, it's one for the money, two for the show..."
당시 퍼킨스의 버전은 무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컨트리 아티스트 최초로 R&B 차트 3위에 오른 곡이었고, 하루에 약 2만 장이 팔리며 발매 4개월 만에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
🤸♀️ 엘비스와 칼 퍼킨스, Sun Records에서의 시작
1954년, 엘비스 프레슬리와 칼 퍼킨스는 모두 Sun Records와 계약했습니다. 퍼킨스는 두 번째 오디션에서 계약을 따냈지만, 엘비스는 자비로 스튜디오 시간을 내며 데모를 녹음한 뒤 기회를 얻었습니다. 두 아티스트는 모두 로커빌리(Rockabilly) 스타일을 좋아했지만, Sun Records의 오너 샘 필립스(Sam Phillips)는 비슷한 스타일의 아티스트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퍼킨스에게는 컨트리 음악을, 엘비스에게는 로커빌리를 맡기도록 했죠.
🤸♀️ 엘비스의 실패와 RCA로의 이적
엘비스의 Sun Records 시절 싱글 5개는 모두 차트 진입에 실패했습니다. 샘 필립스는 엘비스의 잠재력을 믿었지만, 1955년 11월 4만 달러(현재 약 35만 달러)에 그의 계약을 RCA 빅터에 매각했습니다. 이 거래는 "톰 파커 대령"으로 알려진 네덜란드 출신의 앤드리어스 판 칼크(Andreas van Kuijk)가 중개했는데, 그는 본명을 숨기고 미국에서 활동한 인물이었습니다.
🤸♀️ 칼 퍼킨스의 "Blue Suede Shoes" 탄생
엘비스가 Sun Records를 떠나자, 퍼킨스는 원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Honey Don’t"를 먼저 녹음했고, 이어서 "Blue Suede Shoes"를 만들었죠. 이 곡의 영감은 조니 캐시(Johnny Cash)에게서 왔습니다.
조니 캐시는 군대 시절, 군화를 "Blue Suede Shoes"라고 부르던 친구를 떠올리며 퍼킨스에게 이 제목을 권했습니다. 퍼킨스는 한 콘서트에서 춤추던 커플이 "내 스웨이드 신발 밟지 마!"라고 다투는 걸 보고 곡을 완성했죠. 그는 종이 봉지에 가사를 적으며 순식간에 곡을 써냈습니다.
🤸♀️ 엘비스 vs. 칼 퍼킨스: 두 버전의 경쟁
1955년 12월, 엘비스는 퍼킨스, 조니 캐시와 함께 공연했지만, 관객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퍼킨스는 "엘비스가 이런 반응을 처음 겪는다니 안타깝다"며 공연을 그만뒀죠.
1956년 1월, 퍼킨스는 "Blue Suede Shoes"를 정식 녹음했고, 곧 지역적 히트를 쳤습니다. 하지만 RCA는 엘비스에게 같은 곡을 커버하도록 지시했죠. 엘비스는 퍼킨스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버전 발매를 미뤘지만, 라이브에서는 이 곡을 불렀습니다. 결국 퍼킨스 버전은 차트 2위, 엘비스 버전은 20위에 머물렀습니다.
🤸♀️ 퍼킨스의 불운과 엘비스의 부상
1956년 3월, 퍼킨스는 TV 출연을 위해 뉴욕으로 가던 중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운전자는 사망했고, 퍼킨스는 두개골 골절과 심한 부상을 입었죠. 엘비스는 그에게 "빨리 나으라"는 전보를 보냈지만, 병원에서의 회복 기간 동안 엘비스가 TV에서 "Blue Suede Shoes"를 부르는 걸 보며 "이제 내 기회는 끝났다"고 느꼈습니다.
퍼킨스는 이후 Perry Como Show에 출연했지만, 형제의 부상과 엘비스의 급성장으로 인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비스는 할리우드 같은 매력을 가졌지만, 나는 외모에서 밀렸다"고 토로하기도 했죠.
🤸♀️ 비틀즈와의 만남, 그리고 유산
1964년, 퍼킨스는 영국 투어 중 비틀즈를 만났습니다. 비틀즈는 그를 존경하며 "Honey Don’t"를 커버했고, 폴 매카트니는 "칼 퍼킨스 없었다면 비틀즈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퍼킨스는 "영국에서 내 노래를 부르는 걸 보며 다시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죠.
결국 "Blue Suede Shoes"는 엘비스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되었지만, 이 곡의 원작자인 칼 퍼킨스의 이름은 음악사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