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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페르시아 전쟁은 작은 영웅들이 거대한 제국에 맞선 전투였다.
  •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승리하며 서구 문명의 기초를 다졌다.
  • 그리스인들의 끊임없는 새로움 추구가 전쟁 이후 큰 문화적, 정신적 변화를 가져왔다.

1만 vs 7만,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 전쟁, 기적의 역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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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거대한 제국에 맞선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

기원전 550년에서 500년 사이, 세계사에는 매우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 산악 지역에는 예전부터 용맹한 산악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빛과 태양을 숭배하며, 빛은 어둠과 끊임없이 싸우는 선한 힘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민족이 바로 페르시아인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오랫동안 아시리아와 바벨로니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키루스라는 지혜롭고 용맹한 왕이 나타나 페르시아인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키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바벨론 평원으로 진격했고, 바벨로니아인들을 격파했습니다. 키루스 왕은 승리 후 광대한 왕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가장 먼저 바벨로니아의 포로로 잡혀 있던 모든 민족을 풀어주었는데, 이때 유대인들도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기원전 538년에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키루스 대왕은 광대한 왕국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는 이집트 정벌에 나섰지만 이집트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결국 이집트를 정복하여 파라오를 폐위시켰습니다. 이로써 약 3천 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이집트 왕국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소수 민족이었던 페르시아인들은 당시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아직 그리스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스와의 전쟁은 캄비세스 왕이 죽고 다리우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다리우스 대왕은 페르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데, 그는 이집트에서 인도 국경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며 제국 곳곳에 자신의 통치력이 미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도로를 건설하여 제국의 모든 지역에 칙령을 전달될 수 있도록 했고, 총독마저도 왕의 눈과 귀라고 불리는 밀정들을 시켜 감시했습니다.

페르시아의 1차 침공과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

다리우스는 이오니아인의 식민 도시가 있는 소아시아까지 제국을 확장했지만,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 거주민들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들이었고, 자신들의 도시를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이민족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고, 페르시아 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 또한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결국 그리스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 관리들을 쫓아냈고,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인들은 식민지 주민들을 지원하며 함선까지 보내주었습니다.

왕 중의 왕이라 불리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작은 종족인 그리스가 자신에게 대항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소아시아 이오니아 도시들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다리우스는 특히 반란에 가담한 아테네를 응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아테네를 파괴하고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지만, 불행히도 페르시아 함대는 아토스 산 근처에서 폭풍을 만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페르시아의 1차 침공의 실패였습니다.

1차 침공의 실패에 격분한 다리우스는 노예에게 매일 식사 때마다 "아테네인들을 잊지 마소서"라고 외치게 할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함대를 정비하여 아르타페르네스에게 맡겨 아테네로 보냈습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에게 해를 건너면서 수많은 섬들을 정복하고 여러 도시들을 파괴하며 진군했고, 마침내 아테네에서 가까운 마라톤 해변에 상륙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의 규모는 7만 명에 달했지만, 아테네군은 고작 1만 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전력상황만 놓고 보면 아테네의 패배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 군에는 밀티아데스라는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사령관이 있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과거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의 전투 방식을 잘 알고 있었고, 아테네 시민들 또한 이번 전쟁에 자신들의 자유와 생존, 가족들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을Defensive Formation 밀집대형으로 편성하여 페르시아군을 기습 공격했고,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황한 페르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습니다. 살아남은 페르시아군은 황급히 배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막강한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친 승리에 도취되었겠지만, 밀티아데스는 용맹함과 더불어 뛰어난 통찰력까지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함대가 단순히 도망친 것이 아니라, 병력이 비어 있는 아테네로 곧바로 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해로가 육로보다 멀었기 때문에, 밀티아데스는 전령에게 전속력으로 아테네로 달려가 페르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알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전령은 42.195km를 숨 가쁘게 달려 아테네에 도착하여 소식을 전한 직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라톤 경주는 바로 이 전령의 투혼을 기리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승리한 아테네 군대를 이끌고 서둘러 아테네로 귀환했고, 아테네 항구에 도착했을 때, 수평선 너머로 페르시아 함대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테네에는 군대가 재정비되어 있었고, 페르시아군은 예상치 못한 아테네군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자, 다시 싸울 의지를 잃고 고국으로 퇴각했습니다. 이로써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전체가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 전투가 바로 기원전 490년의 마라톤 전투입니다.

페르시아의 2차 침공과 테르모필레,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에서의 패배 소식을 접한 다리우스 대왕은 분노했지만, 제국 내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곧바로 복수를 감행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리우스는 죽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왕위를 계승하여 그리스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보다 더 호전적이고 지배욕이 강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민족, 즉 이집트인,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까지 동원하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군을 조직했습니다.

페르시아 대군은 1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고, 크세르크세스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오늘날의 이스탄불 해협)에 이르러 배를 연결하여 부교를 만들고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강한 폭풍이 불어 부교가 파괴되자, 크세르크세스는 분노하여 바다를 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페르시아 대군은 육군과 해군으로 나뉘어 그리스로 진격했고, 육군은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과 동맹군에 의해 저지당했습니다.

영화 '300'으로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군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요구했지만, 레오니다스는 "직접 와서 가져가라"고 응수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우리의 화살이 너무 많아 햇빛도 가릴 정도다"라고 위협했고, 스파르타군은 "그렇다면 그늘에서 싸울 수 있겠군"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스파르타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그리스군의 배신으로 페르시아군이 우회로를 찾아 협곡을 포위하면서 결국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스파르타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나그네여, 가서 스파르타인들에게 전해주시오. 조국의 법을 따르다 우리는 이곳에 잠들다."

아테네인들은 마라톤 전투의 승리 이후에도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해왔습니다. 특히 테미스토클레스라는 뛰어난 지도자는 페르시아에 맞서기 위해서는 강력한 해군력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고, 그의 주장에 따라 아테네는 해군력을 강화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이 아테네에 진격했을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시키고 도시를 비웠습니다. 페르시아군은 텅 빈 아테네를 점령하고 불태웠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살라미스 섬에서 안전하게 피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해군이 살라미스 섬 근처로 진격해오자, 그리스 동맹군은 두려움에 휩싸여 퇴각하려 했습니다. 이때 테미스토클레스는 뛰어난 지략과 결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에게 비밀 전령을 보내어 "그리스 함대가 도망치려 하니, 지금 공격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계략에 속아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살라미스 해협으로 진격했지만, 좁은 해협에서 페르시아 해군은 기동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아테네 해군은 뛰어난 전술과 용맹함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했습니다. 이것이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입니다.

그리스의 승리와 서구 문명의 기원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한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로 퇴각했고, 페르시아 육군 역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했습니다. 이후 페르시아는 다시는 그리스를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고, 이는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페르시아인들이 그리스인보다 열등하거나 어리석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인, 특히 아테네인들에게는 남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서아시아의 강대국들은 전통과 권위에 얽매여 변화를 두려워했지만, 그리스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실험하며, 기존의 제도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이었던 밀티아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조차도 아테네 시민들의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찬양과 존경을 받다가도 금방 비난과 추방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아테네인들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성격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100년 동안 작은 도시 국가 아테네에서 동방의 대제국들이 천년 동안 이룩한 것보다 더 큰 문화적, 정신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이 생각하고, 그리고 쓰고, 실험하고, 광장에서 토론했던 모든 것들이 오늘날까지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페르시아가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나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의 승리는 서구 문명의 탄생과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 유산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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