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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취준생 필독! 10년 후 연봉 2배 올리는 몸젠 로마사 통찰 5가지 비밀

요약
  • 성공한 군사 지도자도 정치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 마리우스와 사투르니누스의 정치적 협력과 몰락 과정을 탐구한다.
  • 로마 공화정의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불안정이 로마 제정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교양이란 무엇인가? 몸젠의 로마사 분석을 통해 배우는 통찰

성공한 분야의 전문가가 다른 분야에서도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특별한 경우도 존재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라도 다른 분야에서는 한계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로마를 위기에서 구했던 마리우스나 고려 말 외구의 침입을 막았던 이성계, 최영 장군 역시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최영 장군은 결국 이성계의 칼날 아래 무릎을 꿇었고,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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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가 몸젠은 마리우스를 '상식을 경멸하고, 새로운 시대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 대처할 힘이 부족했으며, 옳지 않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일에 공포를 느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군사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마리우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마리우스는 게르만족과의 승리를 통해 로마 최고의 영웅이 되었지만, 정치적인 역량은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사투르니누스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지만, 결국 마리우스는 정치적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기사 계급 출신이었지만, 마리우스보다 더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군사적 업적보다는 행정관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기원전 104년 안찰관에 당선된 사투르니누스는 국가 물자를 공급하는 중요한 직무를 맡게 되었고, 화려한 검투 경기를 주최하여 로마 시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안찰관은 정치 경력을 쌓는 데 매우 유리한 자리였지만, 사투르니누스는 오스티아 항구의 공물 수송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는지 직무 해제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빵 가격 상승의 책임을 물어 해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곡물 가격 상승의 원인을 안찰관 개인의 책임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게 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직무 해제 이후 사투르니누스는 반 원로원적인 행보를 본격화하며 정치적 야심을 드러냅니다. 이듬해 호민관 선거에 당선된 그는 곧바로 반 원로원 법안을 제출합니다. 당시 게르만 전쟁에서 패배한 원로원 의원들을 로마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추방하려 했고, 법안에 반대하던 메텔루스에게 사임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강경한 행보는 사투르니누스의 반 원로원적 성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99년, 마리우스는 게르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식을 거행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전쟁 영웅 마리우스에게는 퇴역 장병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퇴직금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에게 접근하여 퇴역병 퇴직금 지급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제안합니다. 사투르니누스는 그라쿠스 형제가 주장했던 농지법과 공물법을 민회에서 통과시키는 등 원로원을 무시하는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그라쿠스 형제 역시 법 절차를 따랐지만, 원로원과의 합의를 중시하는 전통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사투르니누스도 이러한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적 인기를 가진 마리우스의 지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리우스와 사투르니누스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협력 관계를 구축하게 됩니다. 사투르니누스는 호민관의 지위를 이용하여 퇴역병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고자 했고, 마리우스는 이를 지지했습니다. 또한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정적인 메텔루스를 추방하려는 시도를 했고, 이는 마리우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마리우스의 지지 덕분에 메텔루스는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사투르니누스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점차 무리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몰락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사투르니누스는 호민관 직위를 연임하여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 했고, 자신의 지지자를 집정관 후보로 내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집정관 후보자의 자격에 문제가 있었고, 심지어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은 경쟁 후보를 살해하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이는 사투르니누스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이 되었고, 원로원은 이를 빌미로 원로원 최종 공고를 발동합니다. 원로원 최종 공고는 자문 기관인 원로원이 정책 결정 기관처럼 권한을 행사하는 월권 행위였지만,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마리우스는 이를 묵인하고 사투르니누스와 지지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마리우스의 배신에 사투르니누스는 저항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신전에 감금됩니다. 하지만 원로원 지지자들은 신전 지붕에 올라가 기와와 돌을 던져 사투르니누스와 지지자들을 모두 살해합니다. 마리우스는 정치적 감각 부족으로 인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몰락하게 되었으며, 메텔루스는 다시 로마로 복귀합니다. 몸젠은 이 사건을 통해 마리우스가 정치적 감각이 부족했다고 평가합니다. 만약 마리우스가 원로원 최종 공고에 맞서 사투르니누스를 보호했다면, 로마 정치 지형은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대신 원로원의 뜻을 따랐고, 이는 그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마리우스가 정치적 감각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권력 남용을 자제하려 했던 것인지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건 이후 마리우스는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투르니누스 사건은 마리우스에게 오른팔과 같은 존재를 잃게 만들었고, 그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고려 말 공양왕이 정몽주를 잃고 이성계에게 옥쇄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유사하게, 마리우스 역시 사투르니누스를 잃은 후 정치적 몰락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투르니누스 사건 이후, 승리한 원로원은 공물법을 유지하며 민심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사회 불안정을 해소하고 원로원 중심의 공화 체제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원로원은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했던 식민지 개발 정책은 중단합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식민지 정책은 단순히 빈민 구제책이 아니라, 황무지를 개간하고 생산성을 높여 로마 사회 전체의 번영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식민지를 통해 자영농을 육성하고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원로원이 식민지 개발 정책에 반대한 이유는, 그라쿠스 형제의 지지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클리엔테스-파트로누스 관계, 즉 후원자와 피후원자 관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원로원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주력했고, 그라쿠스 형제의 식민지 정책이 성공할 경우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만약 식민지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로마 빈민들이 자영농으로 성공적으로 정착한다면, 이들은 그라쿠스 형제에게 투표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만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회적 인정과 자존감 역시 중요한 가치입니다. 전쟁 시기에는 군 복무를 통해 자존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마리우스의 게르만족 격퇴 이후 로마는 8년간의 평화기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고 사회적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결국 로마 공화정의 붕괴와 제정 로마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 사회 역시 양극화 심화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인해 트럼프와 바이든으로 대표되는 포퓰리즘 정치 세력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역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몸젠이 '천재'라고 칭했던 카이사르는 사투르니누스가 살해된 해에 태어났고, 40년 후 로마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습니다. 카이사르의 등장은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 로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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