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역사 입문 필독! 790년 주나라, 5가지 충격 반전
진시황 통일 이전 중국 고대사: 주나라 심층 해부
진시황의 통일 이전 중국 고대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046년까지는 하나라와 상나라가 존재했고, 이후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는 주나라가 존속했습니다. 따라서 진시황 통일 이전의 중국 고대사는 하상주 시대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시대를 구분해 보면, 하나라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600년까지 약 400년간,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 약 600년간 이어졌습니다.
상나라는 후대에 은나라라고도 불렸으며,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폭정으로 인해 주변 소국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주나라의 주왕이 아닌 은나라 시대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주왕이었다는 것입니다. 서쪽 변경에 위치했던 주나라의 무왕을 중심으로 주변 소국들이 반란을 준비했고, 결국 무왕을 중심으로 한 반란 세력이 주왕을 물리치면서 무왕은 호경을 수도로 하여 주나라를 건립하게 됩니다. 호경은 현재의 장안 지역에 해당합니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771년, 서쪽의 견융족이 주나라를 침략하면서 주나라는 수도 호경을 버리고 동쪽으로 천도하게 되는데, 이때 옮겨간 곳이 바로 낙읍, 현재의 낙양입니다. 견융족의 침입 이전, 즉 천도 이전 시대를 서주 시대라고 부르며, 낙읍으로 천도한 이후부터 주나라 멸망까지의 시기를 동주 시대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이 동주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도 부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주 시대에 대한 선행 학습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이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과 무왕의 다툼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나라 주왕부터 시작하여 서주를 거쳐 동주로 이어지는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춘추전국시대를 공부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주나라의 건국과 봉건 제도
위키백과에 따르면, 주나라는 상나라를 계승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나라로, 무려 790년간 왕조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11세기 중엽, 서쪽 위수 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장한 주나라는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의 천자로서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원은 좁게는 옛 조나라 지역, 현재의 중국 중부 지방을 의미하며, 넓게는 중국 전역을 포괄하는 역사적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황하가 동쪽으로 흐르는 가운데, 황하 중류 지역이 지리적으로 중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원은 하상주 시대를 비롯한 고대 중국 역사의 중심지였습니다. 상나라를 이은 주나라는 중원이 아닌 상나라의 서쪽 변방에서 발흥한 국가입니다. 따라서 주나라는 서쪽과 서북쪽 유목 세력의 문화와 동쪽 중원의 문화를 모두 받아들인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역사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중원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며,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화북 또는 하북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용어 사용에도 변화가 생긴 결과입니다.
주나라는 원래 상나라의 서부 제후국으로, 오르도스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약탈을 피해 상나라의 서쪽인 기산에 정착했습니다. 주문왕 시기에 이르러 구글로서 주나라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기산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섬서성) 바오지시에 위치하며, 주나라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오장원 또한 이곳에 위치해 있는데, 오장원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죽은 장소로 유명합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이 미녀 달기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주지육림을 즐기는 등 폭정을 일삼자, 주나라 내부에서는 상나라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전쟁이 발발했고, 주나라 문왕의 아들 무왕은 4만 5천여 명의 군대와 300여 대의 전차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목야 전투에서 상나라 주왕을 격파하고 중국 전역을 차지했습니다.
목야 전투는 은의 제신(주왕)과 주나라 무왕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주나라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약 600년간 이어진 은왕조(상왕조)는 멸망하고 주왕조가 중원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황하가 흐르는 지역에서 기산은 위수와 접해 있으며, 장안을 지나 동관에 이릅니다. 동관은 위수와 황하가 만나는 지점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낙양과 장안을 잇는 주요 길목이었기 때문에 여러 역사적 사건에 자주 등장합니다. 동관을 지나면 낙양이 위치하고, 맹진을 거쳐 목야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 목야에서 주나라는 상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주나라가 중국 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지만, 당시 교통과 통신 기술이 미비했기 때문에 넓은 영토를 직접 통치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주나라는 봉건제라는 통치 시스템을 선택하게 됩니다. 봉건제는 봉토 건국의 줄임말로, 왕이 신하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고 다스리게 하는 제도입니다. 주나라는 하나라 잔존 세력에게 땅을 주고, 친족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연, 노, 제나라와 같은 제후국들을 세웠습니다.
봉건제 하에서 왕은 친족인 제후에게 토지와 백성을 하사하고, 제후는 왕에게 곡물과 군사력을 바치는 의무를 지게 됩니다. 또한 제후는 하사받은 땅의 일부를 다시 친척에게 나누어 주고 경, 대부, 사 등의 작위를 주어 그 지역의 농민을 통치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주나라 왕실의 왕과 제후는 단순히 군신 관계뿐만 아니라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였습니다. 왕은 종가가 되고, 제후는 분가가 되는 종법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종법 관계 하의 봉건제를 통해 왕과 제후 사이에 수직적인 신분과 서열이 자연스럽게 정해졌습니다.
이러한 신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묵시적인 규범이 바로 예입니다. 예의 확립과 함께 은나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샤머니즘, 토테미즘적인 제사 대신, 예를 갖추어 선왕과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질서정연한 제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를 통해 신분에 따른 지위, 규모, 의복, 장식, 음식 등이 규정되었습니다. 주나라 시기에 형성된 중국적 생활 방식은 이후 대부분의 중국 왕조 국가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주나라 시대에는 천명 사상이 탄생했습니다. 천명은 하늘의 명령이라는 뜻으로, 천자는 천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왕을 의미합니다. 천자가 다스리는 땅은 천하라고 불렸습니다. 천자 개념은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유교적 왕권 유지를 위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천명은 원래 하나라에 있었지만, 하나라 걸왕의 폭정으로 인해 상나라 탕왕에게 넘어갔고, 다시 탕왕의 후손들이 천명을 잃어 주왕실로 옮겨왔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왕실이 백성의 지지를 잃으면 천명이 바뀔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자는 덕을 쌓고 백성을 위한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는 주나라 천명사상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서양 봉건제와 주나라 봉건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서양 봉건제는 계약에 기반한 반면, 주나라 봉건제는 혈연에 기반한다는 점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계약에 기반한 봉건제가 혈연 봉건제보다 더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혈연관계는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나라 봉건제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연대감이 약해졌고, 이민족 침입 시 제후들이 왕을 돕지 않는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주 멸망과 동주 시대의 개막
기원전 771년, 주나라 유왕은 서쪽 견융족의 침입을 받았을 때 제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를 돕기 위해 온 제후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유왕은 죽임을 당하고, 이듬해 유왕의 아들 평왕이 낙읍으로 천도하며 왕위를 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주 시대는 막을 내리고 동주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동주 시대에도 주왕실의 명맥은 이어졌지만, 서주 시대와 달리 왕을 돕지 않은 제후들에게 아무런 처벌도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봉건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 틈을 타 강성한 제후들이 스스로 천자를 칭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제후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중원을 쟁탈하는 혼란기가 이어졌는데, 이 시기를 춘추시대라고 부릅니다. 춘추시대는 동주 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하며, 춘추라는 명칭은 공자가 편찬한 역사서 춘추에서 유래했습니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76년까지 약 3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 강대국이었던 춘추오패는 제, 진(晉), 초, 오, 월나라입니다. 지도에서 춘추오패의 분포도를 살펴보면, 당시 회맹 장소와 주요 전장 등이 표시되어 있지만, 일부 정보가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황하, 회수, 장강이 흐르는 지역에 주나라를 비롯한 여러 제후국들이 위치해 있었고, 특히 춘추오패는 지도상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제, 진(晉), 초, 오, 월나라입니다. 춘추시대 영역 밖에는 수많은 이민족 세력들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그중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서쪽 견융족과 남쪽 양자강 유역의 초나라였습니다.
기원전 658년, 초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주나라의 중원으로 침입했을 때, 제나라 환공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주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이민족의 침입을 막자는 명분을 내세워 초나라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기원전 651년, 중원 제후들이 모여 회맹을 개최했고, 제나라 환공은 제후들의 맹주인 패자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환공을 패자로 만든 인물은 명재상 관중이었으며, 제갈공명이 스스로를 관중에 비유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주나라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중원의 패자에 의해 유지되는 통치 체제를 회맹 질서라고 합니다.
회맹 질서는 제나라 환공 사후 진(晉)나라 문공에게 이어졌습니다. 문공 시대까지는 존왕양이, 계절존망(繼絶存亡), 즉 끊어진 제사를 잇고 망한 나라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이 유지되었지만, 문공 이후 초나라 장왕, 오나라 합려, 월나라 구천 등이 차례로 패자가 되면서 존왕양이와 계절존망과 같은 명분은 사라지고, 오직 힘에 의해 패권이 결정되는 전국시대로 점차 전환되었습니다. 강대국들은 곳곳에 숨어 있던 약소국들을 정복하고 그 지역에 현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현 설치는 진시황의 군현제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지방을 제후에게 분봉하는 대신 군과 현이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를 직접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했습니다. 군현제의 시작은 진시황 이전 진나라 효공 시대 상앙 변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진시황은 주나라의 봉건적 질서를 유지해서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전국 통일 후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군현제를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춘추시대는 주나라 봉건제에서 진나라 군현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오패는 제 환공, 진(晉) 문공, 초 장왕, 오 합려, 월 구천 순으로 패자가 되었습니다. 제 환공은 기원전 656년 초나라를 토벌하고 651년 회맹을 주도하여 최초의 패자가 되었고, 진(晉) 문공은 기원전 632년 초나라를 토벌하고 패자가 되었습니다. 초 장왕은 기원전 597년 진(晉)나라를 토벌하며 패자가 되었고, 오 합려는 기원전 506년 초나라를 공격하여 패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월 구천은 기원전 473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패자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라 춘추오패의 구성원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위 인물들을 기준으로 설명합니다.
기원전 453년, 진(晉)나라가 한, 위, 조 세 나라로 분열되면서 춘추시대는 끝나고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전국시대와 제자백가의 등장
동주 시대 전반기인 춘추시대에는 회맹 질서가 주나라 봉건 질서를 대체했습니다. 이는 주나라식 혈연 공동체가 약화되고 능력이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개인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민간 교육 기관이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공자와 묵자의 학단입니다. 이들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신의 사상을 자유롭게 전파했고, 제자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그 결과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사상이 출현했는데, 이를 제자백가라고 부릅니다. 유가, 법가, 묵가, 도가 등이 대표적인 사상입니다.
제자백가 사상의 공통적인 특징은 정치 참여를 목표로 했다는 점입니다. 제자백가들은 자신의 학문을 통해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정치와 윤리에 집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사상은 동양 철학의 근간이 되었고,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동북아시아 사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유가는 인과 예를 중시했고, 법가는 법률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으며, 묵가는 보편적인 사랑을 설파했고, 도가는 무위자연을 주장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서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5세기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등장하여 서양 철학을 정립했다는 것입니다.
위키백과에서 제공하는 전국시대 지도를 살펴보면, 연나라 윗부분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연나라 영역으로 표시되지 않는 부분이라는 점을 참고해야 합니다. 지도상에서 주나라 도읍 지역은 회색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낙양 지역만 주나라 영역으로 남아 있었고, 나머지 지역은 전국칠웅이 분할 통치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전국시대는 진(晉)나라가 한, 위, 조 세 나라로 분열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서주 시대 왕으로부터 직접 제후국으로 봉해진 진(晉)나라의 분열은 동주 시대 이후 명맥만 유지되던 봉건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진(晉)나라 분열의 여파는 주변 제후국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전국시대 군주들은 진(晉)나라와 같은 하극상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군사력 강화의 필수 조건은 경제력이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는 다양한 개혁이 시도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 효공 시대 상앙이 주도한 상앙변법입니다. 상앙변법의 핵심 목표는 기존 씨족 공동체 사회를 해체하고,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하여 세금과 병역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앙은 백성을 5호 또는 10호 단위로 묶는 십오제를 실시하여 세금과 병역 의무를 부과하고, 전국을 31개의 현으로 나누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를 통해 십오제를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농업 분야에서는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여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훗날 중국 균전제의 초기 단계로 평가될 수 있는 중요한 정책입니다. 농민 간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 가난한 농민들이 지주에게 예속되어 국가 재정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토지 균등 분배를 통해 이를 예방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 토지 균등 분배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상앙은 군공을 세운 자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여 지주에게 예속된 농민이 일반 농민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동시에, 엄격한 형벌을 통해 신분 하락 가능성을 열어두어 중산층 농민을 육성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전쟁 수행과 법령 준수 측면에서 모두 효과적인 정책이었습니다. 철제 농기구 보급과 우경 확대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5~6인 소가족으로도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앙은 개혁 성공의 핵심 요건으로 공정하고 철저한 법 집행을 강조했고, 이것이 진나라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전국칠웅도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귀족들의 반발 등 여러 이유로 철저하게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혁 효과가 진나라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국칠웅의 개혁 목표는 대체로 유사했으며, 오히려 진나라가 가장 늦게 변법을 시작했습니다. 위나라는 기원전 406년 이회를 중심으로 법치 제도를 수립하려 했고, 조나라는 기원전 403년 공중련을 통해 인재 발탁에 힘썼습니다. 초나라는 기원전 385년 오기가 귀족 특권 박탈을 시도했고, 제나라는 기원전 357년 추기가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한나라는 기원전 351년 신불해가 중앙 집권을 시도했습니다. 개혁의 성패는 귀족들의 저항 정도에 따라 달랐고, 진나라와 위나라만이 상앙과 이회를 등용하여 변법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었습니다. 이 시기에 진나라는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상앙은 수백 년간 지속된 봉건 질서를 타파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만, 전체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했다는 비판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는 강압적인 통치 방식이 불가피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앙은 죄인의 사지와 머리를 말이나 소에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거열형)을 창시할 정도로 냉혹하고 철저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이 만든 형벌로 처형당했습니다.
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였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353년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제나라는 위나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기원전 342년에는 위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하여 한나라를 공격했고, 한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제나라가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국시대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 양상이 나타났고, 군대 편제, 무기 등 전쟁의 많은 측면에서 춘추시대와 비교했을 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쟁 방식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상나라부터 춘추시대까지 전쟁은 주로 넓은 평원에서 전차를 중심으로 벌이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구릉, 산림, 늪지대 등 다양한 지형에서 전쟁이 벌어지면서 전차의 효용성이 감소하고 보병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전국시대 군대는 보병과 전차 부대를 적절히 조합하여 운용했습니다. 북방 유목 민족과의 전투를 통해 조나라 무령왕은 호복기사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보병과 기병의 활약으로 다양한 전략 전술이 등장했고, 전쟁 목표도 공성, 수성전 개념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병력 규모가 급증하여 수십만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투가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병력 수요 증가에 따라 국가는 일반 농민을 징집하여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전국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패권 쟁취를 향한 제후들의 야망은 전쟁을 멈추지 못하게 했습니다. 외교의 중요성 또한 커졌습니다. 전쟁 없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교였기 때문에, 전국시대는 교묘한 외교 술책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시기였습니다. 대표적인 외교 전략이 합종연횡입니다.
원래 진나라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 변방에 위치하여 척박한 환경이었고, 중원 국가들에게 오랑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상앙변법을 통해 강국으로 부상하자, 중원 국가들은 진나라의 부상을 경계하며 대응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소진은 진나라가 아무리 강해도 6개국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다는 논리로 6개국 동맹, 즉 합종책을 주장했습니다. 소진은 조나라를 설득하여 6국 동맹을 결성했고, 6국 공동 재상이 되었습니다. 반면 귀곡선생에게 소진과 함께 수학했다는 장의는 진나라에 발탁되어 6국 각각과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어 소진의 합종책을 와해시키는 연횡책을 구사했습니다.
합종과 연횡의 대립은 진나라가 항상 승리하거나 6국 동맹이 유지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지만, 진나라가 우위를 점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6국 간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진나라의 우세가 굳어지면서 기원전 247년, 훗날 진시황이 되는 정이 진나라 왕위에 올랐습니다. 기원전 230년 진나라는 전국칠웅 중 하나였던 한나라를 멸망시켰고, 나머지 다섯 나라도 연이어 멸망했습니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가 항복하면서 진시황의 통일 대업이 완수되었습니다.
기원전 2000년 무렵 시작된 하상주 시대의 무대는 지리적으로 중원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1800년 후 진시황이 통일을 달성했을 때 진나라의 영토는 서쪽 변방에서 양자강 이남, 동쪽 해안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중국 통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중국 역사의 무대를 만리장성 이남 지역으로 본다면, 그 뿌리는 춘추전국시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상주 시대의 무대는 중원에 국한되었지만,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만리장성 이남과 양자강 이남 지역이 모두 중국 역사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오늘날 중국을 형성하는 지리적, 사상적 기반을 다진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