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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역사 팬 필독! 14 황제로 끝내는 후한 흥망성쇠

소름 돋는 후한 14 황제 잔혹사

후한 황제들의 흥망성쇠: 초대 광무제부터 멸망 헌제까지

후한 왕조는 총 14명의 황제를 거치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써내려 갔습니다. 지금부터 초대 황제 광무제 유수부터 마지막 황제 헌제 유협까지, 후한 황실의 흥망성쇠를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각 황제의 즉위 순서에 따라 그들의 업적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후한 왕조에 미친 영향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후한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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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광무제 유수: 후한 왕조의 기틀을 다진 명군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 유수는 비록 한 고조 유방의 후손이었지만, 황실의 방계 혈족인데다가 변방 지역의 미미한 호족 출신으로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장안의 태학에서 학문을 닦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장사를 통해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남양 지역의 호족들과 함께 한나라를 재건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유수는 호족들과 연합하여 신나라에 대항하는 전쟁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갱시제 유현을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이때 세워진 한나라는 훗날 광무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현한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유수는 현한에서 갱시제를 보좌하며 태상 편장군으로 활약하며 신나라와의 전투를 주도했고, 특히 곤양 대전에서 큰 공을 세워 갱시제를 뛰어넘는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군사적 성공을 발판 삼아 유수는 하북 지역을 평정한 후, 25년에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후한 왕조를 개창했습니다. 그는 낙양을 수도로 정하고, 갱시 정권을 무너뜨린 후, 각지의 군벌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천하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광무제는 뛰어난 통치 능력을 발휘하여 후한 왕조의 안정과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검소하고 근면한 성품으로 백성을 사랑했으며,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관료 체계를 정비하고,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또한, 흉노와의 화친 정책을 통해 북방의 안정을 꾀하고, 서역 경영을 시작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광무제의 노력 덕분에 후한 왕조는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고, 이후 번영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제2대 명제 유장: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한 현명한 황제

광무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명제 유장은 아버지의 업적을 충실히 계승하여 후한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광무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28년에는 음귀비에게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0세에 이미 춘추의 뜻을 이해할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유장은 39년에 동해공, 2년 후에는 동해왕에 봉해지는 등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하남성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약으로 광무제의 신임을 얻으면서 태자였던 유강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습니다. 결국 43년, 유강이 스스로 태자 자리를 사양하는 형식으로 폐위되면서, 유장이 새로운 태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유장은 이름을 유장으로 바꾸었습니다.

57년, 광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30세의 나이로 유장이 황제 자리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후한의 제2대 황제 명제입니다. 즉위 후 명제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더욱 강력한 왕조를 건설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는 엄격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쳐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명제 시대에는 내정이 안정되면서, 북방 흉노족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습니다. 광무제 시대부터 유지해 온 흉노와의 화친 정책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명제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활약한 인물이 바로 반초입니다. 반초는 명제 때 서역에 처음 파견된 이후, 장제, 화제 시대를 거치며 30여 년간 서역 경영에 헌신했습니다.

명제는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꿈에서 부처를 본 명제는 사신을 서역으로 보내 불상과 불경을 구해왔고, 낙양에 중국 최초의 사찰인 백마사를 건립했습니다. 백마사를 통해 불교는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동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명제는 75년, 재위 18년 만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3대 장제 유조: 선정과 외척 발호의 씨앗

명제의 뒤를 이어 제3대 황제에 오른 장제 유조는 할아버지 광무제와 아버지 명제의 유지를 받들어 선정에 힘썼습니다. 그는 신하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이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고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장제 시대에는 황후 두 씨 일족, 특히 외척 두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외척 발호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장제는 도량이 넓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등 훌륭한 면모를 보였지만, 외척에 대한 지나친 관용은 후환을 남겼습니다. 장제는 두 황후를 총애했지만, 두 황후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반면, 대송귀인은 셋째 아들 유경을, 소양귀인은 넷째 아들 유조를 낳았습니다. 유경과 유조가 태어나기 전에도 장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생모와 출생 시기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장제는 아들이 없던 두 황후에게 넷째 아들 유조를 양자로 삼게 했고, 두 황후는 유조를 친아들처럼 정성껏 키웠습니다. 하지만 두 황후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셋째 아들 유경을 모함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두 황후는 어머니, 오빠, 남동생과 함께 대송귀인과 태자 유경을 무고했고, 결국 유경은 폐위되고 맙니다.

두 살의 어린 나이였던 유조는 태자가 되었고, 88년 장제가 사망하자 9세의 어린 나이로 제4대 황제 화제에 즉위하게 됩니다. 화제의 즉위와 함께 두 황후는 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두 씨 일가의 외척 세력이 본격적으로 득세하게 됩니다. 장제는 88년, 재위 13년 만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4대 화제 유조: 외척과 환관의 틈바구니에 갇힌 황제

제4대 화제 유조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외척 두 씨와 환관 세력에 휘둘린 불운한 황제였습니다. 그의 즉위와 함께 두 태후의 섭정이 시작되면서, 오빠 두헌을 비롯한 두 씨 일가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특히 두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정적들을 제거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화제 시대에는 북흉노와의 전쟁이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광무제 시대에 남흉노가 후한에 귀순한 이후, 북흉노는 지속적으로 후한을 위협해 왔습니다. 88년, 남흉노 선우가 북흉노의 기근 상황을 알리며 북벌을 제안하자, 두 태후는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고, 두헌의 주도로 북벌이 결정됩니다. 89년, 두헌은 계략산 전투에서 북흉노를 크게 격파했고, 이듬해에는 북흉노마저 후한에 신하를 칭하며 복속을 요청했습니다.

91년, 두헌은 금미산 전투에서 다시 한번 북흉노를 격파하며 북흉노를 완전히 서쪽으로 몰아냈습니다. 이로써 북흉노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후한은 북방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두헌의 북벌 성공으로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고, 심지어 두헌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습니다.

화제는 외척 세력의 위협 속에서 환관 정중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화제는 정중에게 명하여 두헌을 수도 낙양으로 불러들였고, 92년 6월, 두헌이 방심한 틈을 타 정중은 근위병을 동원하여 두헌과 그의 측근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사건으로 화제는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정중을 비롯한 환관 세력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화제는 외척과 환관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치지 못하고, 105년 12월, 재위 17년 만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은 외척과 환관의 권력 다툼으로 점철되었고, 후한 왕조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제5대 상제 유륭: 요절한 비운의 황제

화제에게는 아들이 없어 황위 계승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화제의 황후 등 씨는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화제에게는 다른 비빈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이 있었지만 모두 요절했습니다. 화제는 아들들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혹시 살해당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합니다.

화제는 궁궐 밖에서 키우던 아들 유승과 유륭 형제를 찾았고, 형 유승이 먼저 황위에 올라야 했지만 병약하다는 이유로 동생 유륭이 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자가 된 바로 그날 밤, 유륭은 황제 자리에 오르니, 그가 제5대 황제 상제입니다. 상제가 즉위하면서 등 황후는 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오빠 등즐을 비롯한 등 씨 일가가 요직에 등용되면서 외척 정권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제 역시 병약하여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등 태후는 이때 장제의 아들 청하왕 유경의 아들 유호를 눈여겨보고, 후일을 대비했습니다. 예상대로 상제는 곧 세상을 떠났고, 유호가 제6대 황제 안제에 즉위하게 됩니다. 상제는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지만, 재위 기간 내내 병약했고, 결국 요절하면서 후한 왕조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제6대 안제 유호: 환관 득세의 빌미를 제공한 황제

상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안제 유호 역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등 태후의 섭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나이가 12세에 불과했던 안제 대신 등 태후가 섭정을 계속하면서 등 씨 외척 세력의 권세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는 상제의 형 유승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등 태후는 섭정 기간 동안 큰 문제 없이 국정을 운영했지만,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안제가 성인이 된 후에도 섭정을 계속하면서 권력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121년, 등 태후가 사망하면서 안제는 비로소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아버지 청하왕 유경은 효덕황제로 추존되었습니다.

하지만 안제는 친정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환관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신하들의 충언은 환관들에 의해 가로막히기 일쑤였고, 국정은 점점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사회 전체가 부패로 물들었습니다. 안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안제는 125년, 재위 18년 만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외척에서 환관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과도기였으며, 환관 득세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안제는 염 황후와 혼인했지만, 황후 역시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안제에게는 궁인 이 씨에게서 얻은 아들 유보가 있었지만, 염 황후의 질투로 인해 불운한 운명을 맞게 됩니다.

제7대 소재 유의: 옹립되자마자 폐위된 비운의 황제

안제에게는 궁인 이 씨에게서 얻은 아들 유보가 있었지만, 황후 염 씨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까 두려워 이 씨를 독살했습니다. 염 황후는 유보마저 제거하려 했지만, 등 태후가 유보를 보호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유보는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등 태후가 사망하자 염 황후는 안제를 꾀어 유보의 측근들에게 역모죄를 씌워 유보를 폐위시키고 제음왕으로 강등시켰습니다.

125년, 안제가 남방 순행 중 갑자기 사망하자, 염 태후는 태자가 없는 틈을 타 제북왕 유수의 어린 아들 유의를 황제로 옹립했으니, 그가 제7대 황제 소재입니다. 소재는 염 태후에 의해 옹립되었지만, 꼭두각시 황제에 불과했습니다. 염 태후는 태후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조정의 실권은 염 태후의 오빠인 대장군 염기가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소재는 옹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절하고 맙니다.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지만, 외척 세력의 권력 다툼 속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소재의 짧은 재위 기간은 후한 왕조의 혼란과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8-9대 황제: 연이은 요절과 황제 옹립 다툼

소재가 요절하자, 다시 한번 황위를 둘러싼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염 태후는 다시 어린 황제를 옹립하여 수렴청정을 이어가려 했지만, 조정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대신들은 덕망 있는 황족을 황제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환제의 숙부인 해괴후 유지를 황제로 옹립하자는 의견이 우세해졌습니다.

하지만 염 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이가 어리지만 다루기 쉬운 유지를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그가 제8대 황제 효환제입니다. 환제 역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염 태후의 섭정을 받았고, 염기의 외척 세력은 더욱 득세했습니다. 환제는 꼭두각시 황제에 불과했고, 실권은 염기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환제는 성장하면서 염기의 권력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환관들과 결탁하여 염기 일족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159년, 환제는 환관들과 함께 염기 일족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고, 비로소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염기 제거 후, 권력은 환관들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환관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환제는 친정을 시작했지만, 환관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환관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환제는 환관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환제는 167년, 재위 21년 만에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10대 질제 유찬: 외척에게 독살당한 비운의 황제

환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또다시 황위 계승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환관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어린 황제를 옹립하여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결국 질제가 옹립됩니다. 양 황후는 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오빠 양기가 대장군이 되어 조정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질제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총명하고 영특했습니다. 어느 날 조회에서 질제는 양기를 "발호장군"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양기의 권세를 빗대어 비판한 것입니다. 양기는 질제의 총명함에 위협을 느끼고, 떡에 독약을 넣어 질제를 독살했습니다. 질제는 146년, 어린 나이에 외척에게 독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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