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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중세 유럽의 균열과 새로운 시작

요약
  • 르네상스는 교회 중심의 중세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과 세속적 가치를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 종교 개혁은 16세기 교회의 부패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어 새로운 교파들이 생겨났다.
  • 근대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는 이성을 기반으로 사회와 세계를 이해하고 개혁하려는 지적 운동이었다.

르네상스: 중세 유럽 문명의 균열과 새로운 시작

중세 천 년 동안 유럽 문명을 지탱해 온 요소들은 1400년경부터 서서히 균열되기 시작했으며, 그 시작점에서 르네상스가 등장했습니다. 르네상스는 종종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지식의 재발견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단순히 잊혀졌던 지식이 다시 나타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새로운 발견들이 있었지만, 핵심적인 변화는 고대 지식을 신학의 도구로만 활용했던 중세 교회 중심의 학문에서 벗어나, 교회 외부에서 신과 독립적으로 지식을 탐구하는 학자들이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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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학문, 예술, 문화를 그 자체로 존중하고 연구했으며, 고대인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예술가들은 고전 조각을 연구하며 인체의 아름다움을 탐구했고, 학자들은 라틴어 문체를 되살려 글을 쓰고, 고대 철학자들의 다양한 사상을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중세 교회가 지배했던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유럽 사회에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은 현세의 삶과 인간의 능력에 주목했으며, 사후 세계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현실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르네상스 학자들은 이러한 고대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받아들이면서, 종교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르네상스 학자들이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거나 공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를 개인의 신념 영역으로 존중했지만, 종교 외에도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할 가치와 지식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흐름은 유럽 사회를 세속화의 긴 여정으로 이끌었습니다. 세속적인 사회는 종교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신념의 영역으로 존중하지만, 사회 전체를 지배하거나 모든 사람의 사고방식을 통제하지는 않습니다. 르네상스는 유럽인들이 고대 문화와 전통을 재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으며, 이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유럽 사상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들은 비로소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고전 시대'라고 명명하며 최고의 문화적 성취를 이룬 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 개혁: 기독교 교회의 분열과 새로운 교파의 등장

르네상스가 중세 유럽 문명의 첫 번째 균열이었다면, 16세기 종교 개혁은 두 번째 거대한 붕괴였습니다. 종교 개혁은 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으며, 기독교 교회를 초기 순수한 형태로 되돌리려는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로마 제국의 통치 시스템을Model: ## 르네상스: 중세 유럽 문명의 균열과 새로운 시작

중세 천 년 동안 유럽 문명을 지탱해 온 요소들은 1400년 즈음에 균열되기 시작했으며, 그 시작점에서 르네상스가 등장했습니다. 르네상스는 흔히 그리스와 로마 지식의 발견, 혹은 재발견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몇 가지 새로운 발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단순히 잊혀졌던 지식이 재발견된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대의 지식을 이용했던 교회 대신, 교회 외부에서 신과 무관하게 연구하는 학자들이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그리스 로마 지식이 탄생했던 시기의 모습 그대로 고대를 상상하며, 예술가들은 고대 조각을 연구하고, 학자들은 고대 라틴어를 사용하여 글을 쓰는 등 고대의 문화를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르네상스 학자들은 고대 사상을 통해 교회가 강조했던 교의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과거 세계를 새롭게 조명했습니다. 그들이 주목했던 과거 세계는 기교적이면서도 이교적인, 다시 말해 더욱 세속적인 세계였습니다. 고대인들은 죽음 이후의 삶보다는 인간과 인간의 행위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인간의 재능과 능력을 찬양하고 인간의 행복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르네상스 학자들이 진입한 세계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세계였습니다. 고대 철학자와 윤리학자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이며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고, 그들의 토론과 추론은 교회가 당시 사람들의 사고에 부과했던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학자들은 기독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태도는 다양했지만, 대체로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즉, 종교는 문제 삼을 것이 없는, 대체로 좋은 것이거나 필요한 것이지만, 종교 말고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과 사고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당시까지 교회의 목적이었던 통제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교회의 통제가 약화되자 사고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모험적이고, 도량이 넓어졌으며, 확실성에 덜 매몰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유럽 사회에 세속화라는 긴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세속적인 세계는 종교가 존재할 수는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처럼 사적인 일이거나 특정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체로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즉,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지 않으며, 종교의 규율과 의식을 강요하거나 사고를 통제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일어난 일은 어떤 문화와 전통을 지닌 사람들이 사색을 통해 스스로 또 다른 문화와 전통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며, 일단 그렇게 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확실하고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그리스와 로마를 '고전 시대'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고전(클래식)'이라는 것은 최고 수준이라는 의미로,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문학, 예술, 철학,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고대인들이 이룬 업적은 누구도 능가하지 못했고, 능가할 수도 없는 최고의 수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전 시대의 수준에 필적할 정도만 되어도 성공이라고 여겼습니다. 르네상스는 "고전이 최고다"라는 메시지를 통해 중세 유럽 문명을 지탱해 온 혼합물을 붕괴시킨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 체계는 두 가지 토대 위에서 작동하는데, 이는 우리 문명이 혼합된 것이라는 특성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일로부터 연도를 표기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기독교 문명으로 인정합니다. 서기를 나타내는 'AD'는 라틴어 '안노 도미니(Anno Domini)', 즉 '예수님의 해'의 약자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고대, 중세, 근대로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은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는 고전적 세계는 그 자체로 완전함에 도달했으며, 그 이후 인류는 길을 잃고 그 유산과 멀어졌다는 르네상스의 견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중단의 기간이 바로 중세 시대이며, 이때는 교회가 지적, 사회적 삶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고대, 중세, 근대라는 시대 구분은 상당히 비기독교적인 명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 기독교 교회의 분열과 새로운 교파의 등장

르네상스가 중세 유럽 문명의 첫 번째 거대한 붕괴였다면, 두 번째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기독교 교회를 로마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형태로 되돌리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는 로마 제국 내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로마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제국이 붕괴된 후에도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는데, 교황은 마치 황제와 같은 존재였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옛 로마 제국의 행정관과 유사한 역할을 했습니다. 지역마다 사제들이 있었으며, 이 신성한 단체는 자체적인 법률, 형벌, 교도소, 그리고 조세 제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교황과 주교들이 교회를 통치하고 교리를 결정했으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공했지만, 이는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즉, 사제와 주교가 필수적이었고, 성찬식, 즉 미사에 참석해야 했으며, 빵과 포도주를 예수의 살과 피로 바꾸는 마법을 일으키기 위해 사제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사제는 사람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었고, 죄를 면죄받기 위해서는 성모송을 외우거나 순례 여행을 떠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심각한 죄를 지은 경우에는 성찬대 앞에서 매를 맞아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사제는 교회에 많은 재산을 기증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설득했을 것입니다. 중세 시대 대부분의 사제, 주교, 대주교는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어서 교회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가장 크고 부유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몰렸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공무원 조직, 대기업, 정계, 혹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안정적인 직업을 얻고, 흥미로운 일을 경험하며, 고액의 급여를 받고, 잘 살고,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고 주변 친구와 친척들에게 직업을 줄 기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부유하고 권위적이며 부패한 조직의 모습은 예수의 가르침과 초기 기독교도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비천한 사람들이었지만, 교황과 주교들은 궁궐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예수는 재물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고, 초기 기독교도들은 서로의 집에서 소규모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신성한 문서는 비판가들의 손에 들어가면 '다이너마이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비판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극소수의 사람만이 읽을 수 있었고, 교회는 성경을 해석할 권한은 오직 교회에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누군가가 교회의 가르침이나 관행을 비판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거나,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면 이단으로 규정되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단은 거짓 신자이자 기독교 세계의 위험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해 변화가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는 마르틴 루터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종교적으로 매우 진지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습니다. 그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지 고민하며, 죄를 고백하고 면죄부를 사는 행위가 진정으로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로마서를 강의하던 중,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을 읽고 구원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루터는 구원은 특정한 행위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사제의 지배를 받고 그의 지도를 따라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존 교회의 가르침을 비판하며,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루터파의 핵심 메시지인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당연히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행을 할 것이며, 교회가 이를 통해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프로테스탄트 이전 교회가 강조했던 선행, 예를 들어 성지순례를 떠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행위 자체가 구원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루터는 "죄만 가득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신의 은총으로 구원받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일종의 '스스로 믿는 종교'이며,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가 설립해 놓은 거대한 기구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혁명적인 주장이었습니다. 루터의 주장은 로마 교황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루터의 비판과 구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거부했고, 루터는 교황을 공개적으로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그는 교황을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적, 적그리스도다"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교황의 화려한 생활과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지적했습니다.

루터의 교회 비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루터는 "어떤 것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면, 교회가 그것을 주장하거나 실행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라고 강조했습니다. 로마 교황청과 단절한 이후, 루터가 처음으로 한 일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 구원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교리와 관행을 성경에 기초함으로써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었으며, 초기 교회의 삶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종교 개혁의 핵심 메시지는 "기독교는 로마의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루터는 어떻게 이단자로 몰려 화형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인쇄술의 발명입니다.

루터의 모든 비판과 주장은 인쇄술 덕분에 빠르게 인쇄되어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인쇄술은 당시 새로운 발명품이었으며, 루터가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는 인쇄술이 발명된 지 고작 5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교황이 루터를 탄압하기 위해 조직을 꾸리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의 비판적인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이전의 이단자들과는 달리, 소수의 추종자만 있는 지역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우 빠르게 국제적인 추종 세력을 확보했습니다. 루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독일 제후들 중 일부가 로마 교황청에 대한 그의 공격을 환영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독일은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여러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였으며, 프랑스나 잉글랜드와 같은 통일된 국가에 비해 제후들의 권력이 강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거두어들였고, 교황은 제후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제후들은 루터를 지지함으로써 교회의 토지를 장악하고, 주교를 직접 임명하며, 로마로 돈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 제후들은 루터를 보호했고, 그들의 영지에서 루터파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의 절반 정도 지역에서 루터파 교회가 설립되었고, 루터교는 독일에서 북쪽으로 확산되어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로 전파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자체적인 프로테스탄티즘 형태인 잉글랜드 국교회를 채택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교회에 대한 경쟁자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를 취했지만, 대부분 자국 내에서 자립적인 국가 교회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루터와 다른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에 따라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곧 루터의 주장 역시 비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고 믿음을 규제할 중앙 권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교파들을 파생시키고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도와 프로테스탄트는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로 싸웠으며, 문자 그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양측은 서로를 완전히 잘못된 존재로 여겼고, 다른 유형의 기독교도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교회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진정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쪽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적대적인 교리는 잔혹한 학살을 초래했습니다. 카톨릭 교도와 프로테스탄트는 하느님에게 극도로 모욕적이며, 교회의 손상을 입히는 교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100년 동안의 종교 전쟁 이후, 어느 한쪽도 승리하지 못하자 양측은 오랜 휴전 상태에 돌입했고, 서서히 관용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맨 먼저 프로테스탄트 국가와 카톨릭 국가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졌고, 더 나아가 여러 종류의 기독교도들이 한 나라 안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습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도 모두 처음에는 믿지 않았던 변화였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은 양쪽 모두 회고적인 운동으로, 하나로 융합되어 있던 중세 유럽 문명에서 특정 부분을 분리해내려는 시도였습니다. 르네상스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지식을 되돌아보았고,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은 교회가 로마적인 구조를 갖기 이전의 초기 기독교 교회를 되돌아보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톨릭 교회가 이 두 운동의 중심이 되는 문서들을 깊숙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카톨릭 교회가 보존한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 덕분에 르네상스는 교회의 지적 권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카톨릭 교회가 만들고 신성시한 성경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은 카톨릭 교회의 신학과 통일성을 붕괴시킬 수 있었습니다.

근대 과학과 진보: 이성의 힘과 새로운 세계관의 탄생

이제 우리는 유럽 문화가 미래 지향적으로 변화하는 과정, 즉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17세기 과학 혁명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17세기는 근대 과학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17세기 초까지 우주와 우주의 작동 방식에 대한 권위는 여전히 그리스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달과 태양을 포함한 다른 모든 행성들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과연 어떤 힘이 지구를 움직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들은 지구는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으며, '불순한' 영역으로 인식했습니다. 지구상의 사물은 변화하고 쇠퇴하는 반면에, 하늘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변하지 않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행성들이 원을 그리며 도는 이유는 원이 완전한 형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스 기하학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완전한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이었고, 정사각형이나 원이 바로 그러한 완전한 형태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행성들은 완전한 영역인 하늘에서 완전한 원형의 조화를 이루며 회전하고 있으며, 외부의 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견해는 우리가 현재 진리라고 여기는 사실, 즉 '지동설'에 의해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 태양이 우주 체계의 중심에 있고, 행성들은 태양의 둘레를 원이 아닌 타원 궤도로 공전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 중 하나이며, 지구 주위에는 달이 돌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체계는 단일한 체계입니다. 불순한 지구와 순수한 하늘이라는 분리된 영역은 사라지고, 우주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인식되었습니다. 하나의 법칙, 혹은 일련의 법칙들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개념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와 태양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아이작 뉴턴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다른 물체가 힘을 작용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직선 운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우주에는 모든 물체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 즉 '만유인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고 있으며, 이 책은 지구로, 지구는 태양으로 끌어당겨지고 있습니다. 지구 표면 위의 물은 지구와 달 사이의 인력 변화 때문에 밀물과 썰물 현상을 일으킵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모든 두 물체 사이의 인력 크기를 계산할 수 있는 수학 방정식을 제시했습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인력의 크기는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증가하는 정비례 관계이며, 거리가 증가할수록 약해지는 반비례 관계를 가집니다. 특히 거리는 멀어지면 제곱만큼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거리가 두 배가 되면 힘은 네 배로 약해집니다. 뉴턴의 방정식은 수학이 과학의 중심이라는 것과, 세계는 단순하며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수학적 형태일 것이라는 그리스인들의 직감이 옳았음을 증명했습니다. 17세기 과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의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우주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지식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행성인 지구 위에서 전체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발견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업적입니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놓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경향이며, 감각적 증거를 따라 지구는 정지해 있다고 추론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격조 높은 그리스인들의 지식을 존경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모든 자연스러운 경향에도 불구하고, 17세기 과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과학 혁명의 메시지는 "그리스인들이 틀렸다"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고전에 대한 오랜 존경심이 무너지고, 유럽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수준에 필적하는 것을 넘어 그들보다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놀라운 지적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주변적인 존재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매우 총명하지만, 동시에 우주에서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찰스 다윈이 인간과 원숭이가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진화론적 견해를 제기한 19세기에는 이러한 인간의 위상 하락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다윈의 주장은 인간과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여겨졌던 추론 능력마저도 격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 속에서 동물의 왕국으로부터 진화해 온 후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카톨릭 교회 모두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는 그 주위를 공전한다는 새로운 학설에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이 지구를 먼저 창조하고, 그 다음에 하늘에 태양, 달, 별들을 배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교회는 과학적 증거에 굴복하고 과학자들이 옳다고 선언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윈의 진화론과 논쟁하다가 결국 항복을 선언했는데, 이 두 사건 모두 교회의 권위에 큰 손상을 입혔습니다.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와 사회 개혁의 열망

과학 혁명 이후, 다음 세대 사람들은 과학 혁명의 발견들이 인간의 의미를 축소시켰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이성으로 우주 전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고, 수학으로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면, 이성을 사용하여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이성이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삶을 완전히 개선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삼으려는 이러한 열망은 계몽주의, 즉 사회 개혁, 정부, 도덕, 신학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이성을 적용하려는 18세기 지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계몽주의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프랑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학자들은 당시 사회를 무지와 미신이 지배하는 어둠의 시대로 보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사회를 지배하는 두 가지 거대한 비이성적인 세력은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절대 군주였습니다.

교회와 왕은 인민의 무지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한다고 계몽주의자들은 비판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천국과 지옥에 대한 허황된 이야기를 퍼뜨렸고, 왕들은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왕의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인물 중 한 명은 계몽주의의 목표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며 "나는 마지막 성직자의 내장으로 목 졸려 죽은 마지막 왕을 보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는 과장된 표현이지만, 계몽주의는 혁명 운동이나 정치적 운동이라기보다는 이성과 교육이 확산되면 미신과 무지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더 이상 기적이나 왕권신수설 같은 허황된 주장을 믿지 않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학자, 작가, 예술가, 역사가들의 지적 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은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계몽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대부분 민주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계몽된 군주가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위한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실제로 18세기 유럽의 군주들 중 일부는 계몽 전제 군주를 자처하며 야만적인 형벌과 고문을 폐지하고 법률을 합리화하는 등 사회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또한, 인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백과사전' 편찬입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편찬된 이 방대한 규모의 백과사전은 최초의 근대적인 백과사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으며, 지식의 계층적 분류를 거부하고 모든 주제를 이성적인 시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즉, 백과사전은 교회가 선호하는 신학이나 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예배' 항목에서 '하느님' 항목을 찾아보도록 안내했습니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지식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색인 방식을 통해 지식을 정리함으로써 교회와 왕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저항을symbolize했습니다. 백과사전은 모든 지식을 동등하게 다루고, 이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으로 검증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 항목에서 백과사전은 "하느님 숭배는 결코 이성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이성의 창조자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백과사전 편집자들은 교회나 왕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매우 조심했습니다. 당시 18세기 프랑스에는 여전히 검열 제도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검열관 중에도 계몽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백과사전의 다음 판본을 위한 도판을 자신의 집에 숨겨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백과사전이 논쟁적인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노아의 방주' 항목입니다. 백과사전은 노아의 방주가 얼마나 컸을지에 대한 질문으로 설명을 시작합니다. 방주는 유럽 동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동물들까지 쌍으로 수용해야 했으므로 틀림없이 엄청나게 컸을 것입니다. 동물들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방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동물 사료의 양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양 두 마리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며, 수백 마리의 어린 양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방주는 매우 거대한 규모였음에 틀림없는데, 성경에 따르면 그 거대한 배를 만든 사람은 오직 네 명(노아와 세 아들)뿐입니다. 백과사전은 마치 진지하게 조사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방주의 실현 불가능성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신의 창조물이며, 창조주로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계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미신'이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교회가 사람들의 정신을 통제하기 위해 미신을 이용하는 방식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교회에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라고Model: ## 낭만주의와 민족주의: 감성, 개성, 그리고 공동체의 발견

계몽주의 이념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을 통해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이성이 사회를 진보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프랑스 혁명은 계몽된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혁명은 유혈 사태, 전제 정치, 그리고 독재 정권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의 혼란 속에서 중세 유럽 문명의 마지막 요소, 즉 낭만주의적 감성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됩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낭만주의 운동은 감정, 정서, 그리고 모든 열정을 긍정하는 사조로 발전했으며, 이 점에서 낭만주의는 이성을 중시했던 계몽주의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낭만주의 운동은 유럽 전역에서 나타났지만, 특히 독일에서 가장 강력하고 완전하게 발현되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이성이 인간의 정서와 열정을 통제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작가나 예술가는 고전에서 영감을 받아 세련된 방식으로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격정, 고통, 절망과 같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낭만주의 예술은 감성적이고, 표현적이며, 고도로 주관적인 특징을 지닙니다. 이러한 독일 낭만주의 이념은 계몽주의의 프랑스적 이념에 대한 의식적인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인간과 사회를 추상적으로 논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인류는 각자 속한 국가에 따라 다르며, 우리는 언어와 역사에 의해 형성되고, 특정 문화적 맥락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자신만의 역사와 언어를 가진 독일인은 프랑스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프랑스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보편적인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은 독일인이 독일인답게 만드는 '독일적인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독일 낭만주의 작가들은 게르만족 전사들이 문명, 로마, 기독교와 융합되기 이전의 모습, 즉 순수한 게르만족의 본질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문화적 요소가 혼합되기 이전의 순수한 게르만족을 이상화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숲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게르만족의 활력과 생명력을 동경했으며, 나약한 지식인들의 이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토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게르만족, 즉 독일인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믿는 게르만 민족을 존경했습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민속 문화를 발견하고 존중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낭만주의 시대, 즉 낭만주의자들이 민속 문화를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입니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신발 끈을 묶고 도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독일 민족의 진정한 정신을 찾기 위해 독일의 시골을 여행하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수집하고, 진정한 독일 정신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낭만주의의 핵심 메시지는 "인위적인 문명은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한다. 제대로 된 삶은 전통 문화 안에서 가능하다"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관점은 이후 서양 사회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인위적인 문명에 저항하는 거대한 문화 운동이 일어났는데, 히피 운동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히피 운동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해방, 자유, 그리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갈망했습니다. 이들은 기존 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거부하고, 단순하고 솔직하며 소박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히피들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자신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머리를 기르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서로에게 솔직하게 대하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또한, 노동자, 농민, 고결한 야만인과 같이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에게서 삶의 방식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낭만주의 작가들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민족주의는 근대 세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강력한 이념입니다. 민족주의는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뚜렷하게 구별되는 민족 집단은 함께 살면서 자신들의 정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추상적인 이론이나 보편적인 원칙만으로는 좋은 정부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특정 민족의 고유한 특성과 열망을 반영해야 하며, 자기 민족의 정부가 아니라면 진정으로 좋은 정부일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인은 함께 살면서 세르비아 정부를, 크로아티아인은 함께 살면서 크로아티아 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함께 사는 국가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모두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세르비아인의 본질은 자신만의 국가를 가질 때 비로소 꽃피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입니다. 낭만주의 운동은 정서, 문화, 민족주의, 그리고 해방을 강조했으며, 이는 이성, 과학, 진보를 중시했던 계몽주의와는 대조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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