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의 역사: 고대 이집트 왕조와 페르시아 제국의 형성과 부상
- 헤로도토스는 고대 이집트 왕조의 역사와 세소스트리스, 페로스, 프로테우스 왕 등의 업적을 설명합니다.
- 케옵스, 케프렌, 미케리노스 왕의 피라미드 건설과 람프시니토스 왕의 보물 창고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정복과 다레이오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 재편까지의 내용을 자서전적으로 서술합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이집트 왕조의 흥망성쇠와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
고대 이집트 왕조의 계보와 세소스트리스 왕의 업적
고대 이집트에는 초대 왕부터 세소스트리스 왕까지 330명의 왕이 통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집트 사제들이 기록한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따르면, 이 중 18명은 에티오피아 출신이었고, 이집트 여성 왕도 한 명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바빌론 여왕과 동일한 니토크리스였다고 합니다. 나머지 왕들은 모두 이집트 남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대 시대 왕들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여기서는 세소스트리스 왕의 업적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세소스트리스 왕은 배를 타고 아라비아 만에서 출발하여 바다 건너까지 원정했으며,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원정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정복한 땅마다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는데, 그 기념비는 스키타이와 트라키아까지 뻗어 있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 콜키스라고 불리는 지역의 주민들이 이집트인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콜키스인은 이집트인 못지않게 이집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피부색이 검고 머리카락이 곱슬머리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더욱 강력한 증거는 콜키스인, 이집트인, 에티오피아인만이 고대부터 할례를 행했다는 점입니다. 페니키아인과 팔레스타인 시리아인들은 할례 풍습을 이집트인에게서 배웠다고 인정했으며, 테르모돈 강과 파르테니오스 강 유역의 시리아인과 마크로네스인 역시 할례를 행한다고 전해집니다.
콜키스인과 이집트인은 아마 재배 방식 또한 동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생활 방식과 언어 또한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사제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세소스트리스 왕은 원정에서 귀국하던 중 펠루시움에 이르렀을 때, 그의 동생에게 배신을 당할 뻔했습니다. 동생은 세소스트리스 왕과 그의 자녀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불을 지르려 했지만, 왕은 아내의 도움으로 여섯 아들 중 두 명을 희생하여 불길을 탈출했다고 합니다.
이집트로 돌아온 세소스트리스 왕은 동생을 처벌하고, 정복지에서 끌고 온 포로들을 동원하여 운하를 파고 신전을 건설하는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습니다. 특히 나일 강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들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하 건설에 힘썼습니다. 세소스트리스 왕은 모든 이집트인에게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 토지를 나누어주고, 매년 공물을 징수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홍수로 토지 일부가 유실될 경우, 왕은 측량관을 보내 피해 면적을 확인하고 공물을 감면해주는 자비로운 정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토지 측량에서 기하학이 탄생하여 그리스로 전해졌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페로스 왕과 프로테우스 왕 시대의 이집트
세소스트리스 왕 이후, 그의 아들 페로스 왕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군사적 업적은 미미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페로스 왕은 나일강에 창을 던지는 불경스러운 행위를 저질러 맹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9년 동안 장님으로 지내던 페로스 왕은 10년째 되던 해에 신탁을 통해 아내의 오줌으로 눈을 씻으면 눈이 보일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왕비의 오줌으로는 효험이 없었고, 이후 여러 여성들의 오줌을試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의 오줌으로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하게 된 페로스 왕은, 왕비를 포함하여 효과가 없었던 여인들을 모두 불태워 죽이고, 자신의 눈을 낫게 해준 여인을 새로운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페로스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프로테우스는 멤피스 출신으로, 그의 성역은 헤파이스토스 신전 남쪽에 화려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성역 안에는 '이국의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이 신전이 실은 틴다레오스의 딸 헬레네를 모신 신전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 이유는 프로테우스 왕의 궁전에 헬레네가 잠시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고, 신전 이름 자체가 '이국의 아프로디테'였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파리스가 스파르타에서 헬레네를 납치하여 트로이로 돌아가던 중, 에게 해에서 역풍을 만나 이집트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파리스의 노예들이 헤라클레스 신전에 피신하여 보호를 요청하자, 프로테우스 왕은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프로테우스 왕은 파리스와 그의 선원들을 이집트에서 추방하고, 헬레네와 약탈품은 이집트에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호메로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서사시에는 어울리지 않아 채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헤로도토스가 트로이 전쟁에 대한 그리스와 트로이의 주장이 진실인지 사제들에게 질문하자, 그들은 메넬라오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스 군이 트로이를 공격했을 때, 트로이 측은 헬레네와 약탈품이 이미 이집트 프로테우스 왕에게 압류되어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리스 군은 이를 믿지 않고 트로이를 함락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트로이 함락 후에도 헬레네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그리스인들은 메넬라오스를 이집트로 보내 헬레네를 찾아오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람프시니토스 왕의 보물 창고와 도둑 이야기
프로테우스 왕의 뒤를 이은 람프시니토스 왕은 막대한 은을 소유한 부유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궁전 바깥 벽에 붙어 있는 석조 건물을 보물 창고로 짓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창고를 건설한 건축가는 돌 하나를 쉽게 뺐다 끼웠다 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창고가 완성된 후, 람프시니토스 왕은 막대한 재물을 보관했지만, 건축가는 죽으면서 두 아들에게 보물 창고의 비밀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두 형제는 밤마다 몰래 창고에 침입하여 재물을 훔쳐갔습니다. 어느 날, 왕은 창고의 재물이 줄어든 것을 발견했지만, 자물쇠와 봉인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 도둑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도둑들의 절도가 계속되자, 왕은 덫을 설치하여 도둑을 잡으려 했습니다.
도둑 형제 중 동생이 덫에 걸리자, 형은 동생의 목을 베어 시체를 숨기고 도망쳤습니다. 다음 날, 왕은 머리 없는 시체가 덫에 걸린 것을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왕은 도둑의 시체를 성벽 밖에 매달아 놓고 파수병에게 감시하게 하며, 시신 앞에서 슬퍼하는 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도둑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살아남은 아들에게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동생은 술이 가득 찬 가죽 부대를 당나귀에 싣고 파수병들에게 접근하여 술을 나눠주며 환심을 샀습니다. 술에 취한 파수병들이 잠들자, 동생은 형의 시체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왕은 도둑의 영리함에 감탄하면서도 분노하여, 딸을 사창가로 보내 도둑을 유인하는 계략을 세웠습니다. 공주는 손님으로 온 남자들에게 가장 교묘하고 악한 짓을 물어보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도둑은 공주의 질문에 자신의 범행을 실토하며, 잘라낸 시체의 팔을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공주가 팔을 잡는 순간, 도둑은 도망쳤습니다. 왕은 도둑의 대담함과 지략에 놀라 그를 용서하고, 오히려 딸을 아내로 주고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이집트인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람프시니토스 왕은 죽은 후 하데스에 내려가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와 주사위 놀이를 했다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이 전설은 이집트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케옵스, 케프렌, 미케리노스 왕의 피라미드 건설과 폭정
람프시니토스 왕 시대까지 이집트는 번성했지만, 그의 아들 케옵스와 케프렌 형제는 폭정을 휘둘렀습니다. 케옵스 왕은 신전을 폐쇄하고 강제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위한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했습니다. 10만 명의 인력이 3개월씩 교대로 동원되어 10년 동안 도로를 건설하고, 20년 동안 피라미드를 지었다고 합니다. 피라미드 건설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오죽하면 케옵스 왕이 딸을 사창가로 보내 돈을 벌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케옵스 왕의 뒤를 이은 케프렌 왕 또한 형 못지않은 폭군이었으며, 역시 피라미드를 건설했지만 형의 피라미드보다는 규모가 작았습니다. 이 두 왕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인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신전마저 폐쇄되어 암흑기를 보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 두 왕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으려 했습니다.
케프렌 왕 이후, 케옵스의 아들 미케리노스 왕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숙부의 폭정을 반성하며 신전을 다시 열고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미케리노스 왕은 역대 왕들 중 가장 공정한 재판을 했다고 칭송받았지만, 불행히도 외동딸이 죽고, 부토의 신탁으로부터 6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신탁에 분노한 미케리노스 왕은 신에게 항의했지만, 오히려 수명이 단축된 이유가 아버지와 숙부와 달리 폭정을 멈췄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이집트는 150년 동안 고통을 겪도록 운명 지어져 있었지만, 미케리노스 왕은 이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미케리노스 왕은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남은 6년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보다 작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절반은 에티오피아 돌로 지어졌습니다.
아키스와 세토스 왕을 거쳐 12왕조 시대
미케리노스 왕 이후, 케리스, 벽돌공 아키스, 장님 왕 아니시스, 사제 출신 세토스 왕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습니다. 세토스 왕까지를 합하면 이집트에는 총 341대의 왕조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제였던 세토스 왕은 무사 계급을 무시하고 냉대하여 백성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세토스 왕 통치 이후, 이집트인들은 자유를 되찾았지만, 왕 없이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이집트 전역을 12개 지역으로 나누고 12명의 왕을 세웠습니다.
12명의 왕들은 서로 혼인 관계를 맺고 평화롭게 이집트를 다스렸으며, 상호 협정을 통해 권력 다툼을 방지했습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기념물을 남기기로 하고, 모이리스 호수 남쪽에 미궁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12명의 왕 중 한 명인 프삼메티코스가 헤파이스토스 신전에서 청동 잔으로 헌주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다른 왕들은 신탁의 예언과 결부시켜 그를 추방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프삼메티코스는 이오니아인과 카리아인 해적 용병을 규합하여 다른 11명의 왕을 몰아내고 이집트의 유일한 왕이 되었습니다. 프삼메티코스 왕은 용병들에게 땅과 막대한 보상을 내리고, 이집트 아이들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프삼메티코스 왕은 54년간 통치하며 시리아의 아조토스 시를 29년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키기도 했습니다.
네코, 프삼미스, 아프리에스 왕과 아마시스의 등장
프삼메티코스 왕의 뒤를 이어 네코 왕이 즉위하여 홍해로 통하는 운하 건설을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프삼미스 왕은 에티오피아 원정을 시도했지만 곧 사망했고, 아프리에스 왕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아프리에스 왕은 증조부 프삼메티코스 왕 이후 가장 번성한 통치를 했지만, 키레네 원정 실패 후 평민 출신 아마시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마시스는 평민 출신이었기에 처음에는 이집트인들에게 경시되었지만, 현명한 정치로 민심을 얻었습니다. 그는 황금 대야를 녹여 신상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며 지지를 얻었습니다. 아마시스 왕은 새벽부터 정무를 보고, 오후에는 술과 유흥을 즐기는 등 융통성 있는 통치를 했습니다. 그는 사이스에 아테네 신전을 짓고, 여러 신전에 복합 건물을 봉헌하는 등 건축 사업에도 힘썼습니다. 아마시스 왕 시대에는 국민들이 수입을 신고하는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집트는 물질적으로 번영을 누렸다고 합니다. 솔론이 이 법률을 아테네에 도입하여 훌륭한 법률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정복과 광기
키루스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아마시스 왕을 정복하려 했습니다. 이집트 의사 한 명이 캄비세스를 부추겼는데, 그는 아마시스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마시스 왕은 페르시아의 힘을 두려워하여 딸 대신 선왕의 공주를 캄비세스에게 보냈고, 캄비세스는 이에 속아 이집트 원정을 감행했습니다.
캄비세스는 용병 대장 파네스의 도움을 받아 사막을 건너 이집트로 진격했습니다. 아마시스 왕은 이미 사망했고, 그의 아들 프삼메니토스가 캄비세스를 맞아 싸웠지만 패배했습니다. 캄비세스는 멤피스를 점령하고 프삼메니토스 왕과 이집트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 굴욕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캄비세스는 이후에도 카르타고, 암몬, 에티오피아 원정을 계획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특히 에티오피아 원정 중에는 식량 부족으로 병사들이 서로 잡아먹는 참혹한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캄비세스는 멤피스로 돌아왔을 때 이집트인들이 신성한 소 아피스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아피스를 칼로 찌르고 사제들을 학대하는 등 광기를 드러냈습니다.
캄비세스는 친동생 스메르디스를 살해하고, 여동생이자 아내인 여동생도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꿈에 스메르디스가 왕좌에 앉는 것을 보고 동생을 살해했지만, 이는 마고스 형제의 계략으로 밝혀졌습니다. 캄비세스는 페르시아로 돌아가 마고스 형제를 처단하려 했지만, 말에서 떨어져 칼에 찔려 사망했습니다. 캄비세스 2세의 광기는 간질병과 정신 질환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행운의 폴리크라테스와 아마시스 왕의 충고
폴리크라테스는 혁명을 일으켜 사모스 섬의 통치자가 되었고, 연이은 성공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는 이집트 아마시스 왕과 친분을 쌓았지만, 아마시스 왕은 폴리크라테스의 계속되는 행운을 불안하게 여겨 충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마시스 왕은 신들의 질투를 경계하며, 폴리크라테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 불운을 겪으라고 조언했습니다.
폴리크라테스는 아마시스 왕의 충고를 받아들여 가장 아끼는 반지를 바다에 버렸지만, 며칠 후 잡은 물고기 뱃속에서 반지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폴리크라테스는 이 사실을 아마시스 왕에게 알렸고, 아마시스 왕은 폴리크라테스의 운명이 비극적으로 끝날 것을 예감하고 동맹을 끊었습니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원정을 준비할 때, 폴리크라테스는 반란을 일으킬 만한 시민 40명을 캄비세스에게 보내 제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모스로 돌아와 폴리크라테스에 맞섰고,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사모스를 공격했습니다. 스파르타는 과거 사모스에게 받은 은혜와 약탈당한 혼수품에 대한 복수로 원정에 참여했습니다. 코린토스 또한 과거 사모스에게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스파르타를 지원했습니다.
스파르타 군은 사모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40일 만에 철수했습니다. 폴리크라테스는 스파르타 군을 물리치고 다시 세력을 확장했지만, 사르디스 총독 오로이테스의 함정에 빠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오로이테스는 폴리크라테스를 속여 마그네시아로 유인한 후 십자가에 매달아 살해했습니다. 폴리크라테스는 죽기 전 딸의 불길한 꿈과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다레이오스 1세의 즉위와 페르시아 제국의 재편
캄비세스 2세가 죽은 후, 마고스 형제가 왕위를 찬탈했지만, 7인의 페르시아 귀족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다레이오스 1세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다레이오스 1세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마부 오이바레스의 도움을 받아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즉위 후 페르시아 제국을 20개의 주로 나누고, 각 주에 총독을 임명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다레이오스 1세는 페르시아 만 지역을 면세 지역으로 설정하고, 과거 키루스 대왕 시대의 관습을 일부 변경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아시아, 리비아, 유럽으로 구분하고, 각 지역의 특징과 민족들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특히 인도와 아라비아의 풍부한 자원과 독특한 풍습에 대해 주목했으며, 리비아 주변을 배로 탐험하여 리비아가 바다로 둘러싸인 대륙임을 밝혀냈습니다.
다레이오스 1세는 스키타이 지역의 지리적 특징과 스키타이 민족의 생활 방식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했습니다. 그는 이스트로스 강 (다뉴브 강)이 유럽에서 가장 큰 강이며, 스키타이 지역이 혹한 지대임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아마존 여인들의 후예인 사우로마타이 족의 기원과 풍습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유럽 북쪽 지역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이며, 서쪽 끝 지역에 에리다노스 강과 호박, 주석이 산출된다는 소문을 전하면서도, 그것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