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뒤발리에와 빈 살만의 잔혹한 독재: 비극적인 권력 남용의 실체와 경고
-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빈 살만의 사례를 통해 독재 권력의 잔혹성과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분석.
- 뒤발리에는 아이티를, 빈 살만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폭력과 공포로 다스림.
- 두 독재자의 행태는 권력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을 강조.
독재 권력의 잔혹한 실체: 뒤발리에와 빈 살만의 사례를 통해 본 인간성의 어두운 그림자
이번 시간에는 역사 속 독재자들의 잔혹한 행태를 통해 권력의 어두운 면과 인간성의 나약함에 대해 심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빈 살만이라는 두 인물의 사례를 중심으로, 독재 권력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를 파괴하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질 수 있는 권력 남용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인물들을 최악의 독재자로 떠올리지만, 프랑수아 뒤발리에야말로 그들을 능가하는 잔혹함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아이티의 대통령이었던 뒤발리에는 1957년부터 1971년까지, 무려 14년간 권력을 휘두르며 아이티를 극심한 공포와 빈곤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죽기 직전 19살의 어린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했다는 점입니다. 이 아들 역시 1986년까지 독재를 이어가며 아이티를 반세기 가까이 암흑 속에 가두었습니다.
원래 의사였던 뒤발리에는 '낙후된 아이티의 보건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는 그럴듯한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잡자마자 그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부인 시몬 뒤발리에가 부두교라는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 부인의 영향을 받아 뒤발리에 역시 부두교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부두교는 본래 나쁜 종교가 아니었지만, 사이비화되면서 죽음과 저주를 숭상하는 광적인 집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독재자의 특징은 숫자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뒤발리에는 대통령 취임일인 1957년 10월 22일, 그리고 숫자 22에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심지어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해 "내가 케네디 인형을 2222번 바늘로 찔러 죽였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국가 행사마저 22일에 거행하는 등 비이성적인 행태를 보였습니다.
1957년 대통령 취임 후, 초기의 '나이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1년 만에 권력에 눈이 먼 독재자로 변모했습니다. 뒤발리에는 서북청년단, 백골단과 유사한 사병 조직 '통통 마쿠트'를 결성하여 공포 정치를 시작합니다. '통통 마쿠트'는 프랑스어로 '민병대 삼촌'이라는 귀여운 이름과는 달리, 잔혹하기 짝이 없는 학살 집단이었습니다. 뒤발리에는 이들을 이용해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는데, 그 방법 또한 매우 잔인했습니다.
뒤발리에는 정적 본인이 아닌, 그 아들을 잡아와 고문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아들을 반 죽음 상태로 만들어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협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인한 투사라도 자식의 고통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것입니다. 1957년, 젊은 장교들이 뒤발리에의 폭정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뒤발리에는 쿠데타를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 세력 숙청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뒤발리에는 '반국가 세력'이라는 명목으로 300명의 숙청 대상 리스트를 작성하고, 이들을 모조리 처형했습니다. 만약 당시 젊은 장교들의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아이티는 지금과 같은 빈곤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쿠데타 진압 후, 뒤발리에에게 심장마비가 찾아와 9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사이 비서실장 바르보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는데, 9시간 만에 깨어난 뒤발리에는 바르보가 자신의 권력을 탐냈다고 의심하며 그를 체포, 구금했습니다.
권력의 허망함을 느낀 뒤발리에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1961년 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합니다. 놀랍게도 당시 선거에서 뒤발리에는 100% 찬성표를 획득합니다. 유권자 수와 찬성표 수가 정확히 일치하는 기이한 결과였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두고 "인류 역사상 가장 기이한 선거"라고 비판했습니다. 100% 득표율을 발판으로 뒤발리에는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며 연구 집권을 선언했고, 심지어 주기도문에서 하나님 이름을 빼고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는 신성모독까지 자행했습니다.
비서실장 바르보 역시 숙청 위기에 놓이자, 뒤발리에의 아들들을 납치하여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납치 시도는 실패했고, 오히려 바르보는 뒤발리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뒤발리에의 측근 부하라, 젊은 장교는 공개적으로 "뒤발리에가 권력 강화를 위해 자작극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가 도주했습니다. 분노한 뒤발리에는 부하라의 부모를 살해하고, 일곱 살짜리 아들마저 죽이려 했습니다.
진범이 바르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발리에는 부두교 사제들을 불러 바르보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사이비 사제는 "바르보는 검은 개로 변신하여 도망쳤다"는 황당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뒤발리에는 이 말을 믿고, "길거리의 모든 검은 개를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1960년대 문명사회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입니다.
뒤발리에는 반대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옆 나라 쿠바가 공산화된 것을 빌미로,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을 모조리 '빨갱이'로 낙인찍은 것입니다. 통통 마쿠트를 동원하여 반체제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는데, 그 수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반체제 인사를 잡아들여 사형시키기 전에, 그의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눈앞에서 먼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을 '역적의 씨'라 칭하며 죽이는 끔찍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의 절규를 녹음하여 정신적인 고문까지 가했습니다. 언론 탄압 또한 극심했습니다. 가짜 뉴스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비판적인 언론사들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렸습니다. 이러한 폭압적인 통치에도 불구하고, 뒤발리에는 1971년 자연사할 때까지 권력을 누렸습니다. 죽기 직전에는 19살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아이티는 86년까지 그의 아들에 의해 철권 통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뒤발리에 부자의 통치 기간 동안 반체제 인사 수십만 명이 학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최근 사례를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이야기입니다. 1985년생의 젊은 빈 살만은 아버지 살만 국왕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32년 이븐 사우드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초대 국왕은 부족 통합을 위해 정략결혼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22명의 부족장 딸들과 결혼하여 22명의 정식 부인과 35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초대 국왕은 아들들의 왕위 계승 다툼을 우려하여, 형제 세습 원칙을 정했습니다. 하지만 빈 살만의 아버지 살만 국왕은 22번째 아들로, 원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살만 국왕 직전 왕세자였던 나예프 왕자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살만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살만은 왕세자가 되었고, 아들 빈 살만에게 왕위를 물려줄 야망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곧바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비판이 쏟아질 것을 우려하여, 우선 조카인 나예프 왕자를 왕세자로 앉혔습니다. 겉으로는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처럼Show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빈 살만은 아버지와 짜고 조카 나예프에게 부정부패 혐의를 씌워 체포, 감금했습니다. 나예프는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왕세자 자리를 빈 살만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생방송 기자회견에서 빈 살만과 악수하는 나예프의 모습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왕위 찬탈 과정에 불만을 품은 왕족들이 빈 살만 제거를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 빈 살만은 왕족, 정부 고위 인사, 언론인 등 500여 명을 리츠칼튼 호텔로 불러 모았습니다.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말에 속아 모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감금이었습니다. 빈 살만은 국정원을 동원하여 호텔을 봉쇄하고, 500명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사우디 왕족 사회에는 서로 비판은 하되, 물리적인 폭력은 행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지만, 빈 살만은 이를 깨고 잔혹한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빈 살만은 500명의 왕족들을 호텔에 감금한 채 야구방망이로 무자비하게 폭행했습니다. 이를 '구타의 밤'이라고 부릅니다. 벽에 덕트 테이프로 붙여놓고 배를 집중적으로 구타하는 잔혹한 방식이었습니다. 호텔은 순식간에 거대한 감옥으로 변했고, 일부 왕족들은 아직까지도 감금되어 있다고 합니다. 빈 살만은 왕족들에게 충성 맹세와 재산 헌납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일부 왕족들은 자가용 비행기나 헬기를 이용하여 탈출을 시도했지만, 빈 살만은 군대를 동원하여 활주로를 봉쇄하고, 헬기를 격추시키는 등 철저하게 탈출을 막았습니다. 이처럼 빈 살만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우디아라비아 MZ세대들은 빈 살만을 '부정부패 척결'의 영웅으로 칭송하며 열광하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권력 찬탈과 왕족 구타의 배경에는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해외에서 빈 살만을 비판하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는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에 들어갔다가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였던 카슈끄지는 빈 살만 비판 기사를 써왔는데,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간 후 실종된 것입니다. 터키 정부 발표에 따르면, 빈 살만이 보낸 정보 요원들이 카슈끄지를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카슈끄지는 손가락이 잘리고, 산 채로 토막 살해당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사우디아라비아 내무부 소속 법의학 전문의까지 현장에 투입되었다는 점입니다. 시신 훼손을 은폐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우디 영사관 직원의 집 정원에 있는 화덕에서 시신을 불태웠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2018년에 벌어진 이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국제 사회의 비난이 쏟아지자, 빈 살만은 "나는 지시한 적이 없다. 부하들의 과잉 충성"이라고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결국 빈 살만은 사건에 가담한 부하들을 처형하며 '꼬리 자르기'에 나섰습니다. 자신의 죄를 부하에게 뒤집어씌우는 비열한 행태를 보인 것입니다.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빈 살만의 사례는 독재자의 잔혹성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2025년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경고를 던지는 듯합니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6300명 이상의 반정부 인사가 처형되었고, 빈 살만 집권 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매년 130명의 반체제 인사가 처형되고 있습니다. 유튜브나 SNS에 반정부적인 글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이나 징역형에 처해지는 현실은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방송 말미에 진행자는 최근 이순신 장군에 빗대어진 인물을 언급하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중요한 시기에 최욱, 김형진과 같은 언론인들이 중심을 잡고 진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진행자는 자신을 원균에 빗대어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언론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독재자들의 잔혹성은 유형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며, 권력에 대한 욕망은 인간을 얼마나 잔인하게 만들 수 있는지 뒤발리에와 빈 살만의 사례는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며, 독재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 가치이며, 언론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언론마저 권력에 굴복한다면, 우리 모두는 독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뒤발리에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의사 출신이었던 뒤발리에는 고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반정부 인사들을 산 채로 욕조에 황산을 풀어 넣어 고문하는 끔찍한 짓을 자행했습니다. 인간의 잔혹성은 끝이 없고, 권력은 인간을 괴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경각심을 가지고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