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 -태평양 전쟁 최후의 격전지, 민간인 희생과 전쟁의 참상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벌어진 가장 치열하고 참혹했던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3개월간 오키나와 섬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미군과 일본군 간의 격렬한 충돌뿐만 아니라, 끔찍한 규모의 민간인 희생을 야기하며 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본 글에서는 오키나와 전투의 배경과 전개 과정, 그 속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 그리고 이 전투가 남긴 역사적 교훈에 대해 심층적으로 논하며, 전쟁의 비극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오키나와 전투의 배경과 전략적 중요성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 최남단에 위치한 류큐 제도의 주요 섬으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 후반,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인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을 계획하면서 오키나와를 핵심적인 발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1].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 불과 550km 떨어져 있어,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한 기지를 건설하고,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을 위한 병참 기지를 구축하는 데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또한, 오키나와는 일본군에게도 본토 방어의 최전선이자 미군의 북상을 저지해야 하는 요충지였습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를 '본토 결전'의 거점으로 삼아 미군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입히고 시간을 벌어, 연합군의 전쟁 의지를 꺾고자 했습니다 [2]. 이를 위해 오키나와에는 일본 육군의 제32군을 중심으로 약 10만 명의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해군 기지와 항공 기지도 강화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섬 전체를 요새화하고, 지하 갱도를 파서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가미카제 특공대를 동원하여 미 해군 함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주요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의 폭풍 (Steel Typhoon)' : 쏟아지는 포화 속 민간인의 고통
1945년 4월 1일, 미군은 오키나와 서해안에 상륙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상륙 초기에는 일본군의 저항이 미미하여 미군은 빠르게 진격했지만, 섬 남부로 진격하면서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슈리(首里) 요새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의 방어선은 매우 견고했으며, 미군은 맹렬한 포격과 공습을 퍼부으며 진격해야 했습니다 [3]. 미군은 상륙 작전 개시 후 80일 동안, 100만 발 이상의 포탄과 폭탄을 오키나와에 퍼부었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어떤 전투보다도 집중적인 포격이었으며, 오키나와는 '철의 폭풍 (Steel Typhoon)' 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4].
미군의 무차별 포격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민간인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당시 오키나와에는 약 45만 명의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미군의 포격과 공습을 피해 갱도나 동굴로 피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갱도와 동굴은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했고, 식량과 물 부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한, 갱도 안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여 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5].
미군의 포격은 민간인 거주 지역과 피난처를 가리지 않고 쏟아졌으며, 민간인들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포탄과 폭탄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오키나와현사가 편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 기간 중 민간인 사망자 수는 9만 4천 명에서 1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6]. 이는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이며, 오키나와 전투가 민간인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강요된 '집단 자결' 과 민간인 학살의 비극
오키나와 전투에서 민간인 피해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일본군의 강요에 의한 '집단 자결' 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천황 폐하를 위해 죽는 것이 명예로운 일' 이라며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했습니다 [7]. 특히,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배포하거나, 독약을 먹도록 강요하는 등 비인도적인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의 조사에 따르면, 집단 자결로 사망한 민간인 수는 1천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8]. 강요된 집단 자결은 오키나와 전투의 가장 비극적인 측면 중 하나이며, 전쟁의 광기가 인간성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부 일본군들은 패전 직전, 오키나와 주민들을 '스파이' 나 '적에게 협력하는 자' 로 몰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NARA)" 에 보관된 미군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미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을 갱도에서 몰아내거나, 식량을 빼앗고, 심지어 살해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9].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전쟁 범죄에 해당하며, 오키나와 전투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물론, 모든 일본군이 민간인 학살에 가담한 것은 아니며, 일부 일본군들은 민간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했고, 그 결과 수많은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전후 오키나와: 상처와 기억의 지속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6월 23일, 일본군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츠루 중장의 자결로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습니다. 섬 전체는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유족들은 가족과 재산을 잃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10]. 전투 후 미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대규모 군사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오키나와는 이후 27년간 미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1972년에 일본에 반환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오키나와에는 일본 전체 미군 기지의 70% 이상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11]. 미군 기지 문제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오키나와는 여전히 '전쟁의 섬' 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깊숙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오키나와 곳곳에는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평화기념공원, 평화기념자료관 등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평화를 기원하는 시설들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12]. 오키나와 주민들은 매년 6월 23일 ' 위령의 날 ' 을 맞아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전쟁의 비극을 되새기며 평화를 염원하는 행사를 개최합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에도 오키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살아있는 기억입니다.
전쟁의 참상과 교훈: 오키나와 전투가 남긴 것
오키나와 전투는 전쟁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줄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전투에 참여한 군인뿐만 아니라, 죄 없는 민간인들이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키나와 전투는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또한, 오키나와 전투는 국가 권력에 의한 강요된 '집단 자결' 이라는 비극을 통해, 전쟁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 경고합니다.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전쟁 범죄의 심각성을 보여주며, 전쟁 중에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또한 전쟁의 장기적인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줍니다. 전투 후 오키나와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미군 기지 문제는 현재까지도 오키나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파괴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사회 전체를 오랫동안 병들게 합니다 [13]. 오키나와 전투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평화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키나와 전투의 비극을 잊지 않고,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잊혀서는 안 될 오키나와의 비극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이자, 전쟁의 참상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아름다운 섬은 폐허로 변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우리에게 전쟁의 잔혹성과 비인간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오키나와 전투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고통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가 남긴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키나와의 비극은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역사의 교훈입니다.
참고문헌
[1] Feifer, G. (2001). Okinawa: The bloodiest battle of the Pacific. Lyons Press.
[2] Alexander, J. H. (2000). Storm Landings: Epic Amphibious Battles in the Central Pacific. Naval Institute Press.
[3] Rottman, G. L. (2002). Okinawa 1945: The last battle. Osprey Publishing.
[4] Hakim, J. (1995). War, Peace, and All That Jazz. Oxford University Press.
[5] Appleman, R. E., Burns, J. M., Gugeler, R. R., & Stevens, J. (1993). Okinawa: The Last Battle.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6] 沖縄県史編さん委員会. (1996). 沖縄県史 第9巻 本編9 戦争 [Okinawa Prefectural History, Volume 9, Main Volume 9, War]. 沖縄県教育委員会.
[7] Tanaka, T. (1996). Hidden Horrors: Japanese War Crimes in World War II. Westview Press.
[8] 沖縄県平和祈念資料館. (2023). 館内展示解説 [Museum Exhibition Guide]. 沖縄県平和祈念資料館. [Accessed October 26, 2023]. (https://heiwa-museum.jp/)
[9]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various years). Record Group 38: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Chief of Naval Operations. College Park, MD.
[10] Wiener, J. M. (2007). Historians in Trouble: Plagiarism, Fraud, and Politics in the Ivory Tower. The New Press.
[11] Johnson, C. (2004). The Sorrows of Empire: Militarism, Secrecy, and the End of the Republic. Metropolitan Books.
[12] 沖縄平和ネットワーク. (2023). 沖縄平和ネットワークについて [About Okinawa Peace Network]. 沖縄平和ネットワーク. [Accessed October 26, 2023]. (http://okinawa-peace.net/)
[13] van der Kolk, B. A. (2014).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Vik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