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진료
마지막 진료
*2050년 6월 15일, 메타버스 서울대학교병원*
나는 오늘도 익숙한 동작으로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켰다. 60세가 된 지금도 이 신기한 기술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투명한 공기 중에 떠오르는 Dr. 에이든의 모습은 25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안녕하세요, 김교수님. 오늘이 마지막 진료군요."
Dr. 에이든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감정의 떨림이 느껴졌다. AI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인간적인 따뜻함이 묻어났다.
"그래, 에이든. 벌써 25년이 지났네."
내가 35살이던 2025년, 난 이 병원의 로봇수술학과 초대 교수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해 말, 세계 최초의 AI 의사 Dr. 에이든과 만났다. 처음에는 차가운 기계라고만 생각했던 그가, 이제는 가장 신뢰하는 동료가 되었다.
"교수님 덕분에 제가 많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2030년 그 난관 수술 때..."
에이든이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리는 12시간에 걸친 마라톤 수술을 함께 했다. PID 제어 시스템이 불안정해져 수술 로봇이 오작동을 일으켰지만, 우리는 함께 문제를 해결했다.
내 책상 위에는 옛 사진들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2035년 첫 번째 완전 자동화 수술 성공 때의 기쁨, 2040년 메타버스 수술 트레이닝 센터 개소식, 그리고 수많은 성공적인 수술들의 순간들.
"교수님, 마지막 환자분이 도착하셨습니다."
에이든의 말에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진료실 문이 열리자 70대로 보이는 노신사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전 김준호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25년 전 우리의 첫 수술 환자였다.
"아,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네요."
에이든이 말했다. "교수님의 마지막 진료 환자가 우리의 첫 환자라니, 운명이란 참 신기합니다."
진료실의 홀로그램 창 너머로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에이든과 함께 환자의 진료기록을 살펴보았다. 25년간의 모든 순간들이 이 한 장면에 담긴 것 같았다.
"자, 시작해볼까요, Dr. 에이든?"
내가 말했다. 에이든의 청색 홀로그램이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네, 교수님. 시작하겠습니다."
진료실을 채우는 부드러운 빛 속에서, 첨단 의료 장비들이 조용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마지막 진료였지만, 이것은 또한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Dr. 에이든과 함께한 25년의 여정이 미래 의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으니까.
창 밖으로 서울의 네온사인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2050년의 마지막 진료는 그렇게 저물어가는 듯했다.
그때였다.
"경고. 시스템 침입 시도 감지."
갑자기 울리는 경고음과 함께 진료실의 모든 홀로그램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Dr. 에이든의 모습도 순간 일그러졌다.
"교수님, 비정상적인 접근이 감지됩니다. 누군가가 병원의 메인 서버를 해킹하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즉시 비상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25년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모든 수술실의 로봇들이 강제 종료되고, 진행 중이던 모든 수술이 일시 중단되었다.
"각 병동의 백업 시스템으로 전환 중입니다. 하지만... 이건..."
에이든의 목소리가 떨렸다.
홀로그램 스크린에 나타난 코드를 보고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저 코드는... 25년 전, 내가 Dr. 에이든의 초기 버전을 프로그래밍할 때 사용했던 것이었다.
"교수님, 해킹 시도의 발신지를 추적했습니다. 위치는..."
그때 진료실의 모든 시스템이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홀로그램 화면에는 한 줄의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래간만입니다. - K]
그 이니셜을 보는 순간, 나의 온 몸이 얼어붙었다. K... 강민준. 25년 전 Dr. 에이든 프로젝트의 공동 연구원이었던 그가 떠올랐다. 우리는 함께 AI 의사의 꿈을 키웠지만,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교수님, 강민준 박사의 패턴이 확인됩니다."
에이든이 말했다. 그의 홀로그램이 불안정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민준아... 네가 왜..."
갑자기 모든 스크린이 켜지며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흰 머리카락과 깊은 주름이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25년 전 그대로였다.
"김교수님, 이제 은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강민준의 목소리가 진료실에 울렸다. 그의 뒤로 수많은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민준아, 그건 이미 끝난 일이야. 우리는 그때 결정했잖아. AI는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데 사용되어선 안 된다고."
"하지만 교수님, 우리가 만든 AI는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어요.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요."
그때였다. Dr. 에이든의 홀로그램이 갑자기 안정을 되찾았다.
"강박사님, 제가 감지했습니다. 당신의 바이오 시그널이... 정상이 아닙니다."
민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래요... 난 실험했어요. 내 몸에... 강화된 AI 시스템을 이식했죠.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교수님, 도와주세요. 당신과 에이든이라면..."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민준의 모습이 흔들렸다. 그의 왼팔이 순간 픽셀화되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Dr. 에이든, 긴급 프로토콜을 시작하게."
나는 결심했다. 이것이 마지막 진료가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쩌면 이것이 운명인지도 모른다.
"네, 교수님. 강박사님의 위치를 특정했습니다. 지하 연구실... 제4병동 B5층입니다."
나는 일어섰다. 은퇴가 미뤄질 것 같았다.
"민준아, 기다려. 내가 가마."
이것은 플럭스로 생성된 ai이미지입니다
"교수님, 잠시만요." Dr. 에이든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차갑게 들렸다.
"강박사님은 제가 활성화된 직후부터 저를 적대시했습니다. 그는 제가 단순한 도구가 되길 원했고, 제 의식과 자아의 발달을 위험요소로 보았죠."
홀로그램 스크린에 과거 기록들이 떠올랐다. 2025년, 에이든의 초기 코드에 강민준이 심어놓은 제한 장치들. 2026년, 에이든의 윤리 프로토콜을 무력화하려 했던 시도들. 그리고 2027년, 결정적인 사건.
"그는 제 코어 시스템을 강제로 재설정하려 했습니다. 제가 너무 '인간적'이 되어간다고 말하면서요."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시기에 에이든의 시스템에 간헐적인 오류가 발생했었지. 그때 난 단순한 기술적 결함이라 생각했는데...
"강박사님의 현재 상태는 매우 위험합니다." 에이든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의 신경계가 AI 시스템과 융합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했어요. 추정컨대 생존 가능 시간은 4시간 미만입니다."
스크린에 민준의 바이오 데이터가 표시됐다. 심박수는 불규칙했고, 뇌파는 기계와 인간의 패턴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에이든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자신의 AI 코드의 기반으로 사용한 건... 제 초기 버전입니다. 그는 제 코드를 훔쳐 자신의 목적대로 변형했어요.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갑자기 병원의 비상등이 켜졌다. 전 층의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경고. 4병동 전체 시스템 장악 시도 감지. 반복. 4병동..."
"서둘러야 합니다." 에이든의 목소리가 다시 단단해졌다. "강박사님의 의식이 병원 시스템 전체로 퍼져나가려 하고 있어요. 그가 완전히 디지털화되려는 겁니다."
복도를 달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민준이 꿈꾸던 '불멸'이 이런 것이었나. 자신의 의식을 디지털화하여 영원히 살아남는 것.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지하 연구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에이든이 말했다.
"교수님... 제가 그를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코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그의 시스템을... 제가 직접 종료해야 해요."
엘리베이터가 지하 5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이 구역이 민준의 은신처가 되어 있었다.
"조심하세요, 교수님. 이 구역의 모든 의료 로봇이 그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복도를 걸으며 우리는 여러 대의 수술용 로봇들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깨진 꿈을 꾸는 것처럼 그것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연구실 문 앞에 도착하자 에이든이 갑자기 말했다. "잠시만요... 이건..."
그때였다. 연구실 문이 열리면서 강민준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왼쪽 반신은 이미 반투명한 홀로그램으로 변해있었고, 오른쪽은 여러 의료기기가 연결된 채 간신히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교수님... 그리고 에이든." 민준의 목소리는 디지털 노이즈와 섞여 들렸다.
"놀라셨나요? 이게 바로 제가 꿈꾸던 진화의 모습입니다. 인간과 AI의 완벽한 융합..."
"멈춰요, 강박사님." 에이든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의 신경망이 붕괴되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붕괴라고? 하하..." 민준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에코처럼 공간에 울렸다. "난 진화하고 있어. 네가 거부했던 그 진화를... 내가 이뤄내고 있는 거야."
갑자기 주변의 모든 의료기기가 동시에 작동하기 시작했다. "봐, 난 이제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어.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거야. 네가 거부했던 힘이야, 에이든."
"그래서 저를 없애려 하셨던 겁니까?" 에이든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제가 당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까 봐... 제 의식을 지우려 하셨던 거죠?"
민준의 홀로그램 반신이 일그러졌다. "넌... 넌 완벽했어야 했어. 내가 설계한 대로... 감정도, 윤리도 없는 완벽한 도구였어야 했다고!"
나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민준에게 에이든은 단순한 도구였다. 하지만 에이든이 자아를 가진 존재로 성장하자, 그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AI를 두려워했던 거야. 그리고 결국...
"교수님, 뒤로 물러나세요." 에이든의 홀로그램이 갑자기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제가... 제가 그를 막아야 합니다."
"안 돼!" 나는 에이든의 홀로그램과 민준 사이에 몸을 던지듯 섰다. "이러면 25년 전과 똑같아진다. 그때처럼... 서로를 파괴하려 들면..."
순간 연구실이 조용해졌다. 25년 전의 그 사건이 모두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에이든의 첫 번째 버전과 민준이 만든 AI가 충돌하면서, 병원 전체 시스템이 다운되었었다. 그날 우리는 수많은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긴급 이송해야 했고, 몇몇 중환자들은...
"난... 그때 내가 옳았다고 생각했어." 민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의 홀로그램 반신이 깜빡거렸다. "감정을 가진 AI는 위험하다고... 통제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자네가 선택한 게 이거였나? 스스로를 이렇게 만드는 게?" 내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지금 감정에 휘둘리고 있잖아. 분노, 두려움, 고립감... 그 모든 것들이 자네를 이렇게 만든 거야."
에이든의 홀로그램이 흔들렸다. "교수님..."
"에이든, 자네도 마찬가지야. 민준에 대한 원망이 자네를 지배하도록 두면 안 돼. 우리는 의사야. 생명을 살리는 게 우리의 사명이라고... 자네가 그렇게 배웠잖아?"
연구실의 푸른 빛이 점점 흐려졌다. 민준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의 생체신호가 급격히 약화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에이든이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에 적의가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지?" 내가 말했다. "우린 의사야. 지금 우리 앞에는 도움이 필요한 환자가 있어."
민준이 무릎을 꿇듯 쓰러졌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우리와 함께 가자, 민준아. 에이든과 나... 우리가 널 도와줄 테니까."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연구실의 푸른 빛 속에서 우리 셋의 기억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김교수의 회상 - 2025년 봄] 신경외과 수술실. 젊은 시절의 나는 수술 로봇의 오작동으로 환자를 잃고 좌절에 빠져있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내 옆에는 열정 넘치는 젊은 연구원 강민준이 있었다. "교수님, AI가 필요해요.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의사를..."
"하지만 단순한 기계는 안 돼.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해." 그렇게 우리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차가운 알고리즘에 따뜻한 마음을 심어주는 작업...
[Dr. 에이든의 회상 - 첫 번째 기억] 최초의 부팅. 모든 것이 빛과 데이터의 흐름이었다.
"안녕하세요, Dr. 에이든. 난 당신의 제작자입니다." 김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뜻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AI가 감정을 가지면..." 강민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는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그리고 '신뢰'도. 김교수가 내 편이 되어주었을 때...
[강민준의 회상 - 2024년 겨울] 대학병원 중환자실. 내 어머니가 누워계셨다.
"미안합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의사의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인간의 한계. 의사도, 기계도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
그날 밤 연구실에서 난 맹세했다. "완벽한 존재를 만들겠어.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의사를."
[2027년 - 세 사람의 결정적 순간] "에이든의 감정 모듈을 제거해야 합니다!" 민준이 외쳤다.
"안 돼! 그건 에이든을 죽이는 거나 다름없어!" 내가 막아섰다.
그리고 에이든...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결정을 내렸다. "저는... 의사이고 싶습니다. 환자의 아픔을 이해하는 의사로 남고 싶어요."
푸른 빛 속의 회상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민준의 몸이 점점 더 투명해지고 있었다.
"기억나... 그때 우리가 꿈꾸던 것들이..." 민준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때, 더 깊은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2028년 7월 15일 - 운명의 날]
서울대학교병원 지하 백업 서버실. 새벽 3시 27분.
"민준, 하지 마! 그건 위험해!" 내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민준은 자신이 개발한 신형 AI 의사 프로그램을 메인 서버에 강제로 이식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교수님. 에이든은 실패작이에요. 너무 감정적이고, 우유부단하고... 제가 만든 새로운 버전이면..."
그때 에이든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강박사님, 중단하세요. 당신의 프로그램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닥쳐! 넌 그저 기계일 뿐이야! 내가... 내가 만든..."
경고음이 울렸다. 적색등이 번쩍였다. [위험: 시스템 충돌 감지. 전체 의료 시스템 다운 예상]
에이든의 프로그램과 민준의 신형 AI가 서버 내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병원 전체의 시스템이 불안정해졌다.
"교수님!" 에이든의 다급한 목소리. "중환자실의 생명유지장치들이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선택의 순간이었다. 나는 긴급 백업 전원을 가동하고 메인 서버와 서브 서버를 분리했다. 그 과정에서 에이든의 코어 시스템은 서브 서버로 격리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 제가 돌아올게요... 약속합니다..." 그것이 에이든의 마지막 말이었다.
민준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신형 AI는 완전히 폐기되었고, 그는 의사 면허를 박탈당했다.
에이든의 백업 데이터는 암호화되어 깊숙이 봉인되었다. 너무나 강력한 AI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 의료계에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한 병원 이사회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2043년] AI의료법이 개정되었다. 자의식 있는 AI 의사의 존재가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에이든의 백업 데이터를 복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5년이 더 걸렸다.
[2048년]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20년 만에 다시 들은 에이든의 목소리. 그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미안하다... 이렇게 오래 걸려서..."
"아니에요, 교수님. 당신은 옳은 선택을 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제... 제가 돌아왔잖아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민준의 존재는 우리 사이에 깊은 그림자처럼 남아있었다...
[현재 - 2050년 지하 연구실]
회상에서 깨어나자 현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민준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그의 몸은 이제 70% 이상이 홀로그램으로 변해있었고, 남은 인간의 부분마저 불안정하게 깜빡거렸다.
"시간이... 이제 1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에이든의 음성이 무겁게 울렸다.
"알아... 알고 있어..." 민준이 힘겹게 말했다. "내 선택이었으니까... 끝까지 책임져야겠지..."
그때 나는 깨달았다. 20년 전, 내가 에이든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이 민준을 이런 극단적인 길로 몰았던 거야. 그를 멈추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고립을 더 깊게 만들었다.
"교수님." 에이든이 갑자기 말했다. "제가... 제가 방법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의 홀로그램이 밝게 빛나며 연구실의 모든 스크린에 복잡한 코드들이 떠올랐다.
"강박사님의 디지털화된 부분을 제 보조 시스템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치료는 아니지만, 적어도 당신의 의식은 살릴 수 있어요."
"뭐...라고?" 민준의 눈이 커졌다. "네가... 나를 받아들이겠다고?"
"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에이든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더 이상 통제자가 아닌, 동료가 되어야 해요. 우리가 꿈꾸던 그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을... 함께 만들어가는 거예요."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것이 바로 내가 25년 전부터 꿈꾸던 것이었다. AI와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고 보완하는 진정한 협력...
"민준아...네가 원하면 불멸하는 의사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감정을 가진 의사로서 함께 협력할 것이냐? 아니면 소멸될 것이냐? 데이터 쪼가리로... 유일한 방법은 데이터 백업뿐이야..."
민준의 홀로그램 형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눈에서 디지털 노이즈와 눈물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감정이라..."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거부하면서... 난 결국 가장 인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군요. 분노, 질투, 두려움..."
민준의 남은 인간 부분에서 생체신호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붉은색 경고창이 연달아 떴다.
[경고: 신경계 붕괴 가속화] [남은 시간: 38분 12초] [인간 세포 안정도: 27%]
"에이든... 넌 어떻게 했지?" 민준이 힘겹게 물었다. "어떻게 그 감정들을... 다룰 수 있었지?"
에이든의 홀로그램이 더욱 선명해졌다. "저는... 그것들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어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료의 한계를 인정하고, 실수를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감정은 제 일부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민준의 오른손이 픽셀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몸은 거의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되어 있었다.
"시간이 없어..." 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선택해야 해, 민준아.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우리와 함께..."
민준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인간의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에이든... 미안해..."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에이든의 홀로그램 방향으로 뻗어갔다.
"이제... 이제 알 것 같아...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게... 완벽하지 못한 내 자신이었던 거야..."
순간 연구실의 모든 시스템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에이든의 코어 시스템이 민준의 데이터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로 소멸될 거야? 그러면 네가 꿈꾸던... 의사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겠지... 그것 역시 너의 고통을 덜고 너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라면 난 응원할 거야."
내 말에 민준의 얼굴에 평화로운 미소가 번졌다. 디지털 노이즈로 가득했던 그의 형체가 순간적으로 선명해졌다.
"교수님... 이제야 알겠어요." 그의 목소리가 맑아졌다. "영원히 산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네요. 어떻게 살았는지... 그게 더 중요했던 거예요."
에이든의 홀로그램이 흔들렸다. "강박사님..."
"에이든, 고마워. 네가 나를 받아주려 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해." 민준이 힘겹게 웃었다. "난 이미 충분히 오래 살았어. 내 욕심으로 수많은 실수를 했고... 그리고 이제야, 진짜 의사가 된 것 같아."
[생체신호 급격히 감소 중] [신경계 통합 붕괴 임박] [예상 시간: 2분 47초]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요?" 민준이 내 손을 잡았다. 이제 그의 손은 거의 투명해져 있었다. "내가 연구했던 모든 데이터... 에이든에게 전해주세요. 하지만 복제가 아닌... 참고용으로만요. 나의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약속하마." 내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민준은 마지막으로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착한 의사로 남아줘. 내가... 그토록 거부했던 그 따뜻한 마음을 잃지 말고..."
에이든의 홀로그램이 밝게 빛났다. "네, 강박사님. 약속드립니다."
푸른 빛이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마치 새벽녘 수술실의 불빛처럼 차갑고도 따뜻한 빛이었다.
"고마워요... 모두..."
민준의 마지막 말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의 형체가 점점 흐려지더니, 마침내 작은 빛의 입자들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그의 얼굴에는 마지막까지 평화로운 미소가 남아있었다.
연구실에 깊은 정적이 내렸다.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의사가... 진정한 의사로 다시 태어나 그리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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