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노트] 베르그송에 대한 추억
아래 글은 대학교 3학년 때 낙제점을 받았던 철학과 수업 레포트 첫 부분이다.
가독성을 위해 약간 편집하였다.
나에게 보낸 이메일에 남아 있어 복구가 가능했다.
20여년 전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신기하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과는 반대되는 말로 자넨 나를 놀라게 하는군, 설마 수세기에 걸쳐서 다듬어진 생각들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수학적인 추론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논리로 간주되어왔지 않은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모든 생각들, 인정받은 모든 관습들은 그것이 다수 군중에게 적합하기에 그렇게 되었을 뿐인 어리석은 것들일 수 있다...... 수학자들은 분명 자네가 말한 그 흔한 오류들을 널리 퍼뜨리는 데 최선을 다해왔지. 그렇지만 진실로서 퍼뜨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류임에 틀림없어. 예를 들면 좀더 가치 있는 대의 명분을 가진 예술에서 그들은 교묘하게 ‘분석’이라는 용어를 대수에 적용하도록 만들었지. 프랑스인들이 이 특정한 속임수의 원조라고 할 수 있어......
나는 추상적으로 논리적인 방식을 제외하면 어떤 다른 특정한 형태로 체계화된 논리들이 쓸모가 있다고 믿지도 않고, 당연히 그런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네. 나는 특히 수학적인 연구에서 연역되는 논리에 반박을 한다네. 수학은 형태와 양의 과학이야. 수학적인 추론은 단지 형태와 양에 대한 관찰에 적용되는 논리이지. 소위 순수 대수라는 것을 이상적인 혹은 일반적 진리라고 추정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야. 그리고 이러한 오류는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나는 그것이 그토록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미칠 지경이라네. 수학의 공리들은 결코 일반적인 진리의 공리들이 아니거든. 예를 들면 형태와 양의 관계에 있어서 진리인 것은 때로는 도덕에 있어서는 완전히 틀린 것이지.
윤리학에 있어서 부분들의 집합이 전체와 같다는 것은 대개는 사실이 아니니까. 또한 화학에서도 그 공리는 맞아떨어지지 않네. 동기를 고려해보기만 해도 그것은 틀린 이야기야. 왜냐하면 두 가지의 동기. 각각의 일정한 가치를 지닌 두 가지 동기가 합쳐졌을 때 반드시 그것이 각각의 가치의 총합만큼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거든. 단지 관계라는 범위에서만 진리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수학적인 진리들이 얼마든지 있다네. 그러나 수학자들은 그의 제한된 진리에서 시작하여 습관적으로-그리고 세상이 실지로 그렇게 상상하는 대로- 마치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적용성을 가진 것같이 주장하지. 브라이언트는 조예 깊은 그의 저서 <신화학>에서 그러한 오류와 유사한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네. ‘이교도의 우화들은 믿지는 않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망각하고 마치 그들이 현존하는 실체들인 양 그것들로부터 추론을 한다.’고 말했거든.
그러나 스스로가 이교도인 대수학자들은 바로 그 ‘이교도의 우화’를 실지로 신봉하고 그것으로부터 추론을 하지. 망각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를 혼돈시킴으로써 말이야. 간단히 말해 나는 이제까지 x²+ px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q와 같다는 것을 은밀하게 신념처럼 믿고 있지 않은 수학자를 본적이 없다네. 시험 삼아 이런 신사들에게 x²+ px가 q가 아닌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해보게. 자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일단 그 사람에게 이해시킨 후에는 가능한 한 빨리 멀찌감찌 도망가는 것이 현명할 거야. 왜냐하면 틀림없이 그는 자네를 때려눕히려고 할 테니까 말야.”
“ 물질 세계는 정신 세계와는 아주 정확한 유추들로 가득 차 있지. 그러니까 수학적인 도그마에도 어떤 특유의 진실성이 부여되고, 비유나 은유는 묘사의 장식이 될 뿐만 아니라 논쟁의 힘을 강하게 할 수 있는 거야. 예를 들어 관성의 법칙은 물리학과 형이상학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네. 물리학에서 작은 물체보다 큰 물체를 움직이기가 더 어려우며 그 이후의 운동량이 이 어려움과 비례한다는 것이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에서 높은 지능이 그보다 열등한 지능보다 더 강력하고 더 지속적이며 보다 많은 일을 하지만 그 초기 단계에서는 움직이기 시작하기가 보다 힘들고 더 망설여진다는 것이 사실이지. 다른 말로 바꾸어보세. 자네는 상점 문 위에 걸린 표지판들 중에서 어떤 것이 눈에 잘 띄는지 주의깊게 본 적이 있나?”
--<에드가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그것은 곧 자연의 법칙, 자연과학의 결론, 또는 수학이다. 예컨대, 인간은 원숭이에게 진화된 것이라고 증명된다면, 아무리 얼굴을 찌푸려 봐도 소용없는 일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엔 없다. 또한 자기 자신의 지방의 한 방울은 본질적으로 동포의 지방 몇 방울보다 더 귀중하다. 따라서 온갖 선행도, 의무도, 그 밖의 온갖 편견도 헛소리도 이 결론을 기초로 하여 해결되어야 한다고 증명된다면, 별 수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2×2는 4니까, 수학이니까 섣불리 말대꾸라도 했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모두들 소리칠 것이다. 반대란 있을 수 없다 - 이건 2×2는 4니까! 자연은 너의 의견 같은 건 듣지도 않는다.
너의 희망이야 어떻든 자연의 법칙이 너의 마음에 들건 말건 그런 건 자연에게 문제도 아니다. 너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따라서 그 결과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한다. 벽은 어디까지나 벽이니까 …… 운운, 제기랄, 도대체 이 법칙 아니, 2×2는 4식의 수학이 내 마음에 안 드는 이상 ( …… ) 물론 나는 이마빼기로 이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만한 힘을 내게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결코 이 벽과 화해하지는 않겠다. 왜냐? 내 앞에 돌 벽이 버티고 서 있으나 나는 그걸 무너뜨릴 힘이 없다는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나는 이렇게 해서 아주 중요한 두 번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사는 별이 집 한채 보다 클까 말까 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지구, 목성, 화성, 금성같이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놓은 커다란 떠돌이별들 말고도 수백개의 다른 떠돌이 별들이 있는데 어떤 것들은 너무도 작아서 망원경으로도 보기 힘들 정도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천문학자기 그런 별을 발견하면 이름 대신 번호를 매겨 준다.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나는 어린왕자가 살던 별이 소혹성 B612호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 혹성은 딱 한번, 1909년에 터키 천문학자에 의해 망원경에 잡힌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국제 천문학회에서 자신의 발견을 훌륭히 증명해 보였었다. 그러니 그가 입은 옷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어른들이란 모두 이런 식이다. 터키의 한 독재자가 국민들에게 서양식 옷을 입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강요한 것은 소혹성 B612호의 명성을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천문학자는 1920년 매우 멋있는 옷을 입고 다시 증명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두들 그의 말을 믿었다. 내가 소혹성 B612호에 관해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하고 그 번호까지 알려주는 것은 어른들 때문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긴요한 것은 물어 보는 적이 없다." 그 아이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니? 나비를 수집하는지?"라는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는 몇이고?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턱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을 보았어요" 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아, 참 좋은 집이구나!"하고 소리친다.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베르그송의 철학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즉 나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특히 학문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수확이다. 철학도에게 베르그송은 철학사 속에서 이해되겠지만 나 같은 영문학도에게 베르그송은 철학사 속에서 이해되기 보다 까뮈나 사르트르처럼 문학적인 사상가로 이해되기 쉽상이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철학도에게는 어쩌면 베르그송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배경지식의 역할을 할 수 없겠지만 나로서는 접근할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문학과 철학은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일 것이다. 굳이 문학과 철학의 정의로써 관계를 규명하지 않아도 양자가 모두 어차피 ‘인간 혹은 인생’을 탐구의 영역으로 한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한가지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양자가 모두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아무리 고상한 철학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도구인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빈약하다면 훌륭한 철학자, 문학자가 될 수 없다는 상식을 대변해 주는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베르그송의 문체(원문으로 접해 본 적이 없지만)가 유려하다는 것은 그를 다시 한번 신뢰할 수 있게끔하는 보증수표와 같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수업을 들으면서 읽었던 소설 중에 그의 철학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 몇 개 있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그것이다. <도둑맞은 편지>는 푸코가 구조주의철학에 대해 언급하면서 인용한 적이 있는 소설이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소설이다. 하지만 <지하생활자의 수기>나 <어린왕자>는 필자가 자의적으로 선택한 작품들이다.
<중략...>
‘나는 이제까지 x²+ px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q와 같다는 것을 은밀하게 신념처럼 믿고 있지 않은 수학자를 본적이 없다네. 시험 삼아 이런 신사들에게
x²+ px가 q가 아닌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해보게.’ 이 구절은 파르미니데스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단초로 인간의 지적공간의 성격을 공부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 공간은 변화가 없는 세계이며 동일률과 모순율이 만나는 수학적 공간이며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죽은 공간이었다. 변화대립의 여지가 없이 無 위에 有가 곧바로 서 있는 방식으로 있는 것, 즉 본질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표현한 이 말은 우리에게 인간의 지적 공간이 동질적인 장이며, 이 공간은 가역성, 동질성, 필연성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암시한다. 근대 과학은 이 공간 위에서 법칙을 추구하였다. 지적 공간의 성격으로 인하여 인간은 무한히 분할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이해하였고, 영원하고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논의 역설은 이러한 지적공간 위에서의 시간과 공간이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마지막으로 ‘예를 들어 관성의 법칙은 물리학과 형이상학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네.’ 란 구절을 보자.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고 했던 화이트 헤드의 탁견을 떠올린다. 이 말은 근대과학의 문제점, 아니 서양철학 전반의 문제점으로 지목했던 형상적 본질주의 법칙적 본질주의가 같은 지적공간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떠올린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같은 소박한 발견에 이르게 된다. ‘천문학자가 그런 별을 발견하면 이름 대신 번호를 매겨 준다.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별이라는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은 결국 숫자라는 상징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시간이 마치 24개의 눈금으로 표시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사고 체계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바로 여기에서 제논의 역설이 탄생하는 것이고 아킬레스가 거북이에게 경주에서 지고 마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의 지속의 발견은 큰 의의를 가진다. 진정한 시간은 변화이며 그것은 이러한 죽은 공간, 지적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생명의 탄생의 순간에 시간이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시간은 기억이 있어야만, 즉 과거를 현재 속에 보존할 수 있을 때에만 탄생하며 생명은 이러한 시간을 형성하는 존재인 것이다. 지적공간을 투사하여 운동으로 이해하게끔 하는 것은 생명의 지속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명체는 행동의 가능성으로 미래를 열어놓게 된다. 또한 생명체의 공간은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열려있으며 생명체의 시간은 생명의 존재방식이다. 이는 지적 공간의 특징인 자기동일성, 등질성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운동은 통과된 공간이 아니다. 인간은 과거기억의 총체를 가지고 미래를 뚫고 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 시.공간에 존재하는 생명은 ‘창턱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할 줄 아는 가능성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문학과 시간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올더스 헉슬리, 프란츠 카프카, 토마스 만, 토마스 울프, 윌리엄 포크너등은 크로노스와 템푸스를 구분했던 작가들이다. 예를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스티븐 디덜러스는 시계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작가들이 사용한 기법과도 연관이 있다.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은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에 사람의 정신 속에서 생각과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된다는 견해를 말하면서 처음 썼다. 현대소설의 한 소재로서의 <의식의 흐름>은 소설적 인물의 의식이 중단되지 않은 채로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계속 받아들이고 그에 반응하면서 연속되는 것을 말한다. 생각, 기억, 특히 비논리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연상이 때로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단편적 사고와 뒤섞여 흐르는 것을 말한다. <의식의 흐름>을 사실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소설가는 이야기와 논리와 수사법과 문법을 희생시키면서라도 그러한 무질서한 잡다한 흐름을 그대로 옮겨놓고자 한다. 자기의 설명이 필요하다면 극히 간결하게, 객관적으로, 삽입할 뿐이다. <의식의 흐름>을 주 소재로 삼는 소설가는 사람의 실존은 외부로 나타난 것에서보다는 정신과 정서의 끝없는 과정에서 더 잘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의 내적 실존은 외부에 나타나는 것처럼 조직적이고 논리적이 아니라 비논리적이고 파편들이 뒤섞여 연속되어 있으며 이 파편들이 연속될 수 있는 것은 잡다한 일상체험의 연속성과 자유로운 연상작용 때문이라고 믿는다.
<의식의 흐름>을 사용한 소설에서의 시간은 크로노스가 아니라 템푸스다. ‘1분 1분은 천천히, 그러나 한 시간 한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라는 피에르 막 오를랑의 <라 방드라>라는 작품의 한 구절처럼 그것은 시계판 위에 일정한 간격의 눈금을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빨리 가기도 하다가 느리게 가기도 하는 수축 팽창 가능한 시간이다.
<이하 생략...>
20년 후의 내가 본 이 글은 조금은 신선하고, 조금은 혼란스럽다.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20년 전의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