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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필독 로마사 입문: 건국 신화부터 포에니 전쟁까지 핵심 정리"

요약
  • 로마 건국 신화에서 포에니 전쟁까지 로마의 역사와 전쟁 이야기。
  • 로마의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전환과 귀족과 평민의 갈등。
  • 포에니 전쟁의 라틴 왕국과 카르타고의 충돌과 로마의 승리。

로마사 핵심 노하우: 건국 신화부터 포에니 전쟁까지

로마 건국 신화의 시작

로마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시작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에게서 비롯됩니다. 트로이가 그리스군의 목마 계략으로 함락되던 날 밤, 불바다 속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아내를 잃고 아버지, 아들, 그리고 트로이 시민들을 이끌고 탈출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방랑길에 오르게 되었고, 에게해의 델로스 섬과 트라키아를 거쳐 이탈리아 근처까지 항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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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행히도 풍랑을 만나 아프리카 북쪽의 카르타고에 표류하게 됩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 말 티루스인들이 여왕 디도를 받들어 세운 도시 국가였습니다. 당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서쪽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지중해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여왕 디도는 아이네이아스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그들의 영웅적인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이네이아스의 용맹함에 매료된 디도 여왕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아이네이아스 역시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왕국 건설이라는 운명을 잊을 수 없었던 아이네이아스는 결국 디도에게 작별을 고하고 이탈리아로 떠날 결심을 합니다. 디도는 그의 결심을 막으려 애썼지만, 아이네이아스는 단호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낸 디도 여왕은 절망한 나머지 장작더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마침내 이탈리아의 티베르 강가에 도착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그곳은 라티누스 왕이 다스리는 땅이었습니다. 라티누스 왕에게는 아름다운 딸 라비니아가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이미 투르누스 왕자를 포함한 여러 왕족들의 구혼이 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라티누스 왕은 꿈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야 한다"는 계시를 받게 됩니다.

마침 아이네이아스가 라티누스 왕에게 사신을 보내 선물을 전달하자, 라티누스 왕은 꿈의 계시를 떠올리며 아이네이아스를 자신의 사위로 맞이할 운명임을 직감합니다. 라티누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이네이아스 일행을 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투르누스 왕자는 격분하여 아이네이아스와 라티누스 왕에게 전쟁을 선포합니다.

전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아이네이아스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라티누스 왕은 전사하고 맙니다. 패배한 투르누스는 당시 강력한 도시 국가였던 에트루리아의 왕 메젠티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메젠티우스 역시 이방인들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투르누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이네이아스와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아이네이아스는 위기를 느끼고 라티누스가 다스리던 원주민들과 힘을 합치기 위해 트로이인들에게 원주민과 같은 이름으로 바꾸도록 지시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트로이인과 원주민은 하나가 되어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고, 메젠티우스는 결국 전쟁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후 아이네이아스의 후손들은 라틴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고, 그의 13대손 프로카스 왕은 두 아들,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왕위는 형 누미토르에게 이어졌지만, 동생 아물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누미토르를 몰아냈습니다.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아들들을 죽이고, 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여신의 무녀로 만들어 결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누미토르의 후손을 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어느 날 레아 실비아가 신전에 바칠 물을 뜨러 군신 마르스의 숲에 갔다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마르스에게 겁탈당하고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게 됩니다. 아물리우스는 레아 실비아를 감금하고 쌍둥이 형제를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는 차마 아이들을 죽일 수 없어 광주리에 담아 티베르 강에 띄워 보냅니다.

광주리는 강물에 떠내려가다 한 강가에 닿았고, 늑대 젖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이후 양치기 파우стуlus가 늑대 굴에서 아이들을 발견하여 자신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파우стуlus 밑에서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자신들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복수를 결심합니다.

형제는 무리를 모아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외할아버지 누미토르를 왕으로 복위시켰습니다. 그 후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지만, 도시를 세울 장소를 두고 다투다 결국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맙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명명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도시를 건설했지만, 여전히 아이를 낳을 여성들이 부족했습니다. 이에 로물루스는 이웃 사비니족과의 축제에 로마인들을 초대했고, 축제가 무르익을 무렵 사비니족 여성들을 납치해 로마 여성으로 삼았습니다. 격분한 사비니족은 로마로 쳐들어왔지만, 납치된 사비니 여성들이 오히려 로마 편을 들면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로마의 역사는 티베르 강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

초기 로마는 왕이 다스리는 도시 국가였으며, 왕은 군사 지휘권, 재판권, 제사장의 역할을 겸했습니다.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왕을 보좌했고, 평민들은 귀족의 보호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한때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기원전 6세기 말 귀족과 평민이 힘을 합쳐 에트루리아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습니다.

공화정 초기에는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크지 않았고, 심지어 로마 외부에서 온 사람들도 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초부터 평민이 귀족이 되는 길이 막히고, 정치와 제사도 귀족이 독점하게 되면서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은 귀족 중에서만 선출되었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평민들은 기원전 494년 로마에서 5km 떨어진 성산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공동체 국가를 세우려 했습니다. 로마 귀족들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 없이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은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려간 평민들을 되찾아오고, 평민들의 모임인 평민 의회와 호민관의 활동을 인정했습니다.

이후에도 귀족들은 평민의 권리를 점차 확대해 나갔고, 기원전 450년에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을 제정하여 평민을 법률적으로 보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봉합한 로마는 주변 에트루리아 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에트루리아군은 보병 전술을 사용하여 기병 중심의 로마군을 압박했습니다.

에트루리아군의 보병 전술은 그리스에서 기원전 8세기경에 발달한 것으로, 갑옷으로 무장하고 방패를 든 보병들이 밀집 대형을 이루어 싸우는 방식이었습니다. 로마군은 에트루리아군에 맞서기 위해 보병 전술로 전환해야 했고, 이를 위해 무기를 마련할 재력과 토지를 가진 평민들의 역할이 중요해졌습니다. 무기 마련은 군인 스스로 부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평민들은 빚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어느 정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보병 전술의 핵심 전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평민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난한 귀족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귀족과 평민이 단결한 로마는 주변 산악지대 종족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기원전 396년에는 에트루리아의 중심 도시 베이를 함락시켰습니다.

하지만 베이 함락 10년 후, 북쪽에서 침입한 갈리아족에게 로마는 큰 타격을 입고 함락당하는 시련을 겪습니다. 갈리아족은 로마를 약탈하고 파괴했지만,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철수했습니다. 전쟁 패배 후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다시 심화되었지만,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이 제정되면서 갈등은 완화되었습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가난한 시민들의 빚 탕감, 부자들의 토지 소유 제한, 그리고 집정관 중 한 명을 평민 중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민주적인 정치 발전을 도모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집정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위 관리를 민회에서 선출했지만, 후보자 추천은 집정관이 독점했고, 관리들은 무보수 명예직이었기에 재산이 있는 계층만이 고위 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한적인 민주주의 속에서 평민 출신이라도 유력 귀족과 손을 잡은 소수의 상층 평민만이 집정관이 될 수 있었고, 이들을 신귀족이라 불렀습니다. 신귀족은 기존 귀족과 평민 출신 부유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수세기 동안 로마 정치를 주도하게 됩니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봉합하고 체제를 정비한 로마는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로마가 국가 기반을 다져나가던 시기,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알렉산더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목표로 하던 로마에게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290년 라틴 동맹을 격파하고 라티움 지역을 점령한 후, 에트루리아와 삼니움을 차례로 정복하며 티베르 강 중심의 이탈리아 중부를 장악했습니다.

다음 목표는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장악하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였습니다. 로마군이 그리스 식민 도시들을 압박하자, 타렌툼은 그리스 본토의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피로스 왕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했고, 그의 군대는 긴 창과 코끼리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코끼리 전술은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에서 사용했던 전법이었습니다.

로마군은 코끼리를 처음 보고 당황하여 피로스 왕에게 연이어 패배했습니다. 전쟁 중 포로 교환 협상을 위해 피로스 왕 진영에 파견된 파브리키우스는 피로스 왕의 환대와 보물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며 로마인다운 기개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피로스 왕이 코끼리를 이용해 파브리키우스를 놀라게 하려 했지만,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코끼리를 칭찬하며 용맹함을 드러냈습니다.

파브리키우스의 강직함에 감동한 피로스 왕은 포로들을 무조건 석방했습니다. 이후에도 로마군의 끈질긴 저항에 지친 피로스 왕은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피로스 왕이 이탈리아에서 철군할 때까지 협상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로마 정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피로스 왕은 시칠리아 섬의 구원 요청을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떠납니다.

피로스 왕이 떠나자 로마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피로스 왕을 공격하려 했지만,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 남부 수복에 집중했습니다. 한편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와 전투를 벌이던 피로스 왕은 고립되어 카르타고와 화해했고, 카르타고 역시 로마의 배신에 분노하여 피로스 왕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배신이 배신을 낳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로마는 다시 피로스 왕의 침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미 피로스 왕의 전술과 코끼리 전법에 대한 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피로스 왕이 코끼리를 앞세워 공격해왔지만, 로마군은 화살과 불화살 마차로 코끼리들을 혼란에 빠뜨렸고, 코끼리들은 오히려 피로스 왕의 군대를 짓밟았습니다. 결국 피로스 왕은 대패하고 본국으로 돌아갔고,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로마의 세력은 시칠리아 섬을 마주보는 메시나 해협까지 확장되었습니다.

포에니 전쟁의 발발과 전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의 다음 목표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카르타고였습니다. 당시 시칠리아 섬은 카르타고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 말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식민 도시로,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성한 해상 강국이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서부, 사르데냐, 코르시카, 이베리아 반도 남동부, 북아프리카 서부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습니다. 그들은 브리타니아에서 주석을,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상아를 수입하며 지중해의 주인으로 군림했습니다.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카르타고는 육군 중심의 로마와 오랫동안 충돌 없이 지냈지만, 로마가 이탈리아 남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중해 서부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로마가 그리스 식민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면서 카르타고는 로마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시라쿠사의 용병대장 마메르티니가 왕이 죽자 메시나를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시라쿠사의 히에론 2세가 마메르티니를 공격하자, 궁지에 몰린 마메르티니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한편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오랜 논의 끝에 마메르티니를 돕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했고, 카르타고 역시 시칠리아에 군대를 증파하면서 로마와 카르타고는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264년,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포에니 전쟁의 주 전장은 시칠리아 섬이었습니다.

로마는 기습적으로 메시나를 점령하고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어 시칠리아에서의 거점을 확보했습니다. 로마군은 육지에서는 카르타고군을 압도했지만, 해군력이 약했기 때문에 해상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해전은 배를 충돌시켜 승패를 가르는 방식이었고, 로마 해군은 카르타고 해군에 비해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뾰족한 뱃머리와 갈고리 발판을 이용한 새로운 해전 전술을 개발하여 해군력을 강화했습니다. 갈고리 발판을 이용해 적선에 건너가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해상 전투의 양상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기원전 260년, 로마 해군은 시칠리아 해안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하며 해상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기세를 올린 로마는 레굴루스가 이끄는 군대를 북아프리카에 상륙시켜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했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군의 공격에 당황하여 강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레굴루스가 지나치게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협상은 결렬됩니다. 강화 협상 결렬 후 카르타고는 스파르타 용병 크산티푸스를 고용하여 로마군에 맞섰습니다.

크산티푸스는 코끼리와 기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로마군을 격파하고 레굴루스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프리카 원정군을 구원하러 가던 로마 함대가 폭풍우를 만나 대부분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바르카를 시칠리아로 파견하여 전력을 재정비하고 로마군에 반격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로마 역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부유한 시민들의 헌납으로 새로운 함대를 건조하여 해군력을 재건했습니다. 로마 해군은 다시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하고 해상 봉쇄에 성공하며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23년간 이어진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시칠리아 섬은 로마의 첫 번째 속주가 되었습니다.

로마는 시칠리아에 이어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까지 점령하고, 이탈리아 북부로 진출하여 켈트족을 격파하는 등 세력을 더욱 확장하며 대제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반면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지불하면서 국력이 크게 쇠퇴했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지만, 빼앗긴 영토와 해상권을 되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의 등장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에 복수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습니다. 특히 하밀카르 바르카는 에스파냐에 주목했습니다. 에스파냐는 풍부한 은광을 보유하고 있었고, 카르타고의 식민지가 있었기에 은을 채굴하여 국력을 회복하고 현지 주민들을 용병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밀카르에게는 9살 된 아들 한니발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에게 로마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습니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에스파냐 남부부터 점령해 나가며 현지 주민들을 카르타고 군대에 편입시키고 은광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기원전 231년에는 로마에 제1차 포에니 전쟁 배상금을 모두 갚을 정도로 국력을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하밀카르는 기원전 229년 야만족과의 전투 중 전사하고, 그의 사위 하스드루발이 뒤를 이어 에스파냐 총독이 되었습니다.

하스드루발은 군사적인 면은 한니발에게 맡기고 국력 강화에 집중했고, 두 사람의 노력으로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의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그들은 신 카르타고를 건설하여 에스파냐 식민지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21년 암살당하고, 26세의 젊은 한니발이 에스파냐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총독이 된 한니발은 아버지 하밀카르의 유지를 이어받아 로마에 대한 복수를 본격적으로 준비했습니다. 한니발은 군사들과 동고동락하며 신뢰를 쌓았고, 그의 명령에 군사들은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로마와의 전쟁 준비를 마친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한니발의 원정군은 보병 7만,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 함선 30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이었습니다. 본국 카르타고 방어를 위해 별도로 보병 2만, 기병 4천, 코끼리 20마리를 남겨두고, 에스파냐에도 일부 병력과 함대를 남겨 보급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니발 군대는 피레네 산맥을 넘는 데만 4개월이 걸릴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험준한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탈영병이 속출하고, 군사들은 추위와 피로에 지쳐갔습니다. 하지만 한니발은 군사들을 격려하며 알프스 산맥을 넘는 도전을 감행했습니다. 로마군은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알프스 산맥은 험준한 지형과 혹독한 추위 때문에 누구도 넘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난코스였습니다. 하지만 한니발은 불가능을 모르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군사들을 독려하며 9일 만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평원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코끼리를 잃었지만, 한니발의 불굴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다는 소식에 로마는 경악했습니다. 로마군은 포 강에서 한니발 군대를 요격하려 했지만 패배했고, 로마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로마는 시칠리아 주둔군까지 소환하여 한니발에 맞서기로 결정했습니다. 한니발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트레비아 강가에 매복 작전을 펼쳐 로마군을 다시 격파했습니다.

연이은 패배에도 로마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로마군은 겨울 동안 철저히 전쟁 준비를 하며 전력을 재정비했습니다. 겨울이 되자 한니발 군대는 추위와 보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코끼리 대부분이 동사했습니다. 한니발은 전진을 멈추고 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봄이 되자 로마군이 먼저 공세를 시작했고, 한니발도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진군로는 녹은 눈으로 인해 진흙탕으로 변해 군사들을 더욱 지치게 했습니다. 한니발 자신도 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아르노 강가에 이르렀을 때 로마군과 마주쳤지만, 한니발은 불리한 평지 전투를 피하고 후퇴했습니다. 로마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 군대를 추격하며 트라시메노 호수 좁은 길로 들어섰고, 그곳에서 한니발 군대의 매복에 걸려 또 다시 대패하고 플라미니우스 자신도 전사했습니다.

잇따른 패전 소식에 로마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로마는 철통같은 방어 태세에 돌입했습니다. 한니발은 로마 공격을 멈추고 군량 보급과 휴식을 취하며 다음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로마군은 지속적으로 한니발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격퇴당했습니다. 기원전 216년, 칸나에에서 로마군 8만 명과 한니발 군 4만 명이 역사적인 대격돌을 벌였습니다.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은 포위 섬멸 전술을 완벽하게 구사하여 로마군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습니다. 한니발 군은 로마군을 둥글게 포위한 후 양쪽에서 협공하여 로마군 5만 명을 전사시키고,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안겼습니다. 칸나에 전투 이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로마는 멸망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를 함락시키는 대신 군대 진격을 멈추고 원군을 기다렸습니다. 칸나에 전투 이후 한니발 군대는 3만 명 이하로 줄어들어 추가 병력 보충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르타고에서는 한니발을 시기하는 세력들이 원군 파병을 반대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카르타고는 소규모 원군만을 파견했고, 한니발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로마는 칸나에 참패에도 굴하지 않고 전력을 재건하며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에스파냐를 먼저 공격하여 한니발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스키피오는 에스파냐를 공격하여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를 격파하고 에스파냐를 로마의 손에 넣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 패배한 하스드루발은 원군을 이끌고 형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지만, 메타우로스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하고 전사했습니다. 하스드루발의 패전 소식을 접한 한니발은 절망에 빠졌지만, 로마와의 결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 본토 공격으로 전략을 바꾸고 스키피오를 아프리카로 파견했습니다.

로마의 승리와 카르타고의 멸망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군대는 아프리카 북부에 상륙하여 카르타고를 위협했습니다. 카르타고 시민들은 한니발에게 귀국을 요청했고,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15년 만에 이탈리아를 떠나 카르타고로 귀환했습니다. 한니발의 귀환에 카르타고는 다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리기는 어려웠습니다.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마지막 결전을 벌였습니다.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에서 사용했던 포위 섬멸 전술을 다시 시도했지만, 스키피오는 이미 한니발의 전술을 간파하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대는 로마군에게 대패했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자마 전투 패배 후 카르타고는 로마에 항복하고 해외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고, 함대를 해체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어야 했습니다. 패잔병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돌아온 한니발은 행정관이 되어 로마에 복수할 기회를 엿보았지만, 정적들의 모함으로 카르타고를 떠나 소아시아를 떠돌아다니며 반로마 동맹을 결성하려 했습니다.

결국 한니발은 비티니아에서 로마군에 포위되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기원전 183년,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은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여전히 강력한 상업 도시 국가였고, 전쟁 배상금을 10년 만에 모두 갚을 정도로 빠르게 재건되었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잠재력에 위협을 느끼고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간의 분쟁을 빌미로 기원전 149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볼모와 무기 인도를 요구하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으로 이주하라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카르타고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노한 카르타고 시민들은 로마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멸망을 각오한 항전을 준비했습니다.

카르타고는 3년간 로마군에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기원전 146년 로마군에 함락되었습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 시내에서 잔혹한 시가전을 벌였고, 카르타고 시는 불타 폐허가 되었습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했고, 5만 명의 생존 시민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카르타고 영토는 로마의 속주 아프리카가 되었습니다.

노예 반란과 토지 개혁의 시대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사회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노예 문제였습니다. 로마의 영토 확장에 따라 노예 숫자가 급증했지만, 로마인들은 노예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가혹하게 부려먹었습니다. 노예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곳곳에서 대규모 노예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대표적인 노예 반란은 시칠리아 섬에서 일어난 반란과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검투사 반란이었습니다. 시칠리아 노예 반란은 에우누스라는 시리아 노예가 주도했습니다. 에우누스는 예언과 요술로 노예들을 현혹하고 반란을 선동했습니다. 기원전 135년, 에우누스는 노예들을 이끌고 엔나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습니다.

에우누스의 반란 소식이 시칠리아 전역으로 퍼지면서 노예들의 봉기가 잇따랐고, 클레온이라는 또 다른 노예 지도자가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로마는 초기에는 노예 반란을 가볍게 여겼지만, 반란의 규모가 커지면서 심각성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진압군을 파견했지만, 오히려 노예 반란군의 기세만 올려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로마는 집정관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가서 반란 진압에 나섰고, 3년 만에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로마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본토와 델로스 섬, 페르가몬 왕국 등에서도 노예 반란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로마 사회는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노예 반란과 함께 로마를 괴롭힌 또 다른 문제는 군대 약화 문제였습니다.

본래 로마군은 자영농 중심의 시민군이었지만, 귀족들의 토지 겸병으로 자영농이 몰락하면서 군 복무 가능 인구가 감소하고 군대의 질이 저하되었습니다. 로마는 군대 유지를 위해 하층민까지 군인으로 징집했지만, 군대의 질적 저하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군대 약화는 로마의 영토 유지와 외세 침략 방어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일부 양심적인 로마 지배층은 토지 개혁을 통해 자영농을 육성하고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귀족들이 공유지를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노예를 이용해 대농장을 경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토지 없는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도시 빈민으로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와 좌절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 개혁을 주장하며 귀족들의 반발에 맞섰습니다. 그라쿠스는 명문 귀족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는 한니발을 격파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이었습니다. 그라쿠스는 재무관으로 에스파냐에 파견되었을 때 자영농 몰락과 군대 약화의 심각성을 직접 목격하고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라쿠스는 공유지 점유 상한선을 설정하고, 초과 토지를 농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내용의 토지 개혁 법안을 민회에 제출했습니다. 법안 시행을 위해 그라쿠스, 그의 동생 가이우스, 장인 아피우스 등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습니다. 토지 개혁 법안은 평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층인 원로원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원로원은 호민관 옥타비아누스를 매수하여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지만, 그라쿠스는 평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옥타비아누스를 호민관 직에서 해임시키고 토지 개혁 법안을 강행 통과시켰습니다. 원로원은 그라쿠스를 극도로 증오했지만, 토지 개혁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농사 자금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때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3세가 왕국을 로마에 기증하면서 재원이 마련되자, 그라쿠스는 페르가몬 왕국 재산을 농민들에게 농사 자금으로 분배하는 법안을 다시 민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원래 외교 문제는 원로원 관할이었지만, 그라쿠스는 민회의 힘으로 원로원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에 반발한 원로원은 그라쿠스 제거를 모의했습니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 임기 만료를 앞둔 그라쿠스는 재선을 시도했고, 이를 빌미로 원로원은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원로원은 스키피오 나시카를 선동하여 반대파를 규합하고 그라쿠스와 지지자들을 습격하여 300여 명을 살해하고 시신을 티베르 강에 던져버렸습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지만, 토지 개혁 특별위원회는 유지되었고,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형의 뒤를 이어 개혁 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토지 개혁은 여전히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탈리아 동맹 도시 부유층들은 공유지 반환에 반발했고, 동맹 도시 빈농들은 로마 시민권이 없어 토지 분배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원로원은 동맹 도시 토지를 개혁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켜 토지 개혁의 범위를 축소시켰습니다. 개혁파 집정관 풀비우스는 이탈리아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추진했지만, 원로원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기원전 12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당선되면서 개혁 운동은 다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가이우스는 형의 개혁을 계승하고 더욱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곡물법을 제정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저가로 곡물을 공급하고, 식민시 건설, 도로 건설 등 공공사업을 통해 빈민들을 구제하려 했습니다.

가이우스는 기사 계층을 포섭하여 원로원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고, 2년 연속 호민관에 재선되었습니다. 재선에 성공한 가이우스는 카르타고 재건 사업을 추진하며 아프리카로 건너갔지만, 그 사이 반대파들은 드루수스 호민관을 매수하여 민심을 이반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가이우스가 로마로 귀환했을 때 민심은 이미 등을 돌린 후였습니다.

하지만 가이우스는 굴하지 않고 이탈리아 동맹 시민권 부여 법안을 다시 추진했지만, 원로원과 기사 계층, 로마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또 다시 실패했습니다.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는 호민관 선거에서 낙선했고, 반대파들의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원로원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집정관 오피미우스를 진압 책임자로 임명하여 개혁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원로원은 개혁파 집회를 무력 진압하여 가이우스 지지자 3천여 명을 학살하고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가이우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지지자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과 함께 토지 개혁은 완전히 좌절되었고, 로마 사회는 더욱 심각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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