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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없는 배가 500척, 판교에서 바다 AI를 만드는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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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바다 위에 선원이 없는 배가 있다

공상과학 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2026년 7월 지금, 태평양 어딘가에서 컨테이너선이 스스로 장애물을 피하고 항로를 바꾸고 있다. 선원은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화면을 본다. 이 기술을 만든 곳은 경남 울산의 HD현대중공업이 아니라, 경기도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자회사 HD현대 아비커스다.

조선업을 철판 두드리는 산업으로만 봤다면 생각이 바뀔 이야기다. 조선업이 이미 AI 산업이 됐다.

왜 배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있나

대형 컨테이너선이 태평양을 건너는 데는 2~3주가 걸린다. 그 기간 동안 선원들은 24시간 교대로 당직을 선다. 새벽 2시에도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한다. 피로가 쌓이고 집중력이 떨어지며 사고로 이어진다. 국제해사기구 통계에 따르면 해양 사고의 약 80%가 인적 오류에서 비롯된다. 충돌, 좌초, 침몰의 대부분이 사람이 졸리고 판단이 흐려져서 생긴다.

거기에 선원 부족 문제가 겹쳤다. 전문 선원이 고령화되고, 젊은 세대는 몇 달씩 가족과 떨어져 바다에 있어야 하는 일을 기피한다. 해운 물동량은 세계 무역이 커질수록 매년 늘어나는데, 배는 늘고 사람은 준다. 자율운항은 멋져서 하는 기술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해서 하는 기술이다.

자율운항선박이 정확히 뭐냐

국제해사기구는 자율운항을 4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의사결정 지원, 컴퓨터가 정보를 주고 사람이 결정한다. 2단계는 컴퓨터가 스스로 판단하고 제어도 하며 사람은 개입을 최소화한다. 3단계는 육지에서 원격 제어, 4단계는 완전 무인이다.

HD현대 아비커스가 만든 하이나스 컨트롤(HiNAS Control)은 지금 2단계다. 레이더, 카메라, 위성 데이터로 주변 선박과 장애물을 스스로 인식하고 충돌 위험을 판단해 항로를 바꾼다. 선원은 있지만 컴퓨터가 주도한다.

이 기술이 2026년 4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르웨이 선급 DNV로부터 세계 최초로 범용 자율운항 시스템 형식승인을 받았다. 특정 배, 특정 프로젝트용이 아니라 어떤 배에도 붙일 수 있는 시스템으로 국제 공인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DNV와 3년 이상 안전 요건을 처음부터 함께 정의했기 때문에, 이 인증 자체가 향후 국제 표준의 기초가 된다. 표준을 만드는 나라가 오랫동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

HD현대 아비커스는 뭐냐

많은 사람이 아비커스를 모른다. HD현대가 자율운항만 전문으로 하기 위해 따로 만든 자회사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아비커스는 두 가지를 만든다. 하나는 하이나스 컨트롤, 컨테이너선, LNG선, 탱커 같은 대형 상선용이다. 다른 하나는 뉴보트(NeuBoat), 북미 레저보트 시장을 노리는 솔루션이다. 전 세계 레저보트 시장의 50% 이상이 북미다. 현대오토에버와 협력해 차량용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선박에 적용하고 있다. 대형선에서 쌓은 기술과 데이터를 소형선으로 확장하는 전략, 바다 위 모든 이동 수단의 자율화를 노린다.

500척이 무슨 의미냐

숫자가 말해준다. HD현대는 2023년부터 새로 짓는 모든 배에 하이나스 컨트롤을 표준 사양으로 넣기 시작했다. 추가 옵션이 아니라 기본 사양이다. 2026년 7월 기준 누적 수주 500척을 넘겼다. 전 세계 대형 상선이 약 5만 척이니 1%다. 작아 보이지만 3년 만에 만든 숫자고, 지금부터 속도가 붙는다.

2026년 1월, 국내 최대 해운사 HMM이 아비커스와 대규모 공급 계약을 맺었다. 수십 척에 동시 적용되는 신호탄이다. HMM이 검증했다는 신호가 시장에 퍼지면 다음 해운사들의 선택을 끌어낸다. 2026년 6월 그리스 포시도니아 박람회에서는 경쟁사인 HJ중공업까지 아비커스와 MOU를 맺었다. HD현대 바깥으로 플랫폼이 확장되는 순간이다.

87억 달러 시장은 왜 커지나

2026년 기준 글로벌 자율운항 선박 시장은 약 87억 달러, 우리 돈 12조원이다. 연평균 10% 이상 성장하면 10년 뒤 200억 달러가 넘는다.

커지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선원 부족은 해결되지 않고 더 나빠진다. 둘째, 연료 효율이다. 자율운항 시스템이 바람, 조류, 파도를 감안해 연료를 가장 적게 쓰는 최적 항로를 실시간으로 계산한다. 연료비가 선박 운항 원가의 40~60%다. 셋째, 환경과 보험이다. 국제해사기구의 탄소 배출 규제가 강화될수록 효율적 항해가 필요하고, 인적 오류가 줄면 사고가 줄고 보험료도 낮아진다. 해운사 입장에서 안 쓸 이유가 없어지는 구조다.

HD현대는 왜 이 타이밍에 이걸 하나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다. HD현대중공업은 2025년 매출 17조 5,806억원, 전년 대비 21.4% 증가, 영업이익 2조 375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전년 대비 188.9% 급증이다. 2026년 1분기 누적 수주는 61억 1,9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9.56% 늘었다. 돈을 잘 버는 회사가 그 돈을 자율운항에 쏟아붓고 있다. 단기 수익을 포기하고 미래를 사는 것이다.

배는 한 번 팔리면 20~30년을 바다에 있다. 2023년부터 표준으로 넣어버리면, 그 배가 다니는 내내 HD현대 소프트웨어 플랫폼 위에서 움직인다. 팔릴 때, 운항될 때, 업데이트될 때마다 돈이 들어온다. 테슬라가 자동차를 팔면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고객을 플랫폼에 묶어두는 것과 같은 전략이다. 바다 위 구독경제다. 지금 팔리는 500척에서만 20~30년치 서비스 수익이 생기고, 운항 데이터가 쌓여 다음 세대 기술을 만든다.

경쟁자는 어디 있나

핀란드, 노르웨이 콩스버그 같은 유럽 해양 기술 회사들이 경쟁자다. 하지만 한국이 유리한 이유가 규모와 통합 생태계다. 콩스버그는 배를 직접 안 만들고 기술을 납품한다. HD현대는 배도 만들고 자율운항도 한다. 자기 선박이 실험 무대고 데이터가 쌓이는 속도가 다르다. 중국이 배를 싸게 따라 만들 수는 있어도, HD현대 선박에 쌓인 실제 운항 데이터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소프트웨어는 따라오기 어려운 영역이다.

자율운항이 바꾸는 것들

일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역할이 바뀐다. 지금 선원은 키를 잡고 긴장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본다. 자율운항이 되면 모니터링하고 위기 상황에 개입하는 역할이 된다. 육지에서 여러 척을 동시에 관제하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일할 수도 있다. 항공사에 자동 항법 장치가 생긴 뒤 파일럿이 없어지지 않고 더 높은 수준의 판단을 하게 된 것과 같다.

판교에서 코드 짜는 손과 울산에서 철판을 다루는 손이 만나는 곳에서 새로운 산업이 태어나고 있다. 그 산업의 이름이 자율운항이다. 2026년 지금은 초기 시장, 표준이 완성되지 않았고 모든 해운사가 도입하지 않았다. 초기 시장에서 한국이 앞서 있다는 것, 시작점에 있다는 것이 10년 뒤 얼마나 유리한지는 나중에 알게 된다. 나중에 알면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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