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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아침의 실습실은 평소와 같았다. 책상 위에는 브레드보드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잘린 점퍼선 몇 가닥이 작은 벌레처럼 흩어져 있었다. 벽면 전원 멀티탭에는 빨간 스위치 불빛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밤새 정리를 하지 않은 듯했지만, 그것만으로 이상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곳에서는 늘 그런 일이 있었다. 늦게까지 남은 사람이 회로를 고치다 지쳐 그대로 가기도 했고, 아침에 온 사람이 조용히 다시 정리하기도 했다. 작은 흐트러짐은 이 공동 작업실의 일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훈은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가장 안쪽 책상 위에 놓인 보드 하나가 아직 전원을 받은 채였다. 연결된 LED는 완전히 꺼지지도, 제대로 켜지지도 않은 상태로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깜빡임이라기보다 숨을 고르는 것에 가까웠다.

어젯밤, 그 보드는 분명 꺼져 있었다.

지훈은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보드 옆에는 실습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마지막 줄에는 짧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

핀 7번 반응 없음. 기록 확인 필요.

그 아래는 비어 있었다. 평소라면 누군가 원인과 수정 과정을 적었을 자리였다. 저항값을 바꿨는지, GND를 다시 연결했는지, 코드에서 핀 번호를 잘못 썼는지. 실습실 사람들은 실패를 숨기기보다 남기는 쪽을 택해 왔다. 그래야 다음 사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패의 모양만 남아 있고, 실패가 지나간 길은 사라져 있었다.

지훈은 컴퓨터를 켰다. 전날 밤 자동 저장된 파일을 열었다. 스케치의 마지막 수정 시간은 23시 48분이었다. 그런데 실습 기록 폴더에는 그 시간대의 로그가 없었다. 중간에 빈칸이 생긴 것처럼, 22시 이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었다.

누락은 가끔 일어난다. 저장을 잊을 수도 있고, 파일 이름을 바꿔 다른 폴더에 넣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훈은 그 설명을 바로 믿을 수 없었다. 어젯밤의 공기 때문이었다.

시연이 끝난 뒤, 사람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누구도 크게 화내지 않았다. 대신 모두 조금씩 말을 줄였다. 가장 불편한 일은 고장 난 회로가 아니라, 고장을 본 뒤에도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는 순간에 생겼다.

첫 스케치로 LED 깜빡이기AI 생성 이미지

말하지 않는 사람들

오전 회의는 예정대로 시작됐다. 민서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오늘 할 일을 적었다.

  • 센서 입력값 재측정

  • 전원선 색상 통일

  • 코드 주석 정리

  • 금요일 발표 자료 수정

목록만 보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다. 해야 할 일은 분명했고, 각자 맡은 역할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아무도 어젯밤의 시연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우선 조도 센서 쪽부터 다시 볼게요." 민서가 말했다. "측정값이 튀는 구간이 있어서 평균 처리를 넣으면 될 것 같아요."

"핀 7번 문제는요?"

지훈의 말에 펜 끝이 잠시 멈췄다. 민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뒤쪽에 앉아 있던 도윤이 의자를 조금 뒤로 밀었다. 끌리는 소리가 실습실 바닥을 길게 긁었다.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 민서가 말했다.

"확실하지 않아서 기록을 지운 거예요?"

공기가 얇아졌다. 누군가 기침을 했고, 다른 누군가는 노트북 화면만 바라봤다. 지훈은 자신이 너무 곧게 물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지점이 있었다.

도윤이 입을 열었다.

"지운 게 아니야. 남기지 않은 거지."

"그게 달라?"

"달라. 아직 확인 안 된 걸 기록으로 남기면, 나중에 그게 사실처럼 굳어질 수 있어."

"그러면 지금은 뭐가 굳어지고 있는데?" 지훈이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쪽?"

민서가 펜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늘 문제를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회로가 꼬이면 전원부터 확인했고, 코드가 길어지면 함수로 나눴다. 사람 사이의 일도 그렇게 다룰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믿음이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 흔들렸다.

"어젯밤엔 다들 지쳐 있었어." 민서가 낮게 말했다. "말 하나가 누구 책임처럼 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고."

"책임을 묻자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시작해도 결국 그렇게 돼."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민서의 말에도 맞는 부분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 회로를 설계한 사람, 코드를 고친 사람, 센서를 납땜한 사람, 발표를 준비한 사람 모두가 얽혀 있었다. 문제 하나를 특정 사람의 실수로 몰아가면 프로젝트는 더 빨리 무너질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잘못된 연결은 그대로 남는다. 브레드보드 안쪽에서 전원과 GND가 실수로 맞닿아 있으면,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전원을 넣는 순간 문제가 드러난다. 사람 사이도 다르지 않았다.

지훈은 어젯밤 희미하게 떨던 LED를 떠올렸다. 제대로 꺼지지 못한 불빛. 사라진 로그. 말끝을 삼키던 얼굴들.

그 모든 것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락된 기록

점심시간이 지나자 실습실은 다시 평소의 소리를 되찾았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점퍼선을 꽂고 빼는 소리, 멀티미터가 책상에 닿는 가벼운 소리. 겉으로 보면 회의 때의 긴장은 이미 지나간 일 같았다.

지훈은 자신의 자리에서 오래된 백업 폴더를 열었다. 자동 저장 파일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보드에 마지막으로 올라간 코드 일부는 IDE의 임시 파일 안에 남아 있었다. 그는 파일을 복사해 따로 열었다.

이상한 점은 금방 보였다.

센서 오류를 처리하는 부분에 주석 처리된 줄이 있었다.

// if (value > limit) stopMotor();

원래라면 입력값이 위험 범위를 넘을 때 모터를 멈추는 코드였다. 그 줄이 막혀 있으면, 센서가 이상한 값을 보내도 출력 장치는 계속 움직인다. 회로가 바로 망가지는 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안전한 동작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지훈은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누가 이 줄을 막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왜 막았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시연 직전 오작동을 줄이려고 임시로 처리했을 수도 있다. 값이 너무 자주 튀어서 발표가 끊기는 걸 막으려 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임시 수정은 기록되어야 했다. 특히 안전과 관련된 줄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했다. 코드 한 줄은 작아 보이지만, 그 줄이 막는 결과는 작지 않을 수 있다.

지훈은 도윤을 찾아갔다.

도윤은 창가 쪽 책상에서 센서 값을 다시 측정하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는 지훈이 옆에 서도 바로 돌아보지 않았다.

"이 줄, 형이 막았어요?"

지훈은 노트북을 돌려 보여 주었다. 도윤의 시선이 화면에 닿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내가 봤을 땐 필요했어."

"왜 기록 안 했어요?"

"시연을 멈출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남겼어야죠."

도윤은 손을 멈췄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검은 절연테이프 조각이 붙어 있었다.

"너는 모든 걸 원칙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적어도 위험한 줄을 막았으면 말해야죠."

"그때는 위험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어. 센서 값이 계속 튀었고, 모터가 멈췄다 켜졌다 했어. 발표가 깨질 상황이었어."

"그래서 발표를 살리려고 안전 코드를 껐어요?"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지훈은 말이 날카로웠다는 걸 알았지만 거두지 않았다. 그 말은 도윤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프로젝트를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 실패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모두가 조금씩 밀어 둔 불안까지 향해 있었다.

도윤은 조용히 말했다.

"너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같은 고민을 했을 거야."

그 말은 지훈을 멈추게 했다.

그럴지도 몰랐다. 시연은 한 번뿐이고, 사람들은 결과를 기다리고, 며칠 밤을 새운 팀원들의 얼굴이 눈앞에 있다면. 그 순간에는 문제를 고치는 것보다 문제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쪽이 더 쉬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쉬운 선택이 옳은 선택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하루

오후가 되자 민서는 발표 자료에서 장치 사진을 바꿨다. 어젯밤 시연 장면은 빠지고, 낮에 다시 찍은 깨끗한 사진이 들어갔다. 선은 가지런했고, LED는 안정적으로 켜져 있었다. 사진 속 장치는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을 했다. 누군가는 전원선을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다시 맞췄고, 누군가는 센서 값을 표로 정리했다. 누군가는 발표 대본에서 "안전하게 멈춥니다"라는 문장을 "상태에 따라 동작을 조절합니다"로 바꿨다.

그 작은 수정들이 지훈의 눈에 걸렸다.

단어 하나가 빠지고, 로그 하나가 비고, 질문 하나가 뒤로 밀렸다. 큰 거짓말은 없었다. 대신 작은 회피들이 있었다. 하나하나는 설명할 수 있었지만, 모두 합치면 방향이 되었다.

지훈은 자신이 너무 의심하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공동체를 지키려면 때로는 기다려야 한다. 확인되지 않은 말을 크게 만들지 않는 신중함도 필요하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림과 외면은 닮아 있었다. 둘은 모두 잠시 멈춰 서는 모습이지만,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기다림은 사실이 드러날 자리를 남겨 두고, 외면은 그 자리를 치운다.

지훈은 실습 노트의 빈칸을 다시 떠올렸다. 그 빈칸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었다. 모두가 알고도 건드리지 않는 자리였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민서가 지훈을 복도로 불렀다. 실습실 문이 닫히자 안쪽 소리가 한 겹 낮아졌다.

"도윤 선배랑 얘기했어?"

"네."

"지훈아, 지금 이걸 크게 만들면 팀이 갈라질 수도 있어."

"이미 갈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민서는 지훈을 바라봤다. 피곤한 눈이었다. 책임을 피하려는 눈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책임을 한꺼번에 붙잡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가져가고 싶어."

"저도 그래요."

"그럼 방법을 생각해야지. 누가 잘못했는지부터 세우면 안 돼."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공개 점검을 하자고 하려고요."

민서의 표정이 굳었다.

"모두 앞에서?"

"네. 코드 변경 기록, 회로 수정, 시연 때 생긴 문제까지. 사람을 지목하지 않고 순서대로 확인하면 돼요. 대신 빠진 건 빠졌다고 말해야 해요."

"도윤 선배가 받아들일까?"

"모르죠."

"다른 사람들은?"

"불편하겠죠."

민서는 한숨을 쉬었다. "너도 불편할 거야."

"알아요."

그 대답을 하고 나서야 지훈은 자신이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걸 깨달았다.

관망을 그만두는 순간

밤이 오기 전, 지훈은 실습실 한가운데 놓인 공동 노트북을 켰다. 사람들은 하나둘 손을 멈췄다. 누가 먼저 묻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하는 듯했다.

지훈은 새 문서를 열고 제목을 적었다.

시연 이후 점검 기록

손끝이 잠시 멈췄다. 이 문서를 만드는 순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누락된 기록은 다시 말해져야 하고, 말해진 내용은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 것이다. 도윤은 자신을 공격한다고 느낄 수 있고, 민서는 팀을 흔든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지훈이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균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길어진다. 겉으로는 장치가 작동하고 발표가 끝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전원을 넣는 순간, 같은 문제가 더 큰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훈은 첫 줄을 썼다.

1. 핀 7번 출력 이상 확인. 원인 미확정.

그다음 줄을 썼다.

2. 안전 정지 코드가 임시로 비활성화된 상태 확인.

실습실은 조용했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민서는 문가에 서 있었다. 아무도 지훈을 막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지훈은 처음으로 분명히 느꼈다. 진실은 항상 큰 소리로 다가오지 않는다. 때로는 비어 있는 줄, 바뀐 단어,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의 형태로 남는다. 그것을 보았을 때 무엇을 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지훈은 문서의 마지막에 회의 시간을 적었다.

내일 오전 9시. 전체 점검.

저장 버튼을 누르자 화면 오른쪽 위에 작은 표시가 떴다.

저장 완료.

그 짧은 문구를 보고 나서야 지훈은 숨을 내쉬었다. 아직 해결된 것은 없었다. 오히려 갈등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문턱 앞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실습실 안에서는 여전히 작은 LED 하나가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이번에는 그 불빛을 그냥 지나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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