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는 남을 보는 일이 아니라 나를 잃는 일이다
비교는 처음에는 가벼운 호기심처럼 시작된다.
친구의 승진 소식, 동료의 이직, 누군가의 결혼 사진, 낯선 사람의 몸매와 여행지. 화면을 몇 번 넘겼을 뿐인데 마음이 어딘가 가라앉는다. 분명 내 하루는 조금 전까지 괜찮았다. 그런데 남의 삶을 본 뒤 갑자기 내 삶이 부족해 보인다.
비교가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질투를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다. 비교는 내 방향 감각을 망가뜨린다. 원래 내가 가고 싶던 길이 있었는데, 누군가 박수를 받는 장면을 보는 순간 내 길이 초라해 보인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속도, 관계, 일의 방식, 생활의 리듬이 갑자기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착각한다.
"나도 저걸 원해."
하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럴 때가 많다.
"나도 저 사람이 받는 인정이 갖고 싶어."
원하는 것과 부러운 것은 다르다. 원하는 것은 내 안에서 오래 남는다. 부러운 것은 남의 조명 아래에서 갑자기 커진다. 비교의 감옥에서 빠져나오려면 먼저 이 차이를 알아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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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너 자신이 되어라'는 편한 구호가 아니다
니체의 문장 중 가장 자주 소비되는 말이 있다. "너 자신이 되어라." 비슷한 말은 오늘날 자기계발 문구처럼 쓰인다. 마치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뜻처럼 들린다.
하지만 니체에게 이 말은 훨씬 더 불편한 과제에 가깝다. 그의 후기 저작 『이 사람을 보라』에는 "어떻게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1 여기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기분대로 사는 일이 아니다. 자기 안에 섞여 들어온 남의 가치, 시대의 유행, 익숙한 도덕, 인정 욕구를 하나씩 의심하는 일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자기 욕망을 남의 언어로 배운다.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몸, 좋은 인간관계, 좋은 취향. 사회는 끊임없이 '괜찮은 삶'의 사진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 사진들이 너무 선명하다는 것이다. 선명한 이미지는 판단을 대신한다. 우리는 묻기도 전에 따라가고, 선택하기도 전에 부러워한다.
니체식으로 묻는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나는 정말 이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이것을 원해야 가치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배웠는가?"
이 질문은 잔인할 수 있다. 내가 열심히 좇던 목표가 사실은 내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보지 못하면 사람은 평생 성취하면서도 허전할 수 있다. 박수는 받았는데 이상하게 나와 가까워지지 않는다. 올라갈수록 더 불안하다. 방향을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관중석의 반응이 정했기 때문이다.
'너 자신이 되어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나라고 믿어 온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빌려온 욕망인가"를 묻는 일이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달콤한 선언이 아니라 자기기만과의 싸움이다.
장자: 쓸모없어서 살아남는 것도 있다
비교는 대개 '쓸모'의 언어로 작동한다.
누가 더 생산적인가. 누가 더 빨리 성장하는가. 누가 더 많은 것을 증명했는가. 누가 더 시장에서 가치 있는가.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관리한다. 쉬는 시간도 회복 효율로 계산하고, 취미도 콘텐츠가 될 수 있는지 따지고, 관계마저 네트워크라는 말로 포장한다.
장자는 이 기준을 아주 오래전에 흔들었다. 그의 이야기에는 목수가 거대한 나무를 보고 쓸모없다고 판단하는 장면이 나온다. 목재로 쓰기에는 뒤틀렸고, 배를 만들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나무를 베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 나무는 쓸모없기 때문에 오래 산다.2
이 비유는 게으르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장자가 겨냥하는 것은 "쓸모 있는 것만 가치 있다"는 좁은 판단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볼 때도 목수처럼 판단한다.
"저 사람은 커리어가 좋다." "저 사람은 자기관리를 잘한다." "저 사람은 인맥이 넓다." "저 사람은 돈이 된다."
그 기준으로 나를 보면 내 안의 많은 것이 쓸모없어 보인다. 느린 성격, 쉽게 지치는 몸, 돈이 되지 않는 취미, 말로 잘 설명되지 않는 감수성, 남들보다 돌아가는 시간. 하지만 삶에는 바로 그런 것들이 사람을 지켜 주는 경우가 있다.
모든 능력이 시장에 제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취향이 콘텐츠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친절이 평판으로 환산될 필요도 없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이 오히려 나를 소진에서 지켜 준다.
비교의 감옥은 우리에게 계속 묻는다.
"너는 무엇에 쓸모가 있느냐?"
장자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너는 남의 목적에 쓰이느라 네 삶을 잃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은 특히 착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필요하다. 유능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불려 간다. 잘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맡게 된다.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더 자주 자기 리듬을 포기한다. 쓸모 있음이 축복이 아니라 소모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 때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을 지켜야 한다. 아무에게도 증명하지 않는 산책,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독서, 평가받지 않는 취미,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대화. 이런 시간은 겉으로는 비효율적이지만, 내 삶이 남의 요구에 전부 점령당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울타리다.
몽테뉴: 나는 정말 원하는가, 부러워서 원하는가
몽테뉴의 힘은 거창한 체계가 아니라 자기 관찰에 있다. 그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수상록』은 한 사람이 자기 생각, 습관, 변덕, 약점, 판단을 오래 관찰한 기록에 가깝다.3
비교심이 올라올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 태도다. 비교심을 부끄러워하거나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는 것이다.
"나는 왜 저 사람을 보고 흔들렸을까?" "저 사람의 무엇이 나를 찔렀을까?" "나는 그 삶 전체를 원하는가, 아니면 보이는 한 장면만 원하는가?"
몽테뉴식 자기 관찰은 감정을 고상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본다. 질투가 나면 질투가 났다고 인정한다. 다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감정을 곧바로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감정이 알려 주는 단서를 살핀다.
부러움은 나쁜 감정만은 아니다. 부러움은 내가 결핍을 느끼는 지점을 알려 준다. 문제는 그 결핍을 너무 성급하게 해석할 때 생긴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화려한 여행 사진을 보고 우울해졌다고 하자.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그 나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휴식일 수도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혹은 "나도 잘 살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 싶다"는 욕구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성공 소식에 마음이 무너졌다고 하자.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같은 직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내 노력이 인정받는 경험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너무 오래 정체되어 있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비교심은 없애야 할 쓰레기가 아니다. 잘 읽으면 내 마음의 편지다. 다만 봉투에 남의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다. 그 편지를 내 이름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SNS는 타인의 삶이 아니라 편집된 하이라이트다
SNS 비교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우리가 남의 삶 전체와 나의 삶 전체를 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의 하이라이트와 내 비하인드를 비교한다.
남이 올린 장면에는 피곤한 아침, 불안한 밤, 계산되지 않은 실수, 말 못 할 갈등이 빠져 있다. 반대로 나는 내 삶의 모든 잡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비교는 애초에 공정한 싸움이 아니다. 편집된 예고편과 원본 영상을 비교하는 일에 가깝다.
그렇다고 SNS를 전부 끊어야만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비교가 올라오는 순간 언어를 바꾸는 일이다. 마음은 질문을 받으면 잠시 멈춘다. 질문은 자동 반응에 틈을 만든다.
비교심이 올라올 때 다음 문장을 사용해 보자.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저 사람의 삶인가, 저 사람에게 쏟아지는 박수인가?"
"저 장면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까지 나는 원하는가?"
"이 부러움이 알려 주는 내 결핍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뒤처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속도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남에게 보여 주고 싶은 삶과 실제로 살고 싶은 삶은 같은가?"
"내가 오늘 지키고 싶은 나의 리듬은 무엇인가?"
이 문장들은 비교심을 즉시 없애 주지 않는다. 대신 비교를 명령에서 질문으로 바꾼다. "너도 저렇게 살아야 해"라는 압박을 "나는 무엇을 원하지?"라는 탐구로 바꾼다. 이 작은 전환이 중요하다.
남의 박수가 내 방향 감각을 망가뜨리는 순간
박수는 기분 좋은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적이다. 문제는 박수가 나침반이 될 때다.
나침반은 방향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런데 남의 박수는 자주 소리 나는 쪽으로 사람을 끌고 간다. 오늘은 이 일이 칭찬받고, 내일은 저 삶이 부러움을 산다. 박수를 따라 살면 계속 방향을 바꾸게 된다. 열심히 사는데도 이상하게 뿌리가 얕아진다.
비교의 감옥에서 나오는 기술은 남을 보지 않는 능력이 아니다. 남을 보되, 내 중심을 잃지 않는 능력이다. 누군가의 성공을 보고 배울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길이 곧 내 길이라는 결론으로 달려가지는 않아야 한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간단하다.
비교심이 강하게 올라온 사람 한 명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종이에 세 줄만 적는다.
"나는 그 사람의 무엇을 부러워했나?"
"그것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인가, 인정받고 싶어서 원하는 것인가?"
"그 부러움이 알려 준 내 삶의 작은 필요는 무엇인가?"
세 번째 답이 중요하다. 거기에 행동이 숨어 있다.
부러움이 휴식을 말하고 있다면 오늘 20분이라도 쉬어야 한다. 인정 욕구를 말하고 있다면 내가 한 일을 스스로 기록해야 한다. 성장 욕구를 말하고 있다면 아주 작은 공부나 시도를 시작하면 된다. 비교의 에너지를 자기비난으로 쓰지 말고, 내 삶을 조정하는 신호로 바꾸는 것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남보다 특별해지는 일이 아니다. 남의 박수 소리가 커질 때도 내 안의 작은 목소리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그 목소리는 처음에는 작다. 그러나 자주 물어볼수록 선명해진다.
"나는 정말 이것을 원하는가?"
비교의 감옥은 이 질문 앞에서 조금씩 문이 열린다.
참고
1Friedrich Nietzsche, Ecce Homo (Project Gut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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