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지스터만으로는 회로가 되지 않는다
작은 전구 하나를 켜려면 전구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전지, 스위치, 전선이 이어져야 합니다. 전구가 아무리 좋아도 전선이 끊겨 있으면 불은 켜지지 않습니다.
반도체 칩도 같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트랜지스터는 전류를 켜고 끄는 작은 스위치입니다. 하지만 트랜지스터 하나만으로 스마트폰의 계산이나 메모리 저장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트랜지스터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어떤 트랜지스터의 출력이 다음 트랜지스터의 입력으로 이어지고, 전원과 접지도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배선 공정입니다. 배선은 칩 안의 전기 신호가 지나가는 길입니다. 트랜지스터가 집과 건물이라면, 배선은 그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와 다리, 지하 통로입니다. 도시가 건물만으로 굴러가지 않듯, 칩도 트랜지스터만으로 동작하지 않습니다. 연결망이 있어야 실제 회로가 됩니다.
반도체 제조에서는 웨이퍼 위에 먼저 트랜지스터 같은 소자를 만들고, 그 위에 금속 배선을 쌓아 서로 연결합니다. 이 가운데 금속 배선망을 형성하는 단계를 보통 배선 공정 또는 BEOL이라고 부릅니다. BEOL은 Back End of Line의 줄임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뒤쪽'은 칩을 포장하는 패키징 단계가 아니라, 웨이퍼 위에서 소자를 만든 뒤 이어지는 배선 형성 단계를 뜻합니다. 최신 칩의 배선망은 단순한 한 층의 전선이 아니라, 여러 층으로 쌓인 복잡한 구리 배선 구조입니다1.
AI 생성 이미지
전기가 지나갈 길은 위로도, 옆으로도 이어진다
칩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회로는 평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 칩 내부는 입체 구조입니다. 아래쪽에는 트랜지스터가 있고, 그 위로 절연막과 금속 배선층이 반복해서 쌓입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길을 구분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가로 방향 배선: 같은 층에서 옆으로 신호를 보내는 금속선입니다.
세로 방향 연결: 아래층과 위층을 이어 주는 작은 금속 기둥입니다. 보통 비아라고 부릅니다.
도시로 비유하면 가로 방향 배선은 도로이고, 비아는 지하철 환승 통로 또는 엘리베이터입니다. 한 층의 도로만으로는 복잡한 도시 교통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가도로, 지하도로, 환승역이 필요합니다. 칩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많은 트랜지스터를 한 평면에서만 연결하려 하면 길이 서로 부딪히고 막힙니다. 그래서 배선을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립니다.
아래층 배선은 보통 짧고 세밀한 연결에 쓰입니다. 가까운 트랜지스터끼리 빠르게 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위쪽 배선층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굵고 긴 선이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멀리 떨어진 회로 블록을 연결하거나 전원, 접지, 클록 신호처럼 넓은 영역에 퍼져야 하는 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절연막에 길을 파고 금속을 채운다
배선 공정의 기본 생각은 단순합니다. 먼저 전기가 통하지 않는 재료를 깔고, 그 안에 길을 판 뒤, 그 길을 금속으로 채웁니다.
이때 전기가 통하지 않는 재료를 절연막이라고 합니다. 절연막은 금속 배선들이 서로 함부로 닿지 않게 막아 줍니다. 도로 사이의 중앙분리대나 건물 사이의 벽처럼, 전기 신호가 정해진 길로만 가도록 구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대표적인 구리 배선 형성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트랜지스터 위에 절연막을 얇게 쌓습니다.
포토리소그래피로 뚫을 위치와 파낼 홈의 위치를 정합니다.
식각으로 절연막에 작은 구멍과 홈을 만듭니다.
구멍과 홈 안쪽에 배리어 막과 씨앗층 같은 보조막을 깝니다.
구리 같은 금속을 채웁니다.
CMP로 표면에 남은 금속을 깎아 평평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작은 구멍은 아래층과 위층을 잇는 비아가 됩니다. 옆으로 길게 파인 홈은 같은 층에서 신호가 지나가는 금속 배선이 됩니다. 즉 절연막이라는 단단한 블록에 터널과 도랑을 파고, 그 안을 금속으로 채워 전기 길을 만드는 셈입니다. 실제 구리 배선 공정에서는 절연막에 비아와 트렌치, 즉 세로 구멍과 가로 홈을 만든 뒤 금속을 채우고 CMP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널리 쓰입니다2.
이 과정은 앞에서 본 식각, 증착, CMP가 다시 등장하는 좋은 예입니다. 포토리소그래피는 위치를 정하고, 식각은 절연막을 파고, 증착이나 도금은 금속이 들어갈 준비를 하거나 실제 금속을 채우며, CMP는 표면을 평평하게 만듭니다. 반도체 제조는 새로운 기술이 매번 따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핵심 공정이 목적에 맞게 반복되고 조합되는 과정입니다.
왜 구리를 쓰고, 왜 막으로 감싸야 할까
칩 안의 금속 배선에는 오랫동안 알루미늄이 쓰였습니다. 이후 고성능 칩에서는 구리 배선이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구리는 전기 저항이 낮아 같은 조건에서 전류가 비교적 잘 흐릅니다. 좁은 길에서도 차가 덜 막히는 도로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구리는 다루기 쉬운 재료만은 아닙니다. 구리 원자가 절연막 안으로 조금씩 스며들면 주변 재료의 전기적 성질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리 배선을 만들 때는 보통 배리어 막을 함께 사용합니다. 배리어는 말 그대로 막아 주는 장벽입니다. 구리가 절연막 쪽으로 퍼지는 것을 줄이고, 배선의 신뢰성을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또 구리를 빈틈없이 채우려면 표면 상태도 중요합니다. 아주 좁은 구멍과 홈 안쪽까지 금속이 고르게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리어 막 위에 얇은 씨앗층을 만들고, 그 위로 구리를 채우는 방식이 사용됩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세부 장비 이름을 모두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배선은 금속만 넣는 일이 아니라 금속이 새지 않게 막고, 잘 붙게 하고, 빈틈 없이 채우는 일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장벽과 보조막도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입니다. 배선 폭이 넓을 때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배선이 아주 좁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전체 길은 작아졌는데 장벽이 차지하는 비율은 커집니다. 그러면 실제로 전류가 흐를 수 있는 구리의 공간이 줄어듭니다. 길 전체 폭은 줄었는데 차선 일부를 안전벽이 차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때문에 미세 공정에서는 배선 저항, 구리 확산 방지, 빈틈 없는 금속 채움, 장기 신뢰성을 동시에 맞추는 일이 점점 어려워집니다3.
배선은 신호 속도와 전력 소모를 좌우한다
처음 반도체를 배울 때는 트랜지스터가 가장 중요해 보입니다. 실제로 트랜지스터는 칩의 기본 스위치입니다. 하지만 칩이 작아질수록 배선도 성능을 결정하는 큰 요소가 됩니다.
전기 신호는 금속 배선을 따라 이동합니다. 이때 배선에는 저항이 있습니다. 저항은 전류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길고 가는 전선일수록 저항이 커집니다. 좁고 긴 골목길에서 차가 느리게 움직이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또 배선과 배선 사이에는 정전용량이 생깁니다. 정전용량은 전하를 잠시 저장하는 성질입니다. 두 금속선이 아주 가까이 놓이고 그 사이에 절연막이 있으면, 작은 축전기처럼 행동합니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이 작은 축전기를 충전하고 방전해야 하므로 시간이 걸리고 에너지도 듭니다.
그래서 배선에서는 저항 R과 정전용량 C가 함께 문제가 됩니다. 이를 흔히 RC 지연이라고 부릅니다. 저항이 크고 정전용량도 크면, 신호가 목적지에 도착해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립니다. 트랜지스터가 아무리 빨리 켜지고 꺼져도, 신호가 배선을 지나며 늦어지면 회로 전체 속도가 떨어집니다.
이를 줄이기 위해 절연막 재료도 바뀌어 왔습니다. 배선 사이의 정전용량을 낮추기 위해 저유전율 절연막, 흔히 로우-k 절연막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k는 절연막이 전기장을 얼마나 잘 머금는지를 나타내는 값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k가 낮으면 배선 사이에 쌓이는 불필요한 전하가 줄어 신호 지연과 전력 소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4.
다만 로우-k 재료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일부 재료는 기존 절연막보다 약하고, 플라즈마 식각이나 CMP 과정에서 손상되기 쉽습니다. 배선 공정은 단순히 전기가 잘 통하는 금속을 넣는 일이 아닙니다. 빠르게 흐르게 하면서도, 서로 새지 않게 하고, 오랫동안 망가지지 않게 만드는 균형의 기술입니다.
여러 층의 배선은 도시의 도로망처럼 쌓인다
완성된 칩 안의 배선은 한눈에 보기 어려울 만큼 복잡합니다. 아래에는 트랜지스터가 촘촘히 있고, 그 위에는 금속선이 층층이 지나갑니다. 어떤 선은 바로 옆 트랜지스터와 연결되고, 어떤 선은 멀리 떨어진 회로 블록까지 신호를 보냅니다. 또 어떤 굵은 선은 전원을 공급하고, 어떤 선은 칩 전체에 박자를 맞추는 클록 신호를 전달합니다.
도시 교통을 떠올리면 구조가 자연스럽습니다. 집 앞 골목길은 좁지만 세밀한 이동에 필요합니다. 큰 도로는 멀리 가는 차량을 빠르게 보냅니다. 고속도로는 도시와 도시를 잇습니다. 중간중간 교차로와 진입로가 있어야 서로 다른 길이 연결됩니다.
칩의 배선도 비슷합니다.
아래층 배선은 세밀한 지역 도로처럼 가까운 소자들을 잇습니다.
중간층 배선은 회로 블록 사이의 신호를 전달합니다.
위층의 굵은 배선은 전원, 접지, 클록처럼 많은 곳에 필요한 신호를 나눠 줍니다.
비아는 층과 층을 이어 주는 교차로와 엘리베이터 역할을 합니다.
이 배선망이 잘 설계되어야 회로가 제대로 동작합니다. 너무 좁은 길에 신호가 몰리면 지연이 커집니다. 전원 배선이 약하면 회로가 동시에 동작할 때 전압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배선 사이 간격이 너무 가까우면 이웃 신호가 서로 영향을 주는 잡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금속선 안에서 전자가 오랫동안 강하게 흐르면 원자가 조금씩 밀려 이동하는 전자이동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는 긴 시간 뒤 배선이 가늘어지거나 끊어지는 신뢰성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배선 공정은 마무리가 아니라 또 하나의 핵심 제조 기술이다
반도체를 처음 생각하면 "트랜지스터를 잘 만들면 끝"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 칩에서는 트랜지스터와 배선이 함께 성능을 만듭니다. 트랜지스터는 신호를 만들고 판단하는 스위치이고, 배선은 그 신호를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길입니다.
배선 공정은 절연막을 쌓고, 구멍과 홈을 뚫고, 금속을 채우고, 표면을 평평하게 만드는 일을 반복합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반복 속에 칩의 속도, 전력, 면적, 수율, 신뢰성이 모두 걸려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트랜지스터 하나하나는 작은 부품입니다. 하지만 부품이 서로 이어질 때 비로소 논리 회로가 되고, 기억 장치가 되고, 프로세서가 됩니다. 배선은 그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칩 내부의 도로망입니다. 좋은 도시는 도로망이 좋아야 움직이고, 좋은 칩은 배선망이 좋아야 빠르고 안정적으로 동작합니다.
참고
1imec, How to solve the back-end-of-line RC delay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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