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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물이 잘 흐르는 길, 거의 막힌 길, 조절할 수 있는 길

전기를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면 좋은 그림은 물길이다. 어떤 길은 물이 잘 흐른다. 어떤 길은 거의 막혀 있다. 그런데 가운데에 있는 조절문을 조금 열거나 닫으면 물의 양이 달라지는 길도 있다.

전기도 비슷하다. 전자가 잘 움직이면 전류가 잘 흐른다. 전자가 거의 움직이지 못하면 전류가 흐르기 어렵다. 반도체는 이 둘 사이에 있다. 다만 여기서 '반'은 단순히 절반이라는 뜻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전기가 통하기도 하고 덜 통하기도 하는 성질을 가리킨다.

이 성질이 중요하다. 전기가 항상 잘 통하기만 하면 스위치를 만들기 어렵다. 전기가 항상 안 통하기만 해도 쓸 수 없다. 반도체가 특별한 이유는 전류를 "흐르게 할 수도 있고, 막을 수도 있고, 조금만 흐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칩이 정보를 저장하고 계산하는 큰 그림은 여기서 시작된다.

도체와 부도체 사이의 특별한 재료AI 생성 이미지

도체: 전자가 쉽게 움직이는 물질

도체는 전기가 잘 통하는 물질이다. 구리, 알루미늄, 금 같은 금속이 대표적이다. 전선에 구리가 많이 쓰이는 이유도 전자가 비교적 쉽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금속 안의 일부 전자는 원자에 단단히 붙잡혀 있지 않다. 그래서 전압을 걸어 주면 전자들이 한쪽 방향으로 조금씩 밀려 이동한다. 이 이동이 전류다.

도체는 전기를 옮기는 데 좋다. 집 안의 전선, 칩 안의 배선, 충전 케이블은 모두 전류를 잘 보내야 한다. 하지만 도체만으로는 복잡한 계산 회로를 만들기 어렵다. 전류가 너무 잘 흐르면 "켜짐" 상태는 만들기 쉽지만, "꺼짐" 상태를 작고 빠르게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도꼭지가 항상 열려 있는 것과 비슷하다. 물을 멀리 보내는 데는 좋지만, 필요한 순간에만 정확히 끊고 다시 흐르게 하기는 어렵다.

부도체: 전자가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

부도체는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물질이다. 유리, 고무, 플라스틱, 건조한 공기 등이 대표적이다.

부도체 안의 전자는 원자에 비교적 단단히 붙잡혀 있다. 보통의 전압에서는 전자가 쉽게 움직일 수 없으므로 전류가 거의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부도체는 전기를 막는 데 쓰인다. 전선 겉의 고무 피복은 안쪽 구리선의 전기가 밖으로 새지 않게 막아 준다.

칩 안에서도 부도체는 매우 중요하다. 전기가 지나가야 할 길과 지나가면 안 되는 곳을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로를 만들 때 차선과 중앙분리대가 필요한 것처럼, 회로 안에서도 전류가 흐를 길과 막힐 곳이 분명해야 한다.

하지만 부도체만으로는 칩을 만들 수 없다. 전류가 거의 흐르지 않으면 신호를 전달하거나 바꾸기 어렵다. 결국 우리는 도체와 부도체 사이의 재료가 필요하다. 바로 반도체다.

반도체: 조건을 바꾸면 성질이 달라지는 재료

반도체는 기본 상태에서는 전기가 아주 잘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막혀 있는 것도 아니다. 온도, 빛, 불순물, 전압 같은 조건을 바꾸면 전류가 흐르는 정도가 달라진다.

이 특징은 처음에는 애매해 보인다. 도체처럼 시원하게 흐르지도 않고, 부도체처럼 확실히 막지도 않는다. 하지만 전자 회로에서는 바로 이 애매함이 힘이 된다. 성질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 안의 조명을 생각해 보자. 스위치가 없다면 불은 계속 켜져 있거나 계속 꺼져 있어야 한다. 조광기가 있으면 밝기를 조금씩 바꿀 수 있다. 반도체는 전류에 대해 이런 조광기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전류를 거의 끊을 수도 있고, 많이 흐르게 만들 수도 있다.

이 조절 능력이 트랜지스터의 바탕이다. 트랜지스터는 반도체 재료 위에 만들어지는 작은 스위치다. 다음 장들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트랜지스터는 반도체의 전기적 성질을 정교하게 바꾸어 0과 1을 만든다.

실리콘 원자는 네 손을 내민다

오늘날 반도체의 대표 재료는 실리콘이다. 실리콘은 영어로 silicon, 원소 기호는 Si다. 흔히 모래와 연결해서 설명하지만, 실제 칩에 쓰이는 실리콘은 매우 높은 순도로 정제되고 결정 형태로 만들어진다. 그냥 모래를 바로 칩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실리콘 원자를 이해하려면 "네 손을 가진 원자"라고 생각하면 쉽다. 실리콘 원자는 바깥쪽에 결합에 참여하기 쉬운 전자 4개를 가지고 있다. 이 전자들은 이웃한 실리콘 원자와 서로 손을 잡듯 연결된다. 이런 연결을 공유 결합이라고 부른다. 어려운 말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전자들이 여러 원자 사이에서 짝을 이루며 안정된 구조를 만든다는 뜻이다.

순수한 실리콘에서는 대부분의 전자가 이런 결합에 묶여 있다. 그래서 금속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전자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순수한 실리콘은 구리 같은 도체보다 전기가 훨씬 덜 통한다.

그렇다고 유리나 고무처럼 전류가 거의 완전히 막히는 것도 아니다. 약간의 에너지를 받으면 일부 전자가 결합에서 벗어나 움직일 수 있다. 이때 전자가 빠져나간 자리도 전류 흐름에 영향을 준다. 이 빈자리는 나중에 '정공'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지금은 전자가 움직일 수 있는 빈자리도 생긴다고만 기억하면 충분하다.

결정 구조: 전자가 움직일 수 있는 질서 있는 길

칩에 쓰이는 실리콘은 원자들이 아무렇게나 섞인 덩어리가 아니다.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이다. 결정은 같은 무늬가 반복되는 바닥 타일과 비슷하다. 타일이 가지런하면 사람이 걷기 쉽다. 타일이 깨지고 뒤틀리면 걸려 넘어지기 쉽다.

전자도 마찬가지다. 실리콘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되면 전자가 이동할 때 예측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반대로 결정 안에 결함이 많거나 원치 않는 불순물이 섞이면 전자의 이동이 방해받는다. 칩 제조에서 실리콘 웨이퍼의 순도와 결정 품질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결정 구조가 있다고 해서 전자가 모두 자유롭게 달리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실리콘에서는 전자들이 대부분 결합에 묶여 있다. 다만 규칙적인 구조 덕분에, 조건을 바꾸었을 때 전자가 어떻게 움직일지 비교적 정교하게 조절할 수 있다. 반도체 공정은 이 조절 가능성을 이용하는 기술이다.

온도와 빛이 전자를 깨운다

반도체의 전기적 성질은 주변 조건에 민감하다. 첫 번째 조건은 온도다.

온도가 올라가면 원자들이 더 활발하게 흔들린다. 이 흔들림은 전자에게 에너지를 준다. 일부 전자는 결합에서 벗어나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반도체는 온도가 올라가면 전류가 더 잘 흐르는 경향이 있다.

금속과는 느낌이 다르다. 금속은 온도가 올라가면 원자들의 흔들림이 전자의 이동을 더 방해해서 저항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반도체는 온도가 올라가면 새로 움직일 수 있는 전자와 빈자리가 늘어나는 효과가 크다. 그래서 전류가 증가할 수 있다.

빛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빛은 에너지를 가진다. 반도체가 빛을 받으면 그 에너지를 흡수한 전자가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태양전지가 빛을 전기로 바꾸는 것도 이런 성질과 관련이 있다. 빛이 전자를 움직이게 만들고, 그 움직임을 회로로 꺼내 쓰는 것이다.

이 민감함은 장점이자 어려움이다. 원하는 신호에는 잘 반응해야 하지만, 원치 않는 열이나 빛 때문에 성질이 흔들리면 회로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그래서 반도체 설계와 제조에서는 온도, 빛, 오염, 전압 조건을 세심하게 관리한다.

불순물은 결함이 아니라 조절 도구가 될 수 있다

일상에서 불순물은 보통 나쁜 뜻으로 쓰인다. 물에 이물질이 섞이면 깨끗하지 않다고 말한다. 반도체에서도 원치 않는 불순물은 큰 문제다. 하지만 정해진 영역에 정해진 양으로 넣는 불순물은 오히려 핵심 도구가 된다.

순수한 실리콘은 전류가 많이 흐르지 않는다. 여기에 특정 원소를 아주 조금 섞으면 전류를 나르는 전자가 더 쉽게 생기거나, 전자가 빠진 빈자리가 더 쉽게 생긴다. 그러면 전류가 흐르는 정도가 크게 달라진다.

이 과정을 도핑이라고 한다. 도핑은 다음 장의 주제다. 지금은 "반도체는 불순물을 정밀하게 넣어 성질을 바꿀 수 있는 재료"라고 이해하면 된다. 도핑 덕분에 반도체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회로의 필요에 따라 성질을 설계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

왜 하필 실리콘이 중심 재료가 되었을까

반도체가 될 수 있는 재료는 실리콘만이 아니다. 초기 반도체 역사에서는 게르마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에도 갈륨비소, 질화갈륨, 탄화규소 같은 여러 반도체 재료가 쓰인다. 빠른 통신, 고전력 장치, 특수 센서에서는 실리콘이 아닌 재료가 유리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실리콘은 오랫동안 반도체 산업의 중심에 있었다. 이유는 몇 가지가 겹친다.

첫째, 실리콘과 관련된 원료가 지구에 매우 풍부하다. 실리콘 자체는 자연에서 순수한 덩어리로 흔히 발견되지는 않지만, 이산화규소 형태로 석영과 모래에 많이 존재한다. 이산화규소는 실리콘 1개와 산소 2개가 결합한 물질이며, 모래의 주요 성분인 경우가 많다1. 원료가 풍부하다는 것은 대량 생산 산업에서 큰 장점이다. 물론 칩용 실리콘을 만들려면 매우 까다로운 정제 과정이 필요하지만, 출발 재료를 구하기 쉽다는 점은 중요하다.

둘째, 실리콘은 좋은 산화막을 만들기 쉽다. 실리콘 표면을 산소나 수증기와 반응시키면 이산화규소, 즉 SiO₂ 막을 만들 수 있다. 특히 높은 온도에서 실리콘 웨이퍼 표면을 산화시키면 실리콘 위에 절연막이 직접 자라난다2. 이 점은 반도체 제조에서 매우 중요하다.

절연막은 전기가 지나가면 안 되는 곳을 막는 얇은 벽이다. 칩 안에서는 전류가 지나갈 길과 막아야 할 곳이 나노미터 단위로 나뉜다. 실리콘은 자신의 표면에 비교적 품질 좋은 절연막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작은 스위치와 복잡한 회로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데 유리했다.

셋째, 실리콘 공정은 오랜 시간 축적되며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었다. 웨이퍼를 만들고, 표면을 산화하고, 빛으로 회로를 그리고, 불순물을 넣고, 막을 쌓고 깎는 기술이 모두 실리콘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한 번 쌓인 장비와 경험, 설계 방법은 다시 실리콘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반도체의 핵심은 중간이 아니라 조절이다

반도체를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이라고 말하면 절반만 맞다. 더 중요한 말은 "조절할 수 있는 재료"다.

도체는 전류를 잘 흘려보낸다. 부도체는 전류를 잘 막는다. 반도체는 조건에 따라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다. 온도와 빛에 반응하고, 불순물의 종류와 양에 따라 성질이 바뀌며, 전압을 이용해 전류 흐름을 제어할 수 있다.

칩은 이 성질을 극한까지 정교하게 이용한 결과물이다. 실리콘 결정 위에 아주 작은 영역들을 만들고, 어떤 곳은 전자가 많게, 어떤 곳은 전자가 부족하게 만든다. 그 위에 절연막과 금속 배선을 쌓아 전류가 지나갈 길을 설계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스위치들이 모여 계산과 저장을 한다.

이번 장의 핵심은 간단하다. 반도체의 '반'은 어중간함이 아니다. 필요할 때 흐르게 하고, 필요할 때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을 실제 기능으로 바꾸는 첫 번째 방법이 바로 도핑이다.

참고

1Silicon dioxide - Wikipedia

2Silicon Oxidation Techniques - TU Wien

책 목록

반도체 만들기: 모래에서 칩까지 쉽게 이해하는 제조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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