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재의 평원
성문이 열리자 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갑옷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숨, 부러진 창끝에 맺힌 오래된 원한, 세리온의 목소리에 묶여 다시 걷는 병사들의 행렬이었다. 망령 군대는 흑요새의 그림자처럼 평원으로 밀려 나왔다.
부서진 왕국의 깃발이 바람에 찢길 듯 흔들렸다.
카엘은 말 위에서 검을 들었다. 왕자의 손은 떨렸지만, 검끝은 내려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자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 외침에 왕실 병사들이 방패를 세웠다. 해적들은 욕설을 뱉으며 도끼를 쥐었고, 순례자들은 검은 베일을 낮게 눌러썼다. 미라는 약솥 앞에 무릎을 꿇고 마지막 약병들을 세었다. 손가락이 희게 굳었다.
아렌은 깃발 아래 서 있었다. 엘루마르는 아직 칼집 안에서 침묵했다. 검을 뽑으면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그 길 끝에서 무엇을 잃게 될지 그는 알고 있었다.
리아가 그의 곁을 스치며 낮게 말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갈게. 마지막 파편은 저 괴물들의 손에 두면 안 돼."
"혼자?"
"도둑은 원래 혼자 들어가. 하지만 이번엔 도망치려고 가는 게 아니야."
아렌이 붙잡으려 했지만, 리아는 이미 검은 재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낡은 망토가 밤과 하나가 되었다.
그때 세리온의 노래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아름답고 끔찍한 선율이었다. 죽은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음에는 아주 작은 틈이 있었다. 일부러 비틀린 한 음. 살아 있는 자에게는 희망처럼 들렸고, 죽은 자에게는 명령을 흐리는 가시처럼 박혔다.
사하라가 그 틈을 들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모래에 꽂고 순례자들에게 외쳤다.
"지금이다. 죽은 발을 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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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벽, 강의 칼날
순례자들은 전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은 검을 높이 들지 않았다. 대신 허리춤의 물주머니를 터뜨리고, 검은 모래와 섞어 원을 그렸다. 사막에서 물은 생명이었다. 그 생명을 땅에 바치는 것은 가장 무거운 맹세였다.
사하라가 별을 향해 두 손을 펼쳤다.
"걷지 못한 자들아, 너희 길은 여기서 끝난다."
모래가 솟았다.
평원의 마른 흙 아래 잠들어 있던 사막의 기억이 일어나 망령들의 발목을 물었다. 죽은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마다 모래가 무릎까지 차올랐다. 검은 별의 명령은 그들을 밀었고, 순례자들의 맹세는 그들을 붙들었다.
힘의 대가는 곧 드러났다. 순례자 몇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물을 바친 자는 자기 몸의 물도 잃었다. 사하라의 입술이 갈라지고 피가 흘렀지만 그녀는 지팡이를 놓지 않았다.
그 순간 흑요새 뒤편에서 붉은 불꽃이 솟았다.
강이었다.
검은 성채의 뒤를 감고 흐르던 차가운 강 위로 칼리사의 해적 함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돛은 찢겼고 선체는 바위에 긁혀 피처럼 검은 물을 흘렸지만, 배들은 멈추지 않았다. 흰까마귀호가 선두에 섰다.
칼리사는 뱃머리 위에서 웃었다.
"바다만 내 길인 줄 알았나? 강도 물이고, 물은 빚을 기억한다!"
해적들의 갈고리가 흑요새 후방 성벽에 박혔다. 화살과 불병이 밤을 갈랐다. 성벽 위의 검은 기사들이 뒤돌아섰다. 그 한순간, 전장의 앞줄을 짓누르던 압력이 흔들렸다.
아렌은 그 틈을 보았다.
"전진!"
왕실 방패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밀고 나갔다. 해적의 불길, 순례자의 모래, 왕실의 방패가 서로 맞물렸다. 오래도록 서로를 믿지 못했던 자들이 같은 밤 아래 한 걸음을 맞추었다.
그러나 흑요새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성문 안에서 검은 기병이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 모르칸이 있었다.
약병 세 개
미라는 부상자들 사이를 뛰었다.
별문독에 중화한 약은 효과가 있었다. 약초 연기가 닿은 망령들은 검을 놓치거나, 자기 이름을 떠올린 듯 멈춰 섰다. 그 짧은 멈춤이 산 자들을 살렸다.
하지만 약은 모자랐다.
약솥 하나가 화살에 맞아 깨졌고, 남은 것은 작은 병 세 개뿐이었다. 미라 앞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배를 찔린 왕실 병사, 별문독에 심장이 검게 물든 해적 소년, 그리고 모래의 주문을 버티다 쓰러진 순례자 여인.
셋 다 살릴 수 없었다.
미라의 눈앞이 흔들렸다. 치유사는 살리는 사람이어야 했다.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은 치유사에게도 칼을 쥐여 주었다. 칼날은 약병의 목처럼 작고 차가웠다.
해적 소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 말고 저 여자에게 줘요. 난 배 밑창에서 태어나 여기까지 왔으니 많이 본 셈이야."
왕실 병사는 피 묻은 손으로 미라의 소매를 잡았다.
"왕자님을… 지켜야…"
순례자 여인은 거의 숨이 끊어져 가면서도 모래 원을 붙들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풀리면 묶여 있던 망령 수십이 다시 움직일 터였다.
미라는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약 한 병을 순례자 여인의 입에 흘려 넣었다. 두 번째는 해적 소년의 검은 혈관 위에 부었다. 마지막 병은 왕실 병사의 상처가 아니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마셔요. 그리고 걸을 수 있으면 카엘 왕자에게 가요.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목숨이 아니라 한 걸음이에요."
그는 약을 마시고 일어섰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몸이었다. 그래도 그는 방패를 들고 다시 전선으로 갔다.
미라는 빈 병을 움켜쥐었다.
별문독이 그녀의 피 속에서 속삭였다. 더 많은 죽음이 온다. 더 많은 선택이 온다.
미라는 떨리는 손으로 약초칼을 들고 자기 팔을 그었다. 검게 물든 피가 그릇에 떨어졌다.
"그럼 내 피를 써."
그녀는 치유사가 삼켜서는 안 될 독을 또 한 번 삼켰다. 그리고 그 독을 약으로 바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오명을 베는 결투
전장의 한복판에서 로반과 모르칸이 마주 섰다.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자 검은 재가 둥글게 밀려났다. 한때 같은 성의 문을 지켰던 기사들. 한 사람은 죄를 짊어지고 추방자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죄를 증오로 벼려 검은 별 아래 섰다.
모르칸이 이를 드러냈다.
"네가 문을 열어 왕을 죽게 했다. 이제 와 누구를 지키겠다는 거냐?"
로반은 방패를 고쳐 쥐었다.
"그래. 내가 문을 열었다. 피난민을 살리려고. 그 틈으로 죽음도 들어왔다. 나는 그 죄에서 도망치지 않겠다."
모르칸의 검이 로반의 어깨를 찢었다. 피가 흘렀다. 로반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죄를 핑계로 산 자들의 목을 조르고 있다. 모르칸, 네가 지키는 것은 왕국이 아니다. 네 상처다."
모르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폭풍처럼 몰아쳤다. 로반의 방패가 갈라지고, 무릎이 꺾였다. 그 순간 카엘이 뒤에서 달려들어 모르칸의 옆구리를 베었다.
"로반 경!"
모르칸은 돌아서며 검을 내리쳤다. 그 일격은 카엘의 목을 향했다.
로반이 몸을 던졌다.
검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카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로반은 피를 토하면서도 두 손으로 모르칸의 검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힘으로 자신의 부러진 검을 들어 모르칸의 목 아래 검은 왕관 문양을 찔렀다.
모르칸이 비명을 질렀다. 문양이 불타며 검은 연기가 터져 나왔다. 그는 쓰러졌지만, 죽기 전까지도 카엘을 노려보았다.
"왕국은… 하나의 의지가 아니면… 또 무너진다…"
카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무너진 자들이 다시 세우겠다. 네 방식 말고."
로반은 카엘의 팔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상할 만큼 평온한 빛이 있었다.
"폐하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카엘이 울음을 삼켰다.
"왜입니까?"
"아직 왕이 아니니까. 먼저… 살아남으십시오."
로반의 손이 떨어졌다. 숨은 남아 있었지만 너무 얕았다. 카엘은 그를 끌어안고 처음으로 왕자가 아닌 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도둑의 길
리아는 성벽 안쪽 그림자 속을 달렸다.
해적들이 후방을 흔든 덕분에 감시병의 눈은 강으로 쏠려 있었다. 리아는 부서진 배수로를 타고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돌벽은 살아 있는 살처럼 축축했고, 어딘가에서 마룬의 신음이 들렸다.
그녀는 멈추고 싶었다. 마룬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마지막 파편이 먼저였다. 모르가스의 의식이 완성되면 누구도 구할 수 없었다.
왕좌의 방 아래, 검은 제단이 있었다. 그 위에 마지막 파편이 떠 있었다. 접힌 밤하늘 같은 조각. 별빛도 어둠도 아닌 무언가가 그 안에서 천천히 숨 쉬었다.
세리온의 목소리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리아… 베어라…"
그 말이 정말 세리온의 뜻인지, 모르가스의 장난인지 알 수 없었다. 리아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함정은 셋이었다. 첫째는 그림자가 발목을 잡는 마법. 둘째는 피를 요구하는 룬. 셋째는 마음속 가장 원하는 도망길을 보여 주는 거울.
거울 속에서 리아는 배 한 척을 보았다. 혼자 떠날 수 있는 배였다. 파편도, 왕관도, 죽음도 없는 먼 바다.
예전의 리아라면 그 배에 올랐을 것이다.
그녀는 접이칼을 꺼냈다. 아렌에게 맡겼던 칼과 같은 모양의 작은 예비 칼이었다. 도망치기 위해 숨겨 둔 마지막 습관.
리아는 그 칼을 거울에 박았다.
"난 이제 혼자 살지 않아."
거울이 깨졌다. 리아는 피 묻은 손으로 파편을 낚아챘다. 순간 흑요새 전체가 울었다. 마치 성채가 오래 기다린 심장을 되찾은 것처럼.
그녀는 깨달았다.
훔친 것이 아니었다.
도둑맞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별문
리아가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전장은 불과 재와 함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순례자의 모래벽은 절반쯤 무너졌고, 해적 함대의 돛은 불타고 있었다. 미라의 약초 연기는 검은 바람에 찢겨 흩어졌다. 카엘은 피투성이가 된 로반을 뒤로 물리고 다시 검을 들었다.
아렌은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의 망령들이 길을 열듯 갈라졌다. 아니,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안으로 부르고 있었다.
리아는 파편을 높이 들었다.
"아렌!"
아렌이 돌아보았다.
네 개의 파편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별빛 조각, 붉은 산의 차가운 조각, 거울 호수의 유리 조각, 그리고 리아의 손에 든 접힌 밤하늘.
그 순간 세리온의 노래가 끊겼다.
침묵이 내려왔다.
그리고 흑요새 꼭대기에서 모르가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고맙다, 작은 도둑아. 마지막 이빨이 제자리로 왔구나."
하늘이 찢어졌다.
검은 별이 별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그것은 닫힌 눈이었다. 이제 그 눈꺼풀이 열리고 있었다. 그 안쪽에는 밤보다 깊은 문이 있었다. 별문. 하늘의 상처. 세상의 모든 불빛을 빨아들이는 입.
파편들이 아렌을 향해 날아오르려 했다. 리아가 두 손으로 붙잡았지만 손바닥이 타들어 갔다. 아렌은 그녀에게 달려갔다.
엘루마르가 칼집 안에서 처음으로 노래했다.
이번 노래는 전투의 노래가 아니었다.
왕관의 노래였다.
검은 하늘 아래, 네 파편이 하나의 둥근 그림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흑요새의 성문 안쪽에서 마룬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아렌… 쓰지 마라…"
그러나 모르가스는 웃었다.
"아르엔 발라티르. 이제 선택해라. 왕관을 쓰고 문을 닫을 것이냐, 아니면 모두가 열린 문 아래 죽게 둘 것이냐."
전장의 모든 함성이 멀어졌다.
아렌은 리아의 불탄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고개를 저었다.
"다른 길을 찾겠다고 했잖아."
아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검은 별문이 완전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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