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길을 삼키다
은빛 궁정의 호수는 사흘 만에 뒤로 사라졌다. 달빛처럼 고요하던 물과 흰 탑들은 이제 기억 속에만 남았다. 그 대신 원정대 앞에는 붉은 산맥이 솟아 있었다.
산은 멀리서도 피를 머금은 짐승처럼 보였다. 눈이 덮였는데도 바위의 결은 붉었다. 오래전 불이 산속에서 태어나 아직 죽지 않은 듯, 틈마다 검붉은 빛이 서려 있었다.
첫날에는 모두 말을 아꼈다. 둘째 날에는 농담이 나왔다. 셋째 날에는 농담조차 얼어붙었다.
"이 길을 만든 자를 만나면," 리아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나는 그자의 발가락부터 훔칠 거야."
로반이 망토를 여미며 대꾸했다.
"길을 만든 건 드워프들이다. 그들은 발가락보다 수염을 더 아낀다."
"그럼 수염을 훔치지."
미라가 얼어붙은 손으로 약초 주머니를 움켜쥐며 웃었다. 그 웃음은 작았지만, 눈보라 속에서는 불씨처럼 귀했다. 아렌도 웃으려 했다. 그러나 입술이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엘루마르는 그의 등에 묶여 있었다. 검집 안에서도 검은 낮게 울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노래였다. 아주 먼 별이 얼음 밑에서 떨리는 소리. 아렌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안쪽에서 무언가가 닳아 없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전날 밤 마룬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굵은 손, 대장간의 불빛, 검댕 묻은 앞치마는 기억났다. 하지만 눈매가 흐렸다. 웃을 때 주름이 어느 쪽으로 깊어졌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추위보다 무서웠다.
'마룬은 살아 있다.'
은빛 궁정에서 본 그 문장은 아직 가슴속에 박혀 있었다.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검은 기사들에게 잡혔을까. 아니면 그들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 있을까.
아렌은 눈을 들어 산맥을 보았다. 붉은 봉우리들 사이로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구름의 밑바닥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낮처럼 걸려 있었다.
보이면 안 되는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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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빵, 남은 발자국
식량은 빠르게 줄었다. 엘라닌이 준 말린 과일과 빵은 고귀한 향을 품고 있었지만, 배고픔 앞에서 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섯째 날 저녁, 리아는 주머니를 뒤집어 마지막 견과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우리도 다섯. 아주 훌륭하군. 한 명은 굶으면 되겠어."
"내 몫을 미라에게 줘라." 로반이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미라가 곧장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쓰러지면 누가 방패를 들어요?"
"방패 없이도 걸을 수 있다."
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 자존심이 워낙 두꺼워서 화살도 막겠지."
로반의 얼굴이 굳었다. 말 한마디가 눈보라보다 날카로워졌다.
"내 자존심이 아니라 네 손버릇 때문에 우리가 엘라닌 궁정에서 죽을 뻔했다."
리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네 충성심 때문에 왕이 죽었다고 했지? 우리 둘 다 훌륭하네. 하나는 훔쳐서 살고, 하나는 섬기다가 망쳤으니."
바람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로반의 손이 검자루로 갔다. 리아도 허리춤의 칼을 반쯤 뽑았다. 미라가 둘 사이로 들어가려 하자 세리온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피곤했고, 눈 아래에는 검은 그늘이 짙었다.
아렌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만해."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엘루마르가 등 뒤에서 작게 울었다. 리아와 로반이 동시에 그를 보았다.
아렌은 숨을 골랐다.
"우리는 모두 뭔가를 망쳤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다시 망치지 않으려고."
리아는 먼저 칼을 넣었다. 로반도 천천히 손을 내렸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금이 남았다.
그날 밤, 그들은 얼어붙은 바위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잤다. 잠들기 전 로반은 자신의 빵 반쪽을 말없이 리아 쪽으로 밀었다. 리아는 받지 않는 척하다가, 모두 눈을 감은 뒤 그것을 둘로 나누어 미라의 주머니에 넣었다.
아렌은 그 모습을 보았다. 길 위에서 쌓이는 것은 상처만이 아니었다. 부끄러워 말하지 못한 작은 선의도 있었다.
아침이 되자 세리온이 눈밭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검은 나뭇가지로 얼음 위에 무언가를 긋고 있었다. 원, 선, 별자리. 그리고 그 중심에 가시관 같은 표시.
아렌이 다가가자 세리온은 손바닥으로 그림을 문질러 지웠다.
"뭐 하고 있었어요?"
"길을 계산했다."
"그건 길이 아니었어요. 별이었죠."
세리온은 잠시 아렌을 보았다. 늘 웃음이 먼저 오던 얼굴에 웃음이 없었다.
"산에서는 별이 길이다."
"검은 별도요?"
대답은 없었다. 멀리서 까마귀 울음이 들렸다. 이 산맥에 들어온 뒤 처음 듣는 새소리였다. 그러나 리아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건 새가 아니야."
눈보라 너머 검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새가 아니라 깃발이었다. 작고 낮게, 능선 아래를 따라오는 검은 깃발들.
검은 기사들이었다.
붉은 절벽의 균열
그들은 달렸다. 달린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넘어지고 기어오르고 다시 일어났다. 산길은 왼쪽으로 붉은 절벽, 오른쪽으로 흰 낭떠러지를 끼고 이어졌다.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골짜기를 채우고 있었다.
뒤쪽 능선에서 쇠나팔 소리가 울렸다.
낮고 긴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눈이 떨렸다. 산이 잠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멈추지 마!" 로반이 외쳤다.
그가 뒤를 돌아 방패를 들었다. 검은 화살 하나가 날아와 방패에 박혔다. 박힌 자리에서 서리가 검게 번졌다.
세리온이 손가락을 튕기자 푸른 불꽃이 피어올라 화살대를 태웠다. 그러나 그의 손끝도 같이 떨렸다. 그는 예전보다 빨리 지쳤다. 숨을 몰아쉬며 다시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산이 갈라졌다.
처음에는 작은 금이었다. 리아의 발밑에서 바위가 쩍 하고 울었다. 다음 순간 눈과 돌이 함께 꺼졌다. 리아가 비명을 삼키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리아!"
로반이 몸을 던졌다. 그는 방패를 버리고 낭떠러지 끝에 엎드려 리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충격으로 그의 어깨가 빠질 듯 뒤틀렸다.
"놓지 마, 늙은 기사!" 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말을 줄이면 더 오래 버틴다!"
"그 충고는 네가 먼저 들어!"
그들의 발밑 절벽이 다시 무너졌다. 로반의 몸도 앞으로 끌려갔다. 아렌이 달려가 그의 허리띠를 잡았다. 미라가 아렌의 망토를 움켜쥐었다. 세리온은 바위에 단검을 박아 미라의 허리끈을 걸었다.
한 줄로 이어진 사람들이 눈 위에서 삐걱거렸다.
아래에서 리아가 웃었다. 죽음의 입 앞에서 나온 미친 웃음이었다.
"로반!"
"왜!"
"나 사실 네 방패에 숨겨 둔 은화 두 닢 훔쳤어!"
로반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올라오면 돌려받겠다!"
"그 말을 들으니 꼭 살아야겠네!"
아렌은 엘루마르를 뽑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검을 쓰면 어둠도, 얼음도, 바위도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검이 요구하는 대가를 알았다. 또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 마룬의 얼굴이 더 흐려질지도 모른다.
그때 모르가스의 목소리가 눈보라 속에서 속삭였다.
검을 뽑아라. 왕은 주저하지 않는다. 네가 망설이는 동안 네 사람은 죽는다.
아렌의 손이 검자루에 닿았다.
그러나 리아가 아래에서 소리쳤다.
"아렌! 그 검 뽑지 마! 네 눈빛이 또 이상해!"
로반도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리는 짐이 아니다. 당겨라!"
그 말이 아렌을 붙잡았다.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맨손으로 로반의 허리띠를 감고, 발뒤꿈치를 바위틈에 박았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피가 눈 위에 떨어져 붉게 번졌다.
미라가 울음 섞인 소리로 셋을 끌어당겼다. 세리온의 단검이 바위에서 밀려나며 불꽃을 튀겼다. 마지막 순간 로반이 자신의 어깨가 부서질 듯한 힘으로 리아를 던지듯 끌어올렸다.
리아가 눈 위로 굴러 올라왔다. 곧이어 로반도 아렌에게 잡혀 쓰러졌다.
모두 숨만 쉬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리아가 먼저 로반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목에는 살이 벗겨진 자국이 깊었다.
"멍청하긴."
로반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도둑 하나 구하려고 기사 맹세를 더럽혔군."
"아니." 리아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그 맹세가 좀 쓸모 있었어."
그 말에 로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굳은 얼굴이 아주 조금 풀렸다.
밤마다 별을 세는 자
추격자들은 절벽 붕괴 때문에 길을 잃은 듯했다. 원정대는 좁은 동굴에서 밤을 보냈다. 동굴 안에는 오래된 드워프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미라는 그중 일부를 더듬어 읽었다.
"불 아래 길이 있고, 길 아래 왕좌가 있다."
"좋군." 리아가 젖은 장갑을 짜며 말했다. "왕좌가 있으면 의자라도 있겠지. 나는 이제 바닥에 앉기 싫어."
로반은 그녀를 흘겨보았지만, 전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다.
아렌은 잠들지 못했다. 엘루마르의 노래가 낮아졌다 높아지기를 반복했다. 검은 별이 산 너머에서 그 노래에 대답하는 것 같았다.
한밤중, 그는 세리온이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렌은 조용히 뒤따랐다. 바깥은 눈보라가 멎어 있었다. 하늘은 칼날처럼 맑았다. 무수한 별 사이, 검은 별 하나가 빛을 삼키며 떠 있었다. 빛나지 않는데도 보였다. 그것은 별이라기보다 하늘에 난 구멍 같았다.
세리온은 낡은 양피지를 펼쳐 그 위치를 기록했다. 이미 수많은 점과 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 선들은 산맥을 지나 동쪽으로, 다시 남쪽으로 꺾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행군로처럼.
"또 길을 계산하는 건가요?" 아렌이 물었다.
세리온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돌렸다.
"검은 별은 움직인다."
"별은 원래 움직이잖아요."
"이건 하늘을 따라 움직이지 않아. 우리를 따라온다."
아렌의 목덜미가 차가워졌다.
"왜 숨겼어요?"
세리온은 양피지를 접지 않았다. 대신 아렌에게 보이도록 들었다.
"네가 이미 충분히 무겁게 걷고 있어서."
"그건 이유가 아니에요."
"맞다." 세리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겁이 났다. 검은 별이 우리를 따라오는 게 아니라, 네 안의 파편들을 따라오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죽음을 데려가는 것이라면."
아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노가 먼저 올라왔지만, 그 아래에는 더 깊은 두려움이 있었다. 세리온의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했어야죠."
"그래."
세리온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게 더 아팠다.
그때 산 아래쪽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움직였다. 횃불이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 검은 기사들의 차가운 불빛이 아니었다. 흔들리고, 꺼졌다 살아나고, 사람들의 손에서 떨리는 불이었다.
아렌과 세리온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달렸다.
불 꺼진 광산의 사람들
새벽이 되기 전, 원정대는 산길 끝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길은 넓은 고개로 열렸고, 붉은 산맥의 심장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절벽 아래 검은 입구들이 줄지어 있었다. 드워프들의 옛 광산이었다. 왕들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는 땅. 빈 왕좌가 잠들어 있다는 곳.
하지만 그 앞에 왕의 군대는 없었다. 수염을 땋은 장인들의 노래도 없었다. 대신 피난민 행렬이 있었다.
드워프들이었다.
그들은 작은 수레에 아이들과 노인을 태우고, 부러진 도끼와 검댕 묻은 망치를 끌고 걸었다. 일부는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갑옷에는 안쪽에서 찢긴 흔적이 있었다. 어떤 이는 수염 절반이 불에 타 사라졌고, 어떤 이는 돌처럼 침묵하며 빈 눈으로 산을 돌아보았다.
원정대가 다가가자 드워프 전사들이 즉시 도끼를 들었다.
"멈춰라!"
가장 앞에 선 드워프는 한쪽 눈을 붕대로 감고 있었다. 남은 눈은 숯불처럼 뜨거웠다.
로반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적은 모두 그렇게 말한다." 드워프가 으르렁거렸다. "검은 갑옷들도 처음엔 왕의 사절이라 했다."
아렌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검은 기사들이 여기까지 왔습니까?"
드워프는 아렌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아렌의 등에 묶인 엘루마르에서 멈췄다. 그리고 아렌의 가슴께, 보이지 않는 파편들이 있는 자리를 꿰뚫듯 바라보았다.
"왔느냐고?" 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은 돌이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아이야, 그들은 이미 안에 있다."
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폐광을 점령했다는 뜻이야?"
"폐광?" 드워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곳은 폐광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홀이고, 우리의 무덤이며, 왕좌가 있는 심장이다. 그런데 지금 그 심장에 검은 깃발이 꽂혔다."
미라가 피난민들 사이를 보며 물었다.
"안에 남은 사람들은요?"
드워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뒤쪽을 향해 턱짓했다. 한 어린 드워프 아이가 담요를 뒤집어쓴 채 떨고 있었다. 아이의 손등에는 검은 표식이 찍혀 있었다. 부서진 별과 가시관.
아렌은 숨을 멈췄다.
아이는 그를 보자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래가 들려요."
엘루마르가 등 뒤에서 대답하듯 울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검게 번졌다.
"빈 왕좌에…… 누가 앉아 있어요."
그 순간 산속 깊은 곳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한 번.
또 한 번.
그리고 붉은 산 전체가 그 소리에 맞춰 깨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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