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숲을 지나
아렌은 숨을 삼키며 달렸다. 잿가지숲의 나무들은 불탄 손가락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밤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깊었고, 검은 재는 눈처럼 내려 어깨와 머리카락에 쌓였다.
세리온은 앞서 달렸다. 음유시인의 낡은 망토는 찢겨 있었고, 허리의 단검에는 아직 재늑대의 검은 피가 말라붙지 않았다.
"멈추면 죽는다."
그가 짧게 말했다.
아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안의 별빛 조각이 뜨거웠다. 마치 제 심장과 따로 뛰는 작은 짐승 같았다. 조각은 숲 너머 어딘가를 향해 약하게 떨었다.
"돌다리 아래로 가라."
별빛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진짜 이름을 기억하라.
아렌은 그 말의 뜻을 몰랐다. 하지만 모르는 말들이 자꾸 그의 길을 정했다. 마룬은 뒤에 남았다. 대장간은 불탔다. 왕의 이름을 내세운 검은 기사들이 마을을 짓밟았다. 이제 남은 것은 손안의 조각과, 믿어도 되는지 알 수 없는 음유시인뿐이었다.
숲이 끊어지는 곳에서 오래된 강이 나타났다. 물은 검었다. 달빛조차 강물 위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 강 위로 낮고 긴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난간은 무너졌고, 돌기둥마다 이끼와 오래된 글자가 붙어 있었다.
세리온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국경의 돌다리다. 옛 왕국과 지금의 왕국이 갈라지기 전부터 있었지."
"왜 여기로 온 거죠?"
"네가 가자고 했으니까."
"제가요?"
세리온은 아렌의 손을 보았다.
"정확히는 네 손에 든 것이."
그때 다리 아래 어둠에서 쇠가 딸깍이는 소리가 났다.
"한 발짝만 더 오면, 그 잘난 음유시인의 목에 구멍을 내겠어."
여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빠르며, 웃음기가 있었지만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세리온은 손을 천천히 들었다.
"리아. 여전히 손님맞이가 고상하군."
"세리온."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검은 머리, 가죽 조끼, 허리에 매단 세 자루의 칼. 그녀의 눈은 강물처럼 차가웠고, 손에는 작은 쇠뇌가 들려 있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나를 아끼는 이들은 늘 그렇게 말하지."
"난 아낀 적 없어."
리아의 시선이 아렌에게 꽂혔다. 그리고 곧장 그의 쥔 손으로 내려갔다.
아렌은 본능적으로 별빛 조각을 감추었다.
늦었다.
리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거 어디서 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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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아래 모인 자들
돌다리 아래에는 숨겨진 공간이 있었다. 무너진 교각 사이로 좁은 굴이 이어졌고, 안쪽에는 말라붙은 장작과 낡은 포대, 빈 술병들이 쌓여 있었다. 밀수꾼들의 은신처였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은 리아뿐이 아니었다.
불씨 옆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낡은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갑옷의 문장은 칼로 긁혀 지워져 있었다. 그는 키가 컸고, 오른쪽 뺨에는 오래된 검상이 있었다. 무릎 위에는 넓은 검이 놓여 있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또 도망자들을 데려왔군."
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넌 말할 자격 없어, 로반. 네 목값이 여기 있는 모두를 합친 것보다 비싸니까."
로반이라 불린 남자의 눈이 세리온에게 향했다.
"저 아이는 누구냐?"
"아렌."
세리온이 답했다.
"가시울에서 왔다."
그 말에 굴 안쪽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아렌은 고개를 돌렸다. 포대 뒤에 어린 소녀가 숨어 있었다. 열세 살쯤 되었을까. 푸른빛이 도는 낡은 외투를 입고, 품에는 약초 꾸러미를 꼭 안고 있었다. 손끝은 흙과 풀물로 물들어 있었다.
리아가 말했다.
"미라, 숨어 봐야 소용없어. 저 애도 우리처럼 쫓기는 꼴이야."
소녀는 천천히 나왔다. 겁먹은 얼굴이었지만 눈만큼은 이상하게 맑았다.
"가시울에서 왔다면…… 재가 내렸나요?"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의 입술이 떨렸다.
"그럼 시작됐군요."
"뭐가?"
아렌이 묻자, 미라는 대답 대신 약초 꾸러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 순간 리아가 아렌에게 다가왔다.
"손 펴."
"싫습니다."
"좋게 말할 때 펴. 네가 들고 있는 게 뭔지 모르는 얼굴인데, 모르면 더 위험해."
세리온이 끼어들었다.
"리아."
리아는 그를 보지도 않았다.
"닥쳐. 난 저 물건 때문에 세 도시에서 사람 목이 잘리는 걸 봤어."
아렌의 손이 조금씩 열렸다.
별빛 문양의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굴 안의 불빛이 순간 낮아졌다. 대신 조각의 은빛 선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로반이 벌떡 일어섰다.
미라는 작게 신음했다.
리아는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앞으로 숙였다. 탐욕과 두려움이 그녀의 얼굴에서 동시에 번졌다.
"고대 왕실의 봉인 열쇠."
그녀가 속삭였다.
아렌은 얼어붙었다.
"열쇠라고요?"
"왕관 보관고를 여는 물건 중 하나라고 들었어. 진짜 왕의 피가 아니면 깨울 수 없다는 물건. 귀족들은 이걸 갖기 위해 성 하나를 팔 거야. 검은 시장에 내놓으면 평생 금화 위에서 잘 수 있지."
리아의 손이 조각 쪽으로 움직였다.
로반의 검이 번개처럼 뽑혀 그녀의 손목 앞을 막았다.
"아이의 물건이다."
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추방당한 기사가 갑자기 명예를 찾았나?"
로반의 턱이 굳었다.
"그 입 조심해라."
"왜? 네가 검은 기사들에게 넘기지 못한 아이들 이야기도 해 줄까?"
굴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갈라졌다.
세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시간이 없다."
리아가 웃었다.
"맞아. 그래서 묻는 거야. 이 애 하나 때문에 검은 기사들이 국경까지 몰려온 거라면, 난 여기서 빠져야겠어."
"그들도 너를 찾고 있잖아." 세리온이 말했다.
리아의 웃음이 멈췄다.
"무슨 소리야?"
"북문 밀수 장부. 부서진 별 문장이 찍힌 거래 기록. 네가 훔쳤지."
로반의 시선이 미라에게 향했다.
"그리고 저 아이도."
미라는 뒤로 물러섰다.
로반이 낮게 말했다.
"검은 기사들이 지나간 마을마다 병든 자들이 남았다. 저 아이는 그 병을 늦추는 약을 알고 있다. 그래서 쫓기는 거다."
미라가 고개를 숙였다.
"완전히 고치는 약은 아니에요. 아직은."
아렌은 그들을 하나씩 보았다. 밀수꾼, 추방 기사, 어린 약초사, 수상한 음유시인. 모두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모두가 검은 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때 다리 위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수십 번.
검은 물의 입
모두가 동시에 불을 껐다.
돌다리 위로 쇠굽이 지나갔다. 검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갑옷은 달빛을 삼켰고, 말들은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아렌은 숨을 멈췄다.
다리 위에서 누군가 말했다.
"별의 냄새가 여기서 끊겼다."
검은 투구의 우두머리 목소리였다. 가시울에서 마룬을 향해 말하던 그 자.
아렌의 피가 얼어붙었다.
다리 아래의 강물이 갑자기 부풀었다.
처음에는 물결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강 한가운데에서 검은 진흙이 솟구치더니, 길고 굽은 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고기의 비늘과 늑대의 턱, 사람의 손처럼 갈라진 앞발을 지닌 괴물이었다. 눈은 없었다. 대신 이마 한복판에 붉은 별 모양의 상처가 타고 있었다.
미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먹이……."
"전설 속 괴물 아니었나?" 리아가 중얼거렸다.
세리온이 단검을 뽑았다.
"오늘 밤은 전설이 바쁜 모양이군."
괴물이 입을 벌렸다. 비린내와 썩은 흙냄새가 굴을 덮쳤다. 동시에 다리 위의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창을 아래로 겨누었다.
로반이 이를 악물었다.
"놈들이 몰아넣은 거다."
괴물의 앞발이 굴 입구를 찍었다. 돌이 터지고 물이 쏟아졌다. 리아가 쇠뇌를 쐈다. 화살은 괴물의 목에 박혔지만, 곧 진흙 속으로 삼켜졌다.
"쓸모없는 짓이네!"
"그럼 네가 더 좋은 생각을 내!" 세리온이 외쳤다.
아렌은 뒷걸음쳤다. 별빛 조각이 손바닥을 태울 듯 달아올랐다. 그의 귀에 낮은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피로 문을 열어라.
아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그 순간 괴물의 꼬리가 휘둘러졌다. 로반이 아렌을 밀쳐냈고, 대신 바위에 부딪혀 무릎을 꿇었다. 갑옷이 찌그러졌다.
미라가 곧장 달려가 그의 상처에 약초 가루를 눌렀다.
"움직이면 피가 더 나요!"
"움직이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로반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리아는 굴 벽을 더듬다가 오래된 쇠고리를 찾았다.
"세리온! 이 다리, 아직 배수문이 살아 있어?"
세리온의 눈이 빛났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밀수꾼은 문을 외우고 살거든!"
리아가 쇠고리를 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리온이 달라붙었다. 로반도 피 묻은 손으로 쇠사슬을 잡았다.
"아렌!" 세리온이 외쳤다. "빛이 필요하다!"
아렌은 손안의 조각을 보았다. 쓰면 안 된다는 마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괴물의 턱은 이미 미라를 향해 벌어지고 있었다.
아렌은 선택했다.
그는 조각을 움켜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물러나!"
별빛이 터졌다.
작은 조각에서 나온 빛은 횃불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차갑고 단단한 빛이었다. 괴물의 붉은 상처가 그 빛에 닿자 타는 소리를 냈다. 괴물이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틈에 리아와 세리온, 로반이 쇠사슬을 끌어당겼다. 녹슨 장치가 신음했다. 돌다리 아래의 바닥이 갈라지고, 강물이 한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괴물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지금!"
로반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세리온의 단검이 괴물의 목 아래를 갈랐다. 리아는 두 번째 화살을 붉은 상처에 꽂았다. 미라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던졌다. 병이 깨지자 푸른 연기가 퍼졌다.
괴물의 진흙 살이 굳기 시작했다.
아렌은 마지막 힘을 짜내 별빛을 밀어붙였다. 괴물은 물속으로 떨어지며 다리 기둥을 할퀴었다. 검은 강이 크게 뒤집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위에서는 검은 기사들의 말발굽이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멈춰 있었다.
"빛을 보았다."
검은 투구의 목소리가 다리 위에서 내려왔다.
"왕관의 첫 번째 이빨은 살아 있다."
피로 묶인 길
다리 아래는 무너진 돌과 물안개로 가득했다. 다섯 사람은 젖은 몸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칼을 겨누던 자들이었다. 이제는 서로가 아니었다면 모두 죽었을 자들이었다.
리아가 먼저 침묵을 깼다.
"좋아. 인정할게. 저 조각은 팔기 전에 우리 목숨부터 살렸어."
아렌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팔 생각을 아직도 해요?"
"생각은 자유잖아."
하지만 리아는 더 이상 손을 뻗지 않았다.
로반은 검을 땅에 세웠다.
"검은 기사들은 곧 내려올 것이다. 흩어지면 하나씩 잡힌다."
"함께 가자는 말인가?" 세리온이 물었다.
"임시로."
리아가 손을 털었다.
"임시라는 말 좋네. 정 없고, 배신하기도 쉽고."
미라가 작게 말했다.
"그래도 맹세는 해야 해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미라는 떨면서도 말을 이었다.
"이 다리는 옛 국경이에요. 여기서 한 맹세는 강이 기억한다고 배웠어요. 거짓으로 맹세하면 언젠가 물이 그 사람 이름을 가져간다고요."
리아가 코웃음을 치려다 멈췄다. 방금 강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모두 보았기 때문이다.
세리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옛 법이다.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아렌은 마룬을 떠올렸다. 도망치라는 마지막 말. 뒤돌아보지 말라는 눈빛. 그는 혼자 도망치고 있었다. 혼자 살아남으려 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이 길은 혼자 갈 수 없었다.
그는 별빛 조각을 가슴에 대고 말했다.
"나는 아렌. 가시울의 대장장이 아들이다. 진실을 알 때까지 도망치지 않겠다. 함께 가는 동안, 너희를 검은 기사들에게 팔지 않겠다."
리아가 눈썹을 올렸다.
"팔지 않겠다니, 좋은 표현이네."
그녀는 단검으로 엄지 끝을 살짝 그었다.
"리아. 강길의 딸. 내 몫을 챙기겠지만, 오늘 맹세한 이들을 먼저 팔지는 않겠다."
"먼저?" 아렌이 물었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
로반은 피 묻은 장갑을 벗었다.
"로반 칼드. 한때 왕의 기사였고, 지금은 추방자다. 내가 저지른 침묵의 값을 치르기 전까지, 아이들을 사냥하는 자들과 같은 편에 서지 않겠다."
미라는 작은 손을 내밀었다.
"미라. 약초사였던 할머니의 제자예요. 병든 사람들을 버리지 않겠어요. 무서워도요."
마지막으로 세리온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손을 올렸다.
"세리온. 노래를 파는 자. 숨긴 것이 많지만, 오늘 밤 이 맹세를 깨지는 않겠다."
"숨긴 게 많다는 말은 왜 굳이 해?" 리아가 물었다.
"나중에 덜 미워하라고."
다섯 사람의 피가 젖은 돌 위에 떨어졌다.
그 순간 돌다리 아래의 오래된 글자들이 빛났다. 이끼 밑에 감춰졌던 선들이 별자리처럼 이어졌다. 아렌의 손안에서 별빛 조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조각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교각 깊은 곳의 홈으로 날아가 박혔다.
쿵.
다리 전체가 심장처럼 울렸다.
무너진 벽 하나가 천천히 갈라졌다. 그 안쪽에서 낡은 돌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판 위에는 산맥, 숲, 강, 그리고 왕관 모양의 성채가 새겨져 있었다.
세리온의 얼굴이 굳었다.
"잊힌 왕의 지도……."
리아는 숨을 삼켰다.
"그건 동화가 아니었어?"
로반은 다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기사들의 그림자가 난간 끝에 줄지어 섰다. 그들 중 하나가 천천히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리 위에서 검은 투구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맹세가 끝났군."
그 목소리에는 기묘한 만족이 있었다.
"이제 문도 열렸다."
아렌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이 괴물을 피해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이곳으로 몰아왔다.
그리고 돌판 지도 위, 아직 젖지 않은 한 지점에서 검은 별 하나가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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