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오기 전의 산
숲은 밤새 등을 켜 두었지만, 새벽이 가까워지자 빛을 하나씩 낮추기 시작했다. 나무줄기 안쪽에서 흐르던 금빛은 잿빛 이끼 아래로 스며들었고, 강가의 등불들은 마지막 잎들을 따라 먼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축제의 노래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노래가 있었던 자리만이 공기 속에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윤서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강물 위로 떠나던 세 통의 편지가 보였고, 눈을 뜨면 품 안에서 희미하게 숨 쉬는 노을이 보였다. 노을은 작았다. 원래도 작았지만, 오늘 새벽에는 더 작아 보였다. 몸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몸을 이루던 저녁빛이 조금씩 안쪽으로 접히고 있는 것 같았다.
루루는 강가에 남은 잎맥 등불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서 흙 위에 묻었다. 그러고는 앞발로 흙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가야 해."
윤서는 노을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노을은 눈을 반쯤 뜨고 윤서를 올려다보았다.
"나 걸을 수 있어."
"날개도 힘들어 보이면서." 윤서가 작게 말했다.
"날 수 있어. 다만 오늘은 네 어깨가 좋아서 그래."
노을은 장난처럼 말했지만, 목소리 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윤서는 그 떨림을 못 들은 척하지 않았다. 예전의 윤서였다면 괜찮은 척 웃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약해진 빛을 보고도, 자신이 더 무너질까 봐 서둘러 눈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윤서는 알았다. 모른 척하는 것은 상대를 지켜 주는 일이 아니라, 함께 있을 기회를 놓치는 일일 때도 있다는 것을.
"그럼 내 어깨에 있어."
윤서가 조용히 말했다.
"대신 힘들면 말해 줘."
노을은 대답 대신 윤서의 목도리 가장자리에 폭신한 이마를 살짝 기대었다. 고맙다는 뜻 같았다.
시간의 산은 숲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루루는 그곳을 설명하며, 지도에는 절대 표시되지 않는 산이라고 했다. 지도를 펼치면 빈 종이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생기면 그때 산길이 나타난다고 했다.
윤서는 그 말이 조금 무서웠다. 마음속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니. 그건 산이라기보다 자기 안쪽으로 난 길 같았다.
세 친구는 강을 등지고 숲으로 들어갔다. 축제의 향기는 조금씩 옅어졌다. 차의 달콤한 냄새,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 젖은 잎의 냄새가 뒤에 남았다. 대신 깊은 숲의 냄새가 다가왔다. 오래된 뿌리, 차가운 돌, 아직 햇빛을 받아 본 적 없는 흙, 아주 먼 곳에서 천천히 녹는 눈의 냄새.
걸음을 옮길수록 숲은 낮아지는 듯했다. 나무들이 머리 위로 더 깊이 숙였고, 가지들은 길을 가리는 대신 조심스레 터널을 만들어 주었다. 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좁고 길었다. 그 하늘빛은 새벽의 푸른색도, 밤의 검은색도 아니었다. 둘 사이에 잠시 머무는 색. 끝난 것과 시작되는 것 사이에만 존재하는 색이었다.
한참 걷자 땅이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발바닥이 알아차릴 만큼 미세한 경사였다. 그러다 숨이 한 박자씩 깊어지고, 종아리 안쪽이 뻐근해질 때쯤, 앞에 안개가 드리워진 산길이 나타났다.
산은 높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정상은 안개에 가려 있었고, 산등성이에는 시계바늘처럼 생긴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풀잎 끝에는 이슬 대신 작은 초침들이 매달려 있었다. 초침들은 똑딱거리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 부딪혀 아주 희미한 은빛 소리만 냈다.
루루가 산 앞에서 멈췄다.
"여기가 시간의 산이야."
윤서는 침을 삼켰다. 목 안이 마른 잎처럼 바스락거렸다.
"올라가면 뭐가 보여?"
"네가 지나온 시간."
루루가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네가 서 있는 시간."
윤서는 노을을 느꼈다. 어깨 위의 아주 작은 온기.
"그리고?"
루루는 잠시 윤서를 바라보았다.
"네가 가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시간."
그 말이 안개처럼 윤서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노을이 작게 중얼거렸다.
"산치고는 성격이 좀 심각하네."
윤서는 웃으려다 실패했다. 그러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노을은 만족한 듯 눈을 깜빡였다.
루루가 앞발 하나를 첫 계단에 올렸다. 계단이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한 길이었다. 돌이 층층이 놓인 것이 아니라, 안개가 딱딱하게 굳어 발판이 된 모양이었다. 발을 디디면 꺼질 것 같았지만, 루루의 발밑에서는 은은한 물결무늬만 번졌다.
"여기서는 남은 시간을 세면 길이 길어져."
루루가 말했다.
"그럼 뭘 해야 해?"
윤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숨결의 숲에서 처음 배웠던 말. 남은 시간을 세지 말고 지금 들리는 소리를 따라가.
루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 거야. 그래도 끝까지 남는 소리가 있어."
윤서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심장이 조용히 뛰고 있었다.
툭. 툭. 툭.
"내가 살아 있다는 소리."
"그래."
루루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 소리를 잃어버리지 마."
윤서는 첫 발을 올렸다. 안개 계단은 차가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체온과 비슷했다. 오래 기다리던 손이 발바닥을 받아 주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안개가 열렸다.

첫 걸음이 불러낸 어제
처음 나타난 것은 병원 복도였다.
윤서는 숨을 멈췄다. 산길 양옆으로 나무가 사라지고, 하얀 벽이 길게 이어졌다. 바닥은 너무 반짝여서 발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그런 복도였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형광등은 낮도 밤도 아닌 빛으로 천장을 채우고 있었다.
복도 끝에 어린 윤서가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지만, 손에 쥔 연필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 윤서는 문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문 너머에서 어른들의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확한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윤서는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좋은 말이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얼굴.
윤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저건…."
"네가 처음으로 끝의 소리를 들은 날에 가까운 장면이야." 루루가 말했다.
윤서는 어린 자신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너무 작았다. 그런데 그 작은 어깨 위에 이미 너무 많은 생각이 내려앉아 있었다. 만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웃어도 되는 걸까. 엄마가 울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들에게 말하면 모두 불편해하지 않을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이 괜찮으려면, 지금부터 조금씩 덜 사랑받아야 하는 걸까.
윤서는 가슴이 아팠다. 정말로 누군가 안쪽에서 조용히 쥐어짜는 것처럼 아팠다.
어린 윤서가 스케치북을 덮었다. 그러고는 문 옆의 큰 화분 뒤에 얼굴을 숨겼다. 울고 싶었지만, 울면 누군가 달려올까 봐 소리를 참는 얼굴이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는데, 이미 울고 있는 얼굴이었다.
노을이 윤서의 어깨에서 살짝 움직였다.
"저때 너, 누가 옆에 앉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윤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났다. 그날 자신은 누군가 옆에 앉아 주길 바랐다. 무슨 말을 해 주지 않아도 좋았다. 괜찮아질 거라고 약속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같은 방향을 보며 앉아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누가 오면 도망치고 싶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고, 버려지고 싶지 않았고, 사랑받고 싶었다. 마음은 늘 서로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윤서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병원 복도는 안개처럼 흔들렸다. 어린 윤서의 모습도 흐려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기 전, 어린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미안해."
그 말은 어린 윤서에게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 윤서는 아주 잠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다시 품에 안았다. 마치 조금 덜 혼자가 된 것처럼.
산길은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윤서는 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 맡았던 소독약 냄새 대신 차가운 흙냄새가 들어왔다. 하지만 가슴 어딘가에는 아직 병원 복도의 흰빛이 남아 있었다.
"시간의 산은 기억을 보여 주기만 하는 게 아니야." 루루가 말했다. "그때 네가 혼자라고 믿었던 장면에, 지금의 네가 다시 들어갈 수 있게 해 줘."
윤서는 손목의 빛실 팔찌를 만졌다. 여러 매듭이 손끝에 닿았다. 모두 지나온 시간인데, 이상하게도 지금 손목에 함께 있었다.
노을이 말했다.
"과거는 사라진 곳이 아니라, 가끔 우리가 늦게 도착하는 방일지도 몰라."
윤서는 노을을 보았다.
"너 오늘 말이 좀 멋있다."
"원래 멋있었어. 네가 이제야 알아본 거야."
노을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윤서는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웃음은 금방 사라졌지만, 사라진 뒤에도 입술에 따뜻한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다시 올랐다.
두 번째 안개는 집 거실을 보여 주었다. 엄마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식은 국과 반쯤 열린 약봉지, 윤서가 남긴 쪽지가 놓여 있었다. 엄마는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손이었다.
윤서는 발을 멈췄다. 엄마의 뒷모습은 생각보다 작았다. 윤서가 늘 보던 엄마는 바빴고, 단단했고, 병원 일정과 서류와 집안일을 모두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윤서는 엄마가 힘들다는 말을 못 했다. 자신이 무섭다고 말하면 엄마까지 무너질 것 같아서.
그런데 안개 속의 엄마는 이미 무너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다만 윤서가 볼까 봐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엄마가 낮게 말했다.
"우리 딸, 오늘은 뭐가 제일 무서웠을까."
그 말에 윤서의 눈이 뜨거워졌다. 엄마는 몰랐던 게 아니었다. 윤서가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문밖에서 듣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오래 서 있었던 것이다.
윤서는 안개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손끝에 식탁의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엄마."
목소리는 작았다.
"나 돌아가면 말할게. 다는 못 해도… 조금씩 말할게."
안개 속의 엄마가 고개를 든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풍경은 흩어졌다. 집의 불빛은 나무 사이로 스며들고, 산길은 다시 발밑에 놓였다.
윤서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바람이 알아서 말려 주도록 두었다.
지금이라는 좁은 다리
산은 점점 가팔라졌다. 발밑의 안개 계단은 더 얇아졌고, 나무들은 뒤로 물러났다. 대신 낮은 풀들이 길가에 빽빽이 돋아났다. 풀잎마다 작은 장면들이 맺혀 있었다. 윤서가 숨을 들이쉬는 지금, 루루가 꼬리를 세우고 앞서 걷는 지금, 노을이 어깨 위에서 억지로 눈을 뜨고 있는 지금.
현재가 이렇게 많이 반짝일 수 있다는 걸 윤서는 몰랐다. 현재는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산길 위에서 현재는 수많은 작은 조각으로 흩어져 있었다. 발바닥에 닿는 서늘함, 손목 팔찌의 미세한 떨림,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 어깨 위의 노을이 아주 가볍게 체중을 옮기는 느낌. 모두 지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작고 빨랐다. 붙잡으려 하면 벌써 지나가 있었다.
윤서는 숨이 차서 잠시 멈췄다. 무릎에 손을 짚자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쿵. 쿵. 쿵.
"힘들어?" 루루가 물었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이상해. 힘든데… 살아 있는 느낌이 나."
루루는 웃었다.
"가끔 몸은 마음보다 먼저 진실을 알아."
노을이 윤서의 어깨에서 내려와 가까운 돌 위에 앉았다. 돌은 검푸른 색이었고, 표면에는 오래된 시계 문자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노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짧은 사이에도 빛이 조금 더 옅어진 듯했다.
윤서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괜찮다는 말이 오늘따라 참 편리하네." 노을이 작게 웃었다. "괜찮지 않아도 일단 괜찮다고 말하면 잠깐은 넘어갈 수 있잖아."
윤서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말은 자신에게도 익숙했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걱정하지 마. 그런 말들로 얼마나 많은 날을 건너왔는지 모른다.
"노을아."
윤서가 말했다.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해도 돼."
노을은 잠시 윤서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 안에 산길의 안개가 작게 비쳤다.
"그 말, 너한테도 해 주는 거야?"
윤서는 대답 대신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목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갔다. 조금 아팠다. 하지만 아픈 만큼 선명했다.
"응."
그 대답을 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노을은 돌 위에서 날개를 접었다.
"그럼 나 괜찮지 않아."
바람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무서워. 빛이 줄어드는 게 느껴져. 예전에는 저녁마다 내가 더 선명해지는 줄 알았거든.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내 색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요즘은 어둠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흐려지는 것 같아."
윤서는 조용히 들었다.
노을은 말을 이었다.
"저녁이끼용은 오래 살지 않는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정말 화가 났어. 왜 하필 나는 짧은 생일까. 왜 어떤 나무들은 수백 번의 계절을 지나는데, 나는 몇 번의 저녁만 품고 사라져야 할까. 그래서 일부러 더 시끄럽게 굴었어. 농담도 많이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도 하고. 내가 오래 못 산다는 걸 누가 슬프게 여기기 전에, 내가 먼저 웃겨 버리면 괜찮을 줄 알았어."
윤서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작은 이끼 몸이 바람에 흔들렸다. 윤서는 손을 뻗어 노을 옆에 가만히 두었다. 붙잡지는 않았다. 도망가지 말라는 손이 아니라, 넘어지면 여기 있다는 손이었다.
"원망했어."
노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를 이렇게 만든 시간을 원망했고, 나보다 오래 남을 나무들을 원망했고, 내 마지막 잎을 준비하는 숲도 원망했어. 누군가의 하루 끝을 지켜 주는 일이 내 일이라면서, 정작 내 끝은 누가 지켜 주나 싶었거든."
윤서의 목이 뜨거워졌다.
"노을아…."
"그런데 너랑 걸으면서 조금 이상해졌어."
노을이 고개를 들었다. 흐려진 빛 속에서도 눈동자는 맑았다.
"내 생은 짧은데, 이상하게 넓어졌어. 비의 마을에서 젖은 우산 아래 있었던 시간, 불씨 곁에서 밤새 졸던 시간, 가시넝쿨 정원에서 네가 이름을 부르던 시간, 별가루 빵집에서 빵 냄새 맡던 시간, 어제 강가에서 네 편지가 떠나가던 시간. 하나하나가 내 안에서 방처럼 생겼어. 나는 오래 살지 못하지만, 그 방들이 생기고 나니까 내 안이 좁지만은 않더라."
윤서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흘렀다.
노을은 부드럽게 웃었다.
"짧다는 건 작다는 뜻이 아니었나 봐. 너와 함께한 날들 때문에, 내 생이 옆으로 넓어졌어. 그래서 아직 원망이 다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전부 원망만은 아니게 됐어."
윤서는 더 참지 못하고 노을을 두 손으로 감쌌다. 노을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작고 따뜻한 몸이 손바닥 안에서 천천히 숨을 쉬었다.
"나도 무서워." 윤서가 말했다.
말은 생각보다 쉽게 나오지 않았다. 가슴 안쪽에서 오래 엉켜 있던 실을 한 가닥씩 풀어내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죽는 게 무서운 줄 알았어. 물론 그것도 무서워. 아프고, 사라지고, 내가 좋아하는 아침 냄새를 더는 맡지 못하게 되는 것도 무서워. 그런데…."
윤서는 눈을 감았다. 엄마의 뒷모습, 서아의 이름, 지민에게 하지 못한 말, 할머니의 유자차, 아직 다 그리지 못한 그림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정말 무서운 건 죽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채 끝날까 봐 두려운 거야."
그 말을 하고 나자 산 전체가 아주 조용해졌다.
윤서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엄마한테 무섭다고 말하지 못한 채, 서아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채, 지민에게 상처 준 걸 그냥 덮어 둔 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제대로 말하지 못한 채 끝나 버릴까 봐. 나를 사랑해 준 것들을 제대로 받아 보지도 못하고,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걸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질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워."
루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오히려 넓은 담요처럼 세 친구를 감쌌다.
노을이 윤서의 손바닥 안에서 속삭였다.
"그럼 우리 지금 사랑하고 있는 거네."
윤서가 눈물을 머금고 노을을 보았다.
"뭐?"
"무서운데도 서로한테 말했잖아. 숨기지 않았잖아. 같이 걷고 있잖아."
노을은 아주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제대로 사랑한다는 게 꼭 대단한 약속을 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가끔은 안 도망가는 거야. 무서운 얼굴을 하고도 옆에 남아 있는 거."
그 말에 윤서의 가슴 안에서 무언가 조용히 풀렸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려움만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 옆에 노을의 온기가 있었고, 루루의 조용한 시선이 있었고, 산길을 함께 오르는 발소리가 있었다.
삶의 의미는 두려움이 사라진 빈자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안고도 누군가의 속도에 맞춰 한 걸음 더 내딛는 사이에서, 아주 작게 피어나는 것이었다.
윤서는 노을을 다시 어깨에 올렸다.
"가자."
목소리는 아직 떨렸지만, 걸음은 전보다 단단했다.
가능했던 미래의 안개
산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안개가 더 두꺼웠다. 앞을 보려 해도 흰빛만 가득했다. 루루의 붉은 꼬리조차 흐릿하게 보였다. 윤서는 손을 뻗어 루루의 꼬리 끝을 살짝 잡았다. 루루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늦추었다.
안개 속에서 첫 번째 미래가 나타났다.
윤서는 교실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벚꽃이 날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새 공책이 놓여 있었고, 공책 첫 장에는 힘찬 글씨로 새 학기 목표가 적혀 있었다. 안개 속의 윤서는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서아가 옆자리에서 무언가를 속삭였고, 윤서는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이건…."
"가능했던 미래 중 하나야." 루루가 말했다.
윤서는 손끝을 움켜쥐었다. 마음속에 날카로운 것이 지나갔다. 저렇게 살 수도 있었을까. 병원과 두려움과 끝의 소리를 모르는 채, 평범하게 시험 걱정을 하고, 친구와 급식 메뉴를 투덜대고, 봄꽃이 예쁘다고 아무 죄책감 없이 웃을 수도 있었을까.
그 생각이 들자 억울함이 올라왔다.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왜 나는 저 길을 걷지 못했을까.
안개 속 장면은 바람에 밀려 사라졌다. 곧 다른 미래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윤서가 작업실 같은 곳에 앉아 있었다. 벽에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창가에는 마른 꽃과 물감병이 놓여 있었다. 어른이 된 윤서였다.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고, 누군가에게 웃으며 그림을 설명하고 있었다.
윤서는 한 걸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보는 일은, 잃어버린 물건을 보여 주고 다시 가져가는 것처럼 잔인했다.
"싫어."
윤서는 낮게 말했다.
"이런 걸 왜 보여 줘?"
루루가 윤서를 돌아보았다.
"빼앗으려고 보여 주는 게 아니야."
"그럼 왜?"
윤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걸 보면 더 아프잖아. 그냥 모르면 좋잖아. 이런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몰랐으면, 덜 억울했을지도 모르잖아."
말을 뱉고 나서 윤서는 놀랐다. 자신 안에 이렇게 큰 억울함이 숨어 있었는지 몰랐다. 늘 슬픔이라고 불렀고, 두려움이라고 불렀고, 외로움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억울함도 있었다. 왜 나에게. 왜 지금. 왜 이렇게.
노을이 윤서의 귀 가까이에서 말했다.
"나도 그 마음 알아."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윤서의 분노를 조금 낮추었다. 노을은 더 오래 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하늘을 매일 봐야 했을 것이다. 자기가 갖지 못할 계절을,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것을.
안개 속에 세 번째 미래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병원 침대 곁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윤서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창가에는 작은 화분이 있었고, 그 옆에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서아와 지민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색하고 조용했지만,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다.
안개 속의 윤서가 무언가를 말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가 울면서 웃었다. 서아가 윤서의 손을 잡았고, 지민이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었다. 창밖으로는 아침빛이 들어왔다.
그 장면은 화려하지 않았다. 학교도 아니고, 작업실도 아니고, 긴 미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윤서는 그 앞에서 가장 오래 멈추었다.
루루가 말했다.
"가능했던 미래는 하나가 아니야. 길고 반짝이는 미래만 미래는 아니지. 짧아도 마음이 닿는 미래가 있고, 멀리 가지 못해도 깊어지는 미래가 있어."
윤서는 안개 속 침대 곁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미래가 실제로 올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서는 처음으로, 미래를 길이로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느꼈다.
미래는 얼마나 오래 이어지느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서로를 바라보느냐로도 넓어질 수 있었다.
노을이 윤서의 뺨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내가 말했지. 짧아도 넓어질 수 있다고."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또 흘렀지만, 이번 눈물은 조금 따뜻했다.
"응."
안개 속 장면들이 천천히 접혔다. 벚꽃 교실도, 그림 작업실도, 병원 창가도 흰빛 속으로 흩어졌다. 윤서는 손을 뻗어 그것들을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붙잡지 않아도 자신 안에 남는 것이 있다는 걸 조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시 걸었다.
소리가 줄어드는 곳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숲의 소리가 하나씩 사라졌다.
처음 사라진 것은 잎사귀 소리였다. 바람은 분명 지나가고 있었지만, 잎들은 흔들리면서도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각거림이 사라지자 숲은 갑자기 낯설어졌다. 윤서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소리에 기대어 걷고 있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다음으로는 루루의 발소리가 사라졌다. 루루는 여전히 앞에서 걷고 있었지만, 발이 안개 계단에 닿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윤서는 불안해져서 루루의 등을 바라보았다. 루루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괜찮다는 신호였다.
조금 더 오르자 노을의 숨소리도 희미해졌다. 윤서는 놀라 어깨를 만졌다.
"노을아?"
"있어."
노을의 목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는데, 동시에 아주 먼 곳에서 오는 것 같았다.
"나 여기 있어."
윤서는 그 말을 붙잡듯 기억했다. 나 여기 있어. 짧고 평범한 말. 하지만 지금은 어떤 주문보다 강했다.
산길은 점점 좁아졌다. 양옆은 안개로 가득했고, 위쪽은 보이지 않았다. 발밑의 계단은 한 사람의 발만 겨우 올릴 수 있을 만큼 좁아졌다. 윤서는 루루의 꼬리를 놓고 두 팔을 살짝 벌렸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때, 멀리서 들리던 물소리도 사라졌다. 마지막 잎의 강이 완전히 뒤로 물러난 듯했다. 축제의 노래, 시장의 웅성거림, 여관 시계들의 낮잠 소리, 구름고래의 깊은 숨, 별가루 빵집의 오븐 소리까지. 윤서가 지나온 모든 장소의 소리들이 하나씩 문을 닫았다.
남은 것은 심장 박동이었다.
쿵.
쿵.
쿵.
그리고 숨소리.
하아.
후우.
들숨은 차갑고, 날숨은 따뜻했다. 윤서는 그 차이를 또렷하게 느꼈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지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폐 안쪽을 펼쳤다. 따뜻해진 숨이 다시 올라와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윤서는 걸었다.
한 걸음.
심장이 뛰었다.
또 한 걸음.
노을의 작은 앞발이 어깨 천을 살짝 쥐었다.
다시 한 걸음.
빛실 팔찌가 손목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소리가 줄어든 세계에서는 작은 감각이 커졌다. 땀이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느낌, 손끝이 차가워졌다가 다시 따뜻해지는 느낌, 무릎이 떨리지만 무너지지는 않는 느낌. 윤서는 자신의 몸을 이렇게 자세히 느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몸은 늘 불안의 장소였고, 병의 소식을 가져오는 장소였고, 끝을 예고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 몸은 길이었다.
아픈 몸도, 지친 몸도, 무서워하는 몸도 윤서를 여기까지 데려오고 있었다. 끝을 향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한 걸음을 향해서.
윤서는 속으로 말했다.
고마워.
자신의 다리에게, 숨에게, 심장에게, 무서워하면서도 멈추지 않는 마음에게.
노을이 아주 작게 말했다.
"윤서야, 내 소리 들려?"
윤서는 귀를 기울였다. 노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 위의 온기는 느껴졌다.
"응. 들려."
"거짓말."
"조금은."
노을이 피식 웃는 기척이 났다.
"안 들려도 괜찮아. 느끼면 돼."
윤서는 어깨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세웠다. 노을이 떨어지지 않도록. 노을도 윤서가 흔들리지 않도록 작은 앞발로 천을 붙잡고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완전히 든든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둘이 함께 있으니 길이 이어졌다.
그때 루루가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말이 잘 닿지 않을 거야."
루루의 목소리도 거의 속삭임처럼 얇았다.
"정상 바로 아래야. 각자 자기 숨을 따라가야 해. 하지만 혼자 걷는 건 아니야. 숨은 각자 쉬지만, 길은 함께 오르는 거니까."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들어 루루의 등에 살짝 얹었다. 루루는 그 손등에 자기 볼을 한 번 기대고 다시 앞으로 걸었다.
산은 마지막 침묵을 펼쳤다.
이제 정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하나는 들렸다.
윤서의 심장.
쿵.
노을의 아주 작은 숨.
흐.
윤서의 숨.
하아.
그 세 소리가 한동안 번갈아 이어졌다. 쿵, 흐, 하아. 쿵, 흐, 하아. 그것은 음악 같기도 했고, 기도 같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행진곡. 끝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 맞추는 박자.
정상 아래에서 나눈 약속
마지막 계단 앞에서 윤서는 멈췄다. 다리가 떨렸다. 눈앞의 안개는 이제 거의 빛에 가까웠다. 흰빛 속에 금빛과 푸른빛이 섞여 있었고, 아주 멀리서 붉은빛 한 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노을의 색이었다.
노을은 윤서의 어깨에서 내려오려 했다.
"안 돼." 윤서가 거의 소리 없이 말했다.
노을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계단은 내가 걸을게."
"힘들잖아."
"그래서 걸어야 해."
윤서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노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숨기지 않은 두려움. 그러나 그 안에는 이상한 평온도 함께 있었다. 원망이 전부가 아니게 된 생의 얼굴은 이런 것일까.
윤서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노을은 그녀의 손바닥을 딛고 산길 위로 내려섰다. 아주 작고 가느다란 발이 안개 계단에 닿았다. 노을의 몸이 흔들렸다. 윤서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노을은 잎사귀 날개를 살짝 펴 균형을 잡았다.
"나 넘어지면 잡아 줘."
노을이 말했다.
윤서는 울음을 삼키며 웃었다.
"당연하지."
"그리고 네가 넘어지면?"
"네가 잡아 줄 거야?"
"나는 작아서 못 잡아."
노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대신 엄청 크게 걱정해 줄게."
윤서는 결국 웃었다. 정상 바로 아래, 모든 소리가 사라진 산길에서 웃음은 소리 없이 얼굴에만 피어났다. 하지만 노을은 그것을 보았다. 루루도 보았다.
노을은 한 걸음 내디뎠다. 작고 느린 걸음이었다. 윤서는 그 옆에 발을 맞췄다. 루루는 조금 앞에서 기다렸다. 세 친구의 그림자는 안개 위에 희미하게 비쳤다. 하나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는 작은 이끼용의 그림자, 하나는 붉은 숲여우 같은 우편부의 그림자. 서로 모양은 달랐지만, 안개 위에서는 세 그림자가 자꾸 겹쳤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동안, 윤서는 더 이상 미래를 묻지 않았다. 얼마나 남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노을의 빛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묻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아직도 너무 궁금했고, 무서웠다. 그러나 지금은 답보다 걸음이 더 중요했다.
노을이 옆에서 숨을 골랐다. 윤서는 자기 숨을 노을의 숨보다 조금 늦게 맞췄다. 노을이 들이쉬면 윤서도 들이쉬고, 노을이 내쉬면 윤서도 내쉬었다. 루루도 앞에서 같은 박자로 걷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윤서는 알았다.
함께 걷는다는 건 같은 속도로 달리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숨이 짧아지면 내 걸음을 줄이고, 내가 길을 잃으면 누군가의 작은 온기를 따라가는 일이었다. 두려움을 없애 주는 일이 아니라, 두려움이 너무 커져서 혼자 들 수 없을 때 한쪽 모서리를 함께 잡아 주는 일이었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그곳에는 넓은 평지가 있었다. 예상과 달리 화려한 궁전도, 거대한 시계탑도 없었다. 평평한 돌바닥이 둥글게 펼쳐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 문 하나가 서 있었다. 문은 벽에 붙어 있지 않았다. 그냥 허공에 세워져 있었다. 낡은 나무문 같기도 했고, 아침빛을 얇게 접어 만든 문 같기도 했다.
문 위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대신 문 한가운데에 잎맥 모양의 가느다란 금이 나 있었다. 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윤서가 처음 비밀 우체국의 문 앞에서 보았던 붉은 우체통의 빛과 닮아 있었고, 달빛 호수에서 되찾은 이름표의 빛과도 닮아 있었다. 또 노을의 남은 빛과도 닮아 있었다.
루루가 문 앞에 멈춰 섰다.
"끝의 문이야."
윤서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세게 뛰었다.
쿵.
이번에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주 선명하게. 정상의 공기가 그 소리를 받아 윤서에게 돌려주는 것 같았다.
노을은 윤서 옆에 섰다. 힘겨워 보였지만, 눈은 문을 향해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겼네."
노을이 말했다.
윤서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문이 꼭 무섭게 생길 필요는 없나 봐."
"무서운 건 문이 아니라, 그 앞에 선 마음일 때가 많지." 루루가 말했다.
윤서는 문을 바라보았다. 이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끝의 의미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루루의 말이 떠올랐다. 윤서는 여전히 무서웠다. 죽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말하지 못하고 끝나는 것도. 노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돌아가서 정말 엄마와 서아와 지민에게 말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이제 두려움은 윤서를 혼자 가두는 벽이 아니었다. 두려움은 함께 들고 온 짐이었다. 무겁지만, 이름을 알게 된 짐. 이름을 알게 된 짐은 완전히 가벼워지지는 않아도, 어디를 잡고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윤서는 한 손을 노을 쪽으로 내밀었다. 노을은 작은 날개 끝을 윤서의 손가락에 얹었다. 다른 손은 루루에게 뻗었다. 루루는 말없이 앞발을 올려놓았다.
세 존재는 끝의 문 앞에 나란히 섰다.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문 한가운데의 잎맥 모양 금이 조금 더 밝아졌다. 그 빛은 윤서의 얼굴을 비추고, 노을의 희미한 이끼와 날개를 비추고, 루루의 붉은 털끝을 비추었다.
윤서는 숨을 들이쉬었다.
차갑고 맑은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손끝에는 노을의 작고 따뜻한 무게가 있었고, 다른 손에는 루루의 단단한 온기가 있었다.
윤서는 더 이상 자신이 끝을 듣는 소녀라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끝을 듣지만, 끝만 듣는 사람은 아니었다. 숨도 듣고, 이름도 듣고, 빵이 식어 가는 소리도 듣고, 누군가 곁에서 두려움을 고백하는 소리도 듣는 사람이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윤서 안에서 작은 길을 만들었다.
윤서는 문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혼자 가지 않을게."
노을이 대답했다.
"혼자 두지 않을게."
루루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럼 문은 열릴 거야."
끝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문틈의 빛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마치 오래 닫혀 있던 아침이, 안쪽에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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