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등을 켜는 저녁
별가루 빵집에서 받은 잎 모양 빵은 아직 따뜻했다. 윤서는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숨결의 숲으로 들어섰다. 봉투 안쪽에서는 갓 구운 밀가루 냄새와 아주 희미한 단맛이 새어 나왔다. 그 냄새는 어쩐지 오래된 이불 같았고, 아침에 누군가 조심스레 열어 준 방문 틈 같았다.
루루는 앞에서 통통 뛰었다. 노을은 윤서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작은 잎사귀 날개로 윤서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장난을 쳤을 텐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윤서가 고개를 돌리면 노을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눈을 깜빡였지만, 그 깜빡임 사이가 전보다 조금 길었다.
숲은 저녁을 맞고 있었다. 나무들은 하나둘 줄기 안쪽에서 빛을 켰다. 등불처럼 환한 빛은 아니었다. 나무껍질의 깊은 틈 사이로 숨이 새어 나오듯 은은한 금빛이 번졌다. 잎들은 그 빛을 받아 가장자리를 밝히고, 바람은 그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윤서는 그 풍경을 보며 걸음을 늦추었다. 숲 전체가 거대한 가슴처럼 보였다.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들이쉬는.
"오늘은 숲이 잠들지 않는 날이야." 루루가 말했다.
"왜?"
"마지막 잎의 축제가 열리거든."
그 말에 윤서는 담온이 건네주었던 잎 모양 빵을 떠올렸다. 빵 위에 별가루처럼 박혀 있던 설탕 알갱이와, 담온이 낮게 들려주었던 말.
마지막 잎도 혼자 떨어지지 않는단다.
윤서는 봉투를 더 꼭 끌어안았다.
조금 더 걸어가자 숲의 나무들 사이로 넓은 강이 나타났다. 숨결의 숲을 처음 지날 때 들었던 물소리와는 달랐다. 그때의 물소리는 길을 알려 주는 속삭임 같았지만, 오늘의 물소리는 낮고 깊은 노래 같았다. 오래 울어 본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그런데 이상하게도 슬프기만 하지는 않았다.
강가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꽃잎으로 만든 숄을 두른 사람, 뿔 끝에 작은 등을 매단 사슴, 모자 대신 이끼를 얹은 두더지, 날개가 투명한 아이들, 윤서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존재들까지. 모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잎이었다.
초록빛을 잃고 갈색으로 마른 잎도 있었고, 아직 붉은빛이 남아 있는 잎도 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잎, 밤하늘처럼 검푸른 잎, 손바닥만큼 커다란 잎, 눈물방울만큼 작은 잎. 모양은 모두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이름처럼 보였다.
강가에는 낮은 탁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탁자마다 투명한 물그릇과 작은 붓, 가느다란 실, 그리고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이 놓여 있었다. 찻잔에서는 향긋한 김이 피어올랐다. 말린 귤껍질 냄새, 풀잎을 비빈 냄새, 꿀 한 방울이 녹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기서는 한 해 동안 떨어진 마지막 잎들을 모아." 루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가 마지막 숨을 내쉬면, 숲 어딘가에서 그 생의 마지막 잎이 떨어져. 사람일 수도 있고, 새일 수도 있고, 오래된 의자일 수도 있고, 어떤 말일 수도 있어. 모두 살아 있었던 것들이니까."
윤서는 강가에 선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잎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울고 있었고, 어떤 이는 잎을 코끝에 대고 웃고 있었다. 한 할아버지는 잎 하나를 앞에 두고 혼자 중얼거리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곧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울음과 웃음이 같은 얼굴 위에 있었다.
윤서는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이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 원래 슬프면 슬퍼야 하고, 기쁘면 기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마음 안에 서로 다른 두 감정이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걸, 윤서는 오래 몰랐다. 그래서 할머니가 떠난 뒤에도 가끔 맛있는 것을 먹고 웃어 버리면 죄책감이 들었다.
그때 루루가 윤서의 손등을 앞발로 톡 건드렸다.
"여기서는 울면서 웃어도 돼."
윤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 안쪽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마지막 잎을 위한 잔치
축제는 종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대신 강 건너편에서 아주 오래된 나무 하나가 잎을 흔들었다. 그 소리는 종보다 부드럽고, 박수보다 조용했다. 사각, 사각, 사각. 숲이 손뼉을 치는 것 같았다.
먼저 아이들이 나왔다. 아이들은 강가에 놓인 둥근 돌 위에 올라서서 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단순했다. 태어났네, 걸었네, 웃었네, 울었네, 사랑했네, 쉬어 가네. 같은 말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런데 반복될수록 노래는 더 깊어졌다. 마치 평범한 하루들이 쌓여 한 사람의 생이 되는 것처럼.
노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졌다. 누군가는 박수를 치며 울었고, 누군가는 울다가 박자에 맞춰 발을 굴렀다. 강가의 등불들이 하나씩 켜졌다. 등불은 종이가 아니라 마른 잎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잎의 가느다란 줄기 사이로 빛이 지나가자, 등불마다 작은 길들이 떠올랐다. 어느 길은 곧게 뻗어 있었고, 어느 길은 구불구불했다. 끊긴 것처럼 보이는 길도 있었지만, 빛이 닿으면 그 끊긴 자리마저 반짝였다.
윤서는 한 등불 앞에 멈춰 섰다. 잎맥 사이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누군가 지나가다 손상된 잎으로 만든 것 같았다. 그런데 빛은 그 구멍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구멍으로 더 둥근 빛이 새어 나왔다.
"상처 난 잎도 등불이 될 수 있구나." 윤서가 중얼거렸다.
노을이 어깨 위에서 작게 웃었다.
"상처 난 곳이 빛나는 창이 되기도 해."
윤서는 노을을 보았다. 노을의 이끼 사이에서 늘 부드럽게 일렁이던 붉고 금빛의 빛이 오늘따라 옅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폭신한 이끼 덩어리처럼 보였던 작은 몸이, 지금은 해가 진 뒤에도 하늘에 조금 남아 있는 기척처럼 희미해 보였다.
"노을아, 괜찮아?"
노을은 날개를 한 번 접었다 폈다.
"응. 축제라서 그래."
"축제라서 힘든 거야?"
"축제라서 솔직해지는 거야."
대답은 부드러웠지만, 윤서의 마음은 조용히 흔들렸다. 더 묻고 싶었다. 그러나 노을은 강 쪽을 바라보았다. 윤서는 그 시선을 따라갔다.
강가 한가운데에서 의식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지고 온 마지막 잎을 물그릇에 살짝 적신 뒤, 작은 붓으로 잎 위에 이름을 썼다. 글자를 쓰는 이도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잎을 가슴에 한 번 대었다가 내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그다음에는 차를 마셨다. 잎을 띄우기 전, 모두가 같은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루루가 찻잔 하나를 윤서에게 가져다주었다.
"기억차야."
"마시면 기억이 나?"
"잊었던 장면이 돌아오기도 하고, 너무 아파서 못 보던 장면을 조금 멀리서 보게 해 주기도 해. 하지만 억지로 보여 주지는 않아. 차도 예의가 있거든."
윤서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함이 손바닥을 지나 팔목으로 올라왔다. 빛실 팔찌의 매듭들이 그 온도에 반응하듯 희미하게 반짝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혀끝에 먼저 달콤함이 닿았다. 그다음에는 아주 약한 쓴맛이 올라왔다. 윤서는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방 냄새가 났다.
낡은 나무장, 베개에 밴 햇볕, 약봉지의 종이 냄새, 그리고 할머니가 겨울마다 끓여 주던 유자차 냄새. 할머니는 늘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말했다.
"뜨거운 건 천천히 마셔야 더 오래 따뜻하단다."
그때 윤서는 빨리 마시고 밖에 나가 놀고 싶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하니 할머니는 차 이야기만 한 게 아니었다. 마음도, 하루도, 사랑도 그렇게 천천히 마셔야 하는 것들이었는지 모른다.
눈을 뜨자 강가의 빛이 조금 흐려져 있었다. 아니, 빛이 흐려진 것이 아니라 윤서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이었다.
루루가 옆에 앉았다.
"너도 띄울 잎이 있니?"
윤서는 대답하려다 멈추었다. 손에는 잎이 없었다. 별가루 빵집에서 받은 것은 빵이었다. 하지만 봉투를 열자, 잎 모양 빵 아래에 진짜 잎 세 장이 놓여 있었다. 언제 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잎들은 얇고 부드러웠다. 하나는 따뜻한 갈색, 하나는 연한 초록, 하나는 새벽빛을 닮은 푸른 회색이었다.
빵집 주인 담온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들리는 듯했다.
마지막 잎도 혼자 떨어지지 않는단다.
윤서는 세 장의 잎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세 장의 편지
강가 한쪽에는 편지를 쓰는 자리가 있었다. 잎 위에 바로 이름을 쓰는 이들도 있었지만, 말이 너무 길어 잎에 다 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라고 했다. 책상은 나무뿌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의자는 폭신한 이끼였고, 잉크병 속에서는 작은 별빛이 천천히 돌고 있었다.
윤서는 책상 앞에 앉았다. 세 장의 얇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종이는 눈처럼 하얗지 않았다. 오래 손에 쥔 손수건처럼 부드러운 색이었다. 윤서는 첫 번째 종이 위에 오래 망설이다가 글자를 썼다.
할머니에게.
그 네 글자를 쓰자마자 손끝이 떨렸다. 윤서는 숨을 들이쉬었다. 숲의 냄새가 폐 안으로 들어왔다. 젖은 흙, 차, 강물, 등불의 따뜻한 연기. 그리고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웃는 소리.
윤서는 천천히 써 내려갔다.
할머니, 나 아직도 할머니가 없는 게 이상해. 어떤 날은 괜찮은 척하다가도, 길에서 유자차 냄새만 나면 갑자기 어린아이가 돼.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아직도 너무 약한 것 같았어. 그런데 오늘 알았어. 그리운 건 약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아직 움직이고 있어서 그런 거라는 걸.
윤서는 잠시 멈추었다. 눈물이 종이에 떨어질까 봐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밤하늘은 어느새 보랏빛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별들은 아직 다 뜨지 않았지만, 숲의 등불들이 먼저 별의 일을 해 주고 있었다.
윤서는 다시 썼다.
할머니가 떠난 건 아직도 슬퍼. 하지만 할머니가 살아 있었던 건 기뻐. 내 손을 잡아 줬던 것, 나를 기다려 줬던 것, 뜨거운 차를 천천히 마시라고 말해 줬던 것. 그게 내 안에 남아 있어.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온도를 남기고 싶어.
첫 번째 편지를 접자, 따뜻한 갈색 잎이 스스로 편지 위에 내려앉았다.
두 번째 편지는 더 오래 걸렸다.
윤서는 종이 위에 친구에게, 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러고는 다시 썼다.
서아에게.
이름을 쓰는 순간, 가시넝쿨 정원에서 보았던 마음의 가시가 생각났다. 별가루 빵집의 밤에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던 이름도. 윤서는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서아가 먼저 다가왔을 때, 웃으면서도 한 발 물러섰던 자신. 서아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던 자신.
윤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아야, 나는 네가 싫어서 멀어진 게 아니었어. 네가 내 슬픔을 보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내가 너무 무거운 사람이 될까 봐 겁났어. 그래서 괜찮은 척했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바쁜 척하고, 네가 손 내밀기 전에 내가 먼저 문을 닫았어.
문장들이 쓰일수록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은 가시넝쿨에 찔리는 아픔과 조금 달랐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억지로 웃을 때의 아픔이 아니라, 상처 주변을 따뜻한 물로 씻을 때의 아픔이었다.
윤서는 숨을 고르고 계속 썼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네가 불렀던 내 이름을 내가 못 들은 척했던 날들이 있었지만, 사실은 다 들었어. 언젠가 돌아가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네 이름을 부를게. 대답이 늦어도 기다릴게. 네가 내 슬픔을 다 고쳐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같이 걸어 줄 수 있냐고 물어볼게.
연한 초록 잎이 두 번째 편지 위에 내려앉았다.
세 번째 종이 앞에서 윤서는 오래 펜을 들고 있었다.
과거의 나에게.
그 말을 쓰자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눈물도 함께 났다. 윤서는 손등으로 눈을 훔치고, 조금 삐뚤어진 글씨로 써 내려갔다.
너는 정말 많이 무서웠지. 끝이 있다는 걸 너무 일찍 들어 버려서, 하루하루가 모래시계처럼만 보였지. 그래서 즐거운 순간에도 곧 끝날 거라고 생각했고, 행복한 일이 생기면 잃어버릴 준비부터 했지. 네가 그랬던 건 이상해서가 아니야. 살고 싶어서였어.
윤서는 다시 펜을 들었다.
그동안 너를 미워해서 미안해. 왜 이렇게 겁이 많냐고, 왜 씩씩하지 못하냐고, 왜 남들처럼 쉽게 웃지 못하냐고 몰아세워서 미안해. 너는 살아남으려고 애쓴 거였어. 그러니까 이제 내가 네 손을 잡을게. 끝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덜 살아 있게 만드는 건 아니래. 오히려 오늘을 더 꼭 안아 보라고 말해 주는 거래.
마지막 문장을 쓸 때, 빛실 팔찌가 환하게 빛났다. 외로웠어 병 속의 주황빛도 윤서의 가방 안에서 살짝 흔들렸다.
새벽빛을 닮은 푸른 회색 잎이 세 번째 편지 위에 내려앉았다.
세 통의 편지가 완성되었다.
강은 이름을 잊지 않는다
강가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줄은 기다림이라기보다 함께 서 있는 모양에 가까웠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다. 앞사람이 오래 울면 뒤에 선 이들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잎을 띄우고 웃으면, 사람들은 조용히 따라 웃었다.
강물 위에는 이미 많은 잎들이 떠 있었다. 수백, 수천 장의 마지막 잎들이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흘러갔다. 이상한 것은 잎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까이 가면 자연스럽게 길을 내주고, 멀어지면 다시 곁을 채웠다. 혼자 흘러가는 잎은 하나도 없었다.
윤서의 차례가 왔다.
강가의 돌은 차가웠다. 윤서는 무릎을 꿇고 첫 번째 편지를 물 위에 올렸다. 따뜻한 갈색 잎이 편지 위에서 가만히 떨렸다.
"할머니." 윤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한마디에 강물이 아주 느리게 반짝였다.
"많이 보고 싶어. 그리고 고마워. 할머니가 살아 있어서, 내가 이렇게 따뜻한 걸 기억할 수 있어."
편지가 물 위로 미끄러져 나갔다. 갈색 잎은 금빛 등불 사이를 지나 다른 잎들 곁으로 갔다. 그 순간 어디선가 유자차 향이 스쳤다. 윤서는 울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울면서 웃는 얼굴. 조금 전 낯설게 보았던 바로 그 얼굴이 이제 자기 얼굴 위에 있었다.
두 번째 편지를 올렸다. 연한 초록 잎은 물에 닿자 아주 작게 흔들렸다. 마치 아직도 망설이는 마음처럼.
"서아야."
이름을 부르자 가슴 한가운데가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돌아가면, 내가 먼저 말할게. 미안하다고. 네가 그리웠다고. 같이 걸어 줄 수 있냐고."
편지가 강물 위로 떠났다. 초록 잎은 다른 잎 하나와 나란히 흘렀다. 꼭 손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세 번째 편지를 올릴 때는 손이 덜 떨렸다. 푸른 회색 잎이 물 위에 내려앉았다. 윤서는 그 잎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윤서야."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일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남들이 부를 때는 익숙한 이름인데, 자신이 자신에게 다정하게 부르려니 목소리가 자꾸 갈라졌다.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 끝을 먼저 듣는다고 해서 네가 끝만으로 된 사람은 아니야. 너는 아침 냄새를 좋아하고, 빵의 온도를 기억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 너는 아직 살아 있어."
푸른 회색 잎이 편지와 함께 천천히 멀어졌다. 그러자 강물 위에 떠 있던 수많은 잎들이 아주 잠깐 빛났다.
윤서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 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잎들을 데려갔다. 그러나 빼앗아 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안고 가는 것 같았다. 마지막 잎들이 혼자 떨어지지 않도록, 마지막 이름들이 혼자 어두워지지 않도록.
그때 축제의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어른들도, 아이들도, 동물들도, 이름 모를 존재들도 함께 불렀다. 누군가는 음을 틀렸고, 누군가는 가사를 잊었다. 어떤 사슴은 너무 크게 울어서 노래 중간에 콧소리를 냈고, 그 바람에 옆에 있던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사슴도 울면서 웃었다.
잔치가 이어졌다. 강가의 긴 식탁에는 열매 조림과 따뜻한 수프, 구운 뿌리채소, 별가루가 뿌려진 작은 빵들이 놓였다. 윤서는 담온이 준 잎 모양 빵을 꺼내 루루와 노을과 나누어 먹었다. 빵은 식었지만 이상하게도 더 깊은 맛이 났다.
루루는 빵 부스러기를 수염에 잔뜩 묻힌 채 말했다.
"어때, 마지막 잎의 축제는?"
윤서는 강물 위의 등불을 바라보았다.
"슬픈데… 따뜻해."
"둘 다 맞아."
"슬퍼하면, 기뻐하면 안 되는 줄 알았어."
"사라짐을 슬퍼하는 마음과 살아 있었음을 기뻐하는 마음은 싸우지 않아." 루루가 말했다. "둘은 같은 나무에서 난 두 잎이야. 바람이 불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흔들릴 뿐이지."
윤서는 그 말을 마음에 넣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지 않기 위해 천천히 숨을 쉬었다.
희미해지는 노을빛
밤이 깊어질수록 축제는 더 조용해졌다. 처음의 노래와 웃음은 잦아들고, 사람들은 강가에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등불들은 물 위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마지막 잎들도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대신, 어둠에 작은 길을 내며 흘러갔다.
윤서는 노을이 말없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노을은 빵을 아주 조금만 먹었다. 평소라면 별가루가 묻은 조각을 제일 먼저 골랐을 텐데, 오늘은 부스러기 하나를 오래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윤서야."
"응?"
"오늘 편지, 잘 띄웠어."
노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다.
"정말?"
"응. 떠나보낸다는 건 잊겠다는 뜻이 아니야. 손에 꽉 쥐고 있던 걸 강물에 맡긴다는 뜻이지. 그러면 이상하게도 더 오래 곁에 남을 때가 있어."
윤서는 노을의 몸을 자세히 보았다. 작은 이끼 사이에서 늘 새어 나오던 붉고 금빛의 빛이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윤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을아, 너 빛이…."
노을은 자기 잎사귀 날개를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들켰네."
"왜 그래? 아픈 거야?"
루루가 고개를 숙였다. 그 침묵이 대답처럼 느껴져 윤서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노을은 윤서의 어깨에서 내려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앉았다. 너무 가벼웠다. 처음 만났을 때도 작고 가벼운 이끼용이었지만, 지금은 따뜻한 빛 한 조각이 잠시 이끼의 모양을 빌린 것 같았다.
"나는 저녁이끼용이야." 노을이 말했다. "모든 이끼용이 그런 건 아니지만, 나 같은 아이들은 오래 살지 않아. 대신 짧은 동안 많은 저녁을 기억해. 누군가 하루의 끝을 무서워할 때, 그 곁에 앉아 주는 게 우리 일이야."
윤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너도…."
끝까지 묻지 못했다. 끝이라는 단어가 입술 근처까지 왔다가 떨렸다.
노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지막 잎도 어딘가에서 준비되고 있을 거야."
윤서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방금 전까지 마지막 잎을 강물에 띄우며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운 존재의 끝이 눈앞에 다가오자 배운 것들은 모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싫어."
말은 아이처럼 튀어나왔다.
"싫어, 노을아. 나는 이제 겨우… 이제 겨우 네가 좋은데."
노을은 윤서의 손바닥 위에서 아주 작게 몸을 부풀렸다. 따뜻함이 손금 사이로 스며들었다.
"좋아하게 된 걸 후회해?"
윤서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됐어."
"뭐가 돼."
"끝이 있다고 해서 좋아한 시간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윤서는 울음을 삼키지 못했다. 눈물이 손등으로 떨어졌고, 노을의 이끼 끝에도 한 방울 닿았다. 그러자 그 방울이 작은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루루가 조용히 말했다.
"윤서야, 시간의 산으로 가야 해."
"시간의 산?"
"끝을 듣는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오르는 길이야. 거기서 너는 네가 들은 끝의 의미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노을도…."
루루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하지만 윤서는 알 수 있었다. 시간의 산은 단순히 다음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뤄 둔 두려움들이 더 이상 뒤에 숨어 있지 못하는 곳이었다.
강 위에서는 마지막 잎들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윤서가 띄운 세 통의 편지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라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할머니의 유자차 향, 서아에게 보내려던 목소리, 과거의 자신에게 건넨 손. 그것들은 강 저편으로 떠났으면서도 윤서의 가슴 안에서 더 선명해졌다.
노을은 윤서의 손바닥 위에서 작은 하품을 했다.
"오늘은 울어도 돼. 대신 내일은 산을 오르자."
"무서워."
"나도."
윤서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노을의 빛은 희미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주 작은 불씨처럼, 마지막까지 자기 색을 잃지 않으려는 듯 가만히 타고 있었다.
"무서운데도 갈 수 있을까?" 윤서가 물었다.
노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서워서 같이 가는 거야."
그 말에 루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가의 누군가가 다시 차를 따랐고, 향긋한 김이 밤공기 속으로 올라갔다. 울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웃음이 앉았고,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조용한 그리움이 앉았다. 어느 마음도 다른 마음을 밀어내지 않았다.
윤서는 노을을 품에 안고 강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잎들은 어둠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쓸쓸하지 않았다. 잎들 곁에는 등불이 있었고, 노래가 있었고, 차의 향기가 있었고,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윤서는 알았다.
끝을 애도하는 일과 삶을 축하하는 일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지 않았다. 둘은 같은 강 위를 흐르고 있었다. 하나는 눈물의 모양으로, 하나는 빛의 모양으로. 강은 그 둘을 함께 안고 천천히 밤을 건넜다.
윤서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마지막 잎도 혼자 떨어지지 않아."
노을이 품 안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응. 그러니까 우리도 혼자 가지 않을 거야."
숲은 밤새 등을 켜 두었다. 마치 떠나는 잎들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아직 길 위에 남은 윤서를 위해서이기도 한 것처럼.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