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지나간 자리의 온기
비의 마을을 벗어났는데도 빗소리는 한동안 윤서의 귓가에 남아 있었다.
찰박.
마지막 물웅덩이를 밟자, 발밑의 길이 젖은 돌에서 따뜻한 흙으로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우산 위를 두드리던 빗방울은 점점 멀어졌고, 대신 아주 낮은 타닥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자 그 소리는 더 분명해졌다.
타닥.
토닥.
마치 작고 조심스러운 심장들이 어둠 속에서 불을 피우는 소리.
윤서는 젖어도 괜찮은 우산을 접었다. 우산 천에 맺혀 있던 빗방울 몇 개가 흙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방울들은 흙에 스며들자마자 희미한 김을 올렸다. 차가운 물이 따뜻한 땅을 만났을 때 나는 숨 같은 김이었다.
"여긴 따뜻해."
윤서가 말했다.
루루는 앞발로 흙을 살짝 긁어 보았다. 붉은 털 끝이 흙빛에 물들었다.
"불씨마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야."
"불씨마을?"
"정식 이름은 조금 길어. '꺼져 가는 빛을 혼자 두지 않는 마을'이라고도 부르지. 하지만 다들 줄여서 불씨마을이라고 해."
노을은 윤서의 어깨 위에서 몸을 길게 늘였다. 비의 마을에서 충분히 축축해진 이끼가 따뜻한 공기를 만나자, 노을의 몸에서는 풀잎을 말릴 때 나는 냄새가 났다.
"이름부터 마음이 복잡하군. 꺼져 가는 빛이라니. 따뜻하긴 한데 어딘가 간지러워."
"무서워?" 윤서가 물었다.
노을은 즉시 고개를 들었다.
"나? 이끼용에게 무서운 건 오직 건조한 바람과 지나치게 예의 없는 베개뿐이야."
그러나 말끝이 평소보다 조금 작았다. 윤서는 노을을 힐끗 보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비의 마을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모든 우산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는 것. 누군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곁에서 걸어도 된다는 것.
길은 낮은 언덕으로 이어졌다. 언덕을 오를수록 공기는 더 따뜻해졌다. 비에 젖은 옷자락이 천천히 마르고, 손끝의 차가움이 풀렸다. 윤서는 품속의 '외로웠어' 병을 만졌다. 병은 조용했다. 대신 손목의 빛실 팔찌가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마치 팔찌도 앞쪽에서 오는 온기를 알아차린 듯했다.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윤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아래쪽 분지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지붕들은 낮고 둥글었다. 굴뚝에서는 연기 대신 금빛 먼지 같은 것이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골목마다 작은 화로가 놓여 있었고, 화로 안에는 불꽃이 크게 타오르지 않았다. 그저 붉은 씨앗처럼, 숨 쉬는 별처럼, 조용히 빛났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작은 등불을 품고 있었다.
정확히는 옷 안쪽, 심장이 있는 자리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어떤 사람의 빛은 밝은 주황색이었고, 어떤 사람의 빛은 차분한 노란색이었다. 아이들의 가슴에서는 불꽃이 통통 튀는 듯한 맑은 빛이 났고, 노인들의 가슴에서는 오래 타 온 장작의 속불처럼 깊고 낮은 빛이 났다. 병든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의 빛은 아주 작았지만, 그 작은 빛 주변을 누군가의 손이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다.
윤서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빛이 많았는데 눈부시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추운 곳을 걷다가 누군가가 두 손으로 따뜻한 찻잔을 건네준 것처럼, 가슴 안쪽이 천천히 풀렸다.
"저 빛은 뭐야?"
윤서가 낮게 물었다.
루루가 대답했다.
"각자의 불씨야. 이 마을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불씨로 본대. 크게 타오르는 날도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날도 있고, 재 속에서 겨우 빛나는 날도 있지."
"그럼…… 꺼지면?"
윤서는 그 말을 꺼내고도 목이 조금 막혔다.
끝.
그 단어는 이제 예전처럼 윤서를 한꺼번에 얼어붙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차가운 돌처럼 마음 한쪽에 놓였다.
루루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꺼지는 걸 막을 수는 없어. 어떤 불씨도 영원히 타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마지막까지 따뜻하게 곁에 있을 수는 있어. 이 마을 사람들은 그 일을 배웠어."
윤서는 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타닥.
토닥.
어떤 불씨는 힘차게 타고, 어떤 불씨는 겨우 숨을 쉬었다. 그 소리들 사이에 윤서에게 익숙한 것이 섞여 있었다. 끝을 듣는 능력이 깨어날 때마다 찾아오는, 아주 가는 떨림.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보다 온기가 먼저 왔다.
끝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온도를 알려 주는 소리 같았다.

가슴에 등불을 품은 마을
마을 입구에는 문이 없었다.
대신 낮은 돌기둥 두 개가 서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사기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릇 안에는 불씨 하나가 잠든 듯 빛나고 있었다. 루루가 그 앞에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윤서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노을은 잠깐 망설이다가 아주 작게 앞발을 모았다.
"이건 예의니까 하는 거야. 불씨가 귀여워서가 아니라."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냄새가 났다. 말린 귤껍질, 장작, 갓 데운 우유, 오래된 담요, 그리고 누군가의 손바닥 냄새. 비의 마을이 젖은 슬픔의 냄새로 가득했다면, 이곳은 잘 덮어 둔 온기의 냄새로 가득했다.
골목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둥글게 앉아 손바닥만 한 등잔을 만들고 있었다. 작은 흙그릇에 심지를 꽂고, 그 주위에 조약돌과 마른 꽃잎을 붙였다. 아이들은 자기 가슴의 빛을 손으로 살짝 감싸더니, 그 빛에서 아주 작은 불씨를 떼어 등잔 심지에 옮겼다. 불씨는 아이의 손바닥 위에서 잠깐 흔들리다가 등잔 안에 자리를 잡았다.
"저렇게 떼어 내도 괜찮아?"
윤서가 놀라 물었다.
곁을 지나던 아주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머니의 가슴에서는 부드러운 살구빛이 새어 나왔다.
"나누는 불은 줄어들지 않는단다. 다만 조금 더 조심히 돌봐야 하지."
"왜 등잔을 만들어요?"
"오늘 저녁에 긴 잠을 준비하는 분들이 계시거든. 아이들이 만든 등잔은 그 길을 밝히는 데 쓰여."
긴 잠.
윤서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숨긴 것도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거칠게 던지지 않았다. 아주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건네듯 말할 뿐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넓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 중앙에는 커다란 화덕이 있었다. 그런데 화덕 안의 불은 활활 타오르지 않았다. 마치 수많은 작은 불씨가 서로 어깨를 맞댄 것처럼, 낮고 넓게 빛났다. 그 주위로 회색 앞치마를 두른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유리등을 닦고, 어떤 이는 작은 집게로 불씨를 옮기고, 어떤 이는 낡은 담요를 햇볕 대신 불빛에 말리고 있었다.
그들의 앞치마 가슴팍에는 같은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두 손이 작은 불꽃을 감싸고 있는 문양.
루루가 말했다.
"불씨지기들이야."
그때 한 사람이 윤서 쪽으로 다가왔다. 키가 크지 않은 여인이었다. 머리카락은 잿빛과 은빛이 섞여 있었고, 눈동자는 깊은 호박색이었다. 그녀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늘었지만, 손끝에서는 안정된 온기가 느껴졌다. 가슴의 등불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흔들림 없이 맑았다.
"새 손님이 왔구나."
여인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오래 끓인 수프처럼 낮고 따뜻했다.
"저는 윤서예요."
"나는 사라. 이 마을의 불씨지기 중 한 사람이란다."
노을이 윤서의 어깨 위에서 사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불씨지기라면 불을 잘 피우는 사람인가?"
사라는 노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불을 피우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하는 일은 불 곁에 앉는 일이지."
"그건 덜 멋져 보이는데."
"그래서 중요한 일이란다. 멋져 보이지 않는 일들이 오래 버티는 온기를 만들 때가 많거든."
노을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이 마을 사람들, 말로 이끼를 말리는 재주가 있네."
사라는 웃었다. 그리고 윤서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윤서는 순간 움찔했다. 이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가슴에 등불이 보였다. 그렇다면 자기에게도 무엇인가 보일까. 사람들의 끝을 듣는 아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가진 아이. 아직 엄마와 지민에게 하지 못한 말을 품은 아이.
사라는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네 불씨는 먼 길을 걸어왔구나."
그 말만 했다.
윤서는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옷 위로 뚜렷한 빛이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손을 얹자 안쪽에서 아주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심장이 뛰는 자리.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자리. 수많은 걱정과 두려움이 쌓였지만, 아직 꺼지지 않은 자리.
"저도 불씨가 있어요?"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불씨를 품고 있지."
사라는 마을 중앙의 화덕을 바라보았다.
"다만 어떤 사람은 자기 불씨가 있다는 걸 잊어버려. 너무 오래 추웠거나, 너무 오래 혼자였거나, 자기 빛이 별것 아니라고 배웠을 때 그렇지."
윤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품속의 '외로웠어' 병이 아주 작게 울렸다. 딸랑, 하는 소리가 아니라 불 가까이에 둔 유리가 살짝 데워지는 듯한 소리였다.
빛을 잘 건네는 일
사라는 윤서를 화덕 옆 긴 의자로 안내했다.
의자에는 이미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젊은 남자는 작은 유리등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유리등 안에는 푸른빛 불씨가 들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맞은편에는 흰 머리의 할머니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아주 작은 등불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등불들은 서로 다른 박자로 깜빡였다.
"여기서는 모두가 불씨를 돌보나요?"
윤서가 물었다.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불씨도, 다른 사람의 불씨도. 하지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착각하지 않는 일이란다."
"무슨 착각이요?"
"누군가의 불씨를 대신 태워 줄 수 있다는 착각."
윤서는 사라를 바라보았다.
"대신 태워 줄 수 없어요?"
"없어. 우리는 곁에 장작을 놓아 줄 수 있고, 바람을 막아 줄 수 있고, 추운 밤에 담요를 덮어 줄 수는 있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어. 마지막 숨도, 마지막 기억도, 마지막 놓아줌도 그 사람의 것이야."
그 말은 따뜻했지만 쉽지 않았다.
윤서는 엄마를 떠올렸다. 피곤한 얼굴로 현관에 들어오면서도 먼저 웃으려 하던 엄마. 윤서는 엄마가 힘들어 보일 때마다 자기가 더 괜찮은 척하면 엄마의 불씨가 덜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슬픔을 숨기면, 엄마의 밤이 조금 덜 추워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자기가 숨긴 슬픔은 엄마를 따뜻하게 했을까, 아니면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찬 벽을 세웠을까.
사라는 작은 집게로 화덕의 불씨 하나를 들어 유리등 안에 옮겼다. 불씨는 옮겨지는 동안 잠깐 흔들렸지만 꺼지지 않았다. 사라는 유리문을 닫고, 그 위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불씨지기들은 죽음을 패배라고 부르지 않아."
사라가 말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빛을 잘 건네는 일."
윤서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따라 했다.
빛을 잘 건네는 일.
"사람이 떠날 때, 그 사람의 불씨가 그냥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그가 데워 준 손, 밝혀 준 길, 나누어 준 말, 남겨 둔 웃음 속으로 옮겨 가지. 물론 남은 사람들은 춥다. 그건 사실이야. 아무리 잘 건네도, 빈자리는 차가워. 그래서 우리는 떠나는 사람 곁에 앉아 있고, 남은 사람 곁에도 앉아 있어. 둘 다 돌봄이 필요하니까."
윤서는 할머니의 손을 떠올렸다.
힘이 없었지만 따뜻했던 손. "그림 계속 그려"라고 말하던 목소리. 그 말은 할머니가 떠난 뒤에도 윤서 안에 남아 있었다. 윤서는 오랫동안 그 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너무 아파서 덮어 두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말은 꺼진 것이 아니었다.
재 속에 남아 있던 불씨처럼, 아주 작게 빛나고 있었다.
"저는 마지막 인사를 못 한 사람이 있어요."
윤서가 말했다.
사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들었다.
"할머니요. 무서워서 말을 못 했어요. 다음에 그림 보여 드린다고만 했는데, 다음이 없었어요."
"그 말을 아직 품고 있구나."
"비의 마을에서 조금 말했어요.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아직 뜨거워요."
사라는 윤서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것은 나쁜 게 아니란다. 아직 사랑이 살아 있다는 뜻일 때도 있어. 다만 너무 오래 혼자 쥐고 있으면 손이 데지."
사라는 화덕 옆 바구니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부드럽고 두꺼운 천이었다. 그녀는 윤서에게 그것을 건넸다.
"오늘 네가 누군가의 불씨 곁에 앉아 줄 수 있겠니?"
윤서는 천을 받아 들고 굳었다.
"제가요?"
"네가 그 사람을 구해야 하는 건 아니야. 대단한 말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손이 차가우면 이 천으로 감싸 주고, 말하고 싶어 하면 들어 주면 된다. 때로 마지막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귀란다."
윤서는 천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누군가의 마지막 곁에 앉을 수 있을까. 끝을 듣는 능력을 가진 자신이, 그 끝을 피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서웠다. 하지만 비의 마을에서 배운 말이 윤서의 손끝에 남아 있었다.
젖어도 괜찮아.
그리고 느린 여관에서 배운 말도 있었다.
기대도 괜찮아.
윤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게요."
잠든 불씨의 방
사라는 윤서를 마을 가장 안쪽에 있는 집으로 데려갔다.
그 집은 다른 집보다 조금 더 낮고 넓었다. 지붕에는 검은 기와 대신 재색 나무판이 얹혀 있었고, 창문마다 얇은 황금빛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문 앞에는 신발이 여러 켤레 놓여 있었다. 작은 신발, 낡은 장화, 털실이 달린 슬리퍼, 그리고 많이 닳은 가죽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소리가 먼저 윤서를 맞았다.
타닥.
아주 작은 소리였다.
방 중앙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는 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얼굴은 마른 나뭇잎처럼 얇았고, 손등에는 푸른 혈관이 강물처럼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이상하게 편안했다. 노인의 가슴 위에는 작은 등불이 놓여 있었다. 등불 안의 불씨는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고, 다시 아주 작게 살아났다.
침대 곁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중년 여인은 노인의 발을 천천히 주무르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물수건을 꼭 짜서 노인의 이마에 올렸다. 어린아이는 침대 밑에 앉아 조그만 나무말을 손에 쥐고 있었다. 모두 울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가벼운 얼굴은 아니었다. 슬픔은 방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리치거나 밀어붙이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사라가 낮게 말했다.
"여기는 마지막불 방이야. 곧 긴 잠에 드는 이들이 혼자 있지 않도록 마련된 곳이지."
윤서는 문가에 서서 손끝을 움츠렸다.
그때 노인이 눈을 떴다. 눈동자는 흐렸지만, 아직 깊은 곳에 작은 빛이 남아 있었다.
"새 손님이 왔나 보구먼."
노인의 목소리는 마른 풀잎이 바람에 스치는 것처럼 가늘었다.
사라가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하룬 어르신, 윤서라는 아이예요. 먼 길을 걸어왔고, 오늘 잠시 어르신 곁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묻고 싶어요."
노인은 윤서를 향해 손가락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앉아도 되지. 늙은 사람 곁은 대체로 자리가 많거든. 다들 바쁘다고 생각해서 멀리 가 버리니까."
그 말에 곁에 있던 중년 여인의 눈가가 젖었다.
"아버지."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농담이야. 마지막까지 농담은 아껴 두면 곰팡이가 슨다."
노을이 윤서의 어깨 위에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저분과는 말이 통할 것 같아."
윤서는 조심스럽게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사라가 건넨 천으로 노인의 손을 감싸 주었다. 손은 차가웠다. 하지만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손바닥 안쪽에 아주 약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윤서는 그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감쌌다.
그 순간, 윤서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타닥.
토닥.
노인의 불씨가 내는 소리였다. 아주 느리고, 아주 작았다. 곧 꺼질 것 같은 소리. 예전 같으면 윤서는 그 소리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귀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끝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워서, 자기도 같이 사라질 것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윤서는 도망치지 않았다.
노인의 손이 자신의 손 안에 있었다. 손등의 주름은 길고 얇은 강줄기 같았다. 손톱은 반투명했고, 손가락은 가끔 아주 작게 떨렸다. 그 떨림은 아직 이곳에 있다는 신호였다.
윤서는 작게 말했다.
"손이 조금 차가우세요."
"오래 쓴 손이라 그렇지."
노인이 대답했다.
"오래 쓰면 닳아. 하지만 닳은 물건은 대체로 이야기가 많아."
윤서는 노인의 손을 더 조심히 감쌌다.
"어떤 이야기가 있어요?"
노인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에서 화덕의 빛이 천 위로 흔들렸고, 방 안은 금빛 물결 속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내가 젊었을 때 말이다. 나는 등불을 만드는 사람이었어. 아주 밝은 등불을 만들고 싶었지. 산길을 한 번에 낮처럼 밝히는 등불, 바다 끝에서도 보이는 등불,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게 해 줄 등불."
노인의 숨이 잠시 끊겼다가 이어졌다.
윤서는 숨을 맞추듯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겨울밤에 길 잃은 아이를 만났어. 눈이 많이 왔지. 내가 만든 큰 등불은 바람에 꺼져 버렸고, 남은 건 손바닥만 한 작은 불씨뿐이었어. 나는 그 불씨를 아이 손에 쥐여 주고, 내 외투로 감쌌다. 큰 등불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작은 불씨 하나가 아이를 아침까지 데려갔어."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날 알았지. 빛은 멀리 보이려고만 있는 게 아니더구나. 가까운 손을 얼지 않게 하려고도 있는 거였어."
윤서는 노인의 말을 마음속에 천천히 담았다.
빛은 멀리 보이려고만 있는 게 아니다.
가까운 손을 얼지 않게 하려고도 있다.
그 말은 윤서가 그동안 생각했던 삶의 모양을 조용히 바꾸었다. 큰일을 해내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살아야만 깊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빛은 충분히 자기 일을 할 수 있었다.
노인의 불씨가 다시 흔들렸다.
타……닥.
방 안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중년 여인은 노인의 발을 주무르던 손을 멈췄고, 어린아이는 나무말을 꼭 끌어안았다.
윤서의 심장도 함께 흔들렸다.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윤서는 알았다. 아무리 손을 꼭 잡아도, 아무리 마음으로 붙잡아도, 노인의 불씨를 대신 태울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은 슬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절망만은 아니었다.
윤서는 노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됐어요?"
노인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살았지. 자라서 빵 굽는 사람이 됐어. 지금도 이 마을 어딘가에서 너무 딱딱한 빵을 만들고 있을 게다."
방 안에서 아주 작은 웃음이 번졌다. 중년 여인이 눈물을 닦으며 웃었고, 어린아이도 코를 훌쩍이며 웃었다.
노인은 그 웃음을 듣고 만족한 듯 숨을 내쉬었다.
"좋구나. 웃음소리는 마지막 길에 들고 가기 좋은 짐이야. 무겁지 않고 따뜻하거든."
윤서는 목이 메었다.
"더 들려주실 이야기가 있어요?"
"있지. 하지만 이제 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노인의 눈이 윤서를 향했다.
"아이가 들어 주었으니, 이야기는 길을 찾았어. 이야기는 꼭 끝까지 말해야만 남는 게 아니란다. 누군가 마음을 기울여 듣는 순간, 이미 조금 건너간 거야."
윤서의 손목에서 빛실 팔찌가 조용히 따뜻해졌다.
할머니가 떠올랐다. 병실에서 다 하지 못한 말들. 다음에 그림 보여 드리겠다는 약속.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지만, 할머니가 남긴 말은 윤서 안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
그림 계속 그려.
윤서는 노인의 손을 감싼 채 속삭였다.
"저도 들었어요. 어르신의 작은 불씨 이야기."
노인은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노인의 가슴 위 등불이 크게 한 번 밝아졌다. 방 안의 얼굴들이 그 빛에 잠깐 환해졌다. 중년 여인의 눈물, 젊은 남자의 떨리는 입술, 아이의 나무말, 사라의 두 손, 윤서의 젖어도 괜찮은 우산 손잡이까지 모두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아니, 사라지는 방식이 윤서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등불 안의 불꽃은 작아지더니 아주 작은 빛가루가 되어 떠올랐다. 빛가루들은 방 안을 천천히 돌았다. 하나는 중년 여인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하나는 아이가 쥔 나무말 갈기에 스며들었다. 하나는 젊은 남자의 물수건 끝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하나는 윤서의 손목, 빛실 팔찌 위에 내려앉았다.
따뜻했다.
눈물이 윤서의 뺨을 타고 흘렀다. 이번에는 비가 아니었다. 숨길 수 없는 눈물이었다. 하지만 방 안 누구도 윤서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슬픔은 이곳에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빛이 건너갔다는 것을 몸이 알아차리는 방식이었다.
사라가 조용히 말했다.
"하룬의 빛이 잘 건너갔습니다."
그 말에 방 안 사람들이 하나씩 노인의 이름을 불렀다.
"하룬."
"아버지."
"할아버지."
윤서는 조금 망설이다가 아주 작게 말했다.
"하룬 어르신."
그 이름이 방 안의 따뜻한 공기 속에 머물렀다.
남은 시간을 나누는 법
마지막불 방을 나왔을 때, 밤이 내려와 있었다.
불씨마을의 밤은 어둡지 않았다. 집집마다 가슴의 등불이 창문 안쪽에서 은은히 비쳤고, 골목의 화로들은 별을 땅에 심어 둔 것처럼 빛났다. 하늘에는 구름이 얇게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별들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윤서는 마을 가장자리의 낮은 돌담에 앉았다.
손바닥에는 아직 하룬의 손 온도가 남아 있었다. 차갑고, 가볍고, 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던 마지막 온도. 윤서는 그 감각을 잊고 싶지 않아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루루는 윤서 옆에 앉아 꼬리를 몸에 감았다. 붉은 꼬리 끝이 작은 횃불처럼 빛났다.
"괜찮아?"
루루가 물었다.
윤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다는 말은 너무 단순했다. 괜찮지 않다고 하기에는 방금 겪은 일이 오직 아픔만은 아니었다. 슬프고, 따뜻하고, 무섭고,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잘 모르겠어."
윤서가 말했다.
"그런데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어."
루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한 날도 있어."
노을은 돌담 위에 올라가 앉았다. 가슴 높이의 화로빛이 노을의 투명한 날개를 비췄다. 날개는 얇은 낙엽처럼 보였다. 노을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돌담의 이끼 품질에 대해 평가하거나, 불씨가 이끼를 얼마나 건조하게 만드는지 투덜거렸을 텐데.
윤서는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노을이 입을 열었다.
"윤서."
"응."
"너는 남은 시간을 아끼고 싶어, 나누고 싶어?"
뜻밖의 질문이었다.
윤서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끼는 거랑 나누는 거, 다른 거야?"
"가끔은."
노을은 앞발로 자기 날개 끝을 만졌다. 날개는 불빛을 받아 거의 투명하게 빛났다.
"내 날개가 일곱 번 정도밖에 제대로 퍼덕이지 못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한동안은 아꼈어. 오늘은 날지 말자, 내일 필요할지 모르니까. 이번에는 뛰지 말자, 다음에 더 중요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러다 보니 이상한 일이 생겼어."
"무슨 일?"
"아낀 날갯짓이 나를 어디에도 데려다주지 않았어."
윤서는 숨을 멈췄다.
노을은 웃으려는 듯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나는 오래 사는 종류가 아니야."
그 말은 아주 조용했다. 하지만 윤서에게는 밤공기 전체가 잠깐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노을아."
"아직 당장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비극적인 표정을 짓지는 마. 나는 비극적인 표정에 알레르기가 있어. 재채기하면 포자가 날릴 수도 있고."
노을은 일부러 가볍게 말했지만, 윤서는 그 말 아래에 있는 떨림을 들었다.
짧은 수명.
작은 날개.
아껴 둔 날갯짓.
윤서는 갑자기 노을의 몸이 더 작아 보였다. 어깨 위에서 농담을 던지고, 축축함에 대해 불평하고, 이상한 철학을 중얼거리던 작은 이끼용. 늘 곁에 있을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자기 안의 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친구.
"무섭지 않아?"
윤서가 물었다.
노을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마을의 불씨들이 타닥거렸다. 멀리 누군가 낮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지막불 방에서 들려오던 노래와 닮은, 떠난 사람의 길을 덮어 주는 노래였다.
"무섭지."
노을이 말했다.
"가끔은 아주 많이. 특히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을 때. 시간이 내 몸속 이끼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 같거든. 그래서 예전에는 더 아끼려고 했어. 날갯짓도, 말도, 마음도. 그런데 그렇게 아끼면 오래 남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더 빨리 마르는 느낌이 들었어."
윤서는 노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노을은 잠깐 망설이다가 윤서의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작은 발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몸은 따뜻하고 조금 축축했다.
"하룬 어르신이 그랬잖아."
노을이 말했다.
"작은 불씨가 아이를 아침까지 데려갔다고. 그 불씨는 자기를 아껴서 살아남은 게 아니야. 손에 쥐여졌기 때문에 의미가 생긴 거지."
윤서는 손바닥 위의 노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나한테 묻는 거야? 남은 시간을 아낄 건지, 나눌 건지."
"응."
노을의 붉은 눈이 윤서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자꾸 시간을 세려고 하잖아.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 끝나는지, 누구의 모래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그걸 아예 안 볼 수는 없겠지. 너는 끝을 듣는 아이니까. 하지만 윤서, 남은 시간을 너무 꼭 쥐면 손이 뜨거워져. 손이 뜨거우면 아무도 잡을 수 없어."
그 말이 윤서의 가슴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윤서는 사람들의 가슴속 모래시계빛을 처음 보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끝이 들린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 전체가 무서워졌던 날. 엄마의 시간, 지민의 시간, 자신의 시간이 모두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져서 숨이 막혔던 날.
그때 윤서는 시간을 지키고 싶었다.
누구도 사라지지 않게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하룬의 방에서 배운 것은 달랐다. 붙잡는 손만이 사랑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잡아 주는 손도 사랑이었다. 시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남은 온도를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불씨지기들이 말하는 돌봄이었다.
"나는……"
윤서는 천천히 말했다.
"아직도 끝나는 게 무서워. 엄마도, 지민도, 나도, 너도. 누구든 사라질 수 있다는 게 무서워."
노을은 가만히 들었다.
"그런데 오늘 하룬 어르신 손을 잡고 있으면서 알았어. 끝이 가까워져도 그 순간이 텅 비는 건 아니더라.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었어. 손의 온도, 이야기, 웃음, 이름 부르는 소리."
윤서는 손바닥을 조금 더 조심히 감쌌다. 노을을 가두지 않으면서도 떨어지지 않게.
"나는 시간을 아끼기만 하고 싶지 않아. 엄마랑 나누고 싶어. 지민이랑도. 너랑도. 무섭다고 숨기느라 다 쓰지 못하는 시간이 아니라, 무서워도 같이 앉아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어."
말을 마치자 품속의 '외로웠어' 병이 따뜻해졌다. 병 안의 남색 빛이 흔들리더니, 아주 작은 주황빛을 품었다. 마치 비에 젖은 슬픔이 불 곁에서 조금 데워진 것 같았다.
노을은 아무 말 없이 윤서의 손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
"그 대답, 꽤 마음에 들어."
"노을답지 않게 솔직하네."
"가끔은 솔직함도 환기가 필요해."
윤서는 웃었다. 웃다가 눈물이 났다. 이번에도 숨기지 않았다. 눈물은 뺨을 타고 내려와 턱 끝에서 떨어졌다. 땅에 닿은 눈물은 작은 김을 올렸다. 불씨마을의 흙은 슬픔도 얼어붙게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노을은 윤서의 엄지손가락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그리고 참고로, 내가 짧게 산다고 해서 오늘 간식 몫까지 양보할 생각은 없어."
윤서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그건 생각도 안 했어."
"좋아. 관계가 건강하군."
마지막을 돌보는 노래
그날 밤, 불씨마을 사람들은 중앙 화덕가에 모였다.
하룬의 가족들이 먼저 나왔다. 중년 여인은 작은 유리등을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하룬의 불씨에서 갈라진 빛가루 하나가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아이는 나무말을 품에 안았고, 젊은 남자는 하룬이 쓰던 낡은 등불 손잡이를 들고 있었다.
사라는 화덕 앞에 섰다.
마을 사람들은 각자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들의 등불이 조금씩 밝아졌다. 누구의 빛도 똑같지 않았다. 어떤 빛은 떨렸고, 어떤 빛은 묵직했으며, 어떤 빛은 아직 울음을 머금은 듯 흐렸다. 그러나 모두 같은 방향을 향했다.
하룬이 떠난 자리.
사라가 말했다.
"오늘 하룬의 불씨가 우리 곁에서 긴 잠에 들었습니다. 그는 큰 등불을 꿈꾸었고, 작은 불씨의 일을 배웠으며, 많은 밤에 누군가의 길을 밝혔습니다. 그의 빛은 끝났으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데운 손과, 우리가 들은 이야기와, 우리가 이어 갈 작은 친절 속에 건너왔습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윤서도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자기 안쪽에서 작은 불씨가 느껴졌다. 크지 않았다. 여전히 겁이 많고, 바람에 흔들리고, 때때로 비에 젖는 불씨였다. 하지만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슬펐다. 그러나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슬픔이 아니었다. 지친 등을 받쳐 주는 슬픔이었다. 음들은 낮게 시작해 천천히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장작이 타는 소리, 누군가의 숨소리, 어린아이의 훌쩍임이 노래 사이에 섞였다.
윤서는 노래를 들으며 하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큰 등불이 아니라 작은 불씨.
멀리 보이는 이름이 아니라 가까운 손.
그리고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다. 괜찮은 척하느라 숨겨 둔 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불씨를 건네듯 말하고 싶었다.
엄마, 나 사실 많이 무서웠어.
엄마도 무서웠어?
우리 같이 조금 앉아 있을까.
지민에게도 말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네가 내 우산 아래로 들어오려 했을 때, 나는 자꾸 접어 버렸다고. 이제는 완벽하게 마른 사람이 된 다음에 만나는 게 아니라, 조금 젖은 채로라도 만나고 싶다고.
노래가 끝났을 때, 화덕의 불씨들이 한 번에 밝아졌다가 천천히 낮아졌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떤 이는 울었고, 어떤 이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는 아이를 안아 주었고, 누군가는 말없이 물 한 잔을 건넸다.
윤서는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돌봄은 끝을 없애는 힘이 아니었다.
끝 앞에서도 사람을 혼자 두지 않는 힘이었다.
이별의 품격이란 슬픔을 숨기지 않는 것, 떠나는 이를 물건처럼 보내지 않는 것, 남은 이의 울음을 서둘러 닦아 내지 않는 것,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라가 윤서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작은 등잔 하나를 건넸다. 흙으로 만든 소박한 등잔이었다. 등잔 안에는 불꽃이 아니라 붉은 점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이건 하룬의 불씨가 아니야."
사라가 말했다.
"네가 오늘 곁에 앉아 주며 피운 불씨란다."
"제가요?"
"들어 주는 마음도 불을 만든단다. 아주 작은 불이지만, 길을 잃은 밤에는 그 정도 빛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어."
윤서는 등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따뜻했다. 뜨겁지 않고,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온기였다.
"이걸 가져가도 돼요?"
"필요할 때 켜렴. 누군가의 끝이 두려워질 때, 혹은 네 마음이 너무 추워질 때. 하지만 기억해. 등잔은 네가 혼자 버티라는 뜻이 아니야. 빛은 나누라고 있는 거니까."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잔의 작은 붉은 점이 대답하듯 반짝였다.
재 속에서 배운 길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마을의 불빛은 더 낮아졌다.
사람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화덕 주변에는 아직 따뜻한 재가 남아 있었고, 그 재 속에서 아주 작은 불씨들이 숨 쉬고 있었다. 사라는 긴 쇠막대로 재를 살짝 덮어 주었다.
"꺼진 것처럼 보여도 안쪽에 남아 있는 불이 있네요."
윤서가 말했다.
"그래. 그래서 함부로 재를 헤집으면 안 된단다."
사라는 윤서를 바라보았다.
"사람 마음도 그렇지. 겉으로 조용해 보여도 안쪽에서 아직 뜨거운 것이 있을 수 있어.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슬픔을 너무 빨리 정리하려 하지 않아. 재 속의 불씨는 자기 속도로 식거나, 다시 살아나야 하니까."
윤서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자기 안의 슬픔도 그랬다.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뜨거웠던 마음. 엄마를 걱정하며 숨겨 둔 말. 지민에게 닿지 못한 사과. 그것들은 정리되지 못한 실패가 아니라, 아직 돌봄이 필요한 불씨일지도 몰랐다.
하늘 가장자리가 희미하게 밝아졌다. 불씨마을의 새벽은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따뜻했다. 골목의 화로들이 밤새 지킨 온기를 길 위에 조금씩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루루가 마을 바깥쪽 길을 바라보았다.
"다음 길이 열렸어."
윤서는 고개를 들었다.
마을 끝, 낮은 언덕 너머에 어두운 초록빛이 보였다. 처음에는 숲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나무가 아니었다. 수많은 넝쿨이 서로 얽혀 벽처럼 서 있었다. 넝쿨에는 길고 날카로운 가시들이 돋아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아주 작은 꽃봉오리들이 숨어 있었다.
"저긴 어디야?"
윤서가 물었다.
루루의 붉은 귀가 살짝 움직였다.
"가시넝쿨 정원."
노을이 즉시 윤서의 후드 안으로 반쯤 숨었다.
"가시라니. 매우 비이끼적이고 반평화적인 식물 구조야."
"무서워?"
윤서가 물었다.
"아니. 나는 단지 내 부드러운 외관이 자연계의 공격적인 장식과 충돌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
윤서는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오는 자신이 조금 신기했다. 방금 이별을 배웠는데도 웃을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웃을 수 있었다. 하룬이 말했듯 웃음은 마지막 길에 들고 가기 좋은 짐이었고, 남은 길을 걷는 사람에게도 가벼운 불씨가 되어 주었다.
윤서는 젖어도 괜찮은 우산을 등에 메고, 사라가 준 작은 등잔을 품에 넣었다. '외로웠어' 병 옆에 등잔이 자리 잡자, 병 안의 남색 빛과 등잔의 붉은 점이 서로를 알아보듯 은은하게 흔들렸다.
사라가 마을 입구까지 배웅해 주었다.
"윤서야."
"네."
"끝을 듣는다는 건 무거운 일일 거야. 하지만 끝만 듣지 말고, 끝까지 남은 온도도 들어 보렴. 불씨는 꺼지는 순간까지 불씨란다."
윤서는 그 말을 가슴에 얹었다.
끝까지 남은 온도.
그것은 오늘 하룬의 손에서 배운 말이었다. 죽음을 패배가 아니라 빛을 잘 건네는 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배운 말이었다. 막을 수 없는 끝 앞에서도 품격 있게 앉아 있는 법.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 주는 법. 떠나는 이의 이름을 불러 주고, 남은 이의 손을 데워 주는 법.
윤서는 사라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사라는 미소 지었다.
"네가 오늘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었듯, 언젠가 네 손도 누군가가 잡아 줄 거야. 그러니 너무 혼자 걸으려 하지 말렴."
윤서는 대답 대신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룬의 온기는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손바닥 깊은 곳에 아주 작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윤서는 그 손으로 품속의 등잔을 한 번 감쌌다.
따뜻했다.
루루가 앞장섰다. 노을은 윤서의 어깨에 올라앉았다. 윤서는 마지막으로 불씨마을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가슴 등불이 새벽빛 속에서 하나씩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흐려진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낮이 오면 불빛은 덜 보일 뿐, 여전히 가슴 안쪽에서 살아 있을 것이다.
윤서는 언덕을 향해 걸었다.
발밑에서 흙이 부드럽게 눌렸다. 뒤에서는 마을의 화덕이 낮게 타닥거렸고, 앞에서는 가시넝쿨 정원이 어두운 숨을 쉬고 있었다.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서는 이제 알았다.
두려운 길에도 등잔을 들고 갈 수 있다는 것을.
끝을 막을 수 없어도, 끝까지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삶의 불씨는 오래 타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나눈 온도만큼 깊어진다는 것을.
윤서는 품속의 작은 등잔을 느끼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아직 아침은 완전히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는 이미, 다음 길을 밝힐 만큼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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