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냄새로 된 계단
안개 계단은 내려갈수록 젖어 있었다.
처음에는 발밑에서만 비 냄새가 났다. 돌담에 오래 머문 물기, 흙 위로 처음 떨어진 빗방울, 낡은 우산을 접을 때 손끝에 묻는 차가운 냄새. 그런데 한 계단, 또 한 계단 내려갈수록 그 냄새는 윤서의 머리카락과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구름고래 도서관은 어느새 머리 위로 멀어져 있었다. 하얀 등 위에 선 책장들은 작아지고, 바람사서 아른이 건네준 책갈피는 윤서의 주머니 안에서 아주 가볍게 흔들렸다.
길이를 세기 전에 온도를 기억할 것.
윤서는 그 문장을 떠올리며 손목을 만졌다. 이름표가 빗방울처럼 차갑게 닿았다.
한윤서.
살아 있는 사람.
그 이름 아래로 빛실 팔찌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시장의 할머니가 묶어 준 팔찌는 비 냄새 속에서도 젖지 않는 등불처럼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품속의 '외로웠어' 병은 남색으로 따뜻했고, 노을은 윤서의 어깨 위에서 앞발로 그녀의 후드를 꽉 붙잡고 있었다.
"비 냄새가 너무 진해."
노을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내 이끼가 자라기에는 훌륭한 환경이지만, 문제는 내 기분까지 축축해진다는 점이야."
루루가 앞서 내려가며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붉은 털 끝에 물방울이 맺혔다가 작은 불꽃처럼 반짝이며 떨어졌다.
"비의 마을은 원래 그래. 비가 그치지 않는 곳이니까."
"한 번도 안 그쳐?"
윤서가 물었다.
"아무도 그친 걸 본 적 없대. 다만 비의 굵기가 달라질 뿐이지. 어떤 날은 실처럼 내리고, 어떤 날은 오래 참은 울음처럼 쏟아지고, 어떤 날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듯 똑, 똑, 천천히 떨어져."
윤서는 계단 아래를 보았다.
회색빛 마을이 안개 속에서 드러났다. 지붕은 모두 둥글고 낮았으며, 기와 사이마다 작은 물길이 파여 있었다. 빗물은 그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 골목으로 모였고, 골목의 돌바닥은 거울처럼 반짝였다. 집집마다 창문 안쪽에는 노란 불이 켜져 있었다. 비가 끝없이 내리는데도 마을은 어둡기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빗방울마다 불빛이 잘게 부서져, 온 마을이 조용히 숨 쉬는 등불처럼 보였다.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윤서의 발이 돌바닥에 닿았다.
차가운 물이 신발 가장자리로 튀었다.
이번에는 젖었다.
윤서는 반사적으로 발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물은 발목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저 얇게 스며들어 양말 끝을 차갑게 만들 뿐이었다. 윤서는 그 감각에 잠깐 놀라 가만히 서 있었다.
"여긴 정말 젖는구나."
"응." 루루가 말했다. "비의 마을에서는 아무도 완전히 마른 채로 지낼 수 없어."
노을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매우 철학적이면서도 양말에게는 잔인한 규칙이군."
그때 멀리서 우산들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꽃들이 걸어오는 줄 알았다.
붉은 우산, 검은 우산, 투명한 우산, 종이로 접은 듯한 흰 우산, 낙엽을 엮어 만든 갈색 우산, 별빛이 박힌 남색 우산들이 골목을 따라 오가고 있었다. 어떤 우산은 너무 커서 집 한 채를 덮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어떤 우산은 손바닥만 해서 쓰는 사람의 어깨 한쪽만 겨우 가렸다. 어떤 우산은 찢어진 곳을 실로 여러 번 꿰맨 흔적이 있었고, 어떤 우산은 비를 맞을 때마다 작은 종소리를 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비를 피하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그들은 비와 함께 걷고 있었다.

각자의 비를 든 사람들
골목 입구에는 빵집이 있었다. 빵집 아주머니는 밀가루가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는 반쯤 투명한 우산을 쓰고 있었다. 우산 안쪽에는 작은 손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빗방울이 우산에 닿을 때마다 손자국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아주머니는 오븐에서 갓 꺼낸 빵을 창가에 놓았다. 따뜻한 김이 비 냄새와 섞이며 골목으로 흘러나왔다.
"저 우산에는 왜 손자국이 있어?"
윤서가 작게 물었다.
루루가 대답했다.
"멀리 떠난 아이들이 남기고 간 손이래. 보고 싶을 때마다 비가 손자국을 두드려 주는 거지."
윤서는 빵집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아주머니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완전히 가볍지 않았다. 비가 우산 위에서 작은 손바닥들을 톡톡 건드릴 때마다, 아주머니의 눈가에 잠깐 물빛이 고였다가 사라졌다.
조금 더 걸어가자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보였다. 그는 한쪽으로 기운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우산 가장자리에는 낚싯줄 같은 은색 실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실 끝마다 작은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할아버지는 그 물방울들을 보며 천천히 담배 파이프를 닦고 있었다.
"저건 기다림의 우산이야." 루루가 말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오래 기다린 사람들이 종종 저런 우산을 써.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는 건, 아직 마음이 놓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어서래."
윤서는 할아버지 곁을 지나며 숨을 죽였다. 은색 실 끝의 물방울들은 금방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래 참고 있는 눈물처럼.
시장 쪽으로 가자 더 많은 우산들이 있었다.
생선 가게 청년은 바다 냄새가 나는 푸른 우산을 쓰고 있었다. 우산 살마다 작은 배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비가 닿으면 배들이 천천히 흔들렸다. 꽃집 여인은 꽃잎 모양의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꽃잎 끝은 조금씩 시들어 있었다. 그러나 빗방울이 닿는 곳마다 아주 작은 새싹이 돋았다. 재봉사는 조각 천을 이어 붙인 우산을 펼쳐 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천 조각마다 색이 달랐다. 어떤 것은 환한 노랑, 어떤 것은 깊은 보라, 어떤 것은 오래된 셔츠처럼 바랜 회색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우산을 함부로 묻지 않았다.
대신 비켜 주고, 손잡이가 미끄러지면 잡아 주고, 찢어진 자리가 보이면 실과 바늘을 건넸다. 큰 우산을 든 사람은 좁은 골목에서 작은 우산을 든 사람이 먼저 지나가도록 몸을 옆으로 돌렸다. 우산이 없는 아이가 뛰어가면, 지나가던 누군가가 잠깐 자기 우산 아래를 내어 주었다.
윤서는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슬퍼 보였다. 그런데 모두 무너져 있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웃었고, 어떤 사람은 장을 보았고, 어떤 사람은 창문을 닦았다. 어떤 사람은 우산 아래에서 조용히 울고 있었고, 곁에 선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 옆에 서 있었다.
슬픔이 없는 마을이 아니라, 슬픔을 들고 사는 마을이었다.
그 사실이 윤서에게 낯설었다.
윤서는 늘 슬픔을 어딘가에 치워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울지 않으면 괜찮은 것이고, 티 내지 않으면 잘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픈 얼굴을 보이면 엄마가 더 힘들어질까 봐, 지민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도 감당할 수 없어질까 봐 자꾸 마음속에 비를 가두어 두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아무도 비를 숨기지 않았다.
"루루."
윤서가 물었다.
"여기 사람들은 왜 비를 멈추게 하지 않아?"
루루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구름이 낮게 내려와 있었고, 빗방울은 그 구름의 숨처럼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멈출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았을 거야."
루루가 말했다.
"하지만 비의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말이 있어. '그치게 하려는 비는 더 차갑게 내리고, 함께 걸으려는 비는 길을 보여 준다.'"
윤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비가 그치면 좋을 텐데.
그러면 우산도 필요 없고, 양말도 젖지 않고, 사람들도 더 밝게 웃을 수 있을 텐데.
윤서는 하늘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주 작게 생각했다.
그치면 안 될까.
그 순간, 품속의 '외로웠어' 병이 살짝 흔들렸다.
비를 멈추려는 손
마을 중앙에는 둥근 광장이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분수가 있었다. 하지만 물이 위로 솟아오르는 분수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들이 돌그릇에 모여 잔잔한 원을 만들고 있었다. 돌그릇 가장자리에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빗물이 그 이름들을 지나갈 때마다 글자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윤서는 그 앞에서 멈췄다.
"여긴 뭐야?"
"빗물 우물." 루루가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이름들이 머무는 곳이야. 꼭 죽은 사람만은 아니야. 떠난 사람, 잃어버린 시간, 돌아갈 수 없는 장소, 예전의 자기 자신까지. 여러 이름이 비가 되어 여기에 모이지."
윤서는 돌그릇 안을 들여다보았다.
수면 위에는 하늘이 비쳤다. 회색 구름, 빗방울, 그리고 윤서의 얼굴. 물에 비친 윤서는 조금 낯설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있었고, 눈동자는 평소보다 어두워 보였다.
그때 수면 위로 작은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멈추어야만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윤서는 눈을 찡그렸다.
"그래도 계속 내리면 힘들잖아."
그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루루에게 한 말 같기도 하고, 빗물에게 한 말 같기도 하고, 자기 안에서 오래 내리던 어떤 것에게 한 말 같기도 했다.
윤서는 손을 뻗었다.
끝을 듣는 능력이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귀 깊은 곳에서 아주 작은 소리들이 들려왔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돌바닥에 닿으며 내는 소리. 우산 천을 두드리는 소리.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소리. 멀리 꽃잎 위에 앉는 소리. 그것들은 모두 각자의 끝을 가지고 있었다.
톡.
이 방울은 여기서 끝.
또르르.
저 방울은 지붕을 타고 내려와 홈통에서 끝.
찰박.
저 방울은 누군가의 신발 앞에서 끝.
윤서는 그 소리들을 모아 보려 했다. 방울들의 끝을 조금씩 앞당기면, 비가 멈추지 않을까. 잠깐이라도 하늘이 맑아지면, 사람들의 얼굴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손끝에 차가운 기운이 맺혔다.
빗방울 몇 개가 허공에서 멈췄다.
노을이 놀라 윤서의 어깨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어? 지금 비가…… 멈췄어?"
정말로 윤서의 주변만 아주 작게 고요해졌다. 빗방울들이 유리구슬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윤서는 숨을 참았다. 더 세게 마음을 모으면 광장 전체의 비를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윤서의 소매를 잡았다.
작은 손이었다.
윤서가 내려다보자, 노란 장화를 신은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연둣빛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우산 위에는 작은 꽃 그림들이 가득했다. 비가 닿을 때마다 꽃 그림들이 실제 꽃처럼 살짝 벌어졌다.
"언니, 비를 멈추게 하려고 해?"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윤서는 손을 내리지 못한 채 대답했다.
"응. 비가 너무 많이 오잖아. 다들 젖고, 슬퍼 보이고…… 비가 없으면 더 낫지 않을까?"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꽃은?"
"꽃?"
아이는 광장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다. 비에 젖은 흙 위로 낮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하얀 꽃, 보라색 꽃, 노란 꽃. 꽃잎은 빗방울 때문에 조금 무거워 보였지만, 꺾이지 않고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이가 말했다.
"비가 있어서 꽃이 피었어."
윤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가 오면 무릎이 젖고, 장화 안에 물이 들어가서 기분 나쁠 때도 있어. 우리 엄마는 비 오는 날마다 조금 울어. 아빠 생각이 많이 난대. 나도 그럴 때 엄마가 안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아이는 자기 우산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런데 엄마가 울고 나면 내 머리를 더 오래 쓰다듬어 줘. 그리고 아빠가 좋아하던 꽃에 물이 충분히 닿았는지 같이 보러 가. 나는 아빠를 잘 기억 못 하지만, 꽃이 피면 엄마가 아빠 얘기를 해 줘. 그래서 나는 비가 조금 싫고, 조금 좋아."
비가 조금 싫고, 조금 좋아.
윤서는 그 말이 마음속 깊은 곳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눈은 맑았다. 슬픔을 모르는 눈이 아니었다. 슬픔이 들어왔다 나간 자리를 아는 눈이었다. 어른처럼 참고 있지도 않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도 않았다. 그저 비가 오는 마을에서 꽃을 본 아이의 눈이었다.
윤서의 손끝에 맺혔던 차가운 기운이 풀렸다.
허공에 멈춰 있던 빗방울들이 다시 떨어졌다.
토도독.
우산 위로, 돌바닥 위로, 화단의 꽃잎 위로.
윤서의 뺨에도 한 방울이 닿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아이가 윤서에게 자기 우산을 조금 기울여 주었다.
"언니, 우산 없어?"
"아직 없어."
"그럼 장인 아저씨한테 가. 새로 온 사람에게 우산을 만들어 줘. 대신 이상한 우산일 수도 있어."
노을이 귀를 번쩍 들었다.
"이끼가 자라는 우산도 있어?"
아이는 노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하게 생각했다.
"있을걸? 여기엔 별별 우산이 다 있으니까."
노을은 감격한 듯 앞발을 모았다.
"드디어 문명적인 마을에 왔군."
아이의 이름은 미루라고 했다. 미루는 노란 장화를 철벅이며 앞장섰다. 걸을 때마다 장화 안에서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났고, 미루는 그 소리에 맞춰 콧노래를 불렀다.
윤서는 미루의 뒤를 따라가며 화단을 돌아보았다.
빗속에서 꽃들이 피어 있었다.
완벽하게 마른 날을 기다리지 않고.
젖은 냄새가 불러온 이름
장인의 작업장은 마을 가장 낮은 골목 끝에 있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다른 골목보다 물이 깊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찰박 소리가 났다. 윤서의 양말은 이제 완전히 젖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 감각이 불편해서 자꾸 발가락을 오므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상하게 덜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젖었다는 사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만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었다.
골목 담장에는 빗물이 흐른 자국들이 무늬처럼 남아 있었다. 어떤 자국은 나무처럼 갈라졌고, 어떤 자국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같았다. 처마 밑에는 작은 종들이 달려 있었다. 빗물이 종을 건드릴 때마다 맑은 소리가 났다.
딩.
동.
딩.
그 소리 사이로 갑자기 익숙한 냄새가 올라왔다.
젖은 흙 냄새.
풀잎이 눕고, 장독대 옆 흙이 물러지고, 오래된 고무신 안쪽에 빗물이 고이던 냄새.
윤서는 걸음을 멈췄다.
할머니 집 마당 냄새였다.
아주 어릴 때, 윤서는 여름방학이면 며칠씩 할머니 집에 머물렀다. 할머니 집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고, 비가 오면 흙냄새가 부엌까지 들어왔다. 할머니는 비 오는 날이면 마루 끝에 앉아 파전을 부쳤다. 기름이 팬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처마 끝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비 오는 날에는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하며 윤서 앞에 작은 접시를 놓아 주었다.
윤서는 그때의 할머니 손을 기억했다. 손등에 주름이 많고, 손톱은 짧고 둥글었다. 파 냄새와 비누 냄새, 그리고 아주 약한 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할머니는 윤서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윤서가 종이에 엉뚱한 동물을 그리면, 할머니는 꼭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건 구름토끼네."
"이건 우는 척하는 고양이고."
"이건 너무 바빠서 자기 꼬리를 잃어버린 여우야."
윤서는 그때마다 웃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보러 갔던 날, 윤서는 웃지 않았다.
병원 냄새가 났다. 비가 오던 날이었다. 엄마는 윤서의 손을 꼭 잡고 병실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평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창문에는 빗방울이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윤서 왔네."
할머니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윤서는 침대 옆에 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는 "할머니한테 인사해야지"라고 조용히 말했지만, 윤서는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픈 모습이 무서웠다. 늘 마루에서 파전을 부쳐 주던 사람이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윤서는 그 손을 잡았다. 손은 따뜻했지만, 힘이 없었다.
"우리 윤서, 그림 계속 그려."
할머니가 말했다.
윤서는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에 예쁜 거 그려서 보여 드릴게."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다음은 오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는 향 냄새가 났고, 어른들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엄마는 울다가 멈추고, 다시 울었다. 윤서는 그 옆에 앉아 자기 손만 내려다보았다. 할머니에게 "고마워", "사랑해", "무서워서 미안해" 같은 말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때는 정확한 문장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가슴 안쪽에 젖은 수건이 뭉쳐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 후로 윤서는 비 오는 날 파전 냄새를 맡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 무거움이 할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괜히 울 것 같아서, 괜히 엄마도 떠올릴 것 같아서, 괜히 모든 끝이 한꺼번에 가까워질 것 같아서.
"윤서야?"
루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는 그제야 자신이 골목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가 머리카락을 따라 턱 끝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미루는 조금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노을은 윤서의 어깨 위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양말이 축축하다거나 이끼가 감정적으로 불어날 것 같다는 말을 했을 텐데,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서는 입술을 떨었다.
"할머니한테…… 마지막 인사를 못 했어."
그 말이 나오자, 비 냄새가 더 진해졌다.
마치 오래 닫혀 있던 서랍이 열리고, 그 안에 접어 둔 젖은 편지가 공기를 만난 것 같았다.
"무서워서. 할머니가 사라질까 봐 무서워서.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했어. 다음에 그림 보여 드린다고만 했는데…… 다음이 없었어."
윤서의 목소리는 빗물에 섞여 작아졌다.
"나쁜 손녀였던 것 같아."
루루는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괜찮아, 아니야, 그런 말로 윤서의 슬픔을 덮지 않았다. 대신 윤서 곁으로 다가와 젖은 꼬리 끝을 그녀의 손등에 살짝 대었다.
"그때의 너는 어린아이였어."
루루가 말했다.
"어린아이는 끝을 보면 겁이 나. 겁이 나서 말을 잃기도 해. 그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야. 사랑이 너무 큰데, 그걸 담을 그릇이 아직 작아서 넘친 거야."
윤서는 눈을 감았다.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조금 다행이었다. 비가 내려서 울어도 덜 들킬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비가 함께 울어 주는 것 같아서였다.
미루가 조용히 다가왔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인사를 못 했으면, 비 오는 날 다시 말해도 된대. 비는 늦게 온 말도 데려갈 수 있대."
윤서는 빗속에 서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젖은 흙 냄새.
파전 냄새는 없었지만, 윤서는 그 냄새를 거의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 집 마루, 처마 끝의 물소리, 할머니가 종이에 그려 준 이상한 동물 이름들.
윤서는 아주 작게 말했다.
"할머니."
비가 조금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
"그때 무서워서 미안해요. 손 잡아 줘서 고마웠어요. 나 그림…… 아직 잘 못 펼칠 때가 많지만, 그래도 다시 그려 보고 싶어요."
말은 완벽하지 않았다. 너무 늦었고, 너무 짧고, 중간중간 끊겼다. 하지만 비의 마을에서는 말이 조금 젖어도 괜찮은 것 같았다. 오히려 젖어서 더 멀리 흘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서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 순간 빛실 팔찌가 따뜻해졌다.
아주 짧은 온기였다. 마루에 앉은 할머니가 윤서의 손목을 한 번 쓸어 주는 것 같은 온도. 윤서는 팔찌를 감싸 쥐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마음속 젖은 수건은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노을이 코를 훌쩍였다.
"이건 빗물 때문이야. 절대 내가 감동해서 그런 게 아니야."
윤서는 울다가 조금 웃었다.
우산 장인의 집
장인의 작업장은 골목 끝 커다란 물레방아 옆에 있었다.
물레방아는 빗물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삐걱, 사르륵, 삐걱, 사르륵. 그 소리는 오래된 자장가처럼 낮고 편안했다. 작업장 지붕은 수많은 낡은 우산 천으로 덮여 있었다. 빨간 천, 회색 천, 푸른 천, 꽃무늬 천, 구멍 난 천들이 겹겹이 이어져 있었고, 빗방울은 그 위를 지나며 색색의 물빛으로 흘러내렸다.
문 위에는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비를 없애지 않는 우산집
윤서는 그 문구를 한참 바라보았다.
노을이 고개를 기울였다.
"상업적으로는 조금 모순된 간판 아닌가? 우산이란 원래 비를 없애지는 못해도 적어도 피하게는 해 줘야 하는데."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키가 작고 어깨가 둥근 사람이 나타났다. 머리카락은 은빛이었고, 앞치마에는 바늘과 실, 작은 망치, 우산살들이 꽂혀 있었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많았지만 눈은 빗방울처럼 맑았다.
"우산은 비를 없애는 물건이 아니야."
장인이 말했다.
"비 오는 날에도 손이 비지 않게 해 주는 물건이지."
노을이 속삭였다.
"등장부터 철학적이군. 긴장해야겠어."
장인은 윤서를 보았다.
"새로 온 아이구나. 아직 자기 우산이 없고."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저는 어떤 우산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보통은 본인이 제일 모른단다."
장인은 옆으로 비켜섰다.
작업장 안은 밖보다 더 따뜻했다. 나무와 천, 기름칠한 쇠, 말린 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천장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산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어떤 우산은 속이 밤하늘처럼 반짝였고, 어떤 우산은 펼쳐질 때마다 작은 새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어떤 우산은 반쯤 투명해서 안쪽에 앉은 사람의 마음 색이 비쳤다.
작업대 위에는 우산살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나무로 된 것, 얇은 금속으로 된 것, 고래수염처럼 부드럽게 휘는 것, 마른 풀줄기처럼 가벼운 것. 장인은 그것들을 하나씩 손에 들어 보더니 윤서를 향해 물었다.
"비를 싫어하니?"
윤서는 대답을 오래 고르다가 말했다.
"싫어한다고 생각했어요. 비가 오면 마음이 너무 무거워져서요. 그런데…… 오늘은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는 건 좋은 시작이지. 마음이 한쪽으로만 굳어 있지 않다는 뜻이니까."
장인은 윤서의 젖은 소매, 빛실 팔찌, 이름표, 품속의 작은 병을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조용함이 윤서는 고마웠다.
장인은 작업대 아래에서 둥근 천 조각 하나를 꺼냈다.
그 천은 이상했다. 색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마른 상태에서는 연한 회색처럼 보였는데, 장인이 손끝에 빗물을 묻혀 천 위에 떨어뜨리자 물이 닿은 자리에서 색이 번졌다. 살구빛, 남색, 초록빛, 아주 옅은 보라. 윤서가 지나온 장소들의 온도가 천 위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것 같았다.
"이 천은 젖어야 색이 나는 천이야."
장인이 말했다.
"마른 날에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비를 만나면 자기 안에 품고 있던 빛을 드러내지."
"그럼 비를 막는 천이 아니네요?"
"조금은 막고, 조금은 통과시킨다. 완전히 막아 버리면 이 천은 숨을 못 쉬거든."
윤서는 그 말을 듣고 천을 만져 보았다. 부드럽고 서늘했다. 손끝에 물기가 묻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장인은 우산살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는 윤서에게 가장 곧은 살을 보여 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단단해서 부러질 것 같다고 했다. 가장 가벼운 살을 들어 보더니 그것도 내려놓았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마침내 그는 짙은 갈색의 얇은 나무살들을 골랐다. 살들은 완벽하게 곧지 않았다. 조금씩 휘어 있었고, 마디가 있었다.
"상실을 대하는 마음은 너무 곧기만 해도 힘들다."
장인이 나무살들을 둥글게 펼치며 말했다.
"똑바로 서야 한다고만 생각하면, 큰비가 올 때 부러지기 쉽거든. 조금 휘어질 줄 알아야 한다. 오늘은 울고, 내일은 웃고, 모레는 다시 그리워하는 식으로."
윤서는 작업대 앞에 앉았다. 장인의 손은 느렸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천을 자르고, 우산살에 맞추고, 실로 꿰맸다. 바늘이 천을 통과할 때마다 사각사각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구름고래 도서관에서 책장이 넘어가던 소리와 조금 닮아 있었다.
"슬픔은 없애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윤서가 말했다.
장인은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니?"
"슬프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되니까요. 엄마도 힘들어하고, 저도 자꾸 무서워지고. 할머니 생각도 나고…… 언젠가 다 끝난다는 생각이 들면 숨이 막혀요."
바늘이 천 위에서 잠깐 멈췄다.
장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슬픔은 종종 사랑이 젖은 모습이란다."
윤서는 그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
"사랑이요?"
"그리워한다는 건, 네 마음이 누군가를 귀하게 품었다는 뜻이지. 잃었다는 사실만 보면 슬픔은 구멍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구멍의 모양이 사랑했던 자리와 닮아 있어."
장인은 우산 손잡이를 꺼냈다. 손잡이는 따뜻한 나무로 되어 있었고, 끝에는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 손가락을 걸면 편안하게 잡힐 모양이었다.
"물론 슬픔이 아름답기만 하다는 말은 아니야. 비가 계속 내리면 춥고, 길이 미끄럽고, 몸이 무거워지지. 그래서 우산이 필요하다. 비를 부정하려고가 아니라, 비 오는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윤서는 젖은 양말 속 발가락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비가 그치기만 바랐다. 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도 걸을 수 있다면. 슬픔이 사라지지 않아도 숨 쉴 수 있다면.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무너지지 않고, 그 기억 속 파전 냄새와 웃음까지 함께 떠올릴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마음일까.
장인은 마지막 매듭을 묶었다.
"됐다."
그가 우산을 들어 올렸다.
우산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윤서 혼자 쓰면 넉넉했고, 누군가와 가까이 붙으면 둘도 함께 쓸 수 있을 만큼이었다. 바깥쪽은 흐린 회색이었지만, 안쪽은 빗물을 머금은 새벽 하늘처럼 은은했다. 살구빛과 남색, 초록빛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고, 한쪽 가장자리에는 작은 꽃무늬가 피어 있었다. 꽃은 미루의 우산에 있던 꽃들과 닮았지만, 조금 더 조용했다.
장인이 우산을 펼치자 파삭, 하는 소리가 났다.
전 장의 끝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윤서는 두 손으로 우산 손잡이를 받았다.
"이 우산 이름은 뭐예요?"
장인은 미소 지었다.
"젖어도 괜찮은 우산."
노을이 즉시 고개를 들었다.
"그건 우산으로서 정체성의 위기 아닌가?"
장인은 웃었다.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게 해 주는 우산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이 아이에게 필요한 건 그런 우산이 아니야."
그는 윤서를 바라보았다.
"이 우산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비만 통과시킨다. 너무 차가운 비는 천 위에서 쉬게 하고, 네가 느껴야 하는 비는 손끝과 어깨에 조금 닿게 하지. 슬픔을 전부 막으면 마음은 마른 땅처럼 갈라진다. 그렇다고 온몸으로 다 맞기만 하면 지쳐 쓰러져. 그러니 적당히 젖고, 적당히 쉬고, 다시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윤서는 우산 안쪽을 올려다보았다.
빗물 몇 방울이 천을 통과해 아주 느리게 떨어졌다. 한 방울은 윤서의 손등에 닿았다. 차갑지만 부드러웠다. 다른 한 방울은 빛실 팔찌 위에 떨어졌고, 팔찌는 짧게 빛났다.
"젖어도 괜찮다……"
윤서는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그 말은 "아프지 않을 거야"가 아니었다. "울지 않아도 돼"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플 수 있어", "울어도 돼", "그래도 너는 계속 걸을 수 있어"에 가까웠다.
장인은 우산 손잡이의 작은 홈을 가리켰다.
"여기엔 네가 나중에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담을 수 있어. 꼭 새기지 않아도 된다. 마음으로 잡으면 우산이 안다."
윤서는 손잡이를 꽉 쥐었다.
엄마.
지민.
그리고 할머니.
이름들이 손바닥 안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함께 걷는 계절
작업장을 나서자 비가 조금 굵어져 있었다.
미루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둣빛 우산 위로 꽃 그림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루루는 처마 밑에서 털을 털고 있었고, 노을은 윤서의 새 우산 안쪽을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이 우산, 축축함의 수준이 아주 세련됐어. 완전히 젖지도 않고 완전히 마르지도 않아. 중간 지대를 아는 우산이야."
"그게 칭찬이야?"
윤서가 물었다.
"최고의 칭찬이지."
윤서는 우산을 들고 골목으로 나섰다.
빗방울이 우산 위에 닿았다. 토독, 토도독, 또르르. 소리는 아까보다 가까웠다. 우산이 비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몇 방울은 천 위에서 쉬고, 몇 방울은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몇 방울은 아주 작은 빛으로 변해 우산 안쪽에 번졌다.
윤서는 걸었다.
신발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양말도 축축했다. 할머니 생각을 하자 가슴이 다시 조금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은 전처럼 윤서를 한꺼번에 삼키지 않았다. 우산 안쪽에서 살구빛이 천천히 움직였고, 손잡이의 따뜻함이 손바닥에 남았다.
광장으로 돌아오자 아까 보았던 사람들이 여전히 각자의 우산 아래 있었다. 빵집 아주머니는 손자국 우산 아래에서 빵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검은 우산의 할아버지는 은색 실 끝의 물방울 하나를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꽃집 여인은 시든 꽃잎 우산 아래에서 새 화분을 내놓았다.
그들의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슬픔 때문에 그들의 하루가 멈춘 것도 아니었다.
미루는 화단 앞에서 쪼그려 앉았다.
"봐. 오늘 새로 핀 꽃이야."
윤서도 옆에 앉았다. 작은 노란 꽃 하나가 흙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꽃잎 끝에는 빗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윤서는 그 꽃을 보며 미루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비가 있어서 꽃이 피었어.
예전 같으면 윤서는 그 말이 너무 쉽게 하는 위로처럼 들렸을지도 몰랐다. 슬픔에도 좋은 점이 있다는 말처럼, 아픔을 예쁘게 포장하는 말처럼.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비가 꽃을 피운다고 해서 비가 늘 좋은 것은 아니었다. 비가 차갑고, 길을 미끄럽게 하고, 누군가를 울게 만든다는 사실은 그대로였다. 다만 비가 오직 망가뜨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슬픔도 오직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 안에서 누군가는 더 다정해지고, 누군가는 오래 미룬 말을 꺼내고, 누군가는 잊지 않기 위해 꽃을 돌본다는 것.
윤서는 우산을 조금 기울여 미루와 꽃 위에 함께 씌웠다.
미루가 웃었다.
"언니 우산 예쁘다. 근데 조금 새네."
"응."
윤서도 웃었다.
"젖어도 괜찮은 우산이래."
"좋다."
미루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안 젖으면 비 오는 줄 모르잖아."
윤서는 그 말에 한참 웃었다. 웃음 끝에 눈물이 조금 났다. 이번에도 비가 함께 내려서, 눈물은 빗물과 자연스럽게 섞였다.
잠시 뒤 광장 한쪽에서 종이 울렸다. 낮은 종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빗물 우물 쪽으로 모였다. 저마다 우산을 들고 둥근 돌그릇 주변에 섰다. 루루가 윤서에게 작게 말했다.
"비의 마을에서는 하루에 한 번, 자기가 오늘 함께 걸은 슬픔에게 인사해. 떼어 내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 온종일 붙잡지도 않겠다고."
마을 사람들이 눈을 감았다.
윤서도 눈을 감았다.
빗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끝의 소리들이 한꺼번에 들렸지만,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방울들은 끝나고, 또 다른 방울들이 시작되었다. 끝과 시작이 너무 촘촘해서 비는 하나의 긴 숨처럼 이어졌다.
윤서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할머니, 오늘은 같이 걸었어요.
엄마, 언젠가 비 오는 날 같이 앉아서 할머니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민아, 아직 미안하다는 말을 다 하진 못했지만, 이제 비를 핑계로 숨기만 하지는 않을게.
그리고 나에게도.
슬퍼해도 괜찮아.
젖어도 괜찮아.
그 순간 우산 안쪽의 색들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살구빛은 따뜻한 부엌 불빛처럼 번졌고, 남색은 깊은 밤의 이불처럼 내려앉았다. 초록빛은 아주 작게 흔들리며 새싹처럼 자랐다.
노을이 윤서의 어깨에서 우산살 하나를 톡톡 두드렸다.
"이 우산, 우리 셋이 쓰기엔 조금 좁을까?"
루루가 윤서 옆으로 다가왔다.
"좁으면 가까이 걸으면 되지."
윤서는 우산을 조금 더 높이 들었다. 루루의 붉은 귀가 우산 아래로 들어왔고, 노을은 만족스럽게 몸을 둥글게 말았다. 셋의 어깨가 가까워졌다. 빗방울은 우산 가장자리에서 흘러내렸고, 몇 방울은 여전히 윤서의 손등에 닿았다.
윤서는 이제 그 방울들을 피하지 않았다.
광장 너머 길 끝에 낮은 무지개빛 물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비가 그친 것은 아니었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고, 빗소리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물안개 너머로 다음 길이 보였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길이었다.
"다음엔 어디로 가?"
윤서가 물었다.
루루는 빗속을 바라보았다.
"불씨를 지키는 사람들이 사는 곳. 비가 오래 내린 뒤에도 꺼지지 않는 불을 돌보는 마을이야."
"비 다음에 불이야?"
노을이 눈을 크게 떴다.
"훌륭해. 축축함과 따뜻함의 균형. 이 세계는 생각보다 취향이 좋아."
윤서는 마지막으로 비의 마을을 돌아보았다.
각자의 우산을 든 사람들이 골목을 오가고 있었다. 누구도 완전히 마르지 않았고, 누구도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빗물 우물에는 이름들이 빛나고 있었고, 화단의 꽃들은 조용히 비를 받고 있었다.
윤서는 젖어도 괜찮은 우산의 손잡이를 꼭 잡았다.
슬픔은 피해야 할 날씨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함께 지나가는 계절이었다.
그리고 계절은 영원히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아주 느리더라도, 아주 축축하더라도, 계절은 다음 길을 향해 움직였다.
윤서는 우산 아래에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찰박.
물웅덩이가 작게 흔들리며 윤서의 얼굴과 우산, 루루의 붉은 털, 노을의 동그란 눈을 비추었다. 그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그림을 흐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윤서는 이제 흐려지는 것이 꼭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조금 알았다.
흐려진 물결 속에서도, 그들은 함께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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