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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듣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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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비가 오기 전의 오후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윤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전 내내 흐리던 하늘은 점심이 지나자 더 낮게 내려앉았고, 건물 유리창마다 회색빛을 얇게 발랐다. 골목 끝 분식집에서는 막 튀겨 낸 김말이 냄새가 났고, 버스 정류장 앞 은행나무는 아직 젖지도 않았는데 벌써 비 냄새를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챙겨 들었고, 챙기지 못한 사람들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뒤 걸음을 빨리했다.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하루가 끝나면 기억에도 남지 않을 그런 오후였다.

윤서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 세 권을 품에 안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등의 빨간 사람이 작은 빛으로 서 있었고, 차들은 물기 없는 도로 위를 낮은 소리로 밀려갔다. 맞은편 약국 간판이 깜박였고, 누군가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짧게 울렸다 멎었다.

그때였다.

윤서는 사람들의 가슴께에서 아주 희미한 빛을 보았다.

처음에는 반사광이라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버스 유리창에 햇빛이 부딪혀 튄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늘엔 햇빛이 없었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 빛들도 사람들의 몸 안쪽에서 함께 흔들렸다.

어떤 사람의 빛은 따뜻한 꿀색이었다. 어떤 사람의 빛은 거의 꺼져 가는 촛불처럼 작고 푸르스름했다. 어린아이의 가슴께에서는 반짝이는 모래알 같은 빛이 느리게 아래로 흘러내렸고, 회색 코트를 입은 노인의 가슴에는 아주 오래된 유리병 안에 든 금빛 가루처럼 미세한 빛이 고요히 흔들렸다.

모래시계.

윤서는 왜 그런 단어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모래시계 같았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보이지 않는 작은 모래시계가 있고, 그 안에서 빛이 한 알씩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윤서는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출 뻔했다.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작게 말했다.

'학생, 앞을 봐요.'

윤서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건너편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손안의 책 모서리가 팔꿈치 안쪽을 눌렀다. 세 권 중 한 권의 표지가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지만, 윤서는 놓치지 않았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책이든, 걸음이든, 숨이든.

인도에 도착하자 빛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희미해져 보이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윤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누구도 이상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중학생 둘은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웃고 있었고, 택배 기사는 어깨에 상자를 얹고 계단을 올랐다. 빵집 앞에서는 갓 구운 식빵 냄새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세상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

그런데 윤서에게만, 세상은 아주 조금 열려 버린 듯했다.

닫혀 있던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듯, 보이지 않던 것이 아주 잠깐 얼굴을 내민 것이다.

윤서는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니트 조끼 위로 손을 얹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익숙한 박동이었다. 아침에 알람을 끄고 일어날 때도, 버스가 막 떠나려는 걸 보고 달릴 때도, 밤에 불을 끄고 잠을 청할 때도 언제나 거기 있던 소리.

쿵. 쿵. 쿵.

하지만 그날 오후, 그 소리는 처음으로 낯설게 들렸다.

마치 언젠가는 멈출 것을 알고 있는 시계처럼.

끝을 듣는 소녀

가슴속의 작은 모래시계

윤서는 열일곱이었다.

열일곱이라는 나이는 끝보다 시작에 가까운 말처럼 들렸다. 어른들은 윤서를 볼 때마다 말했다. 아직 어리잖아. 앞으로 시간이 많아.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조금 늦어도 괜찮아.

윤서는 그 말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시간이 많다는 말은 포근한 이불 같았다. 내일로 미룬 일들을 덮어 주고, 오늘 하지 못한 말들을 조용히 감춰 주었다.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거라고, 언젠가는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

그 단어는 늘 넓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가슴속의 빛을 본 뒤로, 윤서는 그 단어가 아주 얇은 종이처럼 느껴졌다. 손끝에 힘을 조금만 주어도 찢어질 것 같은 종이.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길, 윤서는 빌린 책을 반납함에 넣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있었다. 원래는 책을 반납하고, 새로 나온 판타지 소설을 빌리고,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살 예정이었다. 저녁에는 숙제를 대충 끝낸 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보다가 잠들 생각이었다.

평소의 순서였다. 익숙한 순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도 하루가 끝나는 길.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길이 갑자기 너무 좁아 보였다.

윤서는 길가 카페 창문 앞에서 멈춰 섰다. 안쪽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노트북을 바라보며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께에서 다시 빛이 보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했다. 작은 모래알들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여자는 그것을 모르는 듯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보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서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조금 창백하고, 조금 놀랐고, 아직 머리카락 끝이 바람에 흐트러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나.

질문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윤서는 숨을 삼켰다.

죽는다는 생각은 무서웠다. 당연히 무서웠다. 어릴 때 키우던 햄스터가 작은 상자 안에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윤서는 처음으로 무언가가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밤도 기억났다. 향 냄새, 검은 옷, 엄마의 붉어진 눈가. 그 모든 것이 윤서에게 죽음은 멀고 차가운 곳이라는 느낌을 남겼다.

그런데 지금 윤서를 더 크게 흔드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다.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이 아니라, 끝나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오늘 아침, 엄마가 식탁에 계란프라이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늦지 않게 가. 윤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엄마가 새로 산 머리핀을 하고 있다는 것도 보았고, 어울린다고 말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어색해서. 귀찮아서. 다음에 말하면 되니까.

학교에서 친구 지민이 물었다. 너 요즘 괜찮아? 윤서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그렇지 뭐. 사실 괜찮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마음 안쪽이 비어 있는 것 같고, 뭘 해도 조금 늦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내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덮어 두었다.

그리고 지난주, 윤서는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스케치북을 보았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요즘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잘하는 애들은 너무 많고, 그걸로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괜히 시작했다가 스스로 실망할까 봐.

그래서 미뤘다.

말도, 마음도, 좋아하는 일도.

마치 시간이 끝없이 있을 것처럼.

윤서는 카페 창문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손바닥 아래, 책 표지가 축축했다.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몰랐다. 아주 가는 비였다. 공기 속에 흩어진 은색 실처럼, 소리보다 먼저 피부에 닿는 비.

사람들은 우산을 펼쳤다.

우산 위로 비가 앉는 소리가 하나씩 늘어났다. 톡. 토독. 사르르. 도시 전체가 아주 조심스럽게 숨을 낮추는 소리 같았다.

그때 윤서는 또다시 보았다. 우산을 쓴 사람들의 가슴께에서 빛들이 흔들리는 것을. 비에 젖은 거리를 따라, 수많은 작은 모래시계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으며 통화를 했고, 누군가는 한숨을 쉬었고, 누군가는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달려 나갔다. 그들 모두의 안에서 빛이 흘렀다. 같은 방향으로. 조용히. 멈추지 않고.

윤서는 이상하게도 울고 싶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의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겁먹지 말라고. 지금 본 것이 저주가 아닐 수도 있다고. 끝을 아는 일은, 끝만 바라보라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비는 점점 굵어졌다.

오래된 골목의 붉은 우체통

집으로 가려면 큰길을 따라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면 되었다. 하지만 윤서는 이유도 없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만, 요즘은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좁아 하늘은 길게 찢어진 천처럼 보였다. 낡은 담장에는 젖은 담쟁이잎이 달라붙어 있었고, 오래된 세탁소 간판은 바람이 불 때마다 끼익, 하고 낮게 울었다. 비가 벽돌 사이로 스며들며 먼지 냄새를 깨웠다. 골목 안쪽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녹슨 자전거 아래 웅크리고 있다가 윤서를 보더니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윤서는 이 골목에 우체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며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빨간 페인트가 벗겨져 분홍빛에 가까워진 둥근 우체통. 배가 불룩하고, 입은 좁고, 누군가의 오래된 약속을 아직도 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체통.

요즘도 쓰이는지는 몰랐다.

그런데 골목 끝에 다다랐을 때, 윤서는 우체통 앞에서 멈췄다.

우체통이 빛나고 있었다.

가로등도 켜지지 않은 이른 저녁이었다. 그런데 우체통의 입구 틈새에서 따뜻한 빛이 새어 나왔다. 사람들의 가슴께에서 보았던 모래시계빛과 닮았지만, 조금 달랐다. 더 깊고, 더 오래되었으며, 나무껍질 안쪽의 색처럼 은근했다.

윤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비는 골목의 얇은 지붕과 파이프와 깡통 화분을 두드리며 각기 다른 소리를 냈다. 어디선가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똑. 똑. 똑.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시간을 세고 있는 것처럼.

우체통 안쪽에서 무언가 사각거렸다.

윤서는 숨을 멈췄다.

한 장의 편지가 우체통 입구로 천천히 밀려 나왔다. 누가 안에서 내미는 것처럼. 봉투는 오래된 종이로 되어 있었고,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가장자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젖은 낙엽 냄새와 먼 숲의 흙냄새가 함께 났다.

윤서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봉투 앞면에는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받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우표 자리에는 작은 잎사귀 모양의 금빛 무늬가 찍혀 있었다. 손끝으로 만지자 잎맥처럼 가느다란 선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열어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우체통이 빛나고, 편지가 스스로 나오고, 종이에서 숲 냄새가 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망쳐야 한다. 집으로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오늘 본 모든 것을 피곤해서 생긴 착각이라고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윤서는 봉투를 열었다.

이상한 일은 늘 두려운 얼굴로 찾아오지만, 가끔은 두려움 뒤에 아주 조용한 부탁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알 것 같았다.

편지 안에는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숨결이 머무는 숲으로 오라.'

글씨는 누가 잉크로 쓴 것 같기도 하고, 빗방울이 종이 위에 떨어져 스스로 길을 만든 것 같기도 했다. 윤서는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숨결이 머무는 숲.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귓가에서 아주 작고 먼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이 서로 닿는 소리. 새벽 안개가 풀잎을 지나가는 소리. 누군가 깊이 잠든 사람 곁에서 조심히 이불을 덮어 주는 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사이로, 윤서는 끝을 들었다.

끝은 생각보다 날카롭지 않았다. 검은 벽도, 차가운 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비슷했다. 언젠가 닿겠지만, 지금은 아직 발목에 부드럽게 감기는 물결. 무섭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리에는 재촉이 없었다.

오히려 물어보는 것 같았다.

너는 어디로 가고 싶니.

윤서는 편지를 접었다. 종이가 손바닥 안에서 따뜻해졌다. 마치 누군가 방금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골목 밖 큰길에서는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현실의 소리였다. 젖은 타이어가 도로를 밀고 지나가고, 사람들이 우산을 접고 펴고, 편의점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음악이 새어 나오는 소리.

윤서는 그 소리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처음 하는 생각이었다. 늘 곁에 있었기에 사랑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던 것들. 비 오는 날 운동화 밑창에 스며드는 물기, 버스 창문에 맺힌 작은 물방울들, 집 앞 빵집에서 저녁마다 나는 버터 냄새, 엄마가 현관문을 열 때마다 묻는 짧은 말.

왔어?

그 한마디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갑자기 기적처럼 느껴졌다.

젖은 종이 냄새가 나는 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윤서의 젖은 뺨에 닿았다. 집 안은 바깥보다 훨씬 조용했다. 부엌 쪽에서 보온 밥솥이 낮게 숨을 쉬고 있었고, 냉장고는 가끔씩 몸을 떨며 웅웅거렸다. 엄마는 야근이라 늦는다고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식탁 위에는 랩을 씌운 된장국과 작은 반찬 접시가 놓여 있었다.

윤서는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머뭇거렸다.

평소 같으면 '응' 한 글자만 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바쁘니까. 자신도 피곤하니까. 말은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 '언제든'이라는 말이 다르게 들렸다.

윤서는 천천히 입력했다.

'밥 챙겨 줘서 고마워. 비 많이 오니까 조심해서 와.'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서, 윤서는 괜히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가슴 안쪽이 간지러웠다. 너무 거창한 말도 아니고, 세상을 바꾸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을 보내는 데 마음 한구석이 환해졌다.

방으로 들어가자 눅눅한 공기가 따라 들어왔다. 윤서는 젖은 양말을 벗고, 책상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창문 너머로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유리창에 부딪힌 빗방울들이 서로를 찾아 흘러내렸다. 어떤 방울은 곧게 내려가고, 어떤 방울은 옆으로 비껴가 다른 방울과 합쳐졌다. 작은 길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방 안은 조금 서늘했다. 윤서는 얇은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목덜미로 내려와 차갑게 번졌다. 책상 위 스탠드를 켜자 노란빛이 둥글게 퍼졌다. 그 안에 편지를 올려놓았다.

봉투는 여전히 축축했다.

그러나 물에 젖어 망가진 축축함이 아니었다. 숲속 이끼를 손으로 눌렀을 때 배어 나오는 습기 같았다. 오래된 종이가 품고 있는 먼지 냄새, 비 맞은 나무 냄새, 아주 먼 곳에서 피어난 작은 꽃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윤서는 편지를 다시 펼쳤다.

'숨결이 머무는 숲으로 오라.'

문장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이 났다. 처음에는 명령처럼 보였고, 다음에는 초대장처럼 보였다. 지금은 오래 기다린 누군가의 안부처럼 느껴졌다.

윤서는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숨결.

그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하자, 자신의 숨이 들리고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 가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움직임. 너무 당연해서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 없는 작은 파도.

윤서는 손바닥을 가슴 위에 올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모래시계빛을 보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것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안쪽이라 더 보기 어려운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 있었다. 심장 가까이, 아주 작은 유리빛 공간. 그 안에서 연한 금빛 모래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윤서는 숨을 들이켰다.

무서웠다.

그것을 인정하자 오히려 몸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무섭지 않은 척할 필요는 없었다. 끝이 있다는 사실은 무서운 일이었다. 언젠가 엄마의 손을 잡을 수 없고, 좋아하는 노래를 새로 들을 수 없고, 비 오는 날의 냄새도 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윤서는 그 빛을 보며 동시에 다른 것도 느꼈다.

아직 떨어지고 있는 모래가 있다는 것.

아직 남은 숨이 있다는 것.

아직 보내지 않은 말과, 그리지 않은 그림과, 걷지 않은 길과, 만나지 않은 아침이 있다는 것.

끝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문장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남은 것들을 더 선명하게 비추는 등불일지도 몰랐다.

윤서는 서랍을 열었다. 오래된 스케치북이 안쪽에 누워 있었다. 표지 모서리는 닳았고, 첫 장에는 몇 달 전에 그리다 만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가지는 중간에서 끊겨 있었고, 잎은 몇 개밖에 없었다.

윤서는 연필을 들었다.

처음에는 손이 어색했다. 선이 삐뚤어지고, 나뭇잎 모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처럼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그렸다. 나무 아래에 작은 길을 그리고, 길 끝에 둥근 우체통을 그렸다. 우체통 입구에서 빛이 새어 나오게 칠했다. 그리고 나무 뒤쪽, 아주 희미한 안개 속에 숲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비 소리는 방을 가득 채웠다.

천장 위로, 창틀 위로, 먼 골목의 철제 난간 위로 비가 떨어졌다. 세상은 수많은 작은 손가락으로 두드려지는 악기 같았다. 윤서는 그 소리들 사이에서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다.

들숨.

날숨.

아직 여기 있다는 증거.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엄마의 답장이었다.

'우리 딸도 감기 조심해. 고마워라고 해 줘서 엄마 오늘 힘난다.'

윤서는 화면을 보며 오래 웃었다. 웃음은 아주 작게 시작해 눈가까지 따뜻해졌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대신 마음속 어딘가에 놓여 있던 차가운 돌 하나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윤서는 다시 편지를 바라보았다.

숨결이 머무는 숲으로 오라.

어디에 있는 숲일까. 어떻게 가야 할까. 왜 하필 자신에게 온 걸까. 질문은 끝없이 떠올랐지만, 이상하게도 그 질문들은 윤서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맡에 켜 둔 작은 등처럼 곁에 있었다.

그때 창문이 살짝 울렸다.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유리창 바깥에 무언가 스쳤다.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어둠 속에서 빗방울이 가로등 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였다. 아래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윤서는 보았다.

골목 끝, 오래된 우체통이 있던 방향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빛은 가느다란 실처럼 밤공기를 가로질러 윤서의 창문 앞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유리 위에 작은 잎사귀 모양을 남겼다.

윤서가 손끝으로 그 자리를 만지자, 차가운 유리 너머에서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동시에 편지 뒷면에 새로운 글자가 천천히 나타났다.

'비가 그치기 전, 가장 오래된 문을 찾아라.'

윤서는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은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윤서를 멈추게 하는 벽이 아니었다. 낯선 길 앞에 섰을 때 발목을 붙잡는 떨림, 첫 장을 넘기기 전 손끝에 고이는 긴장에 가까웠다.

윤서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젖은 책, 노란 스탠드 불빛, 그리다 만 숲, 식어 가는 된장국 냄새, 엄마의 답장이 남아 있는 휴대전화. 모두 조금 전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더 또렷했다. 마치 세상이 윤서에게 아주 천천히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봐.

너는 아직 여기에 있어.

윤서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스케치북 사이에 넣었다. 그리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비 냄새와 젖은 흙냄새, 먼 골목의 녹슨 철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윤서는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 순간,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더 이상 멀리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이었다.

언젠가 닫힐 문이 아니라, 지금 열리고 있는 문.

윤서는 담요를 내려놓고, 젖은 운동화를 현관 쪽으로 밀어 두었다. 비가 그치기 전 찾아야 할 문이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 문은 끝으로 이어지는 문이 아니었다.

끝을 알게 된 사람이 처음으로 제대로 살아 보기 위해 여는 문이었다.

윤서는 불을 끄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등 뒤에서 스탠드 불빛이 조용히 흔들렸고, 책상 위 스케치북 사이에 끼워 둔 편지는 아주 희미하게 숨을 쉬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윤서는 그 소리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숲의 첫 숨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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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머무는 숲: 끝을 듣는 소녀의 따뜻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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