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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포함된 노트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새로 쓰는 에누마 엘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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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부서진 바다 위의 첫 글자

티아마트의 바다는 물이라기보다 밤이었다.

서하는 무릎까지 차오른 검푸른 물속에 서 있었다. 물결은 차가웠지만 얼음처럼 몸을 얼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기억처럼 피부 아래로 스며들었다. 바다 위에는 하늘이 없었다. 지성소의 천장도, 에사길라의 벽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물속에 잠긴 별들이 흔들렸고, 별 사이로 아직 태어나지 못한 이름들이 물고기 떼처럼 스쳐 지나갔다.

벨리투는 한 손으로 부러진 창대를 짚고 겨우 일어섰다. 머리카락 끝에서 소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일루-타비는 조금 더 멀리,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팔뚝에는 검은 글자가 뱀처럼 감겼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사제들이 새긴 복종의 주문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그를 삼키지는 못했다. 시장과 법정과 성문 앞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른 소리가 아직 그의 몸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서하의 앞에는 창조의 서판이 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죽은 돌 같았다. 모서리는 깨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오래전 누군가 일부러 긁어낸 듯한 빈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르둑의 이름 첫 획과 티아마트의 이름 첫 획이 같은 점토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획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닿을 듯 말 듯, 바다와 바람처럼 서로의 가장자리를 흔들 뿐이었다.

그때 위쪽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물의 표면이 북소리에 맞춰 떨렸다. 바다 밑의 별들이 하나둘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 않는 천장 너머, 지상에서 사제들이 의식을 시작하고 있었다.

'위에서 하늘이 아직 이름 없을 때.'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내려왔다. 그것은 노래였지만 노래가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오래된 창조 서사의 첫 구절을 빌린 쇠사슬이었다. 사제들은 처음의 시간을 다시 부르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 바다와 어둠이 뒤섞여 있던 순간을 불러낸 뒤, 마르둑이 티아마트를 찢어 세계를 세우는 장면만 되풀이하려 하고 있었다.

벨리투가 이를 악물었다.

'저들은 전투를 다시 만들려는 거야.'

일루-타비가 물을 헤치며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 벽돌의 빛이 남아 있었다.

'전투가 아니라 재판입니다. 이미 판결이 정해진 재판.'

서하는 창조의 서판을 바라보았다. 결락된 부분이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그 빈자리에서 소리가 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리. 오랫동안 지워진 자들이 혀를 잃고 내는 소리였다.

북소리가 빨라졌다.

위에서 사제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르둑의 이름이 불렸고, 티아마트의 이름은 찢어지는 파도처럼 뒤따랐다. 그러나 두 이름은 함께 불리지 않았다. 하나는 왕좌에 올리기 위해, 다른 하나는 다시 죽이기 위해 불렸다.

서하는 그 차이를 알았다.

이름은 부르는 방식에 따라 문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물속에 잠긴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안에는 운명의 서판 조각이 박혀 있었다. 조각은 불에 달군 금속처럼 뜨거웠지만 살을 태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안쪽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문장들이 깨어나려 했다. 쓰기만 하면 된다고, 빈칸을 채우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면 신도 도시도 시간도 다시 질서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서하는 이제 그 속삭임의 위험을 알았다.

혼자 쓰는 자는 결국 지우는 자가 된다.

그녀는 낮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닷물 냄새와 점토 냄새, 피 냄새가 함께 들어왔다.

'아직 부족해.'

벨리투가 물었다.

'무엇이?'

'이 서판은 빈칸이 아니라 상처야. 상처를 메울 살이 필요해.'

일루-타비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서하가 무엇을 찾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킹구.'

그 이름이 바다 위로 떨어지자 물결이 크게 흔들렸다. 사제들의 노래 사이로 낮은 울음이 섞였다. 그것은 사람의 울음 같기도 했고, 신의 짐승이 목을 낮게 떠는 소리 같기도 했다.

티아마트의 바다 깊은 곳에서 붉은 빛이 떠올랐다.

새로 쓰는 에누마 엘리시

킹구의 붉은 점토

서하는 그 빛을 향해 걸었다.

걸음마다 물이 무겁게 달라붙었다. 바다는 그녀를 막으려는 것 같지 않았다. 다만 묻고 있었다. 정말로 그 이름까지 부를 수 있느냐고. 마르둑의 이름도, 티아마트의 이름도, 나부와 샤마시와 에아의 이름도 아닌, 반역자와 패배자와 재료로만 남은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느냐고.

서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킹구를 전설 속 한 줄로만 알았다. 티아마트의 곁에 섰다가 패배했고, 그의 피가 사람을 만드는 데 쓰였다는 이름. 신들의 기록에서 그는 죄의 근원처럼 남아 있었다. 인간은 그의 피를 받았으므로 노동해야 하고, 신들을 섬겨야 한다고 사람들은 배웠다.

그러나 바다 밑에서 본 킹구의 흔적은 죄가 아니라 남은 체온이었다.

붉은 점토는 조개껍데기와 검은 갈대 사이에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두 손으로 빚다 만 작은 심장 같았다. 표면에는 피처럼 어두운 붉은 선이 말라붙어 있었고, 그 아래에서 미세한 금빛 점들이 깜박였다.

서하가 손을 뻗자 물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무죄로 써 달라 하지 않는다.'

서하는 손을 멈췄다.

'그럼 무엇을 원해?'

'나를 이유로 삼지 말라.'

목소리는 깊고 낮았다. 화가 난 것도, 애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너무 오래 기다린 이름만이 낼 수 있는 마른 소리였다.

'사람의 피 속에 나를 섞고, 사람의 등을 굽히는 이유로 내 죄를 들먹였다. 신들의 도시를 세우기 위해 인간이 흙을 져야 한다면, 그것이 나 때문이라 했다. 나는 패했고, 죽었고, 피가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쓰인 명령들까지 모두 내 뜻은 아니었다.'

서하는 붉은 점토를 두 손으로 감쌌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장면이 밀려왔다. 벽돌을 굽는 사람들. 강가에서 진흙을 퍼 올리는 아이들. 이름 없는 서기관들이 밤새 점토판을 말리던 손. 신의 뜻이라는 말 앞에서 고개 숙인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의 핏속에, 죄가 아니라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서하는 조용히 말했다.

'너를 변명으로 쓰지 않을게. 네 이름을 칼로도, 족쇄로도 쓰지 않을게.'

붉은 점토가 그녀의 손안에서 부드러워졌다.

뒤에서 벨리투가 다가왔다. 그녀는 허리끈에 묶어 두었던 작은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는 보르시파의 노서기관 나부-무킨이 건네주었던 그을린 갈대 조각이 있었다. 나부의 성스러운 붓을 깎고 남은 조각. 힘은 거의 없다고 했지만, 진짜 붓의 결을 기억한다고 했던 물건이었다.

벨리투는 그것을 서하에게 건넸다.

'완전한 붓은 안주의 발톱 아래 있어. 하지만 붓의 결을 기억하는 조각은 아직 우리에게 있어.'

일루-타비도 품에서 검은 목록의 흙이 든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저승을 지나며 젖지 않도록 여러 겹 천으로 싸 두었던 흙이었다.

'숨겨진 글자를 드러내는 흙이었지요. 이번에는 숨겨진 글자를 쓰는 데 쓰일지도 모릅니다.'

서하는 갈대 조각의 끝에 검은 목록의 흙을 묻히고, 킹구의 붉은 점토를 조금 비벼 넣었다. 티아마트의 소금물이 그 끝에 맺히자, 조각은 임시 붓처럼 변했다. 금빛도 청동빛도 아니었다. 부러지고 그을리고 검게 얼룩진, 그러나 아직 쓸 수 있는 붓.

그것이 오히려 지금의 서하에게 어울렸다.

완전한 도구가 아니라 조각난 것들의 결합.

서하는 운명의 서판 조각을 창조의 서판 아래에 끼웠다. 일루-타비가 푸른 유약 조각을 서판의 왼쪽 모서리에 대었다. 왕궁의 푸른 벽돌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 도시 문장을 고정하던 장치의 일부였다. 그리고 서하는 킹구의 붉은 점토를 결락된 다섯 번째 판의 빈자리에 눌러 넣었다.

점토가 상처를 채웠다.

창조의 서판이 크게 떨렸다. 물속 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서판 주위를 맴돌았다. 다섯 번째 판. 별과 달과 해의 길을 정하고, 계절과 시간을 세우는 판. 그러나 지금 그 판에서 빠진 것은 별자리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승자의 노래가 필요 없다고 여긴 모든 이름이었다.

서하는 임시 붓끝을 붉은 점토 위에 가져갔다.

그 순간 위쪽에서 굉음이 터졌다.

승자의 노래를 끊다

지성소의 바닥이 갈라졌다.

티아마트의 바다 위로 에사길라의 그림자가 내려왔다. 물 위에 왕궁의 푸른 벽돌과 지구라트의 층계, 신전 마당에 모인 사제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있었지만 옷자락에는 검은 물이 묻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마르둑의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금빛 손에는 그물이 들려 있었고, 어깨에는 폭풍의 활이 걸려 있었다.

대사제가 팔을 들어 올렸다.

'질서는 혼돈을 찢어 세워진다!'

사제들이 한 목소리로 따라 외쳤다.

'질서는 혼돈을 찢어 세워진다!'

서하의 손안에서 운명의 서판 조각이 날카롭게 울었다. 마르둑의 신상 눈에 불이 들어왔다. 동시에 바다 깊은 곳에서 티아마트의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녀는 뱀도, 용도, 여자도 아니었다. 그 모든 모습이 되기 전의 거대한 물결이었다. 별을 낳고 괴물을 품고 이름 이전의 어둠을 기억하는 몸.

사제들은 환호했다. 그들이 원한 장면이었다.

마르둑이 깨어나고, 티아마트가 일어서고, 오래된 전투가 다시 시작되는 것.

대사제가 검은 칼을 뽑아 마르둑의 신상 앞에 놓았다.

'위대한 주여, 다시 바다를 가르소서. 다시 괴물의 이름을 지우소서. 다시 인간에게 명하소서. 섬기는 자만 살고, 묻는 자는 물에 잠기게 하소서.'

그 말이 끝나자 하늘에 남아 있던 두 번째 문장이 완성되려 했다. 검은 글자들이 서로 달라붙으며 끔찍한 문장을 만들었다.

왕은 이름을 빼앗는다.

바빌론 전체가 숨을 멈춘 것 같았다.

서하는 그 문장을 보았다. 마침내 모든 일이 선명해졌다. 안주가 훔치려 한 것도, 사제들이 되찾으려 한 것도, 신들의 이름 그 자체가 아니었다. 이름을 줄 권리, 이름을 빼앗을 권리, 이야기의 마지막 줄을 혼자 쓰는 권력이었다.

마르둑의 신상이 움직였다.

금빛 손이 그물을 들어 올렸다. 티아마트의 바다가 뒤로 밀려났다. 물속에서 괴물들의 눈이 하나둘 떠올랐다. 뿔 달린 뱀, 전갈의 꼬리를 단 수호자, 사자의 얼굴을 한 폭풍, 어둠 속에서만 헤엄치는 물고기, 사람의 꿈을 먹고 자란 새. 그들은 다시 죽임당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몸을 낮췄다.

그때 서하가 외쳤다.

'아니.'

목소리는 처음에는 작았다. 북소리에 묻히고, 사제들의 주문에 밀려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창조의 서판이 그 말을 붙잡았다. 킹구의 붉은 점토가 떨렸고, 임시 붓끝이 스스로 빛났다.

서하는 다시 말했다.

'아니. 창조는 같은 살해를 반복하는 일이 아니야.'

대사제의 눈이 서하를 향했다. 그는 지성소 아래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혹은 서하가 든 붓을 볼 수 있었다.

'이방의 서기관아, 네가 무엇을 안다고 감히 창조의 노래를 끊느냐?'

서하는 물속에 선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윤서하로 태어났고, 벨-에테르로 기억되었고, 이름을 기억하는 자라 불렸어. 그러니 알아. 이름이 지워진 뒤에도 누군가는 남아서 아파한다는 걸.'

대사제가 비웃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아픔으로 도시를 세울 수 없다.'

'아니. 이름 없는 자들의 아픔 위에 세운 도시는 언젠가 반드시 갈라져.'

그 순간 바빌론의 성벽이 보였다. 푸른 벽돌 사이로 가느다란 금이 퍼졌다. 유프라테스 강물이 거꾸로 흐르려 했고, 시장의 천막들이 검은 바람에 찢어졌다. 하지만 거리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빵 굽는 여인, 물항아리를 안은 아이, 법정 앞에서 이름을 불렀던 노인, 이슈타르 문 아래에서 사자의 벽돌을 만지던 병사들.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서로의 이름을 놓지 않았다.

서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같이 불러 줘.'

벨리투가 가장 먼저 알아들었다. 그녀는 물속에서 고개를 들고 외쳤다.

'마르둑!'

일루-타비가 이어 외쳤다.

'티아마트!'

두 이름이 부딪히지 않고 나란히 울렸다.

처음에는 바다만 대답했다. 그다음에는 지성소의 금빛 벽이 대답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상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이딘의 목소리였다. 그는 신전 마당 어딘가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마르둑!'

다른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받았다.

'티아마트!'

이름은 불길처럼 번졌다. 시장에서, 성문에서, 강가에서, 왕궁의 푸른 벽돌 아래에서 사람들이 두 이름을 함께 불렀다. 어떤 이는 뜻도 모르고 따라 했고, 어떤 이는 울면서 불렀다. 그러나 함께 부르는 순간, 사제들의 주문은 더 이상 완전한 명령이 아니었다.

서하는 붓을 들었다.

결락된 다섯 번째 판

첫 획은 깊게 들어갔다.

붓이 점토를 가르자 피가 아니라 빛이 배어 나왔다. 킹구의 붉은 점토는 마치 살아 있는 살처럼 붓끝을 받아들였다. 운명의 서판 조각은 다음 문장을 보여 주려 했다. '마르둑이 티아마트를 찢고…' '왕이 이름을 정하고…' '인간이 짐을 지고…' 익숙한 길들이 불빛처럼 열렸다.

서하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길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첫 문장을 새겼다.

혼돈은 죽여야 할 적이 아니라, 굳은 질서를 다시 숨 쉬게 하는 물이다.

서판이 울었다. 사제들의 북소리가 한 박자 어긋났다. 마르둑의 그물이 허공에서 멈췄다. 티아마트의 물결도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서하는 두 번째 문장을 새겼다.

질서는 바다를 묶어 세우는 벽이 아니라, 바다가 도시를 삼키지 않도록 함께 정한 약속이다.

바빌론의 성벽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이슈타르 문의 사자들이 벽돌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은 사제들의 명령이 아니라 거리의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대사제가 비명을 질렀다.

'멈춰라! 그 서판은 신들의 것이다!'

서하는 세 번째 문장을 새겼다.

신들의 이름은 인간의 입을 빌려 완성되고, 인간의 이름은 신들의 침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일루-타비의 팔을 감던 검은 글자가 끊어졌다. 그는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벨리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위쪽에서 안주의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검은 날개가 지성소의 빛을 덮었다. 안주는 새도 폭풍도 아닌 갈라진 문장의 형상이었다. 부리 끝에는 훔친 글자들이 매달려 있었고, 발톱에는 아직 마르둑의 침묵을 긁어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대사제 위로 내려앉지 않았다. 사제들을 돕기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서판을 노렸다.

'빈칸을 내게 주어라!'

안주의 목소리가 바다를 찢었다.

'질서도 혼돈도 결국 이름을 가진 자들의 놀이일 뿐이다. 나는 이름을 훔쳐 공백의 왕이 되겠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누구도 나를 추방할 수 없다.'

서하는 몸을 돌렸다. 검은 날개가 코앞까지 밀려왔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고, 손에 든 붓이 흔들렸다. 운명의 서판 조각이 뜨거워졌다. 지금이라면 안주의 이름을 지울 수 있었다. 그의 날개를 찢고, 그의 존재를 서판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더 쉬웠다. 악한 이름 하나를 지우고 세계를 구했다는 문장은 언제나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서하는 그 안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배웠다.

그녀는 붓을 고쳐 쥐었다.

'너도 지우지 않아.'

안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를 용서하겠다는 것이냐?'

'아니. 네가 훔친 것을 돌려놓게 하겠다는 거야.'

서하는 네 번째 문장을 새겼다.

훔친 이름으로 하늘을 가른 날개는, 이제 잊힌 이름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폭풍의 경계에 서라.

안주의 날개에서 검은 글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것들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다가 바다 위에 닿자 작은 점토 조각으로 변했다. 그 조각들마다 이름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사라진 서기관의 이름, 거짓 예언 때문에 처형된 하급 사제의 이름, 전쟁에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병사의 이름, 괴물이라 불려 벽 바깥으로 몰린 존재들의 이름.

안주는 비틀거리며 물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소멸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은 폭풍처럼 엷어졌다. 더 이상 왕좌를 노리는 검은 새가 아니라, 먼 하늘의 경계를 도는 어두운 바람이 되었다.

마지막 빈칸이 남았다.

서하는 붓끝을 세웠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마지막 문장은 단순한 주문이 아니었다. 이 문장을 쓰면 그녀가 돌아가야 할 길도 바뀔 것이다. 창조의 서판은 과거와 미래를 함께 고치는 물건이었다. 결락을 메운다는 것은 빠진 줄 하나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그 줄이 없어서 가능했던 모든 거짓말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벨리투가 조용히 말했다.

'서하.'

그 이름이 바다 위에 놓였다.

일루-타비도 말했다.

'벨-에테르.'

두 번째 이름이 첫 번째 이름 옆에 놓였다.

멀리서 신-이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을 기억하는 자!'

세 번째 이름이 서하의 등 뒤에 섰다.

서하는 눈을 감았다. 서울의 밤,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처음 만졌던 점토판의 서늘함이 떠올랐다.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있었다. 그 마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간다는 것은 아무 일도 없던 때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어야 했다. 이름을 기억한 사람은 기억하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서하는 마지막 문장을 새겼다.

진짜 창조는 승자의 노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워진 이름까지 함께 새겨 다음 새벽을 맡기는 일이다.

임시 붓끝이 부러졌다.

동시에 창조의 서판에서 빛이 터졌다.

두 이름의 주문

빛은 흰색이 아니었다. 푸른 벽돌의 남색, 유프라테스의 진흙빛, 킹구의 붉은 피, 티아마트의 검은 바다, 마르둑의 폭풍 금빛이 한꺼번에 섞여 있었다. 빛은 사제들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보게 했다.

대사제는 자신이 밟고 선 신전 바닥 아래에 묻힌 노동자들의 손자국을 보았다. 젊은 사제들은 자신들이 외운 주문에서 빠져 있던 이름들을 보았다. 왕궁의 관리들은 푸른 벽돌 하나를 굽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강가에서 진흙을 팠는지 보았다.

마르둑의 신상이 완전히 현현했다.

더 이상 금과 목재로 만든 조각이 아니었다. 그는 폭풍의 높이를 가진 존재로 서 있었다. 그러나 서하가 상상했던 왕의 얼굴과는 달랐다. 그의 눈에는 명령보다 피로가 먼저 있었다. 너무 오래 침묵한 자의 피로, 너무 오래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을 빌려주고 그 이름으로 벌어진 일을 지켜본 자의 피로.

티아마트도 바다에서 솟아올랐다. 그녀의 몸은 지성소를 가득 채우고도 넘쳤지만, 이상하게 누구도 짓눌리지 않았다. 그녀의 비늘 사이에는 별이 흐르고, 머리카락 같은 파도 속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알들이 흔들렸다.

사제들은 엎드렸다. 일부는 마르둑에게, 일부는 두려움 때문에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대사제만은 떨리는 손으로 칼을 들어 올렸다.

'주여,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저 바다를 다시 가르라 하십시오. 저 여자를, 저 괴물들의 어미를…'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마르둑이 그를 보았다.

그 시선만으로 칼이 녹아 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르둑은 대사제를 태우지 않았다. 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서 눈을 떼고 서하를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 같았지만, 천둥 뒤의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서하는 부러진 붓자루를 쥐고 대답했다.

'왕좌가 누구 하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려 했을 뿐이에요.'

티아마트가 웃었다. 그 웃음에 바다가 출렁였다.

'그리고 나를 복수의 바다로 만들지도 않았지.'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들도 선택해야 해요. 다시 싸울 건지, 아니면 함께 불릴 건지.'

말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신들에게 선택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물은 그녀를 받쳐 주었다.

마르둑은 긴 침묵 끝에 손을 내렸다. 그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티아마트는 몸을 낮추었다. 그녀의 파도가 마르둑의 발치에 닿았고, 마르둑의 바람이 티아마트의 물결 위를 지나갔다. 물은 흩어지지 않았고, 바람은 사라지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모양을 잠시 바꾸었을 뿐이었다.

서하는 창조의 서판에 새긴 문장들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새로운 주문을 읽었다.

'마르둑의 숨으로 경계를 세우고, 티아마트의 물로 경계가 굳지 않게 하라.'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처음에는 어긋났지만 곧 하나의 물결이 되었다.

'마르둑의 숨으로 경계를 세우고, 티아마트의 물로 경계가 굳지 않게 하라.'

서하는 다음 구절을 읽었다.

'질서는 혼돈을 죽이지 말고, 혼돈은 질서를 삼키지 말라.'

벨리투가 따라 했다. 일루-타비가 따라 했다. 신-이딘과 시장의 사람들, 병사들과 아이들, 이름을 잃었던 자들이 따라 했다.

서하는 마지막 구절을 읽었다.

'두 이름 사이에서 사람의 이름이 자라게 하라.'

그 순간 하늘의 검은 문장이 깨졌다.

왕은 이름을 빼앗는다는 문장은 더 이상 완성되지 못했다. 글자들이 흩어져 별이 되었다. 그 별들은 아무렇게나 퍼지지 않았다. 새로 쓰인 다섯 번째 판의 길을 따라 자리 잡았다. 어떤 별은 사자 모양으로, 어떤 별은 전갈 모양으로, 어떤 별은 날개를 접은 새 모양으로 빛났다.

바빌론 위로 처음 보는 별자리들이 생겨났다.

괴물들이 맡은 자리

티아마트의 괴물들은 물속에서 하나둘 올라왔다.

사제들은 다시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괴물들은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오래 기다린 판결을 듣는 자들처럼 서판 앞에 모였다.

가장 먼저 뿔 달린 뱀이 다가왔다. 무슈후슈의 비늘은 푸른 유약처럼 빛났고, 발톱에는 검은 진흙이 묻어 있었다. 서하는 그를 보며 이슈타르 문의 벽돌을 떠올렸다. 처음 바빌론에 떨어졌을 때 그녀를 바라보던 용의 눈.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는 경고. 그 모든 두려움이 이제 다른 뜻으로 돌아왔다.

서하는 서판 위에 그의 자리를 새겼다.

무슈후슈는 성문과 벽돌 사이를 지키는 수호령이 되었다. 왕의 명령만 지키는 짐승이 아니라,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이름과 도시 밖으로 쫓겨나는 이름을 살피는 문지기가 되었다. 누군가 다시 이름을 빼앗으려 할 때, 푸른 벽돌 속에서 그의 발톱이 빛날 것이다.

전갈 꼬리를 가진 존재는 사막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그는 저승의 문턱을 기억하는 눈으로 서하를 바라보았다. 서하는 그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경계의 지혜가 되기를 바라며 새겼다. 해가 지고 길이 사라지는 시간, 그는 여행자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과 반드시 넘어야 할 선을 구별하게 할 것이다.

사자의 얼굴을 한 폭풍은 왕궁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는 더 이상 전쟁의 함성이 아니었다. 여름의 뜨거운 공기를 밀어내고, 썩은 명령이 신전 안에 고이지 않도록 문을 흔드는 바람이 되었다.

깊은 물에 살던 긴 뱀은 유프라테스 아래로 스며들었다. 강이 너무 낮아지면 물길을 기억하게 하고, 강이 너무 높아지면 둑의 약한 곳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숨은 흐름이 되었다. 꿈을 먹던 새들은 밤하늘로 올라가 아이들의 악몽을 별빛으로 쪼아 먹는 작은 별자리가 되었다. 이름 없는 물고기들은 우물 속에 들어가, 물소리에 함부로 대답하지 말라는 오래된 경고를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속삭이는 수호자가 되었다.

괴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벌도 상도 아닌 자리를 받았다. 사라진다는 것은 쉬운 결말이었다. 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어려운 시작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티아마트의 복수도, 마르둑의 전리품도 아니었다. 바빌론의 강, 바람, 별자리, 성벽 사이에서 세계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버티는 존재들이 되었다.

티아마트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바닷물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 눈물은 홍수가 되지 않았다. 에사길라의 깊은 바닥에 스며들어 오래된 샘을 깨웠다. 서하의 팔찌에 새겨진 샘 기호가 다시 빛났다. 빈 표식 안에 생겼던 작은 점이 이제는 물방울 모양으로 커져 있었다.

마르둑은 성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른 벽돌들이 하나씩 빛났다. 벽에는 왕의 이름만 새겨져 있지 않았다. 벽돌을 구운 사람, 벽돌을 나른 사람, 벽돌에 유약을 바른 사람, 벽돌 앞에서 아이를 잃고도 다음 날 다시 물을 길어 온 사람들의 이름이 아주 작은 쐐기문자로 떠올랐다. 너무 작아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손을 대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자였다.

벨리투가 숨을 삼켰다.

'도시가… 기억하고 있어.'

일루-타비는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복종의 자세가 아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자신의 이마에 댔다.

'법정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증인이 되었습니다.'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그녀는 자신이 쓴 문장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도 누군가는 그것을 이용하려 할 것이고, 누군가는 다시 지우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서판에는 빈칸이 없었다. 거짓말이 숨어들기 쉬운 완전한 침묵은 사라졌다.

그때 마르둑이 서하 앞에 섰다.

복종이 아닌 책임

신이 가까이 오자 서하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실감했다.

그의 그림자 안에는 폭풍이 있었고, 왕들의 꿈이 있었고, 수천 년 동안 바빌론 사람들이 올려다본 두려움과 믿음이 있었다. 서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려 했다. 그러나 마르둑은 손을 들어 그녀를 멈추게 했다.

'엎드리지 마라.'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르둑의 목소리가 지성소와 바다, 그리고 도시의 모든 골목에 동시에 울렸다.

'내 침묵은 버림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다림이 언제나 옳았던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지 않는 동안, 많은 자들이 내 이름으로 명령했다. 내가 손을 들지 않는 동안, 많은 손이 내 손이라 불리며 사람들을 눌렀다.'

대사제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주여, 저희는 당신의 질서를 지키려 했을 뿐입니다.'

마르둑이 그를 보았다.

'질서는 두려움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두려움으로 세운 벽은 결국 안쪽 사람들을 먼저 가둔다.'

그 말에 신전의 문들이 열렸다. 오래 잠겨 있던 방, 별의 방 벽 속, 왕궁 서고의 봉인, 법정의 어두운 틈에서 숨겨진 점토판들이 떠올랐다. 그 위에는 고쳐진 판결과 지워진 증언, 거짓 예언의 초안들이 새겨져 있었다. 사제들은 눈을 피했지만 글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티아마트가 낮게 말했다.

'그리고 혼돈도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삼키려는 물은 결국 자기 아이들까지 익사시킨다.'

그 말은 바다에도, 괴물들에게도, 서하 자신에게도 향해 있었다. 서하는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리고 싶은 마음, 아픈 기억을 통째로 지워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작은 혼돈이었다.

마르둑과 티아마트가 함께 서하를 바라보았다.

'윤서하.'

마르둑이 그녀의 첫 이름을 불렀다.

'벨-에테르.'

티아마트가 두 번째 이름을 불렀다.

두 신의 목소리가 겹쳤다.

'이름을 기억하는 자.'

서하의 팔찌가 빛났다. 샘 기호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창조의 서판 위로 내려앉았다. 붉은 점토에 맺힌 물방울은 글자 사이로 스며들어 마지막 획들을 부드럽게 굳혔다.

마르둑이 말했다.

'우리는 너희에게 복종을 남기지 않는다.'

티아마트가 이어 말했다.

'우리는 너희에게 무한한 방종도 남기지 않는다.'

두 목소리가 하나의 주문처럼 울렸다.

'선택의 책임을 남긴다.'

그 순간 바다와 신전의 경계가 무너졌다. 무너졌지만 파괴되지는 않았다. 지성소 아래의 깊은 물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고, 신전의 바닥은 갈라진 흔적을 품은 채 닫혔다. 하지만 완전히 봉인되지는 않았다. 바닥 한가운데에는 작은 샘이 남았다. 누구든 그 물을 들여다보면 자기 이름뿐 아니라 자신이 지운 이름도 보게 될 것이다.

대사제는 그 샘을 보자 뒷걸음질 쳤다. 그가 도망치려는 순간, 이슈타르 문의 사자들이 벽돌 속에서 포효했다. 소리는 도시 전체를 흔들었지만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다만 거짓으로 봉인된 문들이 열렸다. 숨겨졌던 기록들이 사람들 앞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두려움이 아니라 읽기 전의 침묵이었다. 신-이딘이 가장 먼저 점토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은 떨렸지만 목소리는 분명했다. 그는 기록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거짓 예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이름들이 법정에서 사라졌는지, 누가 침묵을 팔아 권력을 샀는지.

한 사람이 읽자 다른 사람이 읽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름을 불렀다. 살아 있는 자의 이름과 죽은 자의 이름, 신들의 이름과 괴물들의 이름이 뒤섞였다. 바빌론은 처음으로 승자의 노래가 아닌 합창을 배웠다.

서하는 창조의 서판을 품에 안으려 했다. 그러나 서판은 더 이상 한 사람이 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빛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일부는 신전의 샘으로, 일부는 성벽의 푸른 벽돌로, 일부는 사람들의 혀와 기억으로 스며들었다.

부러진 붓자루만 서하의 손에 남았다.

운명의 서판 조각은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그것은 손바닥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작은 점토 조각으로 변했다. 거기에는 단 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

아무도 혼자 운명을 완성하지 못한다.

벨리투가 그 문장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마음에 드네. 드물게 겸손한 서판이야.'

일루-타비는 웃으려다 기침을 했다. 벨리투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 평범한 몸짓이 이상하게도 서하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신들이 현현하고 바다가 열리고 별자리가 바뀌었는데, 결국 세계가 계속된다는 증거는 누군가의 등을 두드리는 손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새벽이 오기 전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빌론 위의 하늘에는 새 별자리들이 자리를 찾느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성벽의 푸른 벽돌 사이로 무슈후슈의 그림자가 미끄러졌고, 유프라테스 강물은 이전보다 깊은 소리로 흘렀다. 신전 마당에서는 사람들이 점토판을 주워 서로에게 읽어 주었다. 어떤 이는 분노했고, 어떤 이는 울었고, 어떤 이는 아무 말 없이 무너진 기둥을 받쳤다.

마르둑의 현현은 점점 희미해졌다.

사제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신이 돌아왔으니 명령도 돌아오리라 믿었다.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인지, 누가 왕좌에 앉고 누가 무릎 꿇어야 하는지, 신의 입에서 마지막 판결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마르둑은 아무 명단도 내려 주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의 신상으로 돌아가기 전, 도시를 향해 한 번 더 말했다.

'너희가 부르는 내 이름이 너희의 선택을 대신하지 못한다.'

티아마트의 파도도 샘으로 돌아가며 속삭였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내 깊이가 너희의 책임을 삼켜 주지 못한다.'

두 신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로 물러났다. 마르둑은 폭풍과 신상의 고요 속으로, 티아마트는 샘과 강과 밤바다의 숨결 속으로. 이제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 방식으로 남아 있었다.

서하는 신전의 계단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걸을 수 없었다. 손에는 부러진 붓자루가, 무릎 위에는 작은 운명의 서판 조각이, 손톱 밑에는 킹구의 붉은 점토가 남아 있었다. 세 가지는 더 이상 세계를 뒤흔드는 도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너무 오래 쥐고 있어서 손의 일부가 된 물건들 같았다.

벨리투가 곁에 앉았다.

'끝난 걸까?'

서하는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멀리 동쪽 하늘이 아주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아직 새벽은 아니었다. 새벽이 오기 전의 가장 어두운 파란빛이었다.

'모르겠어.'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노래를 반복하게 두지는 않았어.'

벨리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시작으로는 충분하지.'

일루-타비가 계단 아래에서 다가왔다. 그는 한쪽 무릎을 절었지만 표정은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새 서판을 쓴 자가 누구인지 묻고 있습니다.'

서하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혼자 쓴 게 아니라고 말해 줘.'

'이미 그렇게 말했습니다. 믿지 않는 눈치입니다.'

벨리투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영웅 하나를 세우는 걸 좋아하니까. 그래야 나머지는 편해지거든.'

서하는 계단 아래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그녀를 향해 무릎 꿇으려 했고, 누군가는 손을 흔들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모든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서하는 알았다. 시선을 피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다시 말해야지. 아무도 혼자 운명을 완성하지 못한다고.'

동쪽 하늘에서 첫 새가 울었다.

안주였던 바람이 아주 먼 곳에서 낮게 회오리쳤다. 그것은 위협이라기보다 경고에 가까웠다. 새로운 균형은 완성된 성벽이 아니라 매일 다시 쌓아야 하는 둑이라고. 오늘 이름을 새겼다 해도 내일 누군가 그것을 덮으려 할 수 있다고.

서하는 하늘을 보았다.

새로 생긴 별자리 중 하나가 희미하게 빛났다. 날개를 접은 새의 형상 아래, 작은 점토판 모양의 별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별들 사이에서 아직 읽히지 않은 이름들이 반짝였다.

그녀는 손바닥을 폈다.

킹구의 붉은 점토가 묻은 손금 사이로 샘 기호의 물빛이 지나갔다. 그녀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점토판은 그녀를 삼키는 문이었다. 이제 점토판은 한 사람이 나가는 문이 아니라 많은 이름이 서로를 기억하는 자리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아주 가느다란 금이 다시 울었다.

서하는 고개를 돌렸다.

에사길라의 가장 높은 곳, 아직 밤이 남아 있는 꼭대기에서 희미한 빛이 깜박였다. 별빛인지, 열린 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돌아갈 시간의 틈인지 알 수 없었다.

벨리투도 그것을 보았다.

'서하.'

그 부름에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돌아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마르둑이 남긴 책임과 티아마트가 남긴 깊이, 그리고 사람들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합창이 그녀의 양쪽 어깨에 놓여 있었다.

동쪽 하늘이 조금 더 밝아졌다.

바빌론은 마지막 밤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은, 아직 누구의 이름으로도 완전히 쓰이지 않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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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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