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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포함된 노트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사자가 없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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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숲 밖의 침묵

숲을 나온 뒤, 세상은 이상하게 작아져 있었다.

삼나무 숲 안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컸다. 나무는 하늘을 떠받칠 만큼 높았고, 훔바바의 얼굴은 절벽처럼 넓었으며, 공포는 사람의 몸보다 더 큰 그림자로 일어섰다. 그런데 숲 밖으로 나오자 평야는 낮고 납작했다. 모래와 마른 풀, 멀리 흩어진 불빛 몇 개, 숨을 죽인 사람들. 세상이 커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숲 가장자리의 야영지는 그들이 들어갈 때와 달라져 있었다.

처음 그곳을 지나칠 때만 해도 사람들은 서로를 불렀다. 아이들은 물동이 사이를 뛰어다녔고, 낙타를 묶는 장사꾼은 지나가는 사람마다 값을 흥정했으며, 우루크에서 온 피난민들은 낮은 목소리로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렸다. 검은 문장이 하늘에 떠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살기 위해 떠들었다. 말이 있어야 불안도 조금씩 흩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불은 세 곳에서 타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둘레에 바짝 앉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사라졌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려다 입술을 깨물고, 대신 손짓으로만 가까이 오라고 했다. 늙은 양치기는 자기 양들에게 붙여 준 이름마저 삼킨 채, 그저 막대기로 땅을 두드렸다.

하늘 때문이었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왕은 이름을 잃—

두 번째 문장의 마지막 획은 훔바바의 숨에 말라붙어 있었다. 그러나 말라붙었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검은 글자는 하늘 한가운데 갈라진 상처처럼 걸려 있었고, 그 틈 주변에서는 아직도 젖은 먹빛이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문장을 읽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읽지 않으려 할수록 더 잘 보였다.

서하가 야영지 가장자리로 들어서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여인이 물동이를 끌어안고 뒤로 물러났다. 물이 조금 넘쳐 발등을 적셨지만 여인은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서하의 얼굴이 아니라 손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샘 표식.

훔바바의 숨을 받은 뒤, 그 표식은 이전보다 선명해져 있었다. 가운데 점에서 뻗은 두 개의 가느다란 선이 희미한 초록빛을 품고 있었다. 밤에는 숨기기 어려운 빛이었다.

"저 사람이다."

누군가 아주 작게 말했다.

작은 말은 쉽게 죽지 않았다. 그것은 마른 풀 위의 불씨처럼 야영지에 번졌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여자."

"저 여자가 숲으로 들어간 뒤 하늘 글자가 더 길어졌어."

"왕의 이름이 떨어지면 도시도 떨어진다는데…"

"쉿. 이름 말하지 마."

벨리투가 창대를 고쳐 잡았다. 평소라면 그런 시선 앞에서 먼저 앞으로 나섰을 것이다. 그녀의 창끝은 말보다 빠르게 침묵을 만들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창을 들지 않았다. 창대에 감긴 붉은 실 자국만 엄지로 천천히 눌렀다.

숲에서 나온 뒤, 벨리투도 달라져 있었다.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곧게 서 있었다. 다만 예전의 곧음이 칼날 같았다면, 지금의 곧음은 금이 간 기둥 같았다. 무너질까 봐 버티는 것이 아니라, 금이 간 사실을 숨기지 않은 채 서 있는 기둥.

쿠두루도 평소처럼 떠들지 않았다. 그는 야영지의 물항아리들을 보자마자 시선을 돌렸다. 장난스럽게 불평할 힘은 남아 있었지만, 그 힘을 꺼내 쓰는 것이 두려운 사람처럼 보였다.

"환영이 대단히 뜨겁군요."

그가 마침내 중얼거렸다.

"불 가까이 가지 않아도 충분히 타겠습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서하는 그 침묵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다. 동시에 자신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물을 나누던 손이 멈추고, 함께 길을 묻던 입이 닫혔다. 이름이 흔들리는 시대에는 가장 먼저 믿음이 흔들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일조차 위험해지면, 사람은 누구를 향해 손을 뻗어야 하는지 잊어버린다.

야영지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늙은 서기관이 일어섰다. 그는 한쪽 눈이 흐렸고, 허리에는 빈 갈대통을 매고 있었다. 그가 서하 일행을 향해 다가오자 주변 사람들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노인은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추게 했다.

"숲이 당신들을 돌려보냈군."

노인이 말했다.

"돌려보냈다기보다…" 쿠두루가 입술을 핥았다. "잠시 내쫓지 않기로 한 쪽에 가깝습니다."

노인은 쿠두루를 보지 않았다. 그의 흐린 눈은 서하의 손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 빛을 가려 주시오."

서하는 손을 움찔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니까요?"

"사람들은 이미 무서워하고 있소. 빛 때문이 아니라, 빛을 보고도 묻지 못하는 자기 입 때문에."

노인의 말은 조용했지만 날카로웠다.

"하늘에 저 문장이 걸린 뒤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소. 아이가 울어도 이름 대신 '너'라고 부르고, 죽은 사람을 묻을 때도 이름판을 뒤집어 놓았지. 혹시 누군가 들을까 봐. 혹시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이름이 하늘로 끌려갈까 봐."

서하는 야영지 뒤편을 보았다. 낮은 흙더미 몇 개가 있었다. 그 앞에 작은 점토판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글자가 새겨진 면은 모두 땅을 향해 엎어져 있었다.

죽은 자의 이름까지 숨기는 밤.

그보다 더 깊은 불신이 있을까.

노인이 낮게 말했다.

"당신이 저 문장을 멈출 수 있다면 멈추시오. 멈출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에게 거짓말은 하지 마시오."

그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부탁도 아니었다. 더는 속을 힘이 없는 사람의 마지막 요구였다.

서하는 손바닥을 천으로 감쌌다. 빛은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 흩어졌다. 그러나 침묵은 그대로 남았다. 숨겨진 빛보다 숨겨진 말이 더 오래 남는 법이었다.

그들은 야영지 가장자리, 반쯤 무너진 우물 옆에 자리를 잡았다. 우물은 오래전에 말라붙은 것처럼 보였지만, 바닥 깊은 곳에서는 아주 낮은 물소리가 들렸다. 서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몸이 굳었다.

물소리에 대답하지 마라.

일루-타비의 경고가 다시 귓속에서 살아났다.

벨리투도 같은 생각을 한 듯 우물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쿠두루는 아예 우물 반대편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오늘 물과 친하게 지낼 마음이 없습니다. 물도 저를 그리 반기지 않을 겁니다."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물 안쪽에서 방울이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똑.

그 소리는 너무 맑았다. 마른 우물에서 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 뒤로, 누군가가 아주 멀리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서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저승의 일곱 문

말하지 않은 선택들

밤이 깊어질수록 야영지의 불빛은 낮아졌다.

사람들은 잠들지 못했다. 누운 척만 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서로가 숨 쉬는 소리를 확인했다. 아무도 크게 울지 않았고, 아무도 크게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점이 더 무서웠다. 공동체가 무너질 때 처음부터 고함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사소한 말들이 사라진다. 물을 건네며 하던 농담, 아이의 이름을 부르던 습관,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 주던 친절. 그런 것들이 하나씩 입을 닫으면, 사람들은 아직 함께 앉아 있어도 이미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서하는 작은 불 앞에서 손을 녹였다. 삼나무 숲의 차가운 숨이 아직 몸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손바닥의 표식은 천 아래에서 느리게 뛰었다.

벨리투는 불 건너편에 앉아 창끝을 닦고 있었다. 닦을 피도 먼지도 없었지만, 그녀는 같은 동작을 오래 반복했다. 창을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이 아직 자기 것인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쿠두루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제가 먼저 어리석은 말을 하겠습니다. 저는 침묵이 오래가면 꼭 더 큰 문제가 생긴다고 믿습니다. 물길도 막히면 썩고, 사람 속도 막히면 냄새가 납니다."

벨리투가 그를 보았다.

"비유가 지저분하군."

"살아 있다는 증거지요."

쿠두루는 짧게 웃으려다 실패했다. 그는 불빛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마디가 희게 굳어 있었다.

"숲에서 본 아이 말입니다."

서하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쿠두루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 포기한 듯, 한꺼번에 내뱉었다.

"제 동생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니, 동생 이야기가 시작이긴 했습니다. 그 뒤로 저는 모르는 척하는 법을 배웠지요. 물길에서 살아남으려면 질문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짐을 맡기든, 어디로 가든, 왜 밤에만 움직이든, 묻지 않았습니다. 묻지 않으면 책임도 줄어든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마른 입술을 문질렀다.

"몇 해 전, 보르시파의 서기관 하나가 제 배를 빌렸습니다. 배수로를 따라 남쪽 창고까지 가 달라고 했지요. 짐은 검은 천으로 싸여 있었고, 이상하게 차가웠습니다. 천 아래에서 돌이 서로 긁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짐꾼 하나가 실수로 끈을 풀었는데, 저는 봤습니다."

불이 낮게 흔들렸다.

"무엇을요?" 서하가 물었다.

"검은 돌판 조각들. 가장자리마다 작은 홈이 있었고, 홈 안에는 마른 진흙이 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돈이 필요했고, 제 배가 필요하다는 사람은 늘 위험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서하는 검은 돌판을 떠올렸다. 훔바바의 그루터기 아래 있던 봉인. 일곱 개의 홈. 신들의 인장이 서로를 누르던 그 어두운 표면.

"그 짐이 어디로 갔는지 기억해요?"

쿠두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빌론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신전의 짐이라면 신전으로 가야 하는데, 그들은 도시를 우회했습니다. 북쪽의 먼지 언덕, 버려진 장례길 근처에 내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짐꾼들은 땅 밑으로 내려가듯 사라졌습니다."

벨리투의 손이 멈췄다.

"쿠타."

그녀가 낮게 말했다.

쿠두루가 어깨를 움츠렸다.

"당시에는 이름을 몰랐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요."

"쿠타는 저승의 문을 말할 때 자주 나오는 땅이다." 벨리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죽은 자의 먼지가 모인 곳. 에레쉬키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곳."

쿠두루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 돌을 옮긴 것이 오늘의 이 난리에 보탬이 되었습니까?"

그 질문은 가벼운 농담으로 덮을 수 없었다. 서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침묵으로 밀어낼 수도 없었다.

"보탬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쿠두루의 얼굴이 굳었다.

서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당신 혼자 만든 일은 아니에요. 그 돌을 파낸 사람, 숨긴 사람, 옮기라고 시킨 사람, 이름을 지운 사람, 그리고 묻지 않기로 한 사람. 전부 조금씩 연결되어 있어요."

"그 말이 위로가 되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도요."

벨리투가 창을 내려놓았다.

"묻지 않기로 한 건 나도 같다."

서하와 쿠두루가 그녀를 보았다. 벨리투는 불이 아니라 자기 손목의 끊어진 실 자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슈타르 신전에는 이름 없는 방들이 있다. 신상이 없는 방, 향을 피우지 않는 방, 기록판에 위치가 남지 않는 방. 나는 그런 곳을 지켰다. 여사제들은 그 방들이 여신의 분노를 가두는 곳이라고 했다. 내가 할 일은 문 앞에 서서, 들어가려는 자를 막고, 나오는 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한번은 안에서 노래가 들렸다. 장송가도 아니고 축제 노래도 아니었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같은 음을 반복하는 소리였다. 나는 문을 열 수 있었다. 열쇠가 내 허리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열지 않았다. 명령이 없었다."

불이 작아졌다.

"그 노래를 다시 들은 적은?" 서하가 물었다.

벨리투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 날 방은 비어 있었다. 바닥에는 먼지만 남아 있었다. 여사제들은 그 먼지를 '저승의 세금'이라고 불렀다. 나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묻지도 않았다."

쿠두루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 셋이 모이면 훌륭한 침묵 장사꾼이 되겠군요."

그 말은 슬펐지만, 이상하게도 불 근처의 공기를 조금 풀어 주었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은 표면에 작은 금이 생겼다.

서하는 자기 차례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품속에서 엔키두의 벽돌 조각과 우안나의 그을린 갈대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부의 붓 조각을 천 위에 놓았다. 작은 물건들은 불빛 속에서 서로 다른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도 결락을 채웠어요."

벨리투가 말했다.

"그 이야기는 알고 있다."

"아니요. 내가 왜 채웠는지는 말한 적 없어요."

서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현대의 연구실에서 점토판을 보던 밤이 다시 떠올랐다. 형광등의 차가운 빛, 유리 상자에 반사된 자기 얼굴, 누구보다 먼저 읽어 내고 싶었던 마음.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라고 말하면 편했다. 오래된 언어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더 작고 솔직한 마음이 있었다.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 말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오래된 조각들 사이에서 내가 무언가를 찾아냈다고, 내가 필요하다고, 내가 누구보다 정확히 읽었다고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빈칸 앞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남겨 둘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내가 쓴 문장이 문이 될 줄은 몰랐지만… 문장에 힘이 없다고 믿고 싶었던 건 사실이에요."

쿠두루가 불쑥 말했다.

"글자가 힘이 있을 줄 알았다면 안 썼겠습니까?"

서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대답의 일부였다.

"모르겠어요."

그녀는 솔직히 말했다.

"그때의 나는 아마, 그래도 한 번쯤 손을 댔을 거예요. 조심하겠다고 말하면서.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벨리투가 서하를 오래 보았다. 그 시선에는 비난보다 피로가 많았다. 피로 속에는 이상한 안도가 섞여 있었다. 완벽한 사람을 믿는 일보다, 자기 흠을 아는 사람 옆에 서는 일이 덜 위험할 때가 있다.

"그럼 우리 모두 조금씩 열쇠를 돌린 셈이군."

벨리투가 말했다.

"문을 만든 자들은 따로 있겠지만."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이 봉인을 만들었다. 사제들은 그것을 숨겼다. 왕들은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름들을 눌렀다. 서기관들은 기록했고, 운반자들은 물길을 열었고, 수호자들은 문을 지켰고, 학자는 결락을 채웠다. 위기는 어느 한 사람의 잘못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모두가 조금씩 고개를 돌린 결과가 하늘에 검은 문장으로 걸려 있었다.

쿠두루가 불 속에 작은 나뭇가지를 던졌다.

"그렇다면 누굴 탓해야 합니까? 탓할 대상이 많으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피곤합니다."

서하는 하늘을 보았다. 말라붙은 마지막 획이 다시 젖고 있었다.

"탓할 사람을 찾는 것만으로는 늦어요."

"그럼?"

"무엇을 지킬지 정해야죠."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말하고 나니, 그 말이 오래전부터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을 지킬 것인가.

마르둑의 권위도, 왕의 이름도, 신전의 질서도 아니었다. 그것들이 전부 무너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질서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다치는 것은 힘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름을 사슬로 만드는 질서를 그대로 지키는 것은 더 이상 답이 아니었다.

서하가 지키고 싶은 것은 더 작고 더 어려운 것이었다.

사람이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있는 권리.

두려운 것을 악이라 부르기 전에 묻는 태도.

함께 걷는 사람을 도구로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을 용기.

말로 하기에는 너무 크고 어색했다. 그래서 서하는 그저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구한다는 말도 조심하고 싶어요. 구한다는 말이 때로는 붙잡는 말이 되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름을 빼앗기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벨리투가 창대를 들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말은 좋다. 너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 흠이지만."

쿠두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말은 대체로 발을 많이 아프게 하지요. 멀리 걷게 만드니까요."

그때 우물 깊은 곳에서 다시 물방울 소리가 났다.

똑.

이번에는 세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물 안쪽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물 냄새와 함께, 낯익은 푸른 유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물이 삼킨 편지

처음에는 우물 바닥에서 빛이 올라오는 줄 알았다.

서하는 몸을 낮추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우물은 오래전에 말라붙은 것처럼 보였지만, 깊은 어둠 한가운데 아주 작은 푸른 점이 흔들리고 있었다. 별빛이 빠진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 물속에 유약 조각을 던진 것 같기도 했다.

쿠두루가 뒤에서 속삭였다.

"대답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늘 교훈을 배웠습니다. 물에서 목소리가 나면 무조건 무례하게 굴어야 합니다."

벨리투가 창끝을 우물 가장자리에 걸쳤다.

"목소리가 들리나?"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들렸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를 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뜻이었다. 우물 안쪽에서 아주 낮은 속삭임이 올라오고 있었다.

서하.

벨-에테르.

이름을 기억하는 자.

목소리는 그녀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대답하는 순간, 목소리는 그녀의 숨을 발판 삼아 올라올 것이다. 압수의 물가에서 들었던 경고, 지하의 오래된 물, 에아가 끝내 말하지 않은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서하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신-이딘에게 받은 푸른 유약 가루가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여러 번 위기를 지나며 거의 다 썼지만, 마지막 한 줌만은 아껴 두었다. 그 가루는 물과 닿으면 거짓 글자를 드러내기도 했고, 숨겨진 문장의 가장자리를 밝히기도 했다.

벨리투가 낮게 물었다.

"확실한가?"

"아니요."

"좋군. 요즘 확실하다는 말보다 그 말이 더 믿을 만하다."

서하는 가루를 손끝에 묻힌 뒤, 우물 안으로 떨어뜨렸다.

푸른 가루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물에 닿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우물 벽의 마른 흙 사이사이에 푸른 선이 번졌다. 선들은 쐐기 모양으로 꺾이고, 다시 이어지며 글자가 되었다.

물 위에 쓰인 글자가 아니었다.

우물 벽에 남아 있던 오래된 유약 조각들이 빛을 되찾으며 문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하는 안도의 숨을 아주 조금 내쉬었다. 물의 목소리가 쓴 글자라면 표면에서 떠올랐을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 오래전에 숨겨 둔 문장이었다. 물은 그것을 삼키고 있었고, 푸른 가루가 잠시 끌어낸 것뿐이었다.

첫 줄에는 낯익은 필체가 있었다.

물에 대답하지 않은 자만 읽어라.

서하의 목이 메었다.

신-이딘.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그 이름이 뜨겁게 번졌다. 왕궁 서고의 어두운 통로, 푸른 유약 조각을 건네던 손, 압수라는 이름을 듣고 흔들리던 눈. 그는 늘 반쯤은 믿을 수 없고 반쯤은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푸른 글자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을 먼저 적는다. 너희가 나를 믿어야 한다면,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믿어라.

쿠두루가 작게 말했다.

"정직한 사람인지 교활한 사람인지 구분이 어렵군요."

벨리투가 대꾸했다.

"둘 다일 수 있다."

서하는 글자를 따라 읽었다.

왕궁의 별의 방 벽 속에서 숨겨진 두 번째 봉인을 찾았다. 벨-우슈르가 남긴 압인은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었다. 문이 이미 열렸음을 증명하는 흉터였다. 오래전, 신전과 왕궁은 함께 봉인을 옮겼다. 이유는 하나였다. 마르둑의 침묵을 감추기 위해.

서하의 손이 굳었다.

마르둑의 침묵.

하늘의 첫 문장은 단순한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은 완전히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말이다. 그러나 안주의 문장은 오래된 균열을 물고 자라났다. 마르둑은 정말 침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그 침묵을 알고 있었고, 감추기로 선택했다.

글자는 계속 빛났다.

신들은 티아마트의 파편들을 묶은 뒤, 그 봉인을 서로 나누어 책임지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책임은 기록이 되었고, 기록은 의식이 되었고, 의식은 아무도 뜻을 묻지 않는 습관이 되었다. 왕들은 그 습관을 이용했다. 사제들은 습관을 지키는 것이 신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다. 서기관들은 빠진 줄을 메우며 침묵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서하는 자기 고백이 우물 벽에서 다시 들려오는 것처럼 느꼈다.

빠진 줄을 메우며 침묵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그 말은 그녀에게도 해당되었다.

다음 줄은 글자가 조금 흐렸다. 푸른빛이 흔들렸고, 우물 아래의 목소리가 다시 이름을 부르려 했다. 서하는 이를 악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펴서 삼나무 숨을 아주 조금 흘려보냈다. 초록빛이 푸른 글자 위를 스치자, 번지던 획들이 말라붙으며 다시 선명해졌다.

안주는 거짓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감춰진 진실의 썩은 부분에 자기 먹을 붓고 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빠르다. 사람들은 거짓을 의심하지만, 오래 숨겨진 진실 앞에서는 무너진다.

벨리투가 낮게 욕설을 삼켰다.

쿠두루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번에는 농담도 나오지 않는 듯했다.

우물 벽의 글자는 더 아래로 이어졌다.

두 번째 문장이 완성되면 왕의 이름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왕의 이름을 못처럼 박아 두었던 모든 봉인이 함께 헐거워진다. 그러면 저승의 일곱 문은 안쪽에서 닫힌다. 닫힌 문 뒤에서 이름을 잃은 자들은 가장 큰 목소리에 응답할 것이다. 지금 가장 큰 목소리는 안주의 날개다.

서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라붙었던 획 주변이 점점 젖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때 우물 아래에서 물소리가 커졌다. 푸른 글자의 마지막 부분이 서둘러 떠올랐다.

쿠타의 북쪽, 사자가 없는 문을 찾아라. 장례길이 끝나는 먼지 언덕 아래 첫째 문이 열린다. 문지기에게 이름을 말하지 마라. 그는 이름을 듣는 자가 아니라, 내려놓는 것을 세는 자다.

첫째 문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장식도 무기도 아니다.

너희가 아직 무죄라고 믿는 마음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우물 속의 푸른빛이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아주 늦게, 마지막 글자 하나가 떠올랐다.

일루-타비가 붙잡혔다. 그러나 그를 구하러 바빌론으로 돌아오지 마라. 그가 남긴 말이다. "내 이름보다 먼저 문을 막아라."

서하는 숨을 멈췄다.

일루-타비.

언제나 반쯤 비웃는 얼굴로 위험한 길을 알려 주던 남자. 이슈타르 문에서는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고, 샤마시의 법정에서는 숨소리마저 증언이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많은 것을 숨겼고, 아마 끝까지 다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붙잡혔다는 문장 앞에서 서하는 자신이 그를 생각보다 깊이 믿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벨리투가 조용히 말했다.

"함정일 수도 있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가 정말 붙잡혔다면, 바빌론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가고 싶었다. 그 마음은 분명했다. 일루-타비가 무엇을 알고 있었든, 어떤 거짓을 품고 있었든, 그는 그들의 길 곳곳에 작은 틈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버려두고 다른 문으로 향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신-이딘의 글자는 잔인할 만큼 분명했다.

내 이름보다 먼저 문을 막아라.

쿠두루가 우물 가장자리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저는 바빌론으로 돌아가는 길도 알고, 쿠타로 가는 길도 압니다. 하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잡으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사람들이 우리를 반기지 않을 길입니다. 선택지가 참 풍성하군요."

"어느 쪽이 빠르지?" 벨리투가 물었다.

"빠른 쪽은 쿠타입니다. 안전한 쪽은…"

쿠두루는 잠시 생각했다.

"없군요. 제가 괜히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때 야영지 쪽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우물 벽의 푸른빛을 본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희망은 때로 분노보다 더 위험했다. 희망을 품은 사람은 그것을 잃을까 봐 더 거칠어진다.

늙은 서기관이 앞으로 나왔다.

"무슨 글이었소?"

서하는 잠시 망설였다.

거짓말하지 말라.

노인의 요구가 떠올랐다.

서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름을 숨긴 사람들. 죽은 자의 이름판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같은 불빛 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녀 역시 또 하나의 침묵을 쌓는 셈이었다.

"하늘의 문장은 곧 다시 움직일 거예요."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신음이 퍼졌다.

"우리는 쿠타로 가야 합니다. 저승의 첫째 문이 그곳에서 열려요. 그 문을 막거나, 적어도 안주가 먼저 명령하지 못하게 해야 해요."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왕은?"

"왕의 이름을 지키는 일만으로는 부족해요."

그 말에 몇몇 사람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왕의 이름은 도시의 지붕 같은 것이었다. 지붕이 썩었더라도, 당장 걷어 내면 비를 맞는 것은 아래 사람들이다.

서하는 서둘러 덧붙였다.

"왕의 이름이 무너져도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하지만 왕의 이름만 살리려고 다른 이름들을 계속 묻어 두면, 안주는 그 묻힌 이름들을 모두 자기 목소리로 불러낼 거예요. 그러면 아무도 자기 이름을 지키지 못합니다."

늙은 서기관은 오래 침묵했다.

"우리가 도울 일이 있소?"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떤 얼굴에는 반대가, 어떤 얼굴에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서하가 떠나기만을 바랐고, 누군가는 그녀가 남아서 하늘을 고쳐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서하는 그 침묵을 이해했다.

"길을 알려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이름판을 다시 세워 주세요."

노인의 흐린 눈이 흔들렸다.

"죽은 자들의 이름판 말이오?"

"네. 하늘이 듣는 게 무서워도, 안주가 듣는 게 무서워도… 이름을 땅에 엎어 둔 채로는 우리가 뭘 지키는지 잊게 돼요."

야영지는 더 깊은 침묵에 잠겼다.

서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외지에서 온 여자, 손바닥에 이상한 표식을 가진 사람, 숲에서 괴물의 숨을 받아 온 사람. 그런 사람이 죽은 자의 이름을 세우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하게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늙은 서기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가장 가까운 흙더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엎어진 점토판 하나를 들어 올렸다. 흙이 떨어지며 새겨진 이름이 드러났다. 노인은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아직 그럴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점토판을 바로 세웠다.

그 작은 행동이 야영지 전체를 흔들었다.

한 여인이 울음을 삼키며 두 번째 이름판을 세웠다. 양치기가 세 번째를 세웠다. 아이 하나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네 번째 앞에 섰다.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엎어진 이름들이 하나씩 밤공기 속으로 돌아왔다.

서하는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균열은 무너짐의 시작일 수도 있지만, 빛이 들어오는 틈일 수도 있다.

무죄를 내려놓는 밤

쿠타로 떠나기 전, 세 사람은 짐을 정리했다.

정리라고 해도 버릴 것이 많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것은 대부분 작은 조각들이었다. 엔키두의 벽돌 조각, 우안나의 갈대 조각, 나부의 붓 조각, 신-이딘의 푸른 가루가 거의 사라진 주머니, 벨-우슈르의 압인, 그리고 검은 목록의 흙. 세상을 흔드는 일은 이상하게도 늘 손바닥에 들어오는 것들에서 시작되었다.

벨리투는 창대를 살폈다. 붉은 실 자국은 이제 창대 중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그녀를 신전에 묶는 끈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기 손으로 묶은 표시였다.

쿠두루는 작은 물주머니를 들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저승에 물이 있습니까?"

벨리투가 말했다.

"있다 해도 네가 마시고 싶어 할 물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가지고 가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지들 사이에서는 익숙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는 물주머니를 허리에 묶었다. 그 동작이 조금 떨렸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서하는 야영지 밖으로 몇 걸음 나가 하늘을 보았다. 검은 문장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말라붙었던 마지막 획은 다시 젖어 가고 있었다. 훔바바의 숨이 벌어 준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벨리투였다.

"아직 바빌론을 보고 있나?"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 그쪽으로 돌아갔다. 바빌론. 에사길라의 그림자. 이슈타르 문의 푸른 벽돌. 샤마시의 법정. 나부의 서고. 그곳에는 아직 일루-타비가 있었고, 신-이딘이 있었고,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를 부른 존재의 흔적도 남아 있을 것이다.

"돌아가고 싶어요."

서하가 말했다.

벨리투는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가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요."

"그건 더 마음에 들지 않겠군."

"네."

서하는 손바닥의 천을 풀었다. 샘 표식은 밤공기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점과 두 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장처럼.

"나는 계속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어요. 신들을, 안주를, 나를 이곳으로 보낸 존재를, 거짓말한 사람들을. 탓하면 적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질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점점 모르겠어요. 모두가 잘못했고, 모두가 두려워했고, 모두가 조금씩 침묵했어요. 그러면 나는 누구 편에 서야 하죠?"

벨리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서하의 손바닥을 보다가, 자기 손목의 자국을 보았다.

"사람 편에 서라."

서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벨리투가 어색한 얼굴로 덧붙였다.

"너무 단순한 말이라는 건 안다."

"아니요. 어려운 말이에요."

정말 그랬다. 사람 편에 선다는 말은 듣기에는 쉽지만, 실제로는 매 순간 흔들린다. 왕도 사람이고, 왕에게 짓눌린 이들도 사람이다. 사제도 사람이고, 사제가 숨긴 이름도 사람의 이름이다. 벨리투를 이용한 이들도 사람이고, 벨리투도 사람이다. 쿠두루가 옮긴 짐을 맡긴 자도 사람이고, 그 짐 때문에 이름을 잃은 자도 사람이다.

사람 편에 선다는 것은 한쪽을 무조건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더러운 손들을 보면서도, 누구의 손이 아직 붙잡힐 수 있는지 판단하는 일이었다.

벨리투가 말했다.

"저승 문에서 무죄를 내려놓으라고 했다지."

"네."

"그 말이 마음에 든다."

서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래서 필요한 거다. 사람은 자기가 깨끗하다고 믿는 동안에는 무엇이든 정당화한다. 신전이 그랬다. 왕궁도 그랬겠지. 너도, 나도, 저 배꾼도 조금씩 그랬다."

"그럼 우리는 더러우니까 괜찮다고 말해야 하나요?"

"아니." 벨리투가 단호하게 말했다. "더럽다는 걸 아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하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더럽다는 것을 아니까 조심해야 한다.

무죄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죄인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손에 쥐고 가는 일이었다. 그것은 무거웠다. 그러나 무거운 것을 든 사람은 함부로 뛰지 않는다. 함부로 휘두르지도 않는다.

쿠두루가 뒤에서 다가왔다.

"두 분의 깊은 대화가 끝났다면, 저는 길에 대해 아주 얕고 실용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떠나야 합니다. 달이 저 위치에 있을 때 장례길을 따라가면 먼지 언덕에 새벽 전에 닿습니다. 늦으면 문이 닫히거나, 더 나쁘게는 우리보다 먼저 누군가 열겠지요."

벨리투가 물었다.

"안주의 하수인?"

"하수인인지 깃털인지 그림자인지 저는 구분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앞서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하는 마지막으로 야영지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침묵은 아니었다. 몇몇 이름판이 바로 서 있었고, 아이 하나가 자기 이름을 아주 작게 속삭이다 어머니 품에 숨었다. 어머니는 아이의 입을 막지 않았다. 대신 아이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 작은 장면만으로도, 서하는 떠날 힘을 얻었다.

늙은 서기관이 그들에게 다가와 납작한 점토 조각 하나를 건넸다. 조각에는 단순한 선들이 새겨져 있었다. 길 안내였다. 도시의 지도처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장례길의 표식과 피해야 할 마른 수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쿠타의 북쪽 언덕으로 가려면 세 번째 바람기둥에서 왼쪽으로 꺾으시오. 길을 잃으면 땅을 보지 말고 별을 보시오. 그곳의 땅은 죽은 자의 발자국을 따라 하려 하니까."

쿠두루가 점토 조각을 받아 들었다.

"몹시 위안이 되는 길 안내군요."

노인은 서하를 보았다.

"당신이 돌아오면, 그때는 당신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서하는 잠시 멈췄다.

윤서하.

벨-에테르.

이름을 기억하는 자.

어느 이름을 말해야 할까. 예전 같으면 그 질문 앞에서 갈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이름은 하나만 남기기 위해 다른 하나를 지우는 칼이 아니었다. 이름은 관계마다 다른 빛을 받는 그릇이었다.

"돌아오면 제가 먼저 말할게요."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야영지를 떠났다.

뒤에서 불빛들이 점점 작아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작은 점들처럼 남아 있었다. 이름판을 다시 세운 사람들의 불빛. 아직 서로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불빛.

서하는 그 불빛들을 오래 기억하려 했다.

저승의 문으로 내려가기 전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키려 한 작은 빛을 잊고 싶지 않았다.

사자가 없는 문

쿠타로 가는 길은 말이 없었다.

평야는 밤이 되자 낮과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낮에는 모든 것이 먼지와 햇빛에 눌려 있었지만, 밤에는 땅 밑의 것들이 가까워지는 듯했다. 마른 수로는 검은 뱀처럼 구불거렸고, 버려진 무덤들은 몸을 웅크린 짐승처럼 보였다. 바람은 가끔 흙을 들어 올려 기둥처럼 세웠다가 흩어뜨렸다. 늙은 서기관이 말한 바람기둥이었다.

첫 번째 바람기둥을 지날 때, 쿠두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바람기둥을 지날 때, 벨리투가 창을 낮췄다. 먼 곳에서 날개 소리 같은 것이 들렸지만, 실제로 날아가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바람기둥 앞에서 서하는 걸음을 멈췄다.

바람 속에 재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삼나무의 향도, 우물의 물 냄새도 아니었다. 오래전에 꺼진 향과 마른 흙, 그리고 이름이 지워진 점토판에서 나는 냄새였다.

쿠두루가 지도 조각을 들여다보았다.

"왼쪽입니다."

왼쪽에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 여정에서 길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른 풀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먼지 언덕은 멀리서 보면 낮은 둔덕에 불과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그 둘레가 이상하게 넓었다. 마치 땅 위에 솟은 것이 아니라, 땅 아래 거대한 무언가가 등을 드러낸 것 같았다.

언덕 앞에는 문이 있었다.

정확히는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빈 공간이 있었다.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었지만, 그 위에는 사자 부조가 없었다. 바빌론의 문마다 따라붙던 사자의 위엄도, 이슈타르의 별도, 왕의 이름도 없었다. 기둥은 일부러 비워 둔 것처럼 매끈했다.

사자가 없는 문.

그 빈 문 안쪽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훔바바의 입속에서 보았던 계단과 닮아 있었다. 다만 이곳의 어둠은 숲의 어둠과 달랐다. 숲의 어둠은 살아 있는 잎과 뿌리의 숨으로 가득했지만, 이 어둠은 숨을 아끼는 법을 배운 것처럼 고요했다.

계단 첫 칸 앞에 작은 점토판이 놓여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는데, 그 위의 글자가 저절로 떠올랐다.

첫째 문은 들어오는 자를 막지 않는다.

다만 들어온 자가 무엇을 들고 왔는지 기억한다.

벨리투가 창을 들었다.

"문지기는 보이지 않는군."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보이는 것을 세는 자는 위의 문지기다."

쿠두루가 아주 작게 말했다.

"저는 이제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도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성장입니다."

목소리는 웃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이어졌다.

"아래의 문지기는 내려놓는 것을 센다. 이름을 말하지 마라. 이름은 아직 너희 것이 아니다."

서하의 손바닥 표식이 뜨겁게 뛰었다. 품속의 조각들이 동시에 반응했다. 엔키두의 벽돌 조각은 따뜻했고, 우안나의 갈대 조각은 차가웠으며, 나부의 붓 조각은 손끝을 간질였다.

목소리가 물었다.

"첫째 문에서 무엇을 내려놓겠느냐."

쿠두루가 서하와 벨리투를 번갈아 보았다.

"혹시 물주머니 같은 건 안 되겠지요?"

"안 될 거다." 벨리투가 말했다.

"그렇겠지요. 물어본 겁니다. 희망은 공짜니까요."

그러나 그의 농담은 금세 사라졌다. 쿠두루는 물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놓았다. 벨리투는 창대를 붙들고 있었지만, 창을 내려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신-이딘의 글자가 말했듯, 첫째 문이 요구하는 것은 장식도 무기도 아니었다.

무죄.

서하는 그 단어를 마음속에서 굴려 보았다. 무죄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일일까. 점토판처럼 손에 쥐고 계단 앞에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로 선언한다고 충분할까. 아니면 문은 말보다 깊은 곳을 들여다볼까.

어둠 속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자신을 깨끗하다고 믿는 자는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 아래에서는 먼지가 모든 발에 묻는다."

서하는 야영지의 이름판들을 떠올렸다. 숲의 일곱 두려움, 훔바바의 얼굴, 벨리투의 어린 시절, 쿠두루의 검은 운하, 자신이 채운 결락. 그리고 바빌론에 남은 사람들. 일루-타비. 신-이딘. 아직 숨겨진 진실들.

그녀는 누군가를 탓할 수 있었다.

탓해야 할 이들은 실제로 있었다. 안주는 거짓을 쓰고 있었고, 신들은 봉인을 만들었으며, 사제와 왕궁은 침묵을 쌓았다. 그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순간 자신은 아무 책임도 없다고 믿어 버린다면, 그녀 역시 또 다른 봉인을 만들게 될 것이다.

서하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바닥의 천을 완전히 풀었다. 샘 표식의 빛이 어둠 속에 작게 번졌다.

"나는 내가 깨끗한 독자였다는 믿음을 내려놓겠습니다."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하는 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저 읽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빈칸을 채웠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었고, 내가 찾은 문장이 누구를 묶을지 묻지 않았어요. 그래도 지금부터 다르게 읽겠습니다.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묶인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계단 아래에서 먼지가 살짝 일어났다.

벨리투가 서하 옆에 섰다. 그녀는 창을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창대에 감긴 붉은 실을 풀어 첫 계단 위에 놓았다.

"나는 명령받았다는 말 뒤에 숨은 나를 내려놓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내 손이 한 일을 모두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 내 손이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겠다."

붉은 실은 먼지 위에서 잠시 빛나다가 사라졌다.

쿠두루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도 해야겠지요."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동전 하나를 꺼냈다. 낡고 닳아 무늬도 거의 보이지 않는 동전이었다.

"동생이 물에 빠진 뒤 처음 받은 뱃삯입니다. 저는 이걸 행운의 동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은 핑계의 동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제가 한 선택들은 전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게 해 준 물건이지요."

그는 동전을 계단 위에 올려놓았다.

"살아남는 것과 모른 척하는 것이 늘 같은 말은 아니었다는 걸 인정합니다. 아주 불편하지만요."

동전도 먼지 속으로 가라앉았다.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사자가 없는 문 안쪽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다. 돌이 밀리는 소리도, 나무가 열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누군가 아주 오래 참았던 숨을 내쉬는 소리였다.

첫 계단 아래로 희미한 빛이 켜졌다.

빛은 푸르지도, 초록도, 붉지도 않았다. 먼지의 색이었다. 죽은 자들이 밟고 지나간 길의 색. 그러나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목소리가 말했다.

"첫째 문은 너희를 기억했다."

쿠두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은 뜻입니까?"

"아래에서 기억된다는 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다만 잊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말과 함께 계단 아래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올라왔다. 바람 속에는 수많은 이름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직은 들을 자격이 없다는 듯, 이름들은 먼지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하는 첫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문턱이 다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 문턱은 처음 바빌론에 떨어졌을 때와 달랐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밀려 들어왔다. 지금은 두려움을 알고, 책임의 일부를 알고, 그래도 내려가기로 선택했다.

그 차이는 작아 보였지만 전부였다.

벨리투가 옆에서 말했다.

"준비됐나?"

서하는 하늘을 한 번 보았다. 검은 문장의 마지막 획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왕은 이름을 잃—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막을 수 있었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그리고 세 사람은 사자가 없는 문 아래, 첫째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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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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