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나무 향이 나는 길
우루크의 벽을 떠난 뒤, 길은 오래도록 평평했다.
처음에는 숲으로 간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사방은 누런 흙과 마른 풀, 얕은 물길과 갈라진 벌판뿐이었다. 바람은 먼지를 끌고 다녔고, 낮의 햇빛은 사람의 눈꺼풀마저 구워 버릴 듯했다. 서하는 품속에 넣은 작은 벽돌 조각을 손끝으로 만지며 걸었다. 엔키두의 이름에서 떨어진 조각이라고 했다. 도시가 되찾은 이름의 파편.
그 조각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치 아직 누군가의 목소리를 품고 있는 것처럼.
쿠두루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우루크의 성벽은 이미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벽 위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보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배를 모는 사람입니다."
그가 말했다.
"강과 운하와 몰래 빠져나가는 배수로라면 눈 감고도 갑니다. 그런데 산의 숲이라니요. 나무가 너무 많으면 숨을 곳이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숨은 것들이 너무 많다는 뜻입니다."
벨리투는 창대를 어깨에 걸친 채 앞서 걸었다.
"겁이 나면 돌아가."
"그런 말은 꼭 돌아갈 길이 있을 때 해 주셔야지요."
쿠두루가 투덜거렸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서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문장은 낮에도 밤처럼 선명했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그 아래 두 번째 줄은 이제 더욱 깊어져 있었다.
왕은 이름을.
끝말은 아직 비어 있었다. 하지만 비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빈칸은 언제나 누군가의 손을 기다렸다. 서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한때 빈칸 앞에 앉아 있었다. 현대의 연구실, 희미한 형광등 아래, 깨진 점토판의 결락을 보며 무심코 문장을 채웠다. 그 문장이 문이 될 줄도 모르고.
그때 손바닥의 샘 표식이 따끔거렸다.
가운데의 점에서 뻗은 작은 선이 서쪽을 가리키듯 미세하게 빛났다. 우안나가 준 그을린 갈대 조각도 품 안에서 축축해졌다. 벽돌 조각, 갈대 조각, 손바닥의 표식. 서로 다른 세 시대의 물건들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기울 무렵, 바람이 바뀌었다.
먼지 냄새 사이로 서늘한 향이 섞였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그러나 몇 걸음 더 나아가자 그 향은 분명해졌다. 날카롭고 푸르며, 오래된 신전의 기름 향보다 깊은 냄새. 나무껍질과 수지, 높은 그늘과 차가운 바위의 냄새.
삼나무였다.
지평선에 검은 선이 생겼다. 선은 천천히 높아졌고, 곧 벽처럼 솟았다. 숲이었다. 하지만 평야 끝에서 갑자기 그런 숲이 나타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무들은 너무 높았다. 줄기는 사람 몇 명이 팔을 벌려도 감싸지 못할 만큼 굵었고, 가지는 하늘의 검은 문장을 찢어 버리려는 듯 위로 뻗어 있었다.
숲 앞에는 돌기둥 두 개가 서 있었다.
기둥에는 오래된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다. 대부분은 비와 모래에 닳아 읽기 어려웠지만, 몇몇 쐐기는 아직 살아 있었다.
들어오는 자는 자신의 발로 들어오나, 나가는 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나간다.
공포를 버리고 들어오지 말라.
공포가 없는 자는 숲의 먹이가 된다.
쿠두루가 그 마지막 문장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보통은 공포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벨리투가 돌기둥의 글자를 쓸어 보았다.
"여긴 아닌 모양이군."
서하는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나무들 사이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둠이 있었다. 해가 아직 완전히 지지 않았는데도, 숲속은 이미 밤처럼 깊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후우.
그것은 바람 같기도 하고, 거대한 짐승이 잠결에 내쉬는 숨 같기도 했다.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품속의 벽돌 조각을 꽉 쥐었다.
"훔바바의 숨…"
그 이름을 말하자 숲의 가장자리에서 잎들이 한꺼번에 떨렸다. 마치 수천 개의 귀가 그 말을 들은 것처럼.
벨리투가 서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뒤에 서."
서하는 잠시 그 손을 보았다. 명령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벨리투의 눈에는 지시보다 걱정이 먼저 있었다. 서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옆에 설게요."
벨리투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창을 고쳐 쥐고 서하의 옆에 섰다.
셋은 함께 숲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바깥의 바람이 사라졌다. 두 번째 발걸음에서 우루크의 먼지 냄새가 끊겼다. 세 번째 발걸음에서 하늘의 검은 문장마저 가지들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숲은 그들을 삼켰다.

길을 먹는 숲
삼나무 숲의 침묵은 소리가 없는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있었다. 나뭇진이 천천히 흐르는 끈적한 소리, 뿌리가 흙속에서 몸을 바꾸는 낮은 마찰음, 보이지 않는 새가 날개를 접는 소리,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서로 겹쳐져, 결국 하나의 침묵처럼 느껴졌다.
쿠두루는 처음 몇 걸음 동안 농담을 했다.
"나무가 참 크군요. 누가 이런 걸 배로 만들 생각을 했다면 그 사람은 아주 욕심이 많았거나 아주 미쳤을 겁니다. 아니면 왕이었겠지요. 셋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 뒤로 쿠두루도 말을 줄였다.
길은 보였다가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곧게 이어져 있던 흙길이 나무 그림자 하나를 지나면 끊겼고, 뒤돌아보면 자신들이 지나온 흔적이 없었다. 발자국은 축축한 흙 위에 남지 않았고, 꺾인 가지는 다시 원래 자리로 붙어 있었다.
숲은 길을 감추는 것이 아니었다.
길을 먹고 있었다.
서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숨이 가빠졌다. 길이 사라지면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은 곧 다른 기억을 불러왔다. 런던의 지하 연구실. 새벽 두 시 십칠 분. 닫힌 문. 유리 상자 안의 점토판. 자신이 쓴 문장.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과 낯선 손, 낯선 이름.
윤서하.
벨-에테르.
어느 쪽이 진짜인가.
그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앞쪽 나무 사이에 빛이 생겼다.
서하는 걸음을 멈췄다. 나무들 사이로 현대의 연구실이 보였다. 말이 안 되는 장면이었다. 삼나무 줄기 사이에 흰 벽과 금속 책상, 컴퓨터 화면과 현미경이 끼어 있었다. 화면에는 그녀의 연구 노트가 떠 있었다. 하지만 파일 이름은 낯설었다.
작성자: 알 수 없음.
서하는 목이 말랐다.
화면 앞에는 교수의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는 그녀의 노트를 열어 한 줄씩 지웠다. 윤서하라는 이름도 지웠다. 그녀가 밤새 비교한 쐐기문자 표도 지웠다. 마지막으로 결락 구절 옆에 적힌 문장을 지웠다.
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그림자가 중얼거렸다.
"넌 발견한 게 아니야. 발견되었을 뿐이지."
서하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연구실 바닥에서 물이 차올랐다. 압수의 오래된 물처럼 차갑고 검었다. 물 위에는 바빌론의 점토판들이 떠 있었고, 그 사이에 작은 손 하나가 떠올랐다. 벨-에테르의 손이었다. 어린 서기관의 손. 손목에는 그녀의 것과 같은 샘 표식이 있었다.
그 손이 서하를 가리켰다.
"내 이름을 입고 얼마나 더 걸을 거야?"
서하는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숲은 그녀의 공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공포. 자신이 선택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공포. 누군가가 써 둔 문장 위를, 자신이 자기 의지로 걷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공포.
그때 손바닥의 표식이 뜨겁게 뛰었다.
품속의 벽돌 조각도 함께 달아올랐다. 우루크의 마당에서 사람들이 함께 불렀던 이름이 귓속에 되살아났다.
엔키두.
엔키두.
엔키두.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엔키두는 들에서 태어난 존재였고, 도시에서 이름을 얻었으며, 그 이름 때문에 죽음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의 이야기에만 갇힌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해마다 다시 불렀다. 이름은 덫이 될 수 있지만, 붙잡는 손이 될 수도 있었다.
서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윤서하."
연구실의 불빛이 흔들렸다.
"벨-에테르."
검은 물이 멈췄다.
"둘 중 하나를 지우지 않을 거야. 누가 나를 불렀는지 아직 몰라도, 지금 걷는 발은 내 거야."
그 말이 끝나자 연구실이 갈라졌다. 흰 벽은 삼나무 껍질로 변했고, 컴퓨터 화면은 나뭇진 속으로 녹아내렸다. 벨-에테르의 작은 손은 물 아래로 사라지기 전, 서하의 손바닥을 한 번 가볍게 밀었다.
마치 계속 가라는 듯.
서하는 눈을 떴다.
자신은 여전히 숲속에 서 있었다. 그러나 벨리투와 쿠두루가 보이지 않았다.
"벨리투!"
대답은 없었다.
"쿠두루!"
이번에는 멀리서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하는 그쪽으로 달렸다. 나무들이 길을 막으려 했지만, 손바닥의 표식이 푸르게 빛날 때마다 가지들이 조금씩 물러났다.
작은 공터에서 쿠두루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운하가 있었다. 숲속에 있을 리 없는 검은 운하. 물 위에는 뒤집힌 배가 떠 있었고, 그 옆에서 어린 소년 하나가 손을 뻗고 있었다. 쿠두루와 닮은 얼굴이었다.
"형."
소년이 말했다.
"이번에도 장대를 놓을 거야?"
쿠두루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그는 손을 뻗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서하는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았다.
"쿠두루."
그가 떨리는 입술로 웃으려 했다.
"좋지 않은 때에 오셨군요. 제 용감한 모습은 보통 해가 잘 드는 곳에서만 나옵니다."
"저 아이가 누구예요?"
쿠두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운하의 물이 조금씩 올라왔다. 소년의 손이 멀어졌다.
한참 뒤, 쿠두루가 말했다.
"동생이었습니다. 물길을 훔쳐 달아나던 밤이었지요. 저는 배를 살리려고 장대를 잡았고, 그 아이는 물에 빠졌습니다. 장대를 놓으면 둘 다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해 왔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실은 무서웠습니다. 물이 너무 깊어서. 제가 죽을까 봐."
숲이 그 고백을 들었다. 운하의 물이 검게 부풀었다. 공포를 먹는 숲은 거짓말보다 진실을 더 좋아하는 듯했다. 나무뿌리들이 물가로 기어 나와 소년의 발목을 감싸려 했다.
서하는 쿠두루의 어깨를 잡았다.
"그 아이를 지금 구할 수는 없어요."
쿠두루가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은 잔인했다. 그러나 우루크의 점토판이 말했던 것처럼, 죽음을 지우는 문장은 없었다.
서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숲이 그 아이의 목소리로 당신을 삼키게 둘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무서웠다는 사실이 그 아이를 덜 사랑했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쿠두루의 눈이 젖었다. 그는 물속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그 말은 아주 작았다.
"나는 겁쟁이였다. 하지만 너를 잊은 적은 없다."
운하가 흔들렸다. 소년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더 이상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놓치지 마."
운하는 사라졌다. 쿠두루는 축축한 흙 위에 엎드려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서하는 그가 다시 농담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벨리투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숲의 더 깊은 곳에서, 창날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창이 되기 전의 벨리투
벨리투는 붉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문은 삼나무 숲 안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서하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이슈타르의 문양이 새겨진 신전 문. 사자와 별, 꽃잎처럼 벌어진 팔각의 표식. 문 앞에는 향 연기가 흐르고 있었고, 바닥에는 붉은 천이 깔려 있었다.
벨리투는 그 천 위에서 창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가 겨눈 상대는 적병이 아니었다. 어린 여자아이였다. 열두 살쯤 되었을까. 머리카락은 짧게 잘려 있었고, 손목에는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울면 혼난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운 얼굴이었다.
서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곧 알았다.
벨리투였다.
어린 벨리투 뒤에는 여사제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고, 향유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얼굴은 가면처럼 매끈했다. 가장 앞의 여사제가 아이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는 이제 여신의 눈이다."
다른 여사제가 아이의 어깨를 눌렀다.
"너는 여신의 손이다."
세 번째 목소리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무엇으로 쓰이는지가 중요하다."
어린 벨리투의 손에 작은 칼이 쥐어졌다. 칼날에는 신전의 불빛이 붉게 비쳤다. 아이 앞에는 묶인 남자가 끌려왔다. 그는 반역자라고 불렸고, 신전을 모욕한 자라고 불렸으며, 여신의 이름을 더럽힌 자라고 불렸다. 하지만 남자는 아이를 보고 안도한 듯 웃었다.
"네가 와 줬구나."
어린 벨리투의 입술이 떨렸다.
서하는 환상이 보여 주는 것을 이해했다. 이 남자는 적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이에게는 아니었다. 아마도 신전 밖에서 그녀에게 빵을 준 사람, 이름을 물어 준 사람, 도구가 아닌 아이로 보아 준 사람.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여사제가 아이의 귀에 속삭였다.
"웃어라. 그가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이 여신의 얼굴이어야 한다."
아이는 웃었다.
남자는 그 웃음을 믿고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순간 아이의 손이 움직였다.
서하는 눈을 감고 싶었지만 감을 수 없었다. 칼은 명령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남자는 쓰러졌고, 여사제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벨리투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웃음을 거두라는 명령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터의 벨리투가 창을 휘둘렀다.
"그만해."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그만하라고."
하지만 환상은 멈추지 않았다. 여사제들의 얼굴이 하나씩 서하의 얼굴로 바뀌었다. 어린 벨리투에게 칼을 쥐여 주던 손이 서하의 손으로 변했다. 향 연기 속에서 서하의 목소리와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벨리투, 나를 지켜."
"벨리투, 나를 위해 싸워."
"벨리투, 네 창이 필요해."
벨리투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이제 환상 속의 여사제가 아니라 현실의 서하를 보고 있었다. 아니, 현실의 서하와 환상의 서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도 똑같아."
벨리투가 말했다.
"네가 다르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너도 나를 필요로 해. 내 창, 내 피, 내 거짓말을 꿰뚫는 눈. 너는 내 이름을 부르지만, 결국 원하는 건 내가 네 옆에서 부서지지 않는 거야."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벨리투를 의지했다. 벨리투가 없었다면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신전의 추격을 피할 때도, 법정에서 도망칠 때도, 하늘의 문장이 사람들의 입을 막을 때도, 벨리투의 창은 늘 앞에 있었다.
그러나 의지하는 것과 이용하는 것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서하는 그 경계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숲이 바로 그 틈을 물고 늘어졌다. 삼나무 가지들이 내려와 벨리투의 팔과 창대를 감쌌다. 환상의 여사제들이 동시에 말했다.
"도구는 질문하지 않는다."
"도구는 떠나지 않는다."
"도구는 주인이 바뀔 뿐이다."
벨리투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창을 들어 자기 앞의 어린아이를 찌르려 했다. 과거를 죽이면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서하가 뛰어들었다.
"안 돼요!"
창끝이 서하의 목 앞에서 멈췄다. 벨리투의 손이 떨렸다. 창날은 살갗을 베지 않았지만, 차가운 기운이 목을 훑었다.
"비켜."
벨리투가 말했다.
"저 아이가 살아 있으면 나는 계속 저기 묶여 있어."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를 죽이면, 신전이 한 일을 당신이 끝내 주는 거예요."
벨리투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럼 어떻게 해? 안아 주기라도 하라고? 내가 저 아이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알아? 명령을 기다리던 손, 웃으라면 웃던 입, 사람을 죽이고도 칭찬받고 싶어 하던 마음이 떠올라. 나는 저 아이가 싫어."
"싫어해도 돼요."
서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용서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없었던 일로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품속에서 엔키두의 벽돌 조각을 꺼냈다. 작은 조각은 붉은 신전의 환상 속에서도 따뜻하게 빛났다.
"우루크 사람들은 엔키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이름을 지킬 수 있었어요. 당신도…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지우지 않아도 돼요. 그 일이 당신을 만들었지만, 그 일만이 당신은 아니에요."
벨리투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서하는 창날 앞에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나는 당신에게 명령하지 않을게요."
숲이 웅성거렸다. 나뭇잎들이 한꺼번에 속삭였다.
"지켜 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어요. 함께 가자고 말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떠나겠다고 하면 붙잡지 않을게요. 당신 이름은 내 것이 아니니까."
벨리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창끝이 내려갔다.
어린 벨리투가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다. 환상 속의 아이는 칼을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사제들은 분노한 듯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숲은 더 이상 그들의 명령을 먹지 않았다.
벨리투는 천천히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아이를 안지 않았다. 억지로 다정한 사람이 되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오래 바라보았다.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거짓말 같겠지."
벨리투가 낮게 말했다.
"그래. 너는 손을 움직였다. 너는 웃었다. 너는 살아남으려고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그들이 네 이름을 가져간 건 사실이다."
어린아이가 손가락 사이로 그녀를 보았다.
"이제 돌려받자."
벨리투는 자신의 손목을 감고 있던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을 잡아당겼다. 실은 살 속 깊이 박혀 있는 것처럼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서하는 도우려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이것은 대신 끊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벨리투는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실을 끊었다.
붉은 문이 무너졌다. 여사제들의 얼굴은 향 연기처럼 흩어졌고, 어린 벨리투는 삼나무 잎 하나로 변해 바람에 날렸다. 벨리투는 그 잎을 손바닥에 받아 쥐었다.
한참 뒤, 그녀가 서하를 보았다.
"나는 떠나지 않는다."
서하는 대답하려 했지만, 벨리투가 먼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것이어서 남는 건 아니야."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나도 아직은 믿는 법을 잘 모른다."
"저도요."
그 말에 벨리투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오래 닫혀 있던 문틈이 조금 열린 것에 가까웠다.
"그럼 서로 서툴게 하지."
그 순간 숲의 길이 열렸다.
나무들이 좌우로 물러나며 깊은 안쪽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길을 드러냈다. 그 길 끝에서 거대한 숨소리가 들렸다.
후우.
이번에는 분명했다.
그것은 숲 전체의 숨이었다.
그리고 죽은 수호자의 숨이었다.
훔바바의 얼굴 아래
길의 끝에는 나무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무가 있었던 자리만 남아 있었다. 거대한 공터 한가운데에 잘려 나간 삼나무 그루터기가 솟아 있었다. 그 둘레는 작은 집만 했고, 잘린 단면에는 수백 겹의 나이테가 소용돌이처럼 번져 있었다. 그러나 그루터기는 죽은 나무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이테 사이로 초록빛 안개가 천천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얼굴이 있었다.
절벽인지, 나무껍질인지, 굳은 흙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벽면에 훔바바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우루크의 성벽에서 본 부조와 닮았지만 훨씬 살아 있었다. 눈은 동굴처럼 깊었고, 입은 바람의 문처럼 벌어져 있었다. 수염처럼 보이는 것은 뿌리였고, 이빨처럼 보이는 것은 하얗게 굳은 수지였다.
쿠두루가 숨을 삼켰다.
"이건… 죽은 얼굴입니까, 살아 있는 얼굴입니까?"
얼굴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공터 전체가 흔들렸다. 서하는 무릎이 꺾일 뻔했다. 벨리투가 창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앞으로 뛰쳐나가지 않았다.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공격보다 듣는 일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얼굴이 말했다.
말이라기보다 바람이었다. 그러나 뜻은 분명히 들렸다.
"승자의 벽돌을 들고 온 자여."
서하는 품속의 벽돌 조각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루크의 이름을 품고, 왜 베인 숲에 들어왔느냐."
그 말에는 분노가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증오는 아니었다. 오래 참아 온 물음,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물음의 무게가 있었다.
서하는 벽돌 조각을 두 손에 올려 들었다.
"듣기 위해 왔어요."
얼굴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인간은 늘 그렇게 말한다. 듣기 위해 온다고. 그런 뒤 나무를 센다. 길이를 잰다. 신전의 들보를 생각한다. 왕의 이름을 새길 문을 생각한다."
쿠두루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들보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살아 나갈 길 정도는 생각했습니다만…"
벨리투가 팔꿈치로 그를 쳤다.
서하는 고개를 숙였다.
"우루크의 노래는 당신을 괴물이라고 불렀어요.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무찌른 숲의 공포라고요. 하지만 그 노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숲이 기억하는 이름을 듣고 싶어요."
훔바바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공터 가장자리에서 일곱 개의 그림자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안개처럼 보였지만, 곧 각각 다른 모양을 갖추었다. 입이 없는 얼굴. 눈이 너무 많은 짐승. 자기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아이. 날개가 꺾인 새. 물속에서 부푸는 손. 붉은 실에 묶인 창. 그리고 이름 없는 왕관.
일곱 두려움이었다.
그것들이 일어나자 공터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서하는 방금 지나온 환상들이 그중 몇 개의 숨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숲은 그들의 약한 곳을 찌른 것이 아니라, 훔바바에게 남겨진 갑옷의 가장 바깥을 보여 준 것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훔바바의 숨이 말했다.
"나는 숲의 경계였다. 신들이 나에게 얼굴을 주었고, 목소리를 주었고, 두려움을 입혔다. 인간이 들어오면 돌아가게 하라고 했다. 왕이 오면 무릎 꿇리지 말고 막으라고 했다. 신들의 나무를 지키라고 했다."
그의 목소리에 거대한 나무들이 함께 울렸다.
"두려움은 내 이빨이 아니었다. 문이었다. 들어오지 말라는 문. 그러나 인간은 문을 보면 열고 싶어 한다. 왕은 문을 보면 자기 이름을 새기고 싶어 한다."
서하는 길가메시의 이름을 떠올렸다. 우루크의 벽, 장송가, 엔키두의 눈. 그 이야기는 아름다웠고 슬펐다. 하지만 그 이야기 안에서 훔바바는 쓰러져야 할 존재였다. 숲의 목소리는 거의 남지 않았다.
"당신은 왜 아직 여기 있죠?"
서하가 물었다.
"죽었지만, 숨은 묶였다."
훔바바의 얼굴 아래 그루터기에서 초록빛 안개가 더 짙어졌다.
"엔키두가 내 목숨을 끊었고, 길가메시가 나무를 베었다. 그러나 신들은 내 두려움을 거두어 가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필요로 했다. 죽은 수호자의 숨은 산 수호자보다 편리하니까. 반항하지 않고, 묻지 않고, 경계를 지키지."
벨리투의 손이 창대를 꽉 쥐었다.
그 말은 그녀의 과거와 닮아 있었다. 도구는 질문하지 않는다. 도구는 떠나지 않는다. 죽은 수호자의 숨, 살아 있는 신전의 창. 서로 다른 말이었지만 뿌리는 같았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을 지키고 있었나요?"
숲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서하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나무마다 부딪혀 돌아오는 것처럼 느꼈다.
훔바바의 눈이 깊어졌다.
"신들이 감춘 봉인."
그루터기의 나이테가 갈라졌다. 초록빛 안개 아래에서 검은 돌판이 드러났다. 돌판은 흙도 돌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물처럼 어두웠고, 마른 점토처럼 갈라져 있었으며, 별빛처럼 차가웠다. 그 위에는 여러 신의 인장이 겹겹이 눌려 있었다. 마르둑의 삽 모양 표식, 나부의 쐐기, 이슈타르의 별, 에아의 물결, 엔릴의 바람. 그러나 인장들은 질서 있게 놓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누르고 있었다.
마치 아무도 완전히 책임지고 싶지 않은 비밀을 함께 짓밟아 묻어 둔 것처럼.
돌판 가장자리에는 일곱 개의 홈이 있었다. 그중 세 개가 희미하게 빛났다. 서하의 공포, 쿠두루의 공포, 벨리투의 공포가 숲을 지나며 건드린 자리였다. 나머지 네 개는 아직 어두웠다.
돌판 중앙에는 오래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괴물이라 불린 것들은 경계 안에 머물라.
이름을 잃은 파편들은 신들의 명령에 따르라.
창조 이전의 바다는 다시 말하지 말라.
서하는 몸이 차가워졌다.
"티아마트…"
그 이름이 입술을 떠나자 숲 전체가 낮게 떨었다.
훔바바의 숨이 깊어졌다.
"너는 그 이름을 알고 있구나, 이름을 기억하는 자."
창조 이전의 파편들
공터의 안개가 바뀌었다.
서하는 더 이상 삼나무 숲 한가운데 서 있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는 바다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의 바다도, 강 하구의 물도 아니었다. 하늘과 땅이 나뉘기 전의 물. 위도 아래도 없고, 낮도 밤도 없으며, 이름이 아직 사물에 달라붙지 않은 세계.
그 물속에서 형체들이 움직였다.
거대한 뱀은 파괴하려는 괴물이 아니라 아직 길이 정해지지 않은 강처럼 몸을 틀었다. 용은 불길보다 먼저 태어난 번개의 기억처럼 번쩍였다. 전갈의 꼬리를 가진 존재는 죽음을 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막과 밤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서 있었다. 사자의 몸, 새의 발톱, 물고기의 비늘, 인간의 눈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끔찍했다.
그러나 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너무 오래되고 너무 낯설어서 인간의 눈에 공포로 보일 뿐이었다. 아직 분류되지 않은 것,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것, 아직 신전의 벽에 얌전히 새겨지지 않은 것. 세계가 세계가 되기 전의 가능성들이었다.
훔바바의 목소리가 바다 위로 울렸다.
"티아마트의 자식들이라 불린 자들. 신들의 노래는 그들을 군대라고 불렀다. 창조를 막으려 한 악의 무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노래는 늘 승자의 입에서 먼저 태어난다."
서하는 무슈후슈를 떠올렸다. 바빌론의 푸른 벽돌 위에 새겨진 용, 마르둑의 짐승, 신의 권위를 장식하는 존재. 그러나 그 또한 처음부터 왕궁의 문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길들였고, 신의 편에 세웠고, 안전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모두가 선했다는 뜻은 아니다."
훔바바가 말했다.
"바다는 삼킬 수 있고, 폭풍은 집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밤은 길 잃은 아이를 데려갈 수 있다. 하지만 위험한 것과 악한 것은 같지 않다. 신들은 위험한 것들을 악이라 불렀고, 악이라 부른 뒤에는 묶기 쉬웠다."
벨리투가 낮게 말했다.
"이슈타르 신전도 그랬지. 위험한 아이를 신의 도구라 불렀다. 그러면 아이를 쓰는 일이 거룩해졌으니까."
서하는 그녀를 보았다. 벨리투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방금 숲이 보여 준 과거는 아직 상처처럼 피가 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상처를 숨기기 위해 다시 돌이 되지는 않았다.
훔바바의 눈이 벨리투에게 향했다.
"너는 도구가 아니었다."
벨리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창을 잡은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서하는 검은 돌판 앞으로 다가갔다. 인장들이 겹쳐진 자리를 보자 가슴이 답답했다. 이것은 단순한 봉인이 아니었다. 이름을 다시 쓰는 장치였다. 괴물이라 불린 존재들을 계속 괴물로 남게 하는 문장. 신들의 명령 없이는 자기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못.
"안주는 이 봉인을 이용하려는 거죠?"
서하가 물었다.
훔바바의 숨이 차갑게 변했다.
"날개 달린 도둑은 운명의 서판을 훔쳤던 기억을 아직 품고 있다. 그는 문장이 세계를 구부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늘에 거짓을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짓이 뿌리내릴 오래된 상처가 필요하다."
검은 돌판 위로 안주의 흔적이 떠올랐다. 젖은 깃털처럼 번지는 검은 쐐기. 그것은 신들의 인장 사이를 파고들어, 중앙의 문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괴물이라 불린 것들은 경계 안에 머물라.
그 문장 아래에 새 문장이 생기려 하고 있었다.
이름을 빼앗긴 자들은 거짓 이름에 응답하라.
서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럼 안주가 하늘에 쓰는 문장은 사람들만 겨냥한 게 아니에요."
"사람의 이름이 흔들리면, 신들의 명령도 흔들린다. 왕의 이름이 떨어지면 도시의 벽이 흔들린다. 그리고 봉인에 묶인 오래된 파편들은 새 명령을 찾게 된다."
훔바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 누가 가장 먼저 명령하겠느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안주.
운명의 서판을 훔쳤던 존재. 하늘에 거짓 문장을 새기는 자. 이름의 빈칸을 가장 먼저 차지하려는 날개.
서하는 손바닥을 폈다. 샘 표식의 점과 선이 검은 돌판의 일곱 홈 중 하나와 같은 모양으로 떨렸다. 우안나의 갈대 조각이 품속에서 차가워졌고, 엔키두의 벽돌 조각은 따뜻하게 빛났다.
도시의 기억.
깊은 물의 붓.
숲의 숨.
서하는 이제 자신이 단순히 한 문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쓰게 될 결락 구절은 세계의 편을 정하는 말이 될 것이다. 신들의 질서를 그대로 되풀이할 수도 있고, 안주의 거짓 명령에 빈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직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괴물을 괴물로만 부르지 않는 길.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경계에 묶인 이름을 듣는 길.
"봉인을 깨야 하나요?"
쿠두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깨면 저 모든 것들이 풀려나는 겁니까? 그러면 저는 방금 한 질문을 취소하고 싶습니다."
훔바바의 숨이 길게 흘렀다.
"어리석은 자는 봉인을 깨고 자유라 부른다. 겁먹은 자는 봉인을 덮고 질서라 부른다. 둘 다 같은 실수를 한다. 봉인은 읽혀야 한다."
서하는 그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봉인은 깨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
"읽으면요?"
"무엇이 묶였는지, 왜 묶였는지, 누가 그 묶임으로 이익을 얻었는지 알게 된다. 그런 뒤에야 풀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할 수 있다."
벨리투가 서하를 보았다.
"네가 해야 할 일이군."
서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예전 같으면 그 말을 운명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는 자. 결락을 채우는 자. 누군가가 정해 둔 역할. 하지만 숲은 방금 가르쳐 주었다. 역할은 쉽게 도구가 된다.
서하는 천천히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혼자 하지는 않을 거예요."
벨리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하는 벨리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붙잡으라는 뜻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였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샘 표식, 점과 작은 선.
"당신이 원하면 같이 읽어요. 원하지 않으면, 여기서 다른 길을 찾아도 돼요."
벨리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자기 손바닥을 서하의 손 옆에 나란히 폈다. 붉은 실이 끊어진 자리에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같이 읽는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네 손을 잃으려 하면 내가 부러뜨릴 거다."
서하는 작게 웃었다.
"그 정도는 믿을 수 있겠네요."
쿠두루도 마지못해 손을 들었다.
"저도 같이 읽겠습니다. 읽는 동안 도망갈 길을 찾는 역할이라면 특히 자신 있습니다."
그때 검은 돌판의 세 홈이 더 밝아졌다. 공포를 숨기지 않고 말한 자들의 자리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네 개의 홈은 여전히 어두웠다.
훔바바가 말했다.
"일곱 두려움이 모두 깨어나야 봉인의 본문이 열린다. 숲은 셋을 보여 주었다. 나머지 넷은 숲 아래에 없다."
서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 있죠?"
훔바바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 안쪽은 어둠이 아니라 계단이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검은 계단. 계단 옆에는 문들이 보였다. 하나, 둘, 셋… 일곱 개의 문. 각 문에는 옷과 장신구와 이름을 하나씩 벗겨 내는 듯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벨리투가 낮게 숨을 들이켰다.
"저승…"
훔바바의 숨이 대답했다.
"에레쉬키갈의 땅. 이름이 마지막으로 시험받는 곳. 죽은 자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곳. 그곳의 일곱 문 아래에 나머지 두려움이 묶여 있다."
쿠두루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저는 숲도 싫었는데 이제 저승입니까. 다음에는 하늘 꼭대기나 바다 밑바닥도 들르겠군요."
서하는 검은 계단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두려움을 밀어내지 않았다. 돌기둥의 경고문이 떠올랐다.
공포를 버리고 들어오지 말라.
공포가 없는 자는 숲의 먹이가 된다.
어쩌면 저승도 같을 것이다. 두려움 없이 내려가는 자는 용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 모르는 자일 뿐이다.
숨을 받은 자들
훔바바의 얼굴 아래에서 초록빛 안개가 모여들었다.
그것은 바람처럼 가볍지 않았다. 물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서하는 그것이 숲의 숨이라는 것을 알았다. 베인 나무들의 마지막 숨, 돌아가라고 외치던 수호자의 숨, 괴물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 오래된 경계의 숨.
훔바바가 말했다.
"날개의 거짓은 젖은 먹처럼 번진다. 내 숨은 그것을 말릴 수 있다. 잠시뿐이지만, 번지는 것을 늦출 수 있다."
초록빛 안개가 서하의 손바닥으로 내려왔다. 샘 표식의 점과 선이 뜨겁게 빛났다.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안개는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던 빈 공간을 채우는 것 같았다. 점 옆에 두 번째 가느다란 선이 생겼다. 아직 글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표식은 씨앗보다 조금 더 자란 새싹처럼 보였다.
우안나의 갈대 조각 끝에도 초록빛이 맺혔다. 그을린 갈대는 잠시 삼나무 가지처럼 향을 냈다. 엔키두의 벽돌 조각은 푸른빛과 붉은빛 사이에서 흔들렸다.
도시와 숲이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같은 손 안에 놓였다.
훔바바의 시선이 벨리투에게 향했다.
"창이었던 자여."
벨리투가 똑바로 그 얼굴을 보았다.
"나는 아직 창이다."
"그러나 손잡이가 누구의 것인지 묻기 시작했다."
벨리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끊어진 붉은 실의 자국을 창대에 감았다. 그것은 더 이상 그녀의 손목을 묶지 않았다. 오히려 창이 그녀에게 복종하는 표시처럼 보였다.
훔바바는 쿠두루를 보았다.
"물을 두려워하는 길잡이여."
쿠두루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서 손을 뻗는 과거를 두려워합니다. 차이가 큽니다."
"차이를 아는 자는 삼켜지지 않는다."
쿠두루는 입을 다물었다. 농담으로 흘려보내기에는 그 말이 너무 정확했다.
그때 숲 위쪽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셋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빽빽한 삼나무 가지 사이로 하늘의 검은 문장이 보였다. 안주의 먹이 다시 번지고 있었다. 두 번째 줄의 빈칸에 새로운 획이 내려앉았다.
왕은 이름을 잃—
서하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 순간 손바닥의 삼나무 숨이 저절로 일어났다. 초록빛 바람이 가지 사이로 치솟아 하늘을 스쳤다. 완성되려던 마지막 획이 바싹 말라 갈라졌다. 검은 먹은 잠시 더 번지지 못하고 하늘에 굳어 버렸다.
문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하는 알았다. 막은 것이 아니라 늦춘 것이다.
훔바바의 숨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내 숨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죽은 숲의 숨이기 때문이다."
"그럼 살아 있는 숨은 어디 있죠?"
서하가 물었다.
훔바바의 눈이 저승의 계단을 향했다.
"죽은 자들의 땅에서 찾아야 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죽은 자들이 모두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빼앗긴 이름들은 아래에서 바람이 된다."
벨리투가 말했다.
"저승의 일곱 문을 지나라는 뜻이군."
"문마다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 옷, 장식, 무기, 자랑, 거짓, 두려움,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가 네 이름이라 믿는 것까지."
쿠두루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저는 마지막 조건이 특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서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을 내려놓으라니. 그녀가 지금까지 붙들어 온 모든 것이 이름이었다. 윤서하. 벨-에테르. 이름을 기억하는 자. 그것들을 내려놓고도 자신이 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루크의 장송가가 말했듯, 이름은 죽음을 지우지 않는다.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붙드는 일이지만, 때로는 붙잡은 손의 힘을 조절하는 일이기도 했다. 너무 세게 잡으면 이름은 다시 도구가 된다.
서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려놓는 것과 빼앗기는 건 다르겠죠."
훔바바의 얼굴에 처음으로 아주 희미한 변화가 생겼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낯설고, 슬픔이라고 부르기에는 깊은 표정이었다.
"그 차이를 아는 자만이 문을 지난다."
공터의 검은 돌판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신들의 인장은 흙 아래로 가라앉았고, 일곱 홈의 빛도 희미해졌다. 그러나 서하는 이제 그 봉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단순히 숲 아래에 묻힌 돌판이 아니었다. 세계의 이야기들 아래에 숨어 있었다. 영웅담 아래, 신화 아래, 왕의 이름 아래, 괴물이라는 한 단어 아래.
훔바바의 숨이 점점 옅어졌다.
"이름을 기억하는 자여."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괴물을 불쌍히 여기지 마라. 불쌍히 여기는 것도 때로는 다른 이름의 사슬이다. 다만 물어라. 누구의 명령을 받았는지. 무엇을 지키고 있었는지. 무엇이라 불리기 전에는 무엇이었는지."
서하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괴물은 언제나 파괴자가 아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명령으로 경계를 지키는 존재다. 때로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악이라 불린 존재다. 때로는 승리한 이야기의 바깥에 남겨진 숨이다.
훔바바의 얼굴은 다시 절벽과 나무껍질과 흙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눈은 동굴이 되었고, 입은 뿌리 사이의 어둠이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이 공터에 남아 서하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숲은 너희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대신 너희가 숲을 기억하라."
첫째 문이 열리다
숲을 나오는 길은 들어갈 때보다 짧았다.
그러나 그것은 숲이 친절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숲은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두려웠다. 다만 이제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연구실의 흰빛이 다시 깜빡였지만, 서하는 멈추지 않았다. 검은 운하의 물소리가 쿠두루의 발목을 적셨지만, 그는 장대를 쥔 듯 허공의 손을 꽉 잡고 걸었다. 붉은 신전의 향이 바람에 섞였을 때, 벨리투는 창대에 감은 붉은 실을 한 번 내려다보고 그대로 지나쳤다.
숲은 그들의 공포를 돌려주었다.
조금 덜 날카로운 형태로.
가장자리의 돌기둥이 보일 때쯤, 하늘은 이미 밤이었다. 삼나무 가지들 사이로 별들이 보였고, 그 위에 검은 문장이 굳어 있었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왕은 이름을 잃—
마지막 획은 말라붙은 상처처럼 갈라져 있었다. 훔바바의 숨결이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하지만 갈라진 획 주변에는 안주의 검은 먹이 다시 축축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숲 밖으로 나오자, 평야의 뜨거운 바람이 돌아왔다. 그러나 서하는 이제 그 바람 속에서도 삼나무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손바닥 안쪽의 표식에서 아주 희미하게 풍기는 냄새였다.
벨리투가 옆에 섰다.
"서하."
그녀가 벨-에테르가 아니라 윤서하의 이름을 불렀다. 이 시대의 입에서 듣는 현대의 이름은 여전히 이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낯설기보다 따뜻했다.
"네가 나를 도구로 쓰려 할 때, 내가 먼저 알 것이다."
서하는 그녀를 보았다.
"그때 말해 줘요."
"말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좋아요."
벨리투는 잠시 서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말하겠다. 네가 누군가에게 네 손을 맡기려 할 때, 그것이 신이든 물이든 죽은 이름이든, 내가 막겠다."
서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샘 표식은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명령처럼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묻지 않은 질문처럼 작고 끈질겼다.
"부탁할게요."
그 말에 벨리투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 숲에서 겨우 배운 차이가 그들 사이에 놓였다. 약속은 거창하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더 단단했다.
쿠두루가 헛기침을 했다.
"두 분의 감동적인 신뢰 의식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저승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서 찾습니까? 보통은 죽어야 간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절차를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땅이 울렸다.
셋은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숲의 가장자리, 두 돌기둥 사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땅 위에 검은 물처럼 고이더니, 천천히 아래로 꺼졌다. 그 자리에서 계단이 나타났다.
훔바바의 입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계단이었다.
계단 아래에는 첫 번째 문이 서 있었다. 문은 높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 그러나 그 앞에 서는 순간, 서하는 바빌론의 어떤 성문보다도 무거운 느낌을 받았다.
문 위에는 쐐기문자가 하나 떠올랐다.
겉옷.
벨리투가 낮게 말했다.
"일곱 문은 하나씩 빼앗는다."
서하는 우루크의 노래꾼이 준 벽돌 조각을 만졌다. 우안나의 갈대 조각도 품 안에 있었다. 훔바바의 숨은 손바닥에 깃들어 있었다. 이름과 기억과 숨.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첫 번째 문은 아직 열려 있지 않았다.
서하가 문 앞으로 다가가자, 문틈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죽은 냄새가 아니었다. 오래 닫혀 있던 방의 냄새, 잊힌 이름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버틴 냄새였다.
문 안쪽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이름을 가지고 들어오는 자는, 이름 없이 나갈 각오를 하라."
쿠두루가 뒤에서 작게 말했다.
"저는 각오를 잠시 빌릴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묻고 싶군요."
벨리투는 창을 들었다.
서하는 손바닥을 폈다. 샘 표식의 작은 선들이 어둠 속에서 푸르고 초록으로 빛났다. 그녀는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 두려움이 길을 막는 벽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때로 두려움은 문 위에 새겨진 글자를 읽게 해 주는 불빛이었다.
서하는 첫 번째 문을 향해 말했다.
"빼앗기러 온 게 아니야."
차가운 바람이 멎었다.
"내려놓을 것을 고르러 왔어."
그 순간 첫 번째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아래에서 깊은 어둠이 올라왔다. 저승의 일곱 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 어딘가에서, 아직 이름을 빼앗기지 않은 마지막 숨들이 낮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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