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의 물길
새벽은 보르시파의 지붕 위에 오르지 못하고 낮게 엎드렸다.
하늘에는 아직 검은 문장이 걸려 있었다. 밤새 별빛을 삼킨 그 글자들은 아침이 되어도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해가 떠오르자 더 뚜렷해졌다. 밝은 하늘 한가운데 박힌 어둠은 상처처럼 보였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나부-무킨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말이 자기 혀를 빌려 살을 얻는다는 것을.
서하는 망토의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품속에는 벨-우슈르의 압인, 나부의 붓 조각, 검은 목록의 흙이 든 작은 주머니가 있었다. 신-이딘에게 받은 푸른 유약 가루도 조금 남아 있었다. 모두 합쳐도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은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그 조각들이 지금 그녀와 세상 사이에 남은 유일한 다리였다.
벨리투는 말 대신 눈짓으로 출발을 알렸다.
그들 앞에는 길잡이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쿠두루라고 소개했다. 나이는 서른쯤 되어 보였지만, 늪에서 오래 산 사람 특유의 주름 때문에 더 늙어 보이기도 했다. 한쪽 귀에는 물고기뼈로 만든 작은 장식이 걸려 있었고, 발목에는 마른 갈대끈이 여러 겹 묶여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뱃사람이라 했지만, 벨리투는 그가 뱃사람이기 전에 밀수꾼이고, 밀수꾼이기 전에 도둑이라고 낮게 말했다.
쿠두루는 그 말을 듣고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도둑은 길을 압니다. 정직한 사람들은 문 앞에서 오래 기다리지만, 도둑은 벽에 난 금을 보지요."
"그 금으로 우리 목을 팔 생각은 하지 마."
벨리투가 말했다.
쿠두루는 손바닥을 펴 보였다.
"제 목값이 더 비쌉니다. 왕궁 병사에게는 당신들을 팔 수 있겠지만, 늪의 물에게는 못 팔지요. 물은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갑니다."
그 농담 같지 않은 말에 서하는 손목을 감쌌다. 팔찌의 샘 기호는 새벽의 찬 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쪽으로 흐르는 부름은 밤보다 더 분명했다. 마치 손목 안쪽에 아주 작은 물고기가 들어와 한 방향으로만 헤엄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보르시파의 남쪽 창고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공식 운하는 병사와 사제로 가득했으므로 쿠두루는 버려진 수로를 택했다. 수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좁은 물길이었다. 갈대가 양쪽에서 엉켜 들어와 작은 배의 옆구리를 긁었고, 썩은 물풀 냄새가 아침 공기를 눌렀다.
배는 갈대와 역청으로 바른 낮은 배였다. 서하가 올라타자 배는 한 번 위험하게 기울었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현대에서 타 본 배라고는 유람선과 박물관 앞 호수의 오리배뿐이었다. 이 작은 갈대배는 물 위에 떠 있다기보다 물에게 잠시 허락을 받은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쿠두루가 기다란 장대로 바닥을 밀었다.
배가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빌로니아의 땅이 끝없이 같은 색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누런 흙, 낮은 둑, 갈대, 물소리.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서하는 그 안에 수많은 차이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빛은 장소마다 달랐다. 어떤 곳은 진흙을 머금어 탁했고, 어떤 곳은 갑자기 푸르게 깊어졌다. 갈대도 모두 같지 않았다. 바람에 부드럽게 눕는 갈대가 있는가 하면, 칼처럼 곧게 서서 배를 밀어내는 갈대도 있었다.
멀리서 검은 새들이 날았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주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의 문장은 어디서나 보였다. 수로가 굽을 때마다 검은 쐐기들이 물 위에 비쳤다.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문장은 찢어지고 이어졌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서하는 눈을 돌렸다.
"보지 마."
벨리투가 낮게 말했다.
"물에 비친 글자는 하늘의 글자보다 더 위험할 수 있어. 하늘은 멀지만, 물은 네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쿠두루가 피식 웃었다.
"바빌론 사람도 가끔 쓸 만한 말을 하는군요."
벨리투는 창끝을 조금 들어 올렸다.
쿠두루는 즉시 웃음을 거두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수로는 더 넓은 운하와 만났다. 그곳에는 왕궁의 세금 표식이 찍힌 배들이 오갔다. 쿠두루는 본류로 들어가지 않고 갈대숲 아래로 배를 밀어 넣었다. 물이 얕아지며 배 밑바닥이 진흙에 끌렸다. 서하는 숨을 죽였다. 가까운 곳에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쪽으로 가는 배는 모두 조사하라. 나부의 물건이 사라졌다."
"신전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돌아가라 하지 않았나?"
"명령이 바뀌었다. 마르둑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자가 늘고 있다. 왕궁은 남쪽 제의장들도 의심하고 있다."
서하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벨리투는 소리 없이 손을 들어 서하의 어깨를 눌렀다. 엎드리라는 뜻이었다. 서하는 갈대 사이에 몸을 낮췄다. 썩은 물 냄새가 얼굴에 닿았다. 작은 벌레들이 뺨과 손등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물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윤서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했다.
서하는 몸이 굳었다. 그것은 바빌로니아 사람의 발음이 아니었다. 현대의 한국어였다. 학교에서 출석을 부를 때 듣던 소리, 엄마가 현관에서 부르던 소리, 친구가 카페 안쪽 자리에서 손을 흔들며 부르던 소리.
윤서하.
물은 이번에도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하지 마라. 듣기만 해라. 지난밤 검은 목록의 방에서 들은 목소리가 다시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기 이름이 물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속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벨-에테르.
이번에는 고대의 이름이었다.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그 이름은 그녀 안에 사는 다른 기억을 건드렸다. 어린 서기관의 손, 왕궁 서고의 향, 점토판 위에 엎드린 등, 늙은 스승의 숨소리.
벨-에테르, 네가 쓴 것을 기억하느냐?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물은 한 번 낮게 웃었다.
말하지 않는 인간도 결국 안에서 대답한다.
그 순간 팔찌의 샘 기호가 차갑게 빛났다. 서하의 손목에서 퍼진 푸른빛이 물 위에 얇은 막처럼 펼쳐졌다. 물속 목소리는 칼로 잘린 실처럼 끊겼다.
조금 뒤 병사들의 배가 멀어졌다.
쿠두루는 조용히 장대를 밀었다. 배가 갈대숲을 빠져나왔을 때,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물에게 이름을 들었습니까?"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쿠두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습니다. 늪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름부터 묻습니다. 이름을 주면 길도 주지만, 나중에는 발도 가져가지요."
"넌 어떻게 살아남았지?"
벨리투가 물었다.
쿠두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매번 거짓 이름을 줬습니다."
서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 두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윤서하와 벨-에테르. 어느 쪽이 진짜이고 어느 쪽이 거짓인지, 이제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물은 두 이름 모두를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 깊이 떨게 했다.

갈대가 기억하는 날개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땅은 점점 물에 가까워졌다.
높은 성벽과 벽돌길은 사라지고, 사람의 발자국보다 새와 짐승의 흔적이 먼저 보였다. 갈대숲은 작은 도시처럼 복잡했다. 물길은 골목처럼 갈라졌고, 진흙 둑은 담장처럼 배를 막았다. 어디선가 물새가 울면 다른 쪽 갈대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쿠두루는 길을 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의 기분을 읽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그는 흐름의 색, 갈대 끝의 방향, 물 위에 뜬 거품의 모양을 보고 장대를 밀었다. 서하는 처음으로 그가 왜 필요한지 알았다. 지도는 이런 곳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길은 땅에 있지 않고 움직이는 물 속에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배는 검게 그을린 갈대밭 앞에 멈췄다.
불이 난 흔적처럼 보였지만 이상했다. 주변에는 재가 거의 없었다. 갈대들은 타서 쓰러진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온 거대한 그림자에 눌려 검게 변한 것 같았다. 바람이 불자 그을린 줄기들이 서로 부딪히며 마른 뼈 같은 소리를 냈다.
서하의 품속에서 나부의 붓 조각이 젖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라 갈대 조각을 꺼냈다. 그을린 붓끝에 맺힌 물방울은 투명하지 않았다. 아주 옅은 검은빛을 띠었다. 벨리투가 그 물방울을 보자마자 창을 고쳐 쥐었다.
"안주가 지나갔어."
"얼마나 가까이요?"
"가까웠다면 우리가 이미 그림자가 됐겠지."
쿠두루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낮았다.
서하는 검은 목록의 흙이 든 주머니를 꺼냈다. 나부-무킨은 숨겨진 글자를 드러내는 데 한 번만 쓸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써야 할까. 그녀는 망설였다. 안주가 남긴 자국은 분명 중요했다. 하지만 에리두에 도착하기 전부터 유일한 도구를 써 버리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때 팔찌의 샘 기호가 가볍게 뛰었다.
쓰지 마라.
말이 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뜻은 분명했다. 서하는 주머니를 다시 품에 넣고 대신 신-이딘의 푸른 유약 가루를 손끝에 조금 묻혔다. 이전에 그 가루는 숨겨진 선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완전한 열쇠는 아니어도 흔적을 비추는 빛은 될 수 있었다.
그녀가 가루를 그을린 갈대 위에 흩뿌리자, 검은 줄기들 사이에서 푸른 선들이 살아났다.
선들은 날개의 결처럼 퍼졌다. 거대한 깃털의 끝이 갈대밭을 스치고 지나간 자국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다른 무늬가 있었다. 발톱 자국이 아니었다. 붓끝이었다. 안주는 이곳에 잠시 내려와 하늘에 쓴 문장의 다음 줄을 연습한 듯했다.
푸른 가루가 밝힌 쐐기들이 갈대 사이에서 떠올랐다.
왕은.
그 뒤는 지워져 있었다.
벨리투가 이를 악물었다.
"다음에는 왕을 쓰려는군."
"왕은 무릎 꿇는다, 왕은 이름을 잃는다, 왕은 피를 바친다." 쿠두루가 중얼거렸다. "가능한 말은 많습니다. 나쁜 말은 늘 물고기보다 많지요."
서하는 갈대밭을 바라보았다. 안주가 하늘에 쓴 첫 문장은 마르둑을 묶었다. 두 번째 문장이 왕을 향한다면, 도시는 더 크게 흔들릴 것이다. 신의 침묵 다음에는 인간 권력의 붕괴가 올 것이다. 신전과 왕궁이 동시에 무너지면 그 아래 깔리는 것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때 갈대밭 안쪽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 울음 같기도 했고, 다친 새의 소리 같기도 했다. 쿠두루의 얼굴이 굳었다.
"듣지 마십시오."
"사람일 수도 있어."
벨리투가 말했다.
"늪은 사람 소리를 잘 흉내 냅니다."
울음소리는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분명히 아이의 목소리였다.
아버지.
쿠두루의 손이 장대 위에서 미끄러졌다.
서하는 그를 보았다. 쿠두루의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버지, 나 여기 있어.
벨리투가 쿠두루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네 이름이 뭐든, 지금은 듣지 마."
쿠두루는 웃으려 했지만 입술이 떨렸다.
"거짓 이름을 주면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죽은 자는 진짜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는 한 걸음 갈대밭 쪽으로 움직였다.
서하는 급히 팔찌를 움켜쥐었다. 푸른 샘 기호가 더 밝게 빛났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길을 보여 줘.
팔찌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 위에 작은 원이 생겼다. 원은 갈대밭 안쪽이 아니라 배 아래로 퍼졌다. 서하는 그것이 경고임을 깨달았다.
"아래예요!"
그녀가 외치는 순간, 배 밑에서 검은 손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물풀과 진흙이 엉킨 덩어리였다. 그것은 쿠두루의 발목을 감아 끌어당겼다. 쿠두루가 비명을 질렀다. 벨리투가 즉시 창으로 물풀을 찔렀다. 창끝이 진흙 속에 박히자 물이 검게 끓었다.
서하는 품에서 붓 조각을 꺼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붓 조각은 손안에서 뜨거워졌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물 위에 대고 한 획을 그었다.
글자는 아니었다.
선 하나.
짧고 서툰 선이었다. 하지만 그 선이 물 위에 닿는 순간, 물풀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누군가 명령을 내리려다 문장 중간에서 막힌 것처럼.
벨리투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창을 비틀어 물풀을 끊어냈고, 쿠두루를 배 안으로 끌어올렸다. 쿠두루는 진흙과 물을 토하며 기침했다. 그의 발목에는 손가락 자국 같은 검은 멍이 남아 있었다.
갈대밭의 아이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먼 하늘에서 날개가 한 번 울었다.
그 소리는 가까운 듯 멀었다. 안주가 그들을 보았는지, 아니면 자기 문장의 그림자가 건드려진 것을 느꼈는지 알 수 없었다. 서하는 손안의 붓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끝이 조금 더 검게 타 있었다. 힘은 거의 없다고 했지만, 거의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쿠두루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방금 그 선은 무엇입니까?"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벨리투가 대신 말했다.
"살아남으라는 글자겠지."
쿠두루는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낮게 웃었다. 이번 웃음에는 전처럼 가벼운 비웃음이 없었다.
"그런 글자가 있다면 모든 점토판에 먼저 써야 할 겁니다."
서하는 물 위에 남았다 사라지는 선을 보았다. 살아남으라는 글자. 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글자.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썼는지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모르는 손도 때로 운명을 건드린다.
그리고 그 대가는 언제나 나중에 찾아온다.
에리두의 흰 폐허
사흘째 되는 날, 물의 냄새가 바뀌었다.
이전까지 늪의 물은 썩은 풀과 진흙, 물고기와 햇볕에 데워진 짐승 가죽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부터 공기 속에는 차가운 돌 냄새가 섞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에는 산도 바위도 없었다. 끝없는 평지와 물, 갈대뿐이었다. 그런데도 서하는 깊은 지하에서 막 꺼낸 돌의 냄새를 맡았다.
쿠두루가 장대를 멈췄다.
"에리두입니다."
처음에 서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다 안개가 걷히듯 갈대 너머에서 낮은 언덕이 드러났다.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모양이 너무 반듯했고, 건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무너져 있었다. 오래된 벽돌들이 층층이 쌓인 채 반쯤 흙에 묻혀 있었다. 어떤 벽은 물속으로 내려가 사라졌고, 어떤 계단은 하늘이 아니라 늪을 향해 열려 있었다.
바빌론의 푸른 벽돌과 보르시파의 높은 지구라트에 비하면 에리두는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서하는 그 폐허를 보는 순간 몸을 낮추고 싶어졌다. 높아서가 아니었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되어 인간의 눈이 아니라 흙과 물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 장소였다.
에리두는 무너진 도시가 아니라,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기억처럼 보였다.
가장 안쪽에는 신전이 있었다.
에아의 집, 압수 위에 세워졌다는 성역. 벽돌은 흰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 흰색은 새것의 밝음이 아니었다. 수천 번 물에 씻기고 햇볕에 말라 뼈처럼 남은 색이었다. 신전 아래의 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도 물결이 거의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연못이 아니라 닫힌 눈 같았다.
서하의 팔찌가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팔찌의 샘 기호는 차갑게 빛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에리두 앞에서는 달랐다. 손목 안쪽에서 천천히 열이 올라왔다. 아픈 열은 아니었다. 오래전 잊은 글자를 손바닥에 다시 써 주는 듯한 열이었다.
쿠두루는 배를 신전 앞 낮은 돌계단에 댔다.
"저는 여기까지만 갑니다."
벨리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돈은 에리두 안쪽까지라고 했을 텐데."
"돈은 살아 있는 사람 사이의 약속이지요. 저 안쪽에는 물과 신과 오래된 빚이 있습니다. 그 셋은 장부를 다르게 씁니다."
그는 발목의 검은 멍을 보여 주었다.
"저는 이미 한 번 끌려갔습니다. 두 번째에는 못 돌아옵니다."
벨리투는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더 강요하지 않았다. 쿠두루는 도둑이었고 겁쟁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늪에서 겁은 지혜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었다.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서하가 물었다.
쿠두루는 잠시 생각했다.
"하루는 기다리겠습니다. 둘째 날에는 당신들 물건 중 쓸 만한 것을 챙겨 떠나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당신들 이름을 잊겠습니다."
"정직하네요."
"늪에서는 거짓말도 습기를 먹으면 무거워집니다."
서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와 벨리투는 계단을 올랐다. 물에 잠긴 계단은 미끄러웠다.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발밑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올라왔다. 마치 신전이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문지방을 넘는 순간, 안쪽 어둠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자는 드물다."
서하는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사제의 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옷자락은 물고기비늘처럼 겹쳐져 있었다. 머리에는 높은 관 대신 갈대와 조개껍데기로 엮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얼굴은 늙었으나 눈은 이상할 만큼 맑았다. 그 눈동자는 사람의 눈이라기보다 깊은 우물에 비친 낮하늘 같았다.
"나는 우안나."
그가 말했다.
"에아의 물가에 남은 사제이며, 물이 잊지 못하게 하는 일을 맡은 자다."
벨리투가 창을 낮추지 않은 채 물었다.
"우리가 올 줄 알았나?"
우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면 지혜가 아니지. 기다렸을 뿐이다. 물은 올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흘러온 것을 받아들인다."
그의 시선이 서하의 손목에 닿았다.
"샘의 표식을 지닌 자. 두 이름 사이에서 숨 쉬는 자. 너는 깊은 물을 보러 왔다."
서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에아가 저를 불렀나요?"
우안나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서하를 신전 안쪽으로 이끌었다. 안은 바깥보다 훨씬 서늘했다. 벽에는 물고기, 염소, 흐르는 물, 갈대붓을 든 손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부조는 닳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이상하게도 물결 문양만은 선명했다.
신전 중앙에는 낮은 제단이 있었다.
제단 뒤에는 둥근 물웅덩이가 있었다. 크기는 우물보다 조금 클 뿐이었지만, 서하는 그 앞에 서자 끝없는 바다를 마주한 것처럼 숨이 막혔다. 물은 검푸르고 투명했다. 바닥이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표면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하늘의 검은 문장도, 서하의 얼굴도, 신전의 벽도.
이 물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대신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우안나가 말했다.
"압수의 물이다."
서하의 심장이 한 번 깊게 내려앉았다.
압수.
그 이름을 처음 입 밖에 냈던 순간부터, 물소리는 그녀를 따라왔다. 에사길라의 지하에서, 별의 방의 봉인에서, 검은 목록의 방에서, 남쪽 늪의 속삭임에서. 이제 그 이름의 근원 앞에 서 있었다.
"손을 넣어라."
우안나가 말했다.
벨리투가 즉시 막아섰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먼저 말해."
"그것을 먼저 알면 손을 넣지 못한다."
우안나는 담담했다.
"지혜는 안전한 뒤에 얻는 것이 아니다. 안전을 잃는 순간 무엇을 붙잡을지 아는 것이 지혜다."
서하는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두려웠다. 너무 두려웠다. 그녀는 아직도 돌아가고 싶었다. 전등 스위치가 있고, 휴대폰 화면이 있고, 물소리가 그저 수도꼭지 고장일 뿐인 세계로. 하지만 그 세계에서 읽었던 신화는 지금 이곳에서 사람의 목숨을 흔들고 있었다. 책장을 덮는다고 여기의 하늘 문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서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압수의 물에 닿았다.
물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온도도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차가우면 몸이 반응하고, 뜨거우면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은 몸보다 오래된 곳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신전이 사라졌다.
압수의 잠
처음에는 어둠만 있었다.
그 어둠은 밤이 아니었다. 밤에는 별이 있고, 바람이 있고, 어딘가에 잠든 사람의 숨이 있다. 이 어둠에는 아직 위아래도, 앞뒤도, 이름도 없었다. 서하는 자신이 서 있는지 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발밑도 머리 위도 모두 물이었다.
그러다 소리가 생겼다.
낮고 깊은 숨소리.
압수였다.
그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물이었고, 어둠이었고, 시작이었으며, 시작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시작되기를 원하지 않는 피로였다. 그의 숨이 움직일 때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강들이 몸을 뒤척였고, 아직 이름 없는 샘들이 눈을 떴다 감았다.
그 옆에는 또 다른 물이 있었다.
더 넓고, 더 거칠고, 더 많은 생명을 품은 물. 서하는 그것이 티아마트임을 알았다. 누가 알려 준 것은 아니었다. 이름이 아직 발음되기 전의 존재도, 가까이 가면 스스로를 알게 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어린 신들의 소리가 들렸다.
웃음, 노래, 다툼, 발소리, 번쩍이는 생각들. 새로운 것들은 늘 시끄럽다. 태어나는 것은 조용히 태어나지 않는다. 어린 신들은 물 위를 뛰어다니며 빛을 만들고, 바람을 부르고, 서로의 이름을 시험했다. 그들의 기쁨은 압수에게 소음이었다. 그들의 생명은 오래된 물에게 상처였다.
압수의 숨이 무거워졌다.
그는 속삭였다.
잠들게 하자.
아니, 없애자.
어린 소리들을 모두 거두자.
서하는 몸이 굳었다. 신화책에서 읽은 문장이 아니라, 어떤 늙은 피로가 세계를 향해 내뱉은 실제 의지로 들렸다. 창조 이전의 존재가 창조를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신이 고개를 들었다.
에아.
그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다.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곧 물결처럼 흩어졌고, 수염 난 남자처럼 보이다가도 물고기의 눈을 가진 빛처럼 변했다. 그의 눈은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압수가 숨긴 계획도, 티아마트가 아직 결심하지 못한 분노도, 어린 신들이 모르는 두려움도.
지혜의 신은 먼저 울지 않았다.
먼저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는 들었다.
그리고 계산했다.
그 모습이 서하를 더 두렵게 했다. 칼을 든 신보다 생각하는 신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 알았다. 칼은 상처를 남기지만, 생각은 상처가 생기기 전에 길을 바꾼다.
에아는 주문을 엮었다.
그 주문은 노래가 아니었다. 물의 흐름을 바꾸는 손짓에 가까웠다. 그는 압수의 숨 사이에 말을 숨겼고, 말 사이에 잠을 풀었다. 깊은 물은 처음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곧 압수의 숨이 느려졌다. 느려지고, 더 느려지고, 마침내 거의 멈추었다.
잠이었다.
하지만 서하는 알았다.
그 잠은 돌아올 잠이 아니었다.
에아는 압수를 잠재웠다. 그리고 잠든 물 위에 자기 집을 세웠다. 깊은 물의 몸은 신전의 바닥이 되었고, 죽음은 성역의 기초가 되었다. 어린 신들은 살아남았다. 질서는 무너지는 대신 새 길을 얻었다. 그러나 그 길 아래에는 한 존재의 숨 막힌 침묵이 깔려 있었다.
서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것이 오래된 죄였다.
살기 위해 저지른 죄. 질서를 세우기 위해 묻어 둔 죄. 찬가에서는 지혜라 부르고, 신전에서는 승리라 부르고, 후대의 서기관들은 필요한 일이라 적었을 죄.
에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환상 속의 서하를 정확히 붙잡았다.
"너는 이것을 죄라 부르느냐?"
서하는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물속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에아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린 신들이 죽도록 두는 것은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어둠 속에서 어린 신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압수의 숨은 바닥이 되었다. 그 위에 신전이 세워지고, 그 위에 제의가 쌓이고, 그 위에 도시가 생겼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누군가의 집이 세워지는 것은 신들의 세계만의 일이 아니었다. 인간의 도시도 그랬다. 왕의 궁전도, 전쟁의 승리도, 이름이 남은 모든 질서도.
에아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서하의 가슴 안쪽을 들여다보듯 말했다.
"지식을 원하는 자는 늘 질문을 가져온다. 그러나 지식은 대답이 아니다. 지식은 대답을 얻은 뒤에도 살아가야 하는 형벌이다. 너는 무엇을 내놓고 알고자 하느냐?"
서하는 떨었다.
"제가 왜 여기 왔는지 알고 싶어요."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물방울처럼 작았다.
"왜 저인지, 누가 저를 불렀는지, 이 균열이 왜 시작됐는지."
에아의 얼굴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너는 답을 원한다. 그러나 답은 그릇이 아니다. 손에 쥐고 가져갈 수 없다. 답은 빚이다. 알게 된 자는 모르는 자처럼 살 수 없고, 본 자는 보지 않은 자처럼 잠들 수 없다."
"그래도 알아야 해요."
"왜?"
서하는 압수의 잠든 어둠을 보았다. 그 위에 세워진 성역을 보았다. 하늘에 걸린 거짓 문장을 떠올렸다. 바빌론에서 이름을 잃어 가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기 방의 책상, 아직 펼쳐져 있을지도 모르는 책,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삶을 떠올렸다.
"모르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으니까요."
그 말이 나오자 압수의 물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에아의 눈에 처음으로 아주 희미한 빛이 스쳤다. 웃음일 수도 있었고, 슬픔일 수도 있었다.
"인간다운 대답이구나."
그는 손을 들었다.
어둠이 갈라졌다.
그 틈 사이로 점토가 보였다. 붉은 점토, 검은 점토, 강가의 젖은 점토. 그 위로 피가 떨어졌다. 피는 신의 것이었으나, 그 안에는 복종만 있지 않았다. 서하는 이름을 알았다.
킹구.
티아마트의 편에 섰던 자. 오래된 질서에 맞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킨 자. 운명의 서판을 목에 걸었던 자. 패배한 반역의 피.
그 피가 점토와 섞였다.
손들이 나타났다. 신들의 손인지, 사제들의 손인지, 서기관의 손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손들은 점토를 빚어 인간의 모양을 만들었다. 눈, 입, 갈비뼈, 손가락, 무릎. 인간은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가졌고, 일하기 위해 손을 가졌으며,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가졌다.
하지만 피는 점토 안에서 완전히 잠들지 않았다.
서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얼굴을 보았다. 제단 앞에 엎드린 사람, 세금을 내는 사람, 벽돌을 나르는 사람, 아이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사람, 왕의 명령을 받아 적는 사람, 왕의 명령을 찢어 버리는 사람, 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신에게 왜냐고 묻는 사람.
에아의 목소리가 물속에 울렸다.
"인간은 흙으로만 만들어지지 않았다. 반역의 피가 섞였다. 그래서 인간은 질서를 세우고도 그 질서를 의심한다. 무릎을 꿇고도 어느 날 일어선다. 명령을 받아 적고도 빈칸을 본다."
서하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보이지 않는 점토가 묻어 있는 듯했다.
결락 구절
환상이 다시 바뀌었다.
서하는 거대한 점토판 앞에 서 있었다. 점토판은 하늘만큼 컸고, 아직 마르지 않은 듯 표면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 위에는 창조의 이야기들이 새겨져 있었다. 물이 갈라지고, 신들이 태어나고, 압수가 잠들고, 티아마트가 분노하고, 마르둑이 전쟁에 나서고, 킹구의 피와 점토가 섞이는 장면들.
그것은 세계를 설명하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세계를 묶는 이야기였다.
서하는 그 점토판의 한 부분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글줄 하나가 비어 있었다. 긁혀 나간 것도 아니고, 아직 쓰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일부러 빼낸 자리였다. 주변 글자들은 그 빈칸을 모른 척하며 이어지고 있었지만, 사실 모든 문장은 그 결락을 피해 비뚤어져 있었다.
그 빈칸에서 바람이 새어 나왔다.
균열의 바람이었다.
서하가 처음 바빌론으로 떨어졌을 때 느꼈던 공기. 별의 방에서 본 작은 표식. 샤마시의 법정에서 비틀린 태양의 혀. 안주가 하늘에 글자를 쓸 수 있었던 틈. 모두 그 빈칸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저게 뭐예요?"
서하가 물었다.
에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점토판 위의 글자들이 움직였다. 빈칸 주위에 있던 문장들이 살아나 서로를 밀어냈다. 서하는 그중 몇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인간.
피.
점토.
노동.
기억.
그리고 마지막에 거의 사라진 단어 하나.
대신.
서하는 숨을 멈췄다.
인간은 누구의 대신 만들어졌는가. 신들의 일을 대신하기 위해?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잊힌 구절을 대신 기억하기 위해?
그때 빈칸 속에서 또 다른 글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쐐기문자가 아니었다. 한순간 서하는 현대의 문자, 자신이 익숙한 한글의 획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것은 물결처럼 흐트러져 다시 쐐기 모양으로 변했다.
두 세계의 문자가 한 자리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듯했다.
에아가 말했다.
"너는 과거로 온 것이 아니다."
서하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럼요?"
"과거라는 말은 시간이 강처럼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믿는 자들의 말이다. 깊은 물에서 시간은 층을 이룬다. 오래된 물은 아래에 있고, 새 물은 위에 있지만, 우물이 흔들리면 아래의 물도 위로 올라온다."
점토판의 빈칸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 안에서 서하는 자신의 첫 순간을 보았다. 박물관의 전시실, 유리 안의 점토판, 갑자기 빛난 샘 기호. 그녀가 손을 뻗던 순간. 아니, 손을 뻗기 전 이미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순간.
"누군가 너를 불렀다."
에아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잃어버린 창조의 결락 구절을 쓰게 하려고."
서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누가요?"
에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마르둑의 침묵과 달랐다. 안주의 문장이 만든 침묵은 목을 조르는 침묵이었다. 에아의 침묵은 깊은 물처럼, 들어가면 스스로 바닥을 찾아야 하는 침묵이었다.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아요?"
"네가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이름도 너를 들을 것이다."
에아가 말했다.
"아직은 네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다."
"저는 계속 모르고 움직여야 하나요?"
"모르는 채 움직이는 것과,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그 말은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짓도 아니었다. 서하는 화가 났다. 신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인간을 말판 위에 올려놓고, 규칙을 절반만 알려 준다. 그리고 선택하라 말한다. 실패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이라 부르고, 성공하면 신의 뜻이었다고 기록한다.
"그 구절을 쓰면 어떻게 되죠?"
에아의 눈이 어두워졌다.
"세계는 자신이 무엇 위에 세워졌는지 기억하게 된다."
"그게 좋은 일인가요?"
"좋고 나쁨은 늦게 태어난 말이다."
"그럼 대가가 뭐예요?"
이번에는 에아가 서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물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 안에는 윤서하의 얼굴과 벨-에테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결락을 쓰는 자는 빈칸으로 남을 수 없다. 네가 구절을 채우면, 구절도 너를 채운다. 네가 창조의 숨겨진 빚을 드러내면, 그 빚은 네 이름에도 닿는다. 너는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돌아간 뒤에도 알기 전의 너는 아닐 것이다."
서하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그건 이미 그래요."
에아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 말과 함께 점토판의 빈칸에서 물이 솟았다. 물은 글자 모양으로 흘렀지만, 서하가 읽으려는 순간마다 흩어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글자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지혜의 신은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다만 질문을 더 깊게 만들었다.
너는 무엇을 내놓고 알고자 하느냐.
너는 누구의 침묵을 깨우려 하느냐.
너는 창조의 죄를 읽은 뒤에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느냐.
마지막 질문이 서하의 가슴을 찔렀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느냐.
킹구의 피와 점토로 만들어진 존재들. 명령을 받고도 반역을 꿈꾸는 존재들. 겁먹고도 서로를 구하려 손을 뻗는 존재들. 거짓 문장을 따라 읽을 수도 있고, 그 거짓에 맞서 작은 선 하나를 그을 수도 있는 존재들.
서하는 벨리투를 떠올렸다. 신-이딘을 떠올렸다. 일루-타비, 나부-무킨, 늪에서 죽은 아이의 목소리에 흔들리던 쿠두루, 바빌론의 문 앞에서 울던 아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떠올렸다.
"모르겠어요."
서하가 말했다.
"하지만 미워하기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에아의 얼굴에 다시 그 희미한 빛이 스쳤다.
"그러면 아직 쓸 수 있다."
킹구의 피와 점토
서하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다시 에리두의 신전 안에 있었다.
손은 여전히 압수의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한순간 같기도 했고, 며칠이 지난 것 같기도 했다. 벨리투는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드물게 두려움이 드러나 있었다.
"서하."
벨리투가 낮게 불렀다.
이번에는 물이 아니라 사람이 부른 이름이었다.
서하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손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손은 젖어 있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 한가운데 아주 작은 표식이 생겨 있었다. 샘 기호와 비슷했지만, 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우물처럼.
우안나가 그 표식을 보더니 깊이 고개를 숙였다.
"깊은 물이 빈자리를 보여 주었군."
서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 창조의 이야기에서 빠진 구절이 있다는 걸."
우안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제단 앞에 놓인 젖은 점토판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점토판에는 인간의 형상이 서툴게 새겨져 있었다. 머리와 손, 무릎과 입. 그리고 가슴 한가운데 작은 선 하나가 있었다.
"에아의 사제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진실은 너무 일찍 말하면 칼이 되고, 너무 늦게 말하면 사슬이 된다."
"그래서 숨겼나요?"
서하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우안나는 그 날카로움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리고 숨긴 죄도 우리에게 있다."
신전 안에 물소리가 낮게 울렸다.
우안나는 점토판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인간은 킹구의 피와 점토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많은 신전이 가르치는 말이다. 그러나 그 뜻을 끝까지 말하는 곳은 드물다. 신들은 인간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제단을 돌보고, 운하를 파고, 벽돌을 굽고,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서하를 보았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벨리투가 조용히 물었다.
"빠진 뜻은 뭐지?"
"피는 기억한다."
우안나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킹구의 피는 패배한 반역의 기억을 품고 있다. 점토는 형태를 받아들이는 기억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둘 모두를 지닌다. 질서를 세우려는 손과 질서를 의심하는 눈. 무릎 꿇는 몸과 일어서는 심장. 신들이 인간을 만든 것은 노동을 덜기 위해서였지만, 그 안에 반역의 피를 넣은 순간 인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게 되었다."
서하는 손바닥의 빈 샘 표식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제가 결락 구절을 쓸 수 있는 건가요?"
"너는 두 겹의 기억을 지녔다. 이 땅의 기억과, 이 땅의 법 바깥에서 온 기억."
우안나는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보았다.
"신들의 이름은 이 세계 안에서 강하다. 그러나 너의 한 이름은 이 세계의 점토에 처음 새겨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너는 거짓 법에 완전히 묶이지 않는다. 하늘의 문장이 벨-에테르를 흔들 수는 있어도 윤서하를 다 삼키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다."
서하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그럼 저를 부른 자도 그걸 알고 있었겠네요."
"그렇다."
우안나는 숨기지 않았다.
"너를 부른 자는 이 세계의 법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빈칸을 보았다. 그래서 법 바깥의 이름을 끌어들였다."
"그게 에아인가요?"
우안나는 압수의 물을 바라보았다.
"에아는 물길을 연다. 그러나 물길을 따라오는 자를 모두 부른 것은 아니다."
또 대답이 아니었다.
서하는 화를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왜 아무도 똑바로 말하지 않죠? 나부-무킨도, 에아도, 당신도. 다들 제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작 필요한 말은 숨겨요."
우안나는 조용히 말했다.
"인간은 대답을 들으면 자유로워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대답은 듣는 순간 선택지를 없앤다. 네가 아직 질문할 수 있을 때, 너는 아직 인간이다."
"그럼 신들은요?"
"신들은 너무 많은 답을 가진 탓에 가끔 질문하는 법을 잊는다."
그 말에 벨리투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웃음은 아니었지만, 웃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서하는 압수의 물을 다시 보았다. 그 물은 여전히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 안에 잠든 죄를 알았다. 에아가 압수를 잠재워 죽였고, 그 죽음 위에 지혜의 집을 세웠다. 신들은 티아마트와 싸웠고, 킹구의 피로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창조의 이야기에서 가장 위험한 구절을 빼냈다.
안주는 그 빈칸을 이용하고 있었다.
나부의 붓으로 거짓 법을 쓰는 자는 완전한 운명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락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을 타고 있었다. 빈칸이 닫히지 않는 한, 그의 문장은 계속 두꺼워질 것이다.
"제가 그 구절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서하가 물었다.
우안나는 대답했다.
"다른 누군가가 쓸 것이다. 안주일 수도 있고, 안주 뒤에 있는 손일 수도 있다. 빈칸은 영원히 빈칸으로 남지 않는다. 비어 있는 자리는 늘 가장 굶주린 말이 차지한다."
"쓰면요?"
"그때는 네가 쓴 말이 너를 증언할 것이다."
서하는 눈을 감았다.
선택은 점점 또렷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누가 자신을 불렀는지도 모른다. 결락 구절의 정확한 내용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모른 척할 수 있는 시간은 끝났다.
지혜의 값
해가 질 무렵, 에리두의 신전 위로 붉은 빛이 내려앉았다.
바깥의 늪은 고요했다. 쿠두루의 배는 아직 계단 아래 묶여 있었다. 그는 떠나지 않았다. 멀리서 보이는 그의 그림자는 장대를 품에 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겁쟁이면서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 인간은 늘 그렇게 한 가지 이름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우안나는 서하와 벨리투를 신전 뒤편의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낮은 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 위에는 빵도 없고 술도 없었다. 다만 빈 그릇 일곱 개와 물 한 사발이 있을 뿐이었다.
서하는 그 상을 보자마자 이상한 허기를 느꼈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 더 깊은 곳의 허기였다. 알고 싶은 허기. 빈칸을 채우고 싶은 허기. 답을 손에 넣고 싶은 허기.
우안나는 그 허기를 알아본 듯했다.
"지혜의 문턱에 선 자는 늘 배가 고프다."
"이건 뭐죠?"
"아다파의 식탁을 준비하는 자리다."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아다파?"
"에아가 사랑한 현자. 하늘의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인간. 지혜를 얻었으나 영원한 생명은 얻지 못한 자."
우안나는 빈 그릇 하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네가 결락 구절에 가까이 가려면, 먼저 지혜의 값을 배워야 한다. 에아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네가 무엇을 먹지 않을 수 있는지, 무엇을 마시지 않을 수 있는지, 무엇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지."
서하는 빈 그릇들을 바라보았다.
"또 시험인가요?"
"시험이라 부르면 너무 작다. 식탁이라 부르면 조금 가깝다. 인간은 배고플 때 무엇을 믿는지 드러내니까."
벨리투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안주를 쫓고 있다. 하늘에 두 번째 문장이 쓰이기 전에 움직여야 해."
우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더욱 서둘러 먹어서는 안 된다. 안주는 훔친 붓으로 법의 흉내를 낸다. 그를 막으려면 진짜 말과 거짓 말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배고픈 자는 둘을 자주 혼동한다."
서하는 하늘의 문장을 떠올렸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그 문장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먹고 두꺼워졌다. 안주는 도시 전체의 허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안전해지고 싶은 허기,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허기, 확실한 명령을 듣고 싶은 허기.
지혜의 값은 어쩌면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너무 쉬운 답을 삼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때 압수의 물 쪽에서 낮은 울림이 들렸다.
신전 바닥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물웅덩이의 표면에 처음으로 무늬가 생겼다.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 제단 쪽으로 달려갔다. 벨리투도 뒤따랐다.
압수의 물 위에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아까까지 아무것도 비추지 않던 물이 이제 검은 문장을 보여 주었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그 아래로 새로운 쐐기들이 천천히 생겨나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장. 그러나 첫 단어는 분명했다.
왕은.
서하의 손바닥 빈 샘 표식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
나부의 붓 조각에서도 검은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벨리투가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없어."
우안나는 물 위의 문장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놀람보다 깊은 슬픔이 있었다.
"시간은 늘 없었다. 인간이 그것을 늦게 알아차릴 뿐이다."
서하는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아다파의 식탁이 어디 있죠?"
우안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은 물과 높은 하늘 사이.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사이. 오늘 밤, 네가 잠들면 문이 열릴 것이다."
"잠들면요?"
"압수의 물가에서 잠드는 자는 꿈을 꾸지 않는다. 초대를 받는다."
서하는 물 위의 두 번째 문장을 보았다.
왕은.
그 뒤에 무엇이 붙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말이든 도시를 무너뜨릴 힘을 가질 것이다. 그녀는 안주가 문장을 완성하기 전에 결락의 의미에 더 가까이 가야 했다. 누가 자신을 불렀는지, 무엇을 쓰게 하려는지, 그리고 그 글을 쓰기 위해 무엇을 잃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러나 에아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깊은 물 아래에서 질문만 올려 보냈다.
너는 무엇을 내놓고 알고자 하느냐.
서하는 압수의 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복종의 무릎이 아니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춘 것이었다. 손바닥의 빈 샘 표식이 물의 어둠과 마주했다.
"아직 뭘 내놓아야 하는지 몰라요."
그녀는 아주 낮게 말했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을게요."
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표면에 작은 원이 퍼졌다. 원은 하나, 둘, 셋으로 늘어나더니 빈 그릇 일곱 개가 놓인 방 쪽으로 흘러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식탁을 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바깥에서는 늪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먼 하늘 어딘가에서 안주의 날개가 다시 펄럭였다. 그 소리는 이번에는 분명히 가까웠다. 하늘의 거짓은 두 번째 문장을 찾고 있었고, 깊은 물은 서하에게 빈 식탁을 내밀고 있었다.
서하는 알았다.
다음에 얻게 될 지식은 선물이 아닐 것이다.
값을 치러야 하는 음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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