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이 남긴 이름
검은 깃털 조각은 바닥에 떨어진 뒤에도 완전히 죽지 않았다.
처음에는 까맣게 탄 점토처럼 보였다. 벨리투의 창끝에 베여 떨어진 그것은 먼지와 피가 뒤섞인 길 위에서 작게 떨었다. 누구도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 병사 하나가 창대로 밀어 보려 하자 깃털은 바싹 마른 풀처럼 바스러졌다. 하지만 부서진 조각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서로 달라붙어 아주 작은 쐐기 모양을 만들었다.
서하는 그 쐐기를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글자였다.
아직 읽히지 않는 글자.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 읽어 주기를 기다리는 글자.
보르시파로 가는 행렬은 무너졌다가 억지로 다시 세워진 담장처럼 삐걱거렸다. 쓰러진 수레가 길가로 밀려났고, 다친 사제들이 운하 물로 피를 씻었다. 양들은 흰자위를 드러낸 채 떨었고, 상인들은 잃어버린 물건보다 빈 필경함을 더 자주 훔쳐보았다. 나부의 성스러운 도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아직 사람들의 입에서 완전한 문장이 되지 못했다. 문장이 되는 순간 그것이 현실로 굳어질까 두려운 듯했다.
하지만 이미 현실은 바뀌고 있었다.
필경함을 지키던 보르시파 사제 하나가 입을 벌렸다.
"나부의…"
거기서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는 목을 움켜쥐었다. 피가 난 것도 아니고 숨이 막힌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제가 대신 외치려 했지만, 그 역시 두 번째 음절에서 혀가 굳은 사람처럼 얼굴만 일그러뜨렸다.
벨리투가 낮게 말했다.
"도구를 빼앗긴 게 아니야. 말의 길을 빼앗겼어."
서하는 품속의 벨-우슈르 압인을 움켜쥐었다. 압인은 아직 뜨거웠다. 손목의 팔찌는 반대로 얼음처럼 차가웠다.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서 그녀의 몸은 둘로 찢기는 것 같았다. 윤서하의 기억은 도망치라고 외쳤고, 벨-에테르의 기억은 무릎을 꿇고 고대의 노래를 떠올리라고 속삭였다.
고대의 노래.
그 말이 떠오르자, 서하의 머릿속에서 낡은 장면 하나가 열렸다.
점토판에 새겨진 영웅담. 왕궁 서고의 어두운 방. 갈대불빛 아래에서 늙은 스승이 어린 서기관에게 읽어 주던 이야기. 하늘을 가린 괴조, 신들의 명령을 훔친 도둑, 그 이름을 말하면 바람이 방향을 잃는 존재.
서하는 현대의 책에서도 그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신화 속 괴물의 삽화. 사자의 얼굴, 독수리의 날개, 폭풍처럼 넓은 몸. 그러나 인쇄된 그림은 안전했다. 종이 위의 괴물은 독자의 눈을 물지 못한다.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달랐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기억이었고, 기억이 아니라 상처였다.
"안주."
서하가 아주 작게 말했다.
이름은 입술에서 떨어지자마자 바람을 만들었다. 먼지가 한 번 둥글게 말려 올랐다. 주변에 있던 사람 몇 명이 동시에 몸을 움츠렸다. 늙은 점성가는 이미 그 이름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벨리투가 서하를 보았다.
"확실해?"
"사자의 얼굴과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괴조예요. 오래된 이야기에서 운명의 서판을 훔친 존재로 나와요. 신들의 명령을 자기 발톱에 넣고, 세계가 어떤 순서로 움직여야 하는지 빼앗아 간 도둑."
서하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어디서 배운 지식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박물관 도록에서 읽은 문장인지, 벨-에테르의 손가락이 점토판 위를 더듬던 기억인지, 아니면 이 도시의 공기 자체가 그녀에게 알려 주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운명의 서판을 훔친 자가 왜 나부의 붓을 훔쳐요?"
그 질문은 서하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
대답한 사람은 벨리투가 아니었다. 수레 옆에 주저앉아 있던 보르시파의 젊은 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명의 서판은 신들의 명령을 담는다. 그러나 붓은 명령을 새로 낳는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빈 필경함을 가리켰다.
"발톱에 칼을 쥔 도둑은 사람을 죽인다. 발톱에 붓을 쥔 도둑은 날을 죽이고, 강을 죽이고, 이름을 죽인다."
말이 끝나자 하늘이 낮게 울었다.
처음에는 먼 천둥처럼 들렸다. 그러나 구름은 없었다. 남서쪽 지평선 위, 보르시파 너머의 흐린 공기 속에서 검은 점이 다시 커지고 있었다. 안주는 너무 멀리 있어 보였지만, 그 날개의 그림자는 이미 행렬 위에 닿아 있었다.
이번에는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하늘 높은 곳에서 멈추었다. 거대한 새처럼, 아니 거대한 손처럼 펼쳐진 날개 사이로 햇빛이 찢겨 나갔다. 서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안주의 얼굴이 보였다.
사자의 주둥이처럼 넓은 턱. 독수리처럼 휘어진 부리. 사람의 눈동자처럼 잔인하게 빛나는 두 눈. 그리고 발톱 사이에 쥐어진 금빛 갈대붓.
나부의 붓이었다.

하늘에 새겨진 문장
안주는 하늘을 점토판처럼 사용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늘은 붙잡을 수 없고, 구름은 눌러 새길 수 없으며, 바람은 문장을 오래 품지 못한다. 서하가 아는 세계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이곳에서 글은 물건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신의 권한을 훔친 자에게는 하늘조차 젖은 점토가 될 수 있었다.
안주가 금빛 갈대붓을 들어 올렸다.
붓끝이 허공을 누르는 순간, 푸른 낮하늘에 검은 획이 생겼다. 그것은 먹물이 아니었다. 새까만 구름도 아니었다. 하늘의 피부가 찢어지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밤이 드러난 것 같았다.
첫 번째 쐐기가 찍혔다.
행렬 전체가 숨을 멈췄다.
두 번째 쐐기. 세 번째 쐐기. 안주의 발톱이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방향을 잃었다. 향로의 연기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흘렀다. 운하의 물결은 잠시 거꾸로 밀려났고, 묶여 있던 양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무릎을 꿇었다. 점성가들이 들고 있던 줄자는 제멋대로 꼬였고, 물시계의 물은 항아리 안쪽 벽을 타고 위로 기어올랐다.
서하는 그 장면을 보며 깨달았다.
운명을 빼앗은 자는 칼을 휘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말 한마디다. 제대로 된 자리에, 제대로 된 도구로, 세계가 듣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새겨진 말 한마디. 그러면 강은 강이라는 법을 잊고, 불은 타오르는 법을 잊고, 사람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법을 잊는다.
하늘의 문장이 완성되어 갔다.
마르둑은.
그 첫 부분이 보이자, 보르시파 사제들이 동시에 엎드렸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손톱으로 땅을 긁었다. 벨리투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지만, 하늘을 찌를 수는 없었다.
서하는 마지막 말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보지 않는다고 문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꺼풀 안쪽에 더 선명하게 새겨졌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마지막 쐐기가 찍히자, 세상은 한순간 멈췄다.
그 침묵은 안주가 처음 내려왔을 때의 침묵과 달랐다. 그때의 침묵은 날개 아래 눌린 침묵이었다. 지금의 침묵은 이름이 빠져나간 자리의 침묵이었다. 바빌론의 가장 큰 이름, 축제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이름, 왕과 사제와 도시가 다시 질서를 얻기 위해 불러야 할 이름이 하늘 위에서 묶여 버렸다.
먼 북소리가 들려왔다.
바빌론 쪽이었다.
처음에는 축제 북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그 박자가 무너졌다. 둥, 둥, 둥 하고 이어져야 할 소리가 중간에서 끊기고, 다시 시작했다가 엎어졌다. 행렬 뒤쪽에서 온 전령 하나가 창백한 얼굴로 달려왔다. 그는 보르시파에서 온 자가 아니라 바빌론 남문 쪽을 지키던 병사였다.
"도시에서 연기가…"
그는 숨을 헐떡였다.
"에사길라의 제단 연기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마르둑의 이름을 부르려 하자 입에서 먼지만 나왔다고 합니다. 왕궁 앞의 청동문도 닫힌 채 열리지 않습니다. 문지기들이 밀어도, 빗장을 풀어도, 문이 자기 이름을 잊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웅성거림은 곧 공포가 되었다. 공포는 언제나 가장 빠른 사자였다. 누군가는 바빌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고, 누군가는 보르시파로 달려가 나부의 신상 앞에 엎드려야 한다고 했다. 상인들은 짐을 버리지 않으려 수레를 붙들었고, 병사들은 도망치는 사람을 막느라 칼집에 손을 올렸다. 포로들은 말없이 하늘을 보았다. 그들 중 몇몇은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오래된 체념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제국의 신이 침묵하든 말든, 그들의 목줄은 여전히 목에 걸려 있었으니까.
서하는 자기 이름을 속으로 불러 보았다.
윤서하.
그 이름은 아직 남아 있었다.
벨-에테르.
그 이름은 달랐다. 첫 음절이 목 안쪽에서 걸렸다. 벨. 마르둑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그 소리가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았다. 서하는 자기 안에 들어온 고대의 이름이 하늘의 문장에 묶이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저 문장이 완전한 법이 된다면, 벨-에테르의 기억도 침묵할까. 그렇다면 서하는 이 세계를 읽을 눈의 절반을 잃게 될 것이다.
팔찌의 샘 기호가 손목에서 작게 뛰었다.
마치 대답하지 말라고 경고하듯.
하늘에서 안주가 울었다.
그 울음은 이제 새의 소리가 아니었다. 막 새긴 문장을 스스로 낭독하는 왕의 목소리 같았다. 그러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리를 듣는 순간 사람들은 각자 다른 것을 떠올렸다. 병사는 부러진 창을, 사제는 찢어진 찬가를, 상인은 비어 버린 장부를, 포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영원히 지워지는 장면을 보았다.
서하는 자기 앞에 펼쳐진 세계가 더 이상 도시의 음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에사길라의 그림자, 별의 방의 봉인, 법정의 조작, 벨-우슈르의 죽음. 그것들은 모두 성벽 안의 사건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하늘에 새겨진 문장은 성벽을 넘어 운하와 들판과 신들의 이름까지 흔들었다. 바빌론의 문제는 바빌론 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 오래전에 끝났다고 믿었던 신들의 전쟁이 다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입에는 나부의 붓이 물려 있었다.
에지다의 닫힌 문
행렬은 보르시파에 도착했지만, 도착했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도시의 문 앞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늘의 문장을 본 자들이 먼저 달려왔고, 아직 보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더 크게 두려워했다. 에지다의 지구라트는 먼지 낀 햇빛 속에서 높게 솟아 있었다. 일곱 단으로 오르는 탑은 멀리서 보면 하늘에 닿기 위해 쌓은 계단 같았지만, 오늘은 오히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재앙을 받치고 있는 제단처럼 보였다.
문지기들은 행렬을 들여보내면서도 계속 하늘을 힐끗거렸다. 안주의 문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도 흩어지지 않았고, 햇빛이 강해져도 옅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구름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명령은 구름보다 오래 남았다.
빈 필경함은 에지다 안뜰 한가운데 놓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시신처럼 둘러쌌다. 삼나무 상자의 뚜껑은 부서졌고, 청동 띠에는 발톱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세 개의 봉인은 모두 갈라져 있었다. 에지다의 봉인, 왕궁의 봉인, 길의 봉인. 세 권위가 한꺼번에 찢긴 것이다.
한 사제가 서하를 가리켰다.
"저 아이가 압인을 가지고 있었다. 저 아이가 죽은 봉인을 가져왔고, 저 아이가 이름을 말했다. 그 뒤에 날개가 내려왔다."
군중의 시선이 서하에게 꽂혔다.
벨리투가 즉시 앞으로 나섰다.
"입을 조심해. 두려움이 증거가 되는 법정은 샤마시도 버린다."
"법정?" 사제가 거의 비웃듯 말했다. "오늘 법정의 태양도 혀를 잃었다. 마르둑이 침묵하는데 누가 우리를 판결하겠는가?"
그 말이 끝나자 몇몇 사람이 신음했다. 하늘의 문장을 입으로 따라 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사제 자신도 뒤늦게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에지다 안쪽 문이 열렸다.
모두가 돌아보았다.
문 안에서 나온 사람은 대사제처럼 화려하지도, 병사처럼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너무 늙어 나이를 셀 수 없을 것 같았다. 허리는 조금 굽었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말린 갈대처럼 희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이상할 만큼 단단해 보였다. 손가락 끝에는 오래된 점토가 물든 자국이 남아 있었고, 손톱 아래에는 검은 먹과 푸른 안료가 얇게 끼어 있었다.
누군가 속삭였다.
"나부-무킨 님이다."
나부의 노서기관.
그는 사제들보다 조용히 걸었지만, 사람들이 저절로 길을 비켰다. 서하는 그를 보는 순간 알았다. 이 사람은 제단 앞에서 큰 목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마지막 글자 하나가 틀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사람이다. 왕의 명령보다 오래 남고, 사제의 찬가보다 깊게 숨는 기록을 지키는 사람.
나부-무킨은 빈 필경함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놀람이 없었다. 오히려 아주 오래 기다린 재앙이 마침내 도착했다는 피로가 있었다.
"도둑은 늘 손이 아니라 빈자리를 남긴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안뜰 전체가 들었다.
"그리고 빈자리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자란다. 그러니 누구든 함부로 비난을 심지 마라. 오늘 심은 말은 내일 너희 목을 감을 것이다."
사제들은 입을 다물었다.
나부-무킨의 눈이 서하에게 향했다.
"네가 죽은 봉인의 압인을 지녔다고?"
서하는 품에서 천 조각을 꺼냈다. 벨-우슈르의 손에서 나온 압인. 일곱 단의 탑, 물결, 쐐기, 지워진 날개, 그리고 읽히지 않던 마지막 줄.
노서기관은 그것을 오래 보았다. 그는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눈만으로 선을 따라갔다. 그러자 압인의 마지막 줄이 아주 희미하게 떨렸다. 마치 잠든 벌레가 몸을 뒤척이는 것 같았다.
"검은 목록의 표식이군."
그가 말했다.
벨리투가 물었다.
"검은 목록이 무엇입니까?"
"기억해서는 안 되지만 잊어서도 안 되는 이름들의 목록이다. 신전은 찬가만 보관하지 않는다. 실패한 제의, 지워진 예언, 금지된 봉인, 한번 열리면 다시 닫기 어려운 이름들도 보관한다."
나부-무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목록의 가장 오래된 줄 중 하나에 안주가 있다."
그 이름이 나오자 안뜰 바깥의 바람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노서기관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을 너무 오래 기록해 본 사람처럼 그 이름을 마른 점토 다루듯 조심스럽게 놓았다.
"안주는 단순한 괴조가 아니다. 폭풍이 날개를 얻은 것이고, 탐욕이 부리를 얻은 것이며, 질서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한 혼돈이다. 오래된 이야기에서 그는 엔릴의 곁에 있었다. 가까이 있었기에 보았고, 보았기에 원했다. 운명의 서판이 신들의 명령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것을 훔쳤다."
서하는 숨을 죽였다.
엔릴. 바람과 권위의 오래된 신. 그의 운명의 서판. 안주가 그것을 훔친 이야기.
노서기관은 계속 말했다.
"운명의 서판은 단순한 점토판이 아니다. 거기에 새겨진 것은 오늘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약속, 강이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약속, 왕이 왕으로 불릴 수 있다는 약속, 제의가 제의로 받아들여진다는 약속이다. 안주가 그것을 빼앗았을 때, 신들의 무기는 길을 잊고, 명령은 주인을 잃고, 세계는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흔들렸다."
젊은 사제가 떨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에 쓰러진 존재가 아닙니까? 영웅이 그를 베었다고 배웠습니다."
나부-무킨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끝내야 잠을 잘 수 있다. 그래서 괴물이 쓰러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화에서 쓰러졌다는 말은 때로 죽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름이 묶였다는 뜻이다. 노래 속에 가두고, 의식 속에 눌러 두고, 아이들이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오늘 누군가 그 묶음을 풀었다."
서하는 벨-우슈르의 굳은 손을 떠올렸다. 별의 방 벽 속에 숨겨졌던 봉인. 태양의 혀를 꺾으려던 조작. 물소리에 대답하지 말라는 경고. 이 모든 것이 안주 하나로 시작되었을까. 아니면 안주는 더 큰 손이 풀어 놓은 칼날일까.
"안주는 운명의 서판을 다시 가진 건가요?"
서하가 물었다.
나부-무킨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아직 말을 나눌 수 있다. 만약 그가 진짜 서판을 가졌다면, 지금 너희는 질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대답을 잃었을 것이다."
그 말에 안뜰 전체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나부의 도구를 훔쳤습니다."
서하가 말했다.
"그래. 그래서 위험하다. 운명의 서판은 법을 품고, 나부의 붓은 법의 흉내를 낼 수 있다. 흉내라고 얕보지 마라. 많은 왕들이 신의 뜻을 흉내 내며 나라를 움직였고, 많은 사제들이 침묵을 계시라 부르며 사람을 꿇렸다. 세계도 때로는 진짜 명령과 잘 꾸민 거짓 명령을 바로 구별하지 못한다."
노서기관은 빈 필경함의 찢긴 봉인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안주는 지금 하늘에 거짓 법을 쓰고 있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그 문장이 사람들의 두려움과 제의의 실패를 먹으면, 거짓은 점점 두꺼워진다. 두꺼워진 거짓은 마침내 운명처럼 보인다."
서하는 하늘의 검은 문장을 다시 보았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그 말이 조금 더 굵어진 것 같았다.
검은 목록의 방
나부-무킨은 서하와 벨리투를 에지다 안쪽으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몇몇 사제가 반대했다. 특히 젊은 사제들은 외부인을 깊은 서고로 들이는 일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노서기관이 그들을 바라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아주 오래된 규칙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을 했다. 이 신전에서 그의 침묵은 다른 사람의 고함보다 무거웠다.
서고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았다.
벽에는 마른 갈대 다발과 빈 점토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서늘해졌고, 흙과 물과 오래된 기름 냄새가 짙어졌다. 서하는 이 냄새를 이미 알고 있었다. 에사길라 아래에서 들었던 물소리, 별의 방 벽 속에 갇혀 있던 봉인의 냄새, 벨-에테르의 기억 속에서 밤마다 손가락에 묻던 점토 냄새.
계단 끝에는 낮은 방이 있었다.
방 안에는 선반이 빼곡했다. 점토판들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검은 끈으로 묶여 있었다. 끈에는 작은 봉인이 달려 있었고, 봉인 위에는 새의 발톱처럼 가느다란 쐐기들이 새겨져 있었다. 불빛은 거의 없었다. 나부-무킨이 작은 등잔 하나를 들었지만, 그 빛은 방을 밝히기보다 어둠의 결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검은 목록은 한 장의 목록이 아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은 금지된 것을 한곳에 모아 두면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금지는 편해지는 순간 무너진다. 그래서 목록은 여러 판에 흩어져 있다. 이름은 여기, 죄는 저기, 봉인은 다른 곳, 길은 또 다른 곳. 모두 맞춰야 하나가 된다."
벨리투가 물었다.
"그럼 안주의 길도 여기 있습니까?"
"길의 일부가 있다."
나부-무킨은 선반 사이로 들어가더니 낮은 칸에서 납작한 점토판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다른 판보다 어두웠다. 불에 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밤의 진흙으로 빚은 듯했다. 표면에는 글자가 거의 없었다. 대신 지워진 자국이 많았다. 누군가 여러 번 쓰고, 긁어내고, 다시 덮은 흔적이었다.
그는 점토판을 탁자 위에 놓았다.
"읽어 보아라."
서하는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요?"
"죽은 봉인이 너를 데려왔다. 하늘의 문장이 네 이름 일부를 묶었다. 그리고 네 손목의 샘이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네가 읽어야 한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감쌌다.
벨리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팔찌를 어떻게 알지?"
나부-무킨은 담담히 대답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되는 물건은 깊은 서고까지 내려오지 못한다."
서하는 천천히 천을 풀었다. 팔찌의 샘 기호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별의 방에서 보았던 표식, 그녀가 문장을 썼을 때마다 나타났던 작은 샘. 그것은 물이 솟는 모양이기도 했고, 닫힌 눈이 열리는 모양이기도 했다.
서하가 검은 점토판에 손을 가까이 대자, 표면의 지워진 흔적들이 살아났다.
글자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안주라는 이름이 보였다. 그러나 곧 이름이 새의 그림자로 변했다. 사자의 얼굴, 독수리의 날개, 발톱에 물린 서판. 그 다음에는 산이 보였다. 폭풍이 걸린 산. 신들의 회의가 열렸던 높은 자리. 그리고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날개는 바람으로 달아나나, 바람은 물 위에 흔적을 남긴다.
서하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물소리에 대답하지 말라는 경고가 아직도 그녀 안에 박혀 있었다. 글자들은 계속 움직였다. 이번에는 물결이 나타났다. 에지다의 봉인에도 있었던 물결. 그러나 이것은 보르시파의 운하가 아니었다. 훨씬 오래되고 깊은 물이었다. 도시의 물길이 생기기 전부터 어둠 속에 있었던 물. 이름을 부르기 전에 이미 숨 쉬고 있던 물.
압수.
그 단어가 떠오르자, 방 한가운데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똑.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똑.
벨리투가 즉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나부-무킨은 등잔을 조금 낮추었다. 불빛이 흔들리자 방의 선반들이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일렁였다.
똑.
이번 물소리는 질문하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대신 방바닥의 먼지가 천천히 젖어 갔다. 실제 물이 솟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닥 위에 푸른 선들이 번졌다. 선들은 운하처럼 갈라지고, 강처럼 굽이치고, 늪처럼 넓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남쪽을 향해 길 하나를 그렸다.
나부-무킨이 아주 낮게 말했다.
"에리두."
그 이름이 방 안을 지나갈 때,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벨-에테르의 기억이 깊은 곳에서 떨렸다. 바빌론보다 오래된 도시. 신전보다 오래된 물. 에아의 성역. 지혜로운 물의 신, 속임수를 간파하는 신, 말보다 먼저 뜻을 읽고, 바람보다 먼저 길을 아는 신.
검은 점토판 위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날개를 쫓으려 하지 마라.
그림자를 활로 쏘려 하지 마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물이 기억한다.
남쪽의 깊은 물로 오라.
서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물속에 얼굴을 담근 듯한 감각을 느꼈다. 숨이 막히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으로 숨을 제대로 쉬는 것 같았다. 귀 안쪽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목소리는 늙은 남자 같기도 했고, 아이 같기도 했고, 물결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대답하지 마라.
그 목소리가 말했다.
듣기만 해라.
서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목소리는 다시 흘렀다.
안주의 날개는 바람을 찢지만, 찢긴 바람은 물 위에 무늬를 남긴다. 나부의 붓은 하늘에 거짓을 쓰지만, 거짓도 씻기면 결이 드러난다. 에아의 집으로 오라. 압수의 깊은 물은 훔친 운명의 냄새를 안다.
서하의 팔찌에서 푸른빛이 퍼졌다.
검은 점토판의 마지막 빈칸에 작은 샘 기호가 떠올랐다. 그 옆에는 아주 가는 쐐기들이 이어졌다. 서하는 그것을 읽으려 했지만, 글자들은 읽히는 대신 손목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차갑고도 따뜻한 감각이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피 속에 지도를 접어 넣은 것 같았다.
벨리투가 물었다.
"무슨 계시였어?"
서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안주를 하늘에서 쫓으면 안 돼요. 바람의 흔적을 읽어야 해요. 그런데 바람의 흔적은 물이 기억한대요."
"물?"
"에아의 성역으로 가야 해요. 에리두. 압수의 깊은 물."
나부-무킨은 눈을 감았다.
"나부께서 빼앗긴 손을 되찾으려면, 아버지의 집보다 더 오래된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군."
"에아가 도와줄까요?"
서하가 물었다.
노서기관은 눈을 떴다.
"에아는 도와주는 신이 아니다. 이해하는 신이다. 그리고 이해한 뒤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물길을 바꾼다. 그 물길이 너를 살릴 수도 있고, 네가 서 있던 땅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 안의 푸른 선들은 천천히 사라졌다. 바닥은 다시 마른 먼지로 돌아왔고, 검은 점토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잠해졌다. 그러나 서하의 손목 안쪽에는 아직 남쪽으로 당기는 감각이 있었다. 그것은 길이 아니라 부름이었다.
말이 법이 되는 세계
서고에서 올라왔을 때, 에지다 안뜰은 전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하늘의 문장은 여전히 떠 있었다. 다만 이제 그것은 글자에 머물지 않고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안뜰의 벽돌 사이에 검은 선들이 생겼고, 사람들의 얼굴 위에도 얇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늘 아래에서는 마르둑의 이름이 잘 발음되지 않았다. 누군가 억지로 말하려 하면 목소리가 갈라졌고, 때로는 전혀 다른 단어가 튀어나왔다.
한 늙은 사제가 분노에 차 외쳤다.
"위대한 마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모래를 씹는 소리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울었다.
아이 하나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신이 잠든 거야?"
어머니는 아이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늦었다. 주변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이 잠든다는 말은 신이 죽는다는 말보다 더 두려웠다. 죽은 신은 장례와 이야기를 남기지만, 잠든 신은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그 사이에 누가 세상을 지킬 것인가.
나부-무킨은 안뜰 중앙에 섰다.
"모두 들어라."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잘 들렸다. 나부의 붓은 빼앗겼지만, 오랫동안 진짜 글을 섬겨 온 사람의 목소리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었다.
"하늘의 문장을 따라 읽지 마라. 두려움으로 그것을 되풀이하지 마라. 거짓 명령은 입을 빌릴수록 살이 붙는다. 너희가 공포에 질려 같은 말을 반복하면, 안주는 더 두꺼운 법을 얻는다."
사람들이 서로를 보았다.
노서기관은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제의는 짧아질 것이다. 많은 찬가가 막힐 것이고, 어떤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이 곧 패배는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도 때로는 지키는 일이다. 하늘의 거짓이 땅의 입을 빌리지 못하게 하라."
서하는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 세계에서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사람들의 믿음과 두려움과 반복이 모이면, 말은 법에 가까워진다. 안주가 하늘에 문장을 새겼더라도, 그 문장이 도시의 모든 입에서 반복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운명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막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늘의 문장은 이미 바빌론 전역의 제의를 흔들고 있었다. 마르둑의 침묵은 왕의 권위를 흔들고, 왕의 권위가 흔들리면 군대와 세금과 법정도 흔들릴 것이다. 법정이 흔들리면 샤마시의 태양도 다시 혀를 잃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도시의 혼란은 신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굶주림, 폭동, 처형, 전쟁. 운명이라는 말은 거창하지만, 그 끝에는 늘 사람의 밥그릇과 목숨이 놓여 있다.
벨리투가 서하 옆으로 다가왔다.
"에리두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아."
"멀어요?"
"멀고, 습하고, 낯설어.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야 해. 운하와 늪을 지나고, 왕의 눈이 덜 닿는 곳을 통과해야 하지. 도시에 익숙한 병사는 늪에서 길을 잃고, 늪에 익숙한 도둑은 도시 병사보다 조용히 목을 딴다."
"좋은 소식은 없네요."
"있어."
벨리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주도 우리가 바로 따라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모두가 하늘만 볼 테니까. 우리는 물을 보러 가면 돼."
서하는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부-무킨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가죽 주머니와 짧은 갈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갈대는 평범한 붓처럼 보였지만, 끝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나부의 성스러운 붓은 빼앗겼다. 이것은 그 붓을 깎고 남은 조각이다. 힘은 거의 없다. 그러나 진짜 붓의 결을 기억한다. 안주가 훔친 도구가 가까워지면 갈대 끝이 젖을 것이다."
그는 가죽 주머니도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은 서고 바닥의 흙이다. 검은 목록의 방에서 나온 흙이지. 물에 풀면 한 번은 숨겨진 글자를 드러낸다. 한 번뿐이다. 쓸 때를 아껴라."
서하는 두 물건을 받아 품에 넣었다.
"왜 저를 보내세요?"
그 질문은 오래전부터 목 안에 걸려 있었다. 왜 자신인가. 왜 현대의 윤서하가 이 세계에서 벨-에테르의 이름을 입고, 신들의 봉인과 거짓 예언과 괴조의 날개 사이로 끌려다녀야 하는가.
나부-무킨은 한참 동안 그녀를 보았다.
"네가 가장 강해서가 아니다. 가장 지혜로워서도 아니다. 선택은 그런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때로 선택은 균열과 같다. 이미 금이 간 곳으로 물이 스미고, 빛이 들어오고, 독도 들어온다. 너는 금이 간 곳이다."
서하는 그 말이 칭찬이 아님을 알았다.
"그럼 저는 깨질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
노서기관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깨진 점토판도 읽을 수 있다. 때로는 깨진 뒤에야 숨겨진 뒷면이 보인다."
서하는 벨-우슈르의 시신을 떠올렸다. 죽은 손에 남은 봉인. 깨진 뒤에야 드러난 말들. 사람도 점토판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그 생각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하늘에서 검은 문장이 낮게 흔들렸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서하는 속으로 다른 문장을 붙잡았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그 문장을 점토에 쓰지는 않았다. 하늘에 새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기 안쪽 어딘가에 눌러 새겼다. 아직 법이 될 수 없는 작고 약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모든 글은 처음에는 한 획으로 시작한다.
남쪽으로 흐르는 부름
그날 밤 보르시파에는 축제의 불이 켜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나부의 신상을 맞이하기 위해 노래와 향과 빛이 도시를 채워야 했다. 그러나 에지다의 안뜰에는 낮은 등잔 몇 개만 놓였다. 사람들은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았다. 나부-무킨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고, 하늘의 문장이 아직 그들의 입을 엿보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서하는 신전 지붕 위에 서 있었다.
벨리투는 아래에서 길잡이를 구하고 있었다. 남쪽 늪을 아는 사람, 왕궁의 검문을 피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돈보다 침묵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런 사람은 흔치 않았다. 너무 선하면 살아남지 못했고, 너무 악하면 믿을 수 없었다.
밤이 되었지만 하늘의 문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별들 사이에서 더 선명했다. 별들은 그 문장을 피해 자리를 바꾼 것처럼 보였다. 점성가들이 이 밤을 어떻게 기록할지 서하는 생각했다. '마르둑의 이름이 검은 쐐기에 묶인 밤.' 아니면 '나부의 붓이 도둑맞고, 바람이 물의 증언을 기다린 밤.'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밤도 다른 운명이 된다.
그때 지붕 가장자리에서 바람이 일었다.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 남쪽 하늘에 아주 희미한 선이 보였다. 강인지, 안개인지, 별빛이 낮게 흐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손목의 팔찌가 그 방향으로 당겨졌다. 에리두. 압수의 깊은 물. 에아의 성역.
물소리가 들렸다.
똑.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똑.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물소리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아주 멀리서 누군가 갈대배를 미는 소리처럼, 남쪽으로 길을 열었다.
벨리투가 지붕으로 올라왔다.
"길잡이를 찾았어."
"믿을 만해요?"
"아니."
서하가 돌아보자 벨리투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길은 알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자보다 길을 아는 도둑이야."
"그 도둑이 우리를 팔면요?"
"그러면 내가 먼저 판값을 받아 낼 거야."
그 말투가 너무 진지해서 서하는 아주 잠깐 웃을 뻔했다. 웃음은 완전히 나오지 않았지만, 그 짧은 흔들림만으로도 가슴의 돌이 조금 가벼워졌다.
벨리투는 서하 옆에 섰다.
"후회해?"
"뭘요?"
"하늘을 봤고, 괴물의 이름을 알았고, 이제 도시 밖 신들의 싸움에 발을 들였어. 아직 돌아갈 수 있을 때 돌아가고 싶지 않아?"
서하는 대답하기 전에 바빌론 쪽을 보았다.
그곳은 어둠 속에 있었다. 성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하는 그 안에 남겨진 사람들을 떠올렸다. 신-이딘은 법정의 봉인을 지키고 있을까. 일루-타비는 태양의 혀가 다시 꺾이지 않도록 버티고 있을까. 이슈타르 문의 사자들은 밤마다 다시 눈을 뜰까. 그리고 마르둑의 침묵 아래에서 사람들은 어떤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을까.
"돌아가고 싶어요."
서하가 말했다.
벨리투는 조용히 들었다.
"제 방으로요. 휴대폰이 있고, 전등 스위치가 있고, 아무리 무서운 책을 읽어도 덮으면 끝나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데…"
그녀는 손목의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알아 버렸어요. 책을 덮는다고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여기 사람들은 계속 살아야 하고, 계속 두려워해야 하고, 누군가 하늘에 쓴 거짓말 때문에 밥을 잃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서하는 하늘의 문장을 보았다.
"그러니까 가야 해요. 안주가 훔친 건 붓만이 아니니까요. 사람들이 내일도 오늘과 같은 법칙 속에서 살 수 있다는 믿음을 훔쳤어요."
벨리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새벽 전에 떠난다."
"보르시파에서 바로요?"
"그래. 공식 행렬은 바빌론과 보르시파 사이에 묶일 거야. 사제들은 문장을 막느라 바쁘고, 병사들은 도망친 소문을 잡느라 바쁠 테지. 우리는 그 사이 남쪽 물길로 빠진다."
서하는 품속의 가죽 주머니를 확인했다. 검은 목록의 흙. 나부의 붓 조각. 벨-우슈르의 압인. 신-이딘의 푸른 유약 가루가 조금 남은 주머니. 모두 작고 불완전한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가진 무기는 그런 것뿐이었다. 완전한 창도, 온전한 서판도, 신의 명령도 아닌 조각들.
어쩌면 조각들만이 균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도 몰랐다.
남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는 습기가 섞여 있었다. 바빌론의 먼지와 보르시파의 점토 냄새와는 다른 냄새. 갈대, 늪, 오래된 물,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어둠의 냄새.
서하는 눈을 감았다.
멀리서 날개가 한 번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주가 어디선가 하늘의 다음 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마르둑의 침묵 다음에는 무엇을 쓸까. 왕은 무릎 꿇는다. 강은 거꾸로 흐른다. 이름은 주인을 버린다. 어떤 문장이든 가능했다. 운명을 훔친 자는 말로 세계를 바꿀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물도 기억한다.
서하는 그 사실을 붙잡았다.
하늘이 거짓을 쓰면, 물은 그 거짓이 지나간 자국을 품는다. 바람이 날개를 숨기면, 물은 날개의 그림자를 흔들어 보인다. 안주가 아무리 높이 날아도, 그 그림자는 언젠가 물 위에 닿는다.
새벽이 오기 전, 서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문장은 별들 사이에 박혀 있었다.
마르둑은 침묵한다.
서하는 아주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속삭였다.
"그럼 우리가 듣게 만들 거야."
그 말은 하늘에 새겨지지 않았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별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손목의 샘 기호가 조용히 빛났다. 남쪽으로 이어진 보이지 않는 길이 그녀의 피 속에서 열렸다.
안주의 날개는 하늘을 찢었다.
이제 서하는 그 찢어진 자리를 따라가는 대신, 그 그림자가 떨어질 물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에리두의 깊은 물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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