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 간 선택
서하는 그날 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낮 동안 들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부딪쳤다. 신-이딘은 푸른 유약 조각을 자신이 우연히 주웠다고 했지만, 그의 소매 안쪽에는 같은 빛깔의 가루가 묻어 있었다. 일루-타비는 이슈타르 문 근처에 가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정작 그 경고 속에는 이미 그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벨-에테르. 자신이자 자신이 아닌 그 이름은, 서하의 몸속 어딘가에서 오래된 문처럼 닫혀 있었다. 누군가 그 문을 두드릴 때마다 서하는 자신이 윤서하인지, 바빌론의 서기관 벨-에테르인지, 아니면 둘 다 아닌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기다리면 누군가가 진실을 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이미 깨졌다.
서하는 허리춤에 작은 천주머니를 묶었다. 그 안에는 신-이딘에게 받은 푸른 유약 조각과, 별의 방 벽에서 베껴 낸 작은 표식이 들어 있었다. 팔찌의 샘 기호는 달빛을 받을 때마다 아주 희미하게 젖은 듯 반짝였다. 마치 땅속에서 물이 차오르는 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골목은 낮의 바빌론과 달랐다. 낮에는 상인들의 목소리와 짐승의 울음, 빵 굽는 냄새와 먼지가 도시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밤의 도시는 사람보다 벽돌이 더 많이 말하는 곳이었다. 구운 흙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낮은 숨을 내쉬었고, 지붕 위에 놓인 물항아리는 별빛을 받아 검게 빛났다.
멀리, 이슈타르 문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푸른 벽돌의 문. 왕의 행렬이 지나고 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문. 낮에는 찬란한 유약으로 태양을 되쏘아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던 그 문이, 밤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깊은 물처럼 보였다.
서하는 걸음을 멈췄다.
일루-타비의 말이 떠올랐다.
용의 문에서는 이름을 부르지 마라.
그때는 무슈후슈가 새겨진 벽돌을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슈타르 문의 양쪽 벽, 행렬길을 따라 늘어선 사자 부조들을 보자 경고의 뜻이 조금 달라 보였다. 이름은 사람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신도, 괴물도, 도시도 이름으로 묶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서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불러내는 열쇠였다.
서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순간, 문 그림자 안쪽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우갈루.
소리는 너무 작아 바람처럼 들렸다. 그러나 팔찌의 샘 기호가 차갑게 수축했다. 손목을 파고드는 통증에 서하는 숨을 삼켰다.
다시 속삭임이 이어졌다.
우갈루. 도시의 발을 빌려 굶주림으로 일어나라.
서하는 소리가 난 쪽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벽이 움직였다.

푸른 벽돌의 숨
처음에는 달빛의 장난처럼 보였다.
이슈타르 문을 따라 새겨진 사자의 눈에 금빛이 돌았다. 유약 벽돌 위의 갈기 선이 천천히 흔들리고, 납작하게 눌려 있던 어깨가 벽 밖으로 부풀었다. 구운 흙과 푸른 유약이 살처럼 늘어나며, 사자의 앞발 하나가 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벽돌이 깨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물에서 짐승이 솟아오르는 소리와 비슷했다. 질척하지도, 완전히 마르지도 않은 오래된 흙의 숨소리.
서하는 뒷걸음질쳤다.
사자 한 마리가 완전히 벽 밖으로 나왔다. 몸은 벽돌 조각들로 이루어졌는데도 움직임은 살아 있는 짐승처럼 부드러웠다. 푸른 유약이 등과 옆구리 사이에서 밤하늘처럼 반짝였고, 갈기는 황금빛 선으로 타올랐다. 입을 벌리자 이빨 대신 뾰족한 쐐기문자들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사자는 울부짖지 않았다.
대신 사람 목소리와 짐승 울음이 뒤섞인 소리가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이름을 내놓아라.
서하는 얼어붙었다. 심장이 갈비뼈 안에서 미친 듯이 뛰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다리가 한순간 말을 듣지 않았다. 현대의 박물관 유리장 너머에서 보던 고대의 사자는 안전했다. 설명문 아래 조용히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사자는 설명할 수 있는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 자체가 드러낸 이빨이었다.
두 번째 사자가 벽에서 떨어졌다. 세 번째, 네 번째. 행렬길 양옆의 사자들이 하나둘 눈을 뜨며 몸을 낮췄다. 그들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푸른 벽돌 가루가 달빛 속으로 튀었다.
서하는 간신히 몸을 돌려 달렸다.
뒤에서 발소리가 쏟아졌다. 벽돌 발톱이 포장된 길을 긁으며 불꽃 같은 파편을 튀겼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골목으로 뛰어들면 몸집 큰 사자들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첫 번째 사자는 벽을 밟고 옆으로 달렸다. 두 번째 사자는 지붕 낮은 곳으로 뛰어올라 서하의 그림자 위를 덮쳤다.
서하는 몸을 굴렸다.
사자의 앞발이 방금까지 그녀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땅바닥의 벽돌이 부서지고, 파편 하나가 서하의 뺨을 스쳤다.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손을 대자 피가 묻었다.
그제야 서하는 깨달았다.
이곳에서 신화는 상처를 낸다.
책 속에서 읽던 이름, 박물관 표지판에 적힌 단어, 강의실에서 지나가듯 들었던 고대의 신들은 더 이상 죽은 지식이 아니었다. 사랑도, 전쟁도, 저주도, 수호도 모두 살을 가지고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사자가 다시 몸을 낮췄다. 그 눈 안쪽에서 검은 물결 같은 것이 일렁였다. 사자의 원래 눈빛이 아니었다. 벽돌 틈 사이로 검은 진흙이 스며 있었고, 그 진흙은 숨을 쉬듯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서하는 천주머니에서 푸른 유약 조각을 꺼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달빛에 조각을 비추자 조각 가장자리가 날카롭게 빛났고, 사자의 옆구리 아래 숨어 있던 문자가 드러났다.
우갈루.
서하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으려다 이를 악물었다.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 알고 있다는 것과 부르는 것은 달랐다. 부르는 순간, 이름은 길을 얻는다.
사자의 입이 벌어졌다.
내 이름을 말하라.
서하는 대답 대신 유약 조각을 있는 힘껏 던졌다. 조각은 사자의 눈 옆을 스치며 벽에 부딪혔다. 작고 푸른 빛이 산산이 튀었다. 그 순간 사자가 움찔했다. 깨진 조각들에 달빛이 반사되며 사자의 몸 위에 본래의 부조 선들이 겹쳐 보였다.
사자였다.
굶주린 괴물이 아니라, 문을 지키기 위해 새겨진 사자.
하지만 다음 순간 검은 진흙이 다시 갈기를 덮었다. 사자는 몸을 떨더니 더 거칠게 달려들었다.
서하는 뒤로 물러나다 발을 헛디뎠다. 등 뒤에 벽이 닿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첫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칼도 방패도 없고, 적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채로.
벨리투의 창끝
사자의 그림자가 서하 위로 떨어졌다.
그때 골목 위에서 붉은 끈 하나가 날아왔다. 끈 끝에는 청동으로 만든 작은 방울이 달려 있었다. 방울은 사자의 앞발 앞에 떨어지며 맑고 짧은 소리를 냈다.
딸랑.
그 소리가 울리는 순간, 사자의 몸이 공중에서 멈췄다.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발톱은 여전히 서하의 목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붙잡은 듯 속도가 느려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짙은 남색 옷자락이 밤바람에 펄럭였다. 젊은 여자가 서하와 사자 사이에 착지했다. 허리에는 짧은 청동검이 있었고, 손에는 끝이 날카로운 의식용 창이 들려 있었다. 머리카락은 땋아 뒤로 묶었고, 이마에는 여덟 갈래 별이 새겨진 얇은 금장식이 빛났다.
그녀는 사자를 향해 창끝을 세웠다.
잠든 발아, 멈추어라.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떨리지 않았다.
사자가 이빨 같은 쐐기문자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창끝으로 땅을 찍었다.
이 문은 너희의 배가 아니다. 이 길은 너희의 사냥터가 아니다. 너희는 여주인의 벽에서 태어난 발, 아이와 병사와 신부와 포로가 지나가는 길을 지키는 눈이다.
서하는 숨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여자의 말은 주문 같았지만, 괴물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사자를 우갈루라 부르지 않았다. 사자의 역할을 불렀다. 무엇이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불렀다.
사자의 몸에서 금빛 선이 잠깐 살아났다. 그러나 검은 진흙이 다시 꿈틀거리며 그 빛을 삼켰다. 사자의 고개가 비틀렸다. 목에서 낯선 소리가 흘러나왔다.
피. 이름. 굶주림.
여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건 네 말이 아니야.
그녀는 왼손 손목에 감긴 붉은 끈을 풀어 창대에 묶었다. 방울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맑은 소리 뒤에 쇳소리가 섞였다. 여자는 창을 돌려 사자의 앞발을 쳐냈다. 청동과 유약 벽돌이 부딪치자 파란 불꽃이 튀었다.
싸움은 춤처럼 시작되었다.
여자는 사자의 발톱을 정면으로 막지 않았다. 창끝으로 방향을 틀고, 옷자락을 미끼처럼 흔들어 사자의 시선을 빼앗았다. 사자가 왼쪽으로 달려들면 그녀는 거의 몸을 접듯 낮아졌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자가 덮치면 방울을 던져 그것의 귀를 흔들었다.
서하는 벽에 기대 숨만 몰아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주변을 더듬어 부서진 벽돌 조각 하나를 집었다. 손바닥이 까졌지만 쥐었다. 사자가 여자의 등 뒤로 돌아가려는 순간, 서하는 조각을 던졌다. 빗나갔다. 벽에 맞은 조각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소리가 났다.
사자의 고개가 아주 잠깐 돌아갔다.
그 짧은 순간을 여자는 놓치지 않았다. 창끝이 사자의 옆구리, 검은 진흙이 스며 있는 틈을 찔렀다. 사자는 처음으로 울부짖었다. 벽돌 사자의 울음은 짐승의 소리가 아니었다. 오래된 문이 안쪽에서 찢어지는 소리였다.
서하는 이를 악물고 두 번째 벽돌 조각을 들었다. 이번에는 사자를 맞히려 하지 않았다. 깨진 푸른 유약 조각들이 흩어진 곳을 향해 던졌다. 조각들이 부딪치며 달빛을 여러 갈래로 튕겼다. 빛이 사자의 눈을 스치자 검은 진흙이 꿈틀거리며 물러났다.
여자가 외쳤다.
좋아! 빛을 깨워! 벽돌이 기억하게 해!
서하는 남은 조각들을 발로 차 흩뜨렸다. 달빛이 깨진 유약 위에서 잘게 부서졌다. 사자들의 몸에 잠시 본래의 선이 돌아왔다. 그 틈을 타 여자는 창대를 땅에 눕혀 원을 그렸다. 방울이 원을 따라 굴렀고, 맑은 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그녀는 노래하듯 말했다.
돌아가라. 벽으로 돌아가라. 여주인의 눈 아래 잠들어라. 너희의 발은 침략자를 짓밟기 위해 있고, 길 잃은 자의 목을 물기 위해 있지 않다.
사자 한 마리가 몸을 떨었다. 푸른 벽돌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며 다시 납작한 부조의 선으로 접혔다. 두 번째 사자도 뒷걸음질쳤다. 세 번째 사자는 마지막까지 서하를 노려보았다. 그 눈 안쪽에서 검은 물결이 일렁였고,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이름을 기억하는 자.
서하의 피가 식었다.
그러나 여자가 창끝으로 땅을 세 번 찍자 사자는 더 버티지 못하고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목에는 깨진 유약 조각과 서하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청동 방울의 마지막 떨림만 남았다.
사랑과 전쟁의 같은 얼굴
서하는 무릎을 꿇었다. 힘이 풀리자 다리가 자기 것이 아닌 듯 떨렸다. 뺨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렀고, 손바닥에는 벽돌 가루가 박혀 있었다.
여자가 다가와 서하 앞에 앉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는 생각보다 어렸다. 서하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려 보였다. 하지만 눈빛은 많은 장례식과 많은 탄생을 모두 본 사람처럼 깊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작은 그릇을 꺼내더니 향이 나는 기름을 손가락에 묻혔다.
움직이지 마. 유약 파편은 살 안에 남으면 열을 불러.
서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여자는 상처를 살피며 대답했다.
벨리투. 이슈타르 신전의 말단 여사제야. 아직 높은 제단에는 못 올라가고, 대개는 피 묻은 천을 빨거나 울다 지친 사람들에게 물을 건네지.
말투는 담담했지만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녀는 서하의 뺨에 기름을 바르고, 얇은 천으로 지혈했다. 조금 전 사자의 발톱 앞에서 창을 들던 사람과 같은 손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서하가 중얼거렸다.
방금은 전사 같았는데요.
벨리투가 작게 웃었다.
우리 여주인이 그런 분이니까.
이슈타르.
그 이름을 듣자 골목의 공기가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이름이 위험하다는 것을 너무 많이 겪은 뒤였다. 벨리투는 그 반응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하는 게 맞아. 하지만 모든 이름이 같은 방식으로 위험한 건 아니야. 어떤 이름은 잡아먹기 위해 달려오고, 어떤 이름은 흩어진 마음을 붙들어 줘. 문제는 누가, 어떤 뜻으로 부르느냐지.
서하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이슈타르는 사랑의 여신이라고 배웠어요.
배웠다,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 서하는 뒤늦게 후회했다. 이 시대 사람에게 무엇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벨리투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서하의 손바닥에서 작은 파편을 빼내며 말했다.
맞아. 사랑의 여신이지. 새 신부가 떨리는 손으로 향유를 바칠 때도, 오랫동안 아이가 없던 여자가 밤새 제단 앞에서 울 때도, 전쟁터로 간 남편을 기다리는 사람이 문간에 빵을 놓을 때도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불러.
그녀는 피 묻은 천을 접었다.
하지만 사랑은 늘 꽃만 들고 오지 않아. 사랑하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칼을 들어야 할 때가 있어. 성벽 위에서 활을 당기는 병사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연인이며, 누군가의 아버지야. 그가 지키려는 집 안에는 잠든 아이와 빵 냄새가 있지. 그러니 전쟁은 사랑의 반대편에만 있는 게 아니야. 때로는 사랑이 마지막으로 입는 갑옷이 전쟁이야.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알던 신들은 대부분 이야기 속에 있었다. 착한 신, 무서운 신, 질투하는 신, 벌을 내리는 신. 교과서와 전시 설명은 신들을 분류했다. 하지만 바빌론의 신들은 분류표 안에 얌전히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 전 사자들은 도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녀를 찢어 죽일 수 있는 괴물이 되었다. 벨리투의 손도 그랬다. 상처를 감싸는 손이자 창을 드는 손.
자비와 폭력은 서로 다른 방에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같은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벨리투는 서하의 팔찌를 보더니 눈을 좁혔다.
그 샘 표식. 어디서 났어?
서하는 손목을 감쌌다.
말하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예요.
오늘 밤 벽에서 사자가 걸어나오는 걸 봤는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직 남았어?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벽 속으로 돌아간 사자들의 눈이 아직도 그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뒤틀린 수호자
벨리투는 깨진 유약 조각 하나를 주워 달빛 아래 들었다. 조각 안쪽에 검은 선이 남아 있었다. 그냥 그을음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작은 쐐기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벨리투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사자에게 쓰는 말이 아니야.
서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들은 그 이름 때문인가요?
벨리투는 고개를 들었다.
너도 들었어?
서하는 입술을 눌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갈루, 라고요. 사자가 자기 이름을 말하라고 했어요.
벨리투는 낮게 욕설을 삼켰다. 여사제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우갈루는 단순한 사자의 이름이 아니야. 오래된 괴물의 이름이지. 폭풍과 굶주림을 데리고 오는, 인간의 도시가 생기기 전 어둠에서 올라온 것들의 이름 중 하나야. 티아마트의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무리와 닿아 있어.
티아마트.
그 이름은 서하의 속을 차갑게 훑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균열 뒤에서 느껴지던 거대한 그림자. 도시 아래의 물, 오래된 신들의 전쟁, 운명의 서판에 남은 문양. 모든 것이 그 이름 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벨리투는 사자가 나온 벽 가까이 다가갔다. 벽돌 표면은 다시 평평해졌지만, 부조의 눈가에는 아주 얇은 검은 금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창끝으로 금을 긁었다. 마른 진흙 같은 것이 떨어졌다.
이건 저주가 아니야.
벨리투가 말했다.
저주가 아니라면요?
수호 상징을 바꿔 쓴 거야. 문을 지키는 사자에게 괴물의 이름을 덧씌운 거지. 사자는 원래 침입자를 막고 왕의 길을 보호해. 그런데 누군가 그 몸에 다른 이름을 심었어. 그러면 사자는 자신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잊고, 이름이 명령하는 대로 굶주리게 돼.
서하는 벽을 바라보았다. 푸른 벽돌은 다시 조용했다. 그러나 이제 그 고요함이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벽이, 도시를 상징하는 부조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도시 안의 사람을 사냥하는 도구가 되었다.
누군가 오래전부터 준비한 일이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낮 동안의 모순된 말들이 다시 돌아왔다. 신전에서 들은 침묵들, 왕궁 서고의 숨겨진 봉인, 별의 방 벽에 숨어 있던 작은 표식, 신-이딘의 소매에 묻은 푸른 가루. 모든 단서가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가도, 가까이 가면 다시 흩어졌다.
벨리투는 벽돌 사이를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멈췄다.
이 쐐기, 이상해.
서하가 다가갔다. 벽돌 틈 안쪽에는 아주 작은 표식이 있었다. 별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결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하가 천주머니에서 낮에 베껴 온 표식을 꺼내자 두 모양이 정확히 겹쳤다.
벨리투가 그녀를 보았다.
네가 이걸 왜 가지고 있어?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
그때 벽 안쪽에서 아주 낮은 물소리가 들렸다.
똑.
똑.
땅속 깊은 곳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서하는 본능적으로 대답할 뻔했다. 누구냐고, 거기 있느냐고, 압수냐고. 하지만 일루-타비의 경고가 날카롭게 떠올랐다.
물소리에 대답하지 마라.
서하는 입을 틀어막았다.
벨리투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여사제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빠져 있었다.
너도 들었구나.
네.
좋아. 대답하지 마. 저건 물이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사자 부조의 입가에서 검은 진흙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땅에 닿은 진흙은 잠깐 작은 글자 모양으로 뭉쳤다가 사라졌다.
벨리투가 무릎을 꿇고 그 자리를 살폈다.
누군가 신전의 말과 바다의 괴물 이름을 함께 쓰고 있어. 평범한 서기관은 못 해. 전쟁 주문을 아는 자이거나, 신전 창고의 금지된 점토판을 본 자야.
왕궁 사람일 수도 있나요?
벨리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왕궁에도 신전에서 배운 손이 있고, 신전에도 왕궁에 팔린 귀가 있어. 지금 중요한 건 어느 벽 안에 숨어 있느냐가 아니야. 그자가 도시의 상징들을 하나씩 바꾸고 있다는 거야.
서하는 이슈타르 문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벽 위의 사자들이 다시 조용한 부조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잠든 것이 아니라, 억지로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사제의 고백
벨리투는 깨진 유약 조각들을 모아 작은 천에 감쌌다. 그녀의 손놀림은 익숙했다. 전투 뒤의 정리도 제의의 일부인 듯했다.
서하가 물었다.
왜 저를 구했어요?
벨리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멀리 새벽 전의 어둠이 가장 깊어지고 있었다. 바빌론의 지붕들은 검은 파도처럼 겹쳐 있었고, 그 위로 별들이 흔들리지 않는 못처럼 박혀 있었다.
처음엔 네가 도둑인 줄 알았어.
정직한 대답이었다.
요즘 밤마다 이 문 근처에서 이상한 흔적이 발견됐거든. 유약을 긁어 간 자국, 제의용 기름이 아닌 검은 진흙, 사자들의 눈에 남은 낯선 빛. 상급 여사제들은 왕궁과 마르둑 사제단의 눈치를 보느라 조용히 덮으려 했고, 나는 말단이라 입을 다물라는 말만 들었지.
그런데요?
그런데 오늘 밤 사자들이 너를 죽이려 했어. 도시의 수호자가 길 잃은 한 사람을 사냥하는 건, 여주인의 뜻이 아니야.
벨리투는 창끝을 천천히 닦았다.
그리고 너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 두려워하면서도. 그게 중요해.
서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너무 무서워서 목소리가 안 나온 걸 수도 있어요.
그것도 지혜야. 많은 사람이 두려우면 아무 이름이나 붙잡고 불러. 살려 달라고, 죽여 달라고, 대신 싸워 달라고. 그런데 이름은 칼과 같아. 잡는 법을 모르면 네 손부터 베지.
벨리투의 말은 서하의 가슴 한복판에 박혔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이름의 힘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윤서하라는 이름은 이 세계에서 그녀를 붙잡아 주는 마지막 끈이었고, 벨-에테르라는 이름은 이 도시가 그녀에게 씌우려는 오래된 옷이었다. 어느 쪽도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어느 쪽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벨리투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어릴 때는 이슈타르가 왜 사랑과 전쟁을 함께 쥐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신전에는 혼례를 앞둔 여자들이 와서 노래를 배웠고, 다음 날이면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실려 왔지. 한쪽 방에서는 향유 냄새가 나고, 다른 쪽 방에서는 상처를 태우는 연기 냄새가 났어. 나는 둘 중 하나는 가짜라고 생각했어.
그녀는 손목의 붉은 끈을 다시 감았다.
그러다 내 오라비가 북쪽 성벽에서 죽었어. 시신도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지. 어머니는 제단 앞에서 울면서 여주인에게 저주를 퍼부었어. 왜 사랑의 여신이 내 아들을 전쟁터로 보냈느냐고. 그런데 그날 밤, 신전의 가장 늙은 여사제가 어머니에게 말했어. 여신은 네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칼을 준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 했기에 칼의 길에 섰다고.
벨리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어. 아직도 다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고. 하지만 오늘 밤은 알아. 저 사자들은 누군가를 미워해서 깨어난 게 아니야. 누군가 그들에게 잘못된 이름을 먹였어. 사랑해야 할 도시를 물어뜯게 만든 거지. 그건 전쟁보다 나빠. 전쟁은 적어도 자신이 칼을 들었다는 걸 알지만, 뒤틀린 수호자는 자기가 무엇을 죽이는지도 몰라.
서하는 벨리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젊은 여사제는 강해 보였지만, 그 강함은 상처가 없는 사람의 단단함이 아니었다. 여러 번 찢어진 뒤에도 다시 묶인 천처럼, 그녀는 약한 곳을 알고 있었기에 쉽게 부러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서하는 이 시대에서 누군가를 믿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다.
같은 적을 본 사람들
벨리투가 물었다.
너, 누구에게 쫓기고 있어?
너무 많은 사람에게요.
그럼 누구를 믿고 있어?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답이구나.
벨리투는 그렇게 말하고도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는 천천히 말했다.
누군가 이 모든 일을 오래전부터 준비했어요. 왕궁 서고에도 흔적이 있었고, 에사길라에도 그림자가 있어요. 가까운 사람들의 말도 맞지 않아요. 제가 뭘 알고 있는지, 혹은 제가 뭘 기억해야 하는지 다들 저보다 먼저 아는 것 같고요.
벨리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기억해야 하는 자.
사자도 그렇게 말했어요. 이름을 기억하는 자라고.
그 말이 나오자 팔찌의 샘 기호가 희미하게 빛났다. 벨리투는 그것을 보았지만 만지려 하지 않았다. 신전에서 배운 사람답게, 그녀는 함부로 성스러운 것과 저주받은 것을 구분하려 들지 않았다.
벨리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너를 완전히 믿지 않아.
서하는 오히려 안도했다.
저도 그래요.
좋아. 그럼 같이 갈 수 있겠네.
서하가 눈을 깜빡였다.
믿지 않는데 같이 간다고요?
믿음은 제단에 올리는 향처럼 천천히 타야 해. 처음부터 활활 타오르는 건 대개 기름을 부은 거야. 우리는 서로를 믿어서가 아니라, 같은 적을 봤기 때문에 같이 가는 거야.
벨리투는 사자 부조 아래에서 긁어 낸 검은 진흙을 작은 항아리에 담았다. 그리고 서하에게 깨진 푸른 유약 조각 하나를 건넸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네가 던진 조각이 사자를 잠깐 깨웠어. 벽돌은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기억해. 사람도 아마 그럴 거야.
서하는 조각을 받아 쥐었다. 차가운 표면 아래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마치 돌이 아니라 잠든 심장 조각을 쥔 것 같았다.
벨리투는 동쪽 하늘을 보았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어둠의 가장자리가 조금 옅어지고 있었다.
해가 뜨면 샤마시의 눈이 도시를 덮을 거야.
샤마시요?
정의와 태양의 신. 거짓말은 밤에 강하지만, 낮에는 그림자를 가져야만 서 있을 수 있어. 이 흔적을 샤마시의 법정에 가져가야 해. 그곳에서는 적어도 말이 저울 위에 올라가.
서하는 이슈타르 문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벽돌 사자들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이제 약속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완전히 적이 아니었다. 완전히 아군도 아니었다. 신들의 도시에서 수호와 폭력은 같은 몸을 나누어 썼고, 사람은 그 사이에서 올바른 이름을 찾아야 했다.
그때 가장 가까운 사자 부조의 입술 사이에서 작은 파편 하나가 떨어졌다.
서하와 벨리투가 동시에 몸을 굳혔다. 파편은 땅에 닿아 두 번 튀고 멈췄다. 그 안쪽에는 검은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그 위에 아주 작은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벨리투가 그것을 읽으려다 얼굴을 굳혔다.
서하가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어요?
벨리투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새벽 전의 바람이 이슈타르 문의 푸른 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그녀가 낮게 말했다.
내일의 판결 전에, 태양의 혀를 꺾어라.
서하의 손목에서 샘 기호가 차갑게 빛났다.
멀리 동쪽 하늘 아래, 아직 떠오르지 않은 태양이 피처럼 붉은 선을 만들고 있었다. 샤마시의 법정으로 가기도 전에, 누군가 이미 그곳을 노리고 있었다.
벨리투는 창을 고쳐 쥐었다.
이제 정말 서둘러야 해.
서하는 피 묻은 손으로 푸른 유약 조각을 움켜쥐었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두려움 옆에 다른 것이 생겼다. 함께 달릴 사람의 발소리, 그리고 자신이 더는 도망치는 사람만은 아니라는 작고 뜨거운 확신.
이슈타르 문의 사자들은 벽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서하는 알았다. 다음에 깨어날 것은 사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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