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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포함된 노트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에사길라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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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푸른 길의 아침

서하는 해가 뜨기 전에 신전을 빠져나왔다.

바빌론의 새벽은 낮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사람들의 고함과 당나귀 울음, 장사꾼의 흥정 소리가 골목마다 걸려 있었지만, 새벽에는 도시 전체가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흙벽 위에는 밤의 서늘함이 아직 남아 있었고, 집집마다 꺼지지 않은 작은 등불이 별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품 안에 작은 점토 조각을 숨기고 있었다.

용.

문.

샘.

세 기호는 눈앞에 없어도 자꾸 떠올랐다. 벨-에테르의 몸은 길을 알고 있었다. 나부 신전에서 큰길로 나와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 축제 행렬이 지나갈 넓은 도로, 푸른 벽돌의 성문으로 향하는 방향. 하지만 윤서하의 머리는 계속 다른 생각을 했다.

이 도시에서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 곳이 있다.

용의 문에서는 이름을 부르면 안 돼.

일루-타비의 속삭임은 밤새 귓속에 남아 있었다. 서하는 그 경고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기억했기 때문에 지금 가야 했다. 위험한 곳은 대개 단서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가 설명해 주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새벽 시장의 가장자리를 지나자 푸른 유약 벽돌을 실은 수레들이 보였다. 아직 햇빛이 제대로 닿지 않았는데도 벽돌은 어둠 속에서 물빛을 품고 있었다. 수레를 끄는 남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서로를 재촉했다. 그들의 손가락과 손톱 밑에는 푸른 안료가 스며 있었다.

서하는 가까이 다가가 한 사람에게 물었다.

"신-이딘을 찾고 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서하의 옷차림과 손에 밴 점토 자국을 빠르게 훑었다.

"나부의 아이가 새벽부터 벽돌장이를 왜 찾아?"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물어볼 것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남자는 수레 위의 벽돌을 천으로 덮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대답을 완전히 피하지는 않았다.

"신-이딘은 이슈타르 문에 없다. 어제 밤 에사길라로 불려 갔다. 용의 눈을 손보던 손이니, 신의 집에서도 쓸모가 있겠지."

"에사길라요?"

서하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남자는 그 반응을 수상하게 여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바빌론에서 에사길라를 모르는 아이가 있나?"

"아니요. 알고 있습니다."

서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었다. 벨-에테르의 기억도 알고 있었고, 윤서하의 지식도 알고 있었다. 에사길라. 마르둑의 거대한 신전. 바빌론의 심장. 그 이름은 단지 건물 하나를 가리키지 않았다. 왕의 권위, 축제의 질서, 서기관의 기록, 제물과 세금, 신탁과 별점이 모두 그곳으로 모였다.

그런 곳에 신-이딘이 있다.

그 말은 단서가 이슈타르 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진다는 뜻이었다.

서하는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뒤에서 작은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처음에는 시장으로 나오는 아이들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발소리는 그녀가 멈추면 멈추고, 다시 걸으면 다시 움직였다.

서하는 골목 모퉁이에서 갑자기 몸을 돌렸다.

"언제부터 따라왔어?"

일루-타비가 벽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그는 들킨 고양이처럼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가 너무 쉽게 몰래 나가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만, 따라오라고 한 적도 없어."

"혼자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 말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서하는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일루-타비의 어깨는 추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조금 굳어 있었다.

"난 이슈타르 문으로 가려던 거야."

"지금은 아니지."

일루-타비가 그녀가 향한 방향을 보았다. 그 끝에는 아직 햇살을 받지 않은 거대한 건물들의 그림자가 엎드려 있었다.

"에사길라로 가는 길이야."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대답이 되었다.

일루-타비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너 정말 미쳤구나."

"어쩌면."

"에사길라는 나부 신전의 창고가 아니야. 마음대로 들어갔다가 마음대로 나오는 곳이 아니라고. 마르둑의 사제들은 사람의 눈을 보지 않아. 사람의 뒤에 적힌 이름을 봐."

그 표현이 이상하게 서하의 가슴을 찔렀다.

사람의 뒤에 적힌 이름.

그녀의 뒤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 벨-에테르. 나부 신전의 견습생. 나부-주쿱의 제자. 아니면 이 시대의 어느 점토판에도 존재하지 않는 윤서하.

서하는 손목의 팔찌를 만졌다. 매듭 속 샘 모양의 기호가 손끝에 걸렸다.

"그래서 더 가야 해."

일루-타비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잠시 뒤 그는 욕처럼 작게 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가, 서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럼 적어도 내 말은 들어. 안에서 누가 네 이름을 묻거든 짧게 대답해. 더 붙이지 마. 그리고 절대 먼저 묻지 마. 신전에서 질문은 빚이야. 대답을 받는 순간 갚아야 할 것이 생겨."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바빌론의 낮이 도시 위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사길라가 가까워질수록 서하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누군가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거리의 소음은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변했고, 사람들의 행렬은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처럼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중심에 에사길라가 있었다.

에사길라의 그림자

하늘로 올라가는 벽돌

에사길라의 첫인상은 높이가 아니었다.

서하는 먼저 그 넓이에 압도되었다. 벽은 하나의 건물을 감싼 것이 아니라 작은 도시를 품고 있었다. 문을 지키는 사람들, 제물을 끌고 온 농부들, 향유 항아리를 든 상인들, 점토판을 품에 안은 서기관들, 머리를 깎은 하급 사제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누구도 허둥대지 않았지만, 아무도 쉬고 있지 않았다.

그 뒤로 지구라트가 보였다.

층층이 쌓아 올린 거대한 벽돌 산이 아침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꼭대기는 아직 옅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인데도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땅이 하늘에게 말을 걸기 위해 스스로 등을 세운 모습 같았다.

벨-에테르의 기억이 그 이름을 속삭였다.

에테메난키.

하늘과 땅의 토대가 되는 집.

서하는 그 이름을 생각하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현대의 책에서 읽었던 단어가 지금 눈앞에 흙먼지와 햇빛과 사람들의 숨결 속에 서 있었다. 그러나 책에서 보던 유적은 침묵했다. 이곳의 지구라트는 살아 있었다. 계단 위로 사제들이 오르내렸고, 운반꾼들이 제물과 물품을 날랐으며, 아래뜰에서는 관리들이 숫자를 부르고 서기관들이 받아 적었다.

"기도하는 곳이라고만 생각했어."

서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일루-타비가 그녀를 흘끗 보았다.

"뭐?"

"아니야."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윤서하는 박물관의 설명문과 논문 속에서 신전을 배웠다. 신전은 신에게 바치는 공간, 의례의 중심, 종교 건축물. 그렇게 정리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의 에사길라는 그런 단어들보다 훨씬 복잡했다.

여기서는 보리가 신의 이름으로 들어오고, 다시 사람의 배급으로 나갔다. 양과 염소가 제물로 바쳐졌지만, 그 가죽과 털은 다른 장부에 기록되었다. 별의 움직임은 신의 뜻으로 해석되었고, 그 해석은 왕궁으로 보내졌다. 토지 경계와 빚, 혼인과 상속, 제사 날짜와 노동자의 수가 모두 점토판 위에 찍혔다.

기도는 이곳의 일부일 뿐이었다.

에사길라는 도시가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문 앞에서 하급 사제가 그들을 막았다. 그는 일루-타비의 얼굴을 보고, 다음으로 서하의 손에 밴 점토 자국을 보았다.

"나부 신전의 견습생들인가?"

일루-타비가 재빨리 대답했다.

"예. 서고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서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그런 심부름은 없었다. 그러나 일루-타비의 얼굴은 너무 태연했다. 거짓말을 많이 해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사제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둘을 보았다.

"누구의 지시냐?"

일루-타비의 눈꺼풀이 아주 작게 떨렸다.

그때 안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여보내라. 오늘은 손이 모자란다."

푸른 안료가 묻은 손을 가진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수염에 마른 흙가루가 붙어 있었고, 허리에는 작은 끌과 붓이 매달려 있었다. 눈가에는 밤을 새운 사람의 피로가 있었지만, 시선은 날카로웠다.

서하는 그를 보는 순간 알았다.

"신-이딘?"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일루-타비가 옆에서 짧게 숨을 삼켰다.

이름을 먼저 불렀다.

서하는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용의 문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이름은 어디서나 조심해야 했다.

신-이딘은 잠시 그녀를 노려보다가 낮게 말했다.

"나를 찾는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네 입이 네 발보다 빠르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한 입은 대개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그는 하급 사제에게 손짓했다.

"이 둘은 내가 데려가겠다. 서고로 보낼 판이 있다."

사제는 더 묻지 않았다. 신-이딘이 높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에사길라 안에서 오래 일한 사람에게는 문지기보다 단단한 권한이 있는 듯했다.

그는 서하와 일루-타비를 안쪽 뜰로 이끌었다.

"이슈타르 문으로 오지 말라고 누가 말해 주지 않았나?"

신-이딘이 앞만 보고 말했다.

서하의 심장이 뛰었다.

"제가 그곳으로 가려던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용의 눈이 흔들리면, 용의 눈을 고치는 사람에게 먼저 소문이 온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름 없는 판을 읽은 아이가 샘의 매듭을 차고 있다는 말도 왔다."

서하는 손목을 감추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신-이딘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덧붙였다.

"겁먹지 마라. 겁은 냄새가 난다. 에사길라 안에서는 특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뜰 깊은 곳에서 종이 울렸다.

소리는 맑았지만, 이상하게 무거웠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떠들던 목소리들이 낮아지고, 제물을 끌고 가던 이들이 길을 비켰다. 하급 사제들이 물동이를 들고 빠르게 지나갔다. 향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졌다.

신-이딘이 목소리를 낮췄다.

"마르둑께서 아침을 드실 시간이다."

서하는 처음에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신이 아침을 먹는다고?

그러나 곧 그녀는 보게 되었다.

신이 머무는 몸

마르둑의 내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서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견습생과 장인은 정해진 선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었다. 안쪽의 움직임은 기둥 사이와 얇은 휘장 너머로 부분적으로 보였다.

하급 사제들이 먼저 바닥을 닦았다. 단순히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먼지를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동작처럼 보였다. 그 뒤로 물그릇이 들어갔다. 물은 낮은 노래와 함께 뿌려졌다. 향이 피어올랐다. 연기는 천장으로 곧장 오르지 않고 휘장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신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하는 숨을 멈췄다.

그것은 조각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강했다. 금과 푸른 돌, 검은 눈동자, 정교하게 다듬은 수염과 옷자락.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을 닮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신을 이해하기 위해 빌린 껍질 같았다.

마르둑.

바빌론의 주신.

티아마트의 혼돈을 가르고 세계에 이름과 자리를 준 자.

사제들은 신상 앞에 엎드렸다가 일어났다. 한 사람이 낡은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벗겼고, 다른 사람이 새 옷을 들고 왔다. 보라색과 푸른색 실이 섞인 천은 빛을 받을 때마다 물결처럼 색을 바꾸었다. 그들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듯, 그러나 왕보다 더 조심스럽게 신상에 옷을 입혔다.

허리띠를 매고, 장식을 걸고, 머리 부분을 정돈했다.

그 다음 음식이 들어왔다.

둥근 빵, 대추야자, 향이 강한 맥주, 고기, 기름을 바른 과자, 작은 그릇에 담긴 소금. 서하는 신화 속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생활의 한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신에게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일루-타비가 귓속말로 말했다.

"쳐다보지 마."

그러나 서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세계에서 박물관의 신상은 전시품이었다. 유리 너머에 놓인 물건. 만든 사람은 사라졌고, 믿음은 설명문이 되었으며, 신성함은 학술 용어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이들은 신상이 신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상이 곧 신이 머무는 자리라고 믿었다.

아니, 믿는다는 말도 부족했다.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마르둑이 옷을 입어야 도시가 아침을 맞았다. 마르둑이 음식을 받아야 사람들도 먹을 수 있었다. 마르둑의 방이 닫히면 신의 사생활이 지켜졌고, 문이 열리면 세계의 질서가 다시 숨을 쉬었다.

그때 신상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빛났다.

서하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향 연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푸른 돌이 햇빛을 반사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빛은 한 번 더 깜박였다.

무슈후슈의 눈에서 보았던 색과 같았다.

팔찌가 손목을 조였다.

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명을 삼키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신상 앞에 서 있던 나이 든 사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휘장 너머에 선 서하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가 거기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사제의 눈은 매우 어두웠다.

신-이딘이 서하의 팔꿈치를 잡아 뒤로 한 걸음 물렸다.

"너무 오래 보았다."

"저분이 저를 봤어요."

"그러니 더 봐서는 안 된다."

"신상이..."

서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신-이딘이 낮게 말했다.

"여기서는 물건이라는 말도, 조각이라는 말도 조심해라. 마르둑의 몸은 나무와 금과 돌로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빈 그릇이 아니다. 사제들은 그분을 깨우고, 씻기고, 입히고, 먹인다. 그래야 그분이 이 도시 안에 머무신다."

"머무시지 않으면요?"

신-이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안쪽에서 들려오는 사제들의 노래가 답처럼 이어졌다. 낮고 오래된 언어였다. 벨-에테르의 귀는 뜻의 일부를 알아들었다. 윤서하의 머리는 그 언어가 단순한 찬가가 아니라 명령과 확인의 문장에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

오소서.

머무소서.

받으소서.

떠나지 마소서.

마지막 문장이 가장 두려웠다.

떠나지 마소서.

신이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축제가 세계를 다시 세우는 날

의식이 끝난 뒤에도 에사길라는 조용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빠졌다. 마르둑의 아침 식사가 끝나자 남은 음식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옮겨졌고, 각 항목은 점토판에 기록되었다. 어떤 빵이 몇 개였는지, 어떤 그릇이 어느 방으로 갔는지, 누가 그것을 확인했는지까지 빠짐없이 적혔다.

서하는 그 장면을 보며 서늘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곳에서 신성한 것은 기록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철저하게 기록되었다. 신에게 바친 빵 하나도 장부를 통과했다. 향유 한 방울도 이름과 숫자를 얻었다. 거룩함은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아니라, 쐐기문자로 찍힌 확인이었다.

신-이딘은 그들을 서고 옆의 긴 방으로 데려갔다. 방 안에는 사제들과 서기관들이 모여 있었다. 벽 쪽 선반에는 점토판들이 천 조각에 싸인 채 줄지어 놓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새 점토와 갈대 필기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이 든 사제가 방 중앙에 서 있었다. 아까 휘장 너머에서 서하를 보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가 입을 열자 방 안의 작은 소리들이 사라졌다.

"아키투가 다가온다."

그 한마디에 공기가 달라졌다.

아키투.

새해 축제.

서하는 벨-에테르의 기억 속에서 그 축제를 알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들뜨는 날. 행렬과 제물, 노래와 왕의 의식, 신들의 이동. 그러나 에사길라에서 듣는 아키투는 시장 아이들이 기대하는 축제와 달랐다. 그것은 즐거운 행사가 아니라 세계를 다시 묶는 일처럼 들렸다.

사제가 말을 이었다.

"마르둑께서 혼돈의 바다를 꺾고 하늘과 땅에 자리를 주셨기에, 왕은 왕좌에 앉고, 강은 길을 잃지 않으며, 달은 제때 차고 기운다. 그러나 질서는 한 번 세워졌다고 영원히 저절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매년 우리는 그 일을 다시 말해야 한다."

그는 서기관들을 둘러보았다.

"말하지 않는 질서는 약해진다. 잘못 말한 질서는 비뚤어진다."

서하는 그 문장을 들으며 손끝이 차가워졌다.

말하지 않는 질서.

잘못 말한 질서.

그것은 신화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 낭송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에누마 엘리시, 창세의 서사시는 아키투 축제에서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다시 펼쳐 보이는 도구였다. 마르둑이 티아마트를 물리치고, 신들이 그에게 왕권을 주고, 이름과 별과 계절과 통치의 자리가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낭송해야 왕권도, 우주의 질서도 새해를 맞아 다시 힘을 얻었다.

나부 신전에서 글자는 지식이었다.

그러나 에사길라에서 글자는 질서 그 자체였다.

사제는 한 점토판을 들어 올렸다.

"일곱 판본을 대조한다. 오래된 판본과 새 판본, 보르시파에서 온 사본과 왕궁 서고의 사본을 비교한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낭송자의 혀가 길을 잃고, 혀가 길을 잃으면 왕의 발도 길을 잃는다."

방 안의 서기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일루-타비는 서하 옆에서 작게 떨고 있었다. 평소라면 귀찮은 베끼기 일이라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사제가 마침내 서하를 바라보았다.

"나부의 아이."

서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름을 말하라."

일루-타비의 경고가 떠올랐다.

짧게 대답해. 더 붙이지 마.

"벨-에테르입니다."

사제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 이름만 가지고 왔느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벨-에테르의 혀가 입안에서 굳었다. 윤서하라는 이름이 목구멍 아래에서 조용히 몸부림쳤다. 말하면 안 된다. 이 도시에서 이름은 손잡이다. 누군가 붙잡으면 끌려갈 수 있다.

그녀가 침묵하자 사제는 천천히 웃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마른 표정이었다.

"좋다. 침묵도 때로는 올바른 대답이다."

그는 손짓했다.

"저 아이에게 다섯 번째 판을 보이게 하라. 나부의 견습생은 눈이 가볍다. 어른들이 너무 오래 보아 놓친 것을 아이가 볼 때도 있다."

서하는 그 말이 칭찬이 아니라 시험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이딘이 옆에서 아주 작게 말했다.

"손을 함부로 대지 마라."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하급 서기관 하나가 천에 싸인 점토판을 가져오고 있었다.

다섯 번째 판의 검은 자리

에사길라의 서고는 나부 신전의 사본실과 닮았지만, 더 깊고 무거웠다.

나부 신전의 서고가 글자를 배우고 보존하는 곳이라면, 이곳은 글자가 판결을 기다리는 곳 같았다. 선반은 사람 키보다 높았고, 점토판은 주제와 날짜와 봉인에 따라 나뉘어 있었다. 일부는 신화와 찬가였고, 일부는 제물 장부였다. 별의 움직임을 기록한 판, 꿈의 해석을 적은 판, 질병과 징조를 분류한 판, 토지와 노동자의 목록도 있었다.

서하는 선반 사이를 지나며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은 책을 모아 둔 곳이 아니었다.

도시의 기억이 쌓인 곳이었다.

누가 무엇을 바쳤는지, 어느 날 달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왕이 어떤 신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어떤 땅이 누구의 것인지, 누가 누구에게 빚졌는지. 에사길라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죽어도 점토판은 남았다. 왕이 바뀌어도 봉인은 남았다. 거짓말을 해도 기록이 남으면 진실처럼 굳어질 수 있었다.

그때 서하는 나부-주쿱의 말을 떠올렸다.

신들의 전쟁은 조용히 온다.

장부의 숫자가 하나 어긋난다.

제물 명단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사라진다.

여기라면 가능했다.

칼 한 자루 들지 않고도 사람을 없앨 수 있었다. 이름을 지우고, 배급을 끊고, 상속을 바꾸고, 신에게 바친 목록에서 제외하면 된다. 이 신전은 기도하는 장소를 넘어 지식과 행정과 운명을 통제하는 중심이었다. 그리고 서하는 그 중심의 가장 어두운 선반 앞에 서 있었다.

다섯 번째 판은 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그것이 놓이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하급 서기관은 천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나이 든 사제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마치 점토판이 병든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가 거리를 두었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였다.

일곱 점토판 중 다섯 번째.

에누마 엘리시의 한 부분. 윤서하의 기억 속에서 다섯 번째 판은 하늘의 질서와 관련된 내용이 담긴 판이었다. 별자리와 달, 시간의 구분, 밤과 낮의 길. 마르둑이 혼돈을 이긴 뒤 세계를 단순히 만든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법칙을 정하는 장면.

그러나 눈앞의 판은 완전하지 않았다.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부분이 결락되어 있었다. 결락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점토판은 깨지고 닳고 불에 그을릴 수 있었다. 수천 년 후의 박물관에서 서하는 그런 상처를 수도 없이 보았다.

문제는 이 검은색이었다.

그곳은 단순히 타지 않았다.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주변 점토는 붉은 갈색이었지만, 결락 부위는 깊은 우물처럼 검었다. 불에 그을린 흔적이라면 가장자리가 갈라지거나 재가 묻어야 했다. 그런데 이 검은 자리는 매끈하면서도 거칠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표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구멍이 뚫린 것 같기도 했다.

서하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신-이딘의 경고가 떠올랐다.

손을 함부로 대지 마라.

"읽어 보아라."

사제가 말했다.

서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판의 앞부분은 읽을 수 있었다. 쐐기문자는 벨-에테르의 몸이 배운 방식으로 눈에 들어왔고, 윤서하의 지식이 그 의미를 맞추었다. 별의 자리를 정하고, 한 해의 문을 세우고, 달에게 밤을 맡긴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장이 검은 결락 앞에서 끊겼다.

그녀는 결락 다음 줄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했다.

문장이 이어져야 하는데 이어지지 않았다. 단순히 몇 글자가 빠진 것이 아니었다. 빠진 자리에 있어야 할 의미 전체가 사라진 듯했다. 앞뒤 문장은 서로를 모르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서하의 관자놀이가 아팠다.

검은 부분을 오래 볼수록 눈앞에 물결이 생겼다. 어두운 표면 안에서 아주 작은 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별 같았다. 그러나 별이라기에는 너무 검었다. 빛나는 점이 아니라,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난 구멍들이었다.

그때 그녀는 들었다.

사각.

사각.

누군가 젖은 점토 위에 갈대를 누르는 소리.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서고의 다른 서기관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누구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소리는 계속 들렸다.

사각.

사각.

그 소리는 점토판에서 나오고 있었다.

검은 결락의 안쪽에서.

서하의 손목이 뜨거워졌다. 팔찌의 매듭 아래, 샘 기호가 살을 파고드는 듯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검은 자리가 천천히 번졌다.

아니, 실제로 번지는 것은 아니었다. 서하의 시야가 그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결락의 가장자리에서 희미한 선들이 나타났다. 쐐기문자 같기도 하고, 물결 같기도 했다. 그녀는 무심코 그 선을 읽으려 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문장이 떠올랐다.

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서하는 숨을 멈췄다.

그것은 첫날 밤 점토판에서 보았던 문장이었다. 그녀를 이 세계로 끌고 온 문장. 빈칸에 적었던, 있어서는 안 될 구절.

"무엇을 보았느냐?"

사제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서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이 든 사제가 어느새 그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다섯 번째 판보다 더 어두웠다.

"결락입니다."

서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모두가 본다."

"검게 탔습니다. 하지만 불에 탄 흔적은 아닙니다."

방 안의 서기관 몇 명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럼 무엇에 탔다고 생각하느냐?"

서하는 대답을 고르려 했다. 모른다고 말하면 안전할까. 너무 많이 보았다고 말하면 위험할까.

그녀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름이 빠져나간 자리 같습니다."

말하고 나서야 서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서고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일루-타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신-이딘은 눈을 감았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듯이.

나이 든 사제만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나부의 아이는 눈이 가볍다 했더니, 혀도 가볍구나."

서하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때로는 가벼운 혀가 무거운 봉인을 건드린다."

사제는 다섯 번째 판 위에 천을 덮었다.

그 순간 서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천이 검은 결락 위를 지나갈 때, 천의 그림자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부분이 천 위로 그림자를 올려 보냈다. 빛의 방향을 거스르는 어둠.

사제가 말했다.

"아키투 전에 이 판은 완전해야 한다. 완전하지 않은 서사를 낭송할 수는 없다. 왕은 왕좌에서 새해를 맞아야 하고, 마르둑의 이름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는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우리는 잃어버린 부분을 찾아야 한다."

서하는 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결락이 단순한 손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그 결락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저는 견습생일 뿐입니다."

"견습생은 배운다. 배운 자는 쓴다. 쓴 자는 세계의 무게를 조금 나누어 든다."

사제는 손을 들어 서고 안쪽의 어두운 문을 가리켰다.

"아래로 가라. 오래된 물로 판을 식혀야 한다."

신-이딘이 즉시 끼어들었다.

"그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사제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갔다.

"너는 벽돌과 유약을 다룬다, 신-이딘. 물의 이름을 듣는 것은 서기관의 일이다."

"저 아이는 아직—"

"아직이기에 듣는다."

사제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반박을 허락하지 않는 힘이 있었다.

일루-타비가 서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손이 차갑게 떨렸다.

"가지 마."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팔찌의 샘 기호가 다시 조여들었다. 이번에는 분명한 방향이 있었다. 아래로. 땅속으로. 에사길라의 바닥 밑, 도시의 기록보다 오래된 곳으로.

운명을 보관하는 집

지하로 내려가기 전, 서하는 짧은 시간 동안 대기실에 머물렀다.

사제들은 다섯 번째 판을 다시 천으로 싸고, 봉인을 준비했다. 그 과정도 의식처럼 엄격했다. 젖은 진흙을 바르고, 원통 인장을 굴리고, 누가 봉했는지 큰 소리로 확인했다. 단순한 보관이 아니었다. 점토판의 이동 하나에도 증인이 필요했고, 그 증인은 다시 기록되었다.

서하는 그 장면을 보며 머리가 차갑게 맑아졌다.

에사길라는 힘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절차로 만들었다. 누가 무엇을 만졌는지, 누가 어느 방에 들어갔는지, 어떤 문장이 낭송될 자격이 있는지, 어떤 이름이 장부에 남을 수 있는지. 이곳의 권력은 칼보다 느리지만 더 오래갔다.

칼은 몸을 베지만, 기록은 시간을 베었다.

사람은 죽어도 장부는 그를 계속 빚진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다. 왕은 살아 있어도 신전의 의례가 그를 인정하지 않으면 왕좌 위에서 흔들릴 수 있었다. 신화의 빈칸 하나는 하늘의 질서를 의심하게 만들고, 제물 명단의 누락 하나는 가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

서하는 처음으로 이 세계의 진짜 무서움을 보았다.

괴물은 거리의 벽돌 눈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괴물은 질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유약 벽돌, 정갈한 점토판, 깨끗한 물그릇, 정확한 봉인. 그것들이 모여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신-이딘이 가까이 다가왔다. 사제들이 보지 않는 틈을 골라 그는 아주 낮게 말했다.

"아래에서 물소리가 들리면 대답하지 마라."

서하는 그를 보았다.

"왜 모두 이름에 대해 같은 말을 하죠?"

"이 도시가 이름으로 세워졌으니까."

그는 푸른 안료가 묻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이름은 목소리로 나오지만, 한번 나오면 네 몸 밖에 남는다. 누가 주워 갈 수 있다는 뜻이지."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신-이딘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서하는 그가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벽돌을 굽고 유약을 칠하는 사람의 손을 가졌지만, 눈은 너무 많은 금지된 것을 본 사람의 눈이었다.

"이슈타르 문의 무슈후슈 눈을 손보던 날, 푸른 유약 아래에서 검은 자국을 보았다. 오늘 네가 본 판과 같은 색이었다."

서하의 숨이 멎을 듯했다.

"문 아래에도 결락이 있습니까?"

"문에는 글자가 없다."

그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글자만 지워지는 것은 아니지."

그 말의 뜻을 묻기도 전에, 하급 사제가 다가왔다.

"시간이 되었다."

신-이딘은 물러났다. 그러나 지나치며 서하의 손에 작은 것을 쥐여 주었다. 납작한 유약 조각이었다. 푸른 표면에 아주 작은 용의 비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빛이 모두 사라지는 곳에서만 보이는 색이 있다."

그는 그 말만 남겼다.

서하는 조각을 손안에 숨겼다.

일루-타비는 끝까지 따라가려 했지만, 지하 계단 앞에서 막혔다. 그는 문지기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서하를 향해 소리 없는 입모양을 만들었다.

돌아와.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 약속을 믿지 못했다.

나이 든 사제가 앞장섰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서하도 묻지 않았다. 질문은 빚이라는 일루-타비의 말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계단은 좁고 깊었다.

위쪽의 향 냄새와 빵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젖은 흙과 오래된 벽돌 냄새가 올라왔다.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새겨진 작은 홈들이 움직이는 글자처럼 보였다. 몇몇은 배수로 표시였고, 몇몇은 오래된 봉인 자국이었다. 그러나 어떤 흔적은 글자도 문양도 아니었다. 물이 오랜 세월 핥고 지나간 자국, 돌이 숨을 쉰 것 같은 균열.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소리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발소리뿐이었다. 그 다음에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 내려가자 그 물방울들은 서로 이어져 낮은 흐름이 되었다. 마치 땅속 어딘가에 작은 강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사제가 말했다.

"에사길라는 위로만 세워지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사람들은 지구라트를 보고 하늘을 생각한다. 그러나 신의 집은 아래로도 뿌리를 내린다. 위에는 하늘의 문이 있고, 아래에는 오래된 물의 기억이 있다."

"압수..."

서하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사제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 이름을 어디서 배웠느냐?"

서하는 바로 후회했다.

압수.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땅 아래의 원초적 민물, 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깊은 물. 윤서하에게는 책에서 배운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 함부로 꺼내도 되는 단어가 아니었다.

"나부 신전에서 들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마 벨-에테르도 언젠가 들었을 것이다.

사제는 한참 그녀를 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이름은 조심해서 불러야 한다. 신들의 계보에 적힌 이름이라 해도, 너무 오래된 것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

계단은 마지막으로 급하게 꺾였다. 그 아래에 낮은 방이 있었다. 천장은 둥글었고, 벽돌 사이로 습기가 배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돌로 둘러싼 검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우물이라고 하기에는 넓고,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깊었다. 등불빛이 닿았지만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소리는 계속 났다.

흐르는 소리.

아주 먼 곳에서 많은 물이 지나가는 소리.

사제는 봉인된 다섯 번째 판을 돌 받침 위에 놓았다. 직접 물에 닿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낮은 주문을 외우며 물 위로 손을 지나가게 했다.

"불이 먹은 자리를 물이 기억하게 하라. 잃은 이름이 제자리를 찾게 하라. 거짓된 혀가 낭송자의 입에 오르지 않게 하라."

서하는 그 주문 속에서 이상한 모순을 느꼈다.

잃은 이름을 찾는다는 말은 선하게 들렸다. 그러나 누가 잃었고, 누가 찾으며, 찾은 이름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이 도시에서 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운명을 다시 쥔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사제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손을 물 위에 두어라."

서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제가 해야 합니까?"

사제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질문은 빚.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말했다.

"검은 결락이 네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물은 모든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잊힌 이름이 가까이 오면 흔들린다."

"제 이름은 잊힌 적 없습니다."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제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짜 흥미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좋겠구나."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손을 물 위로 가져갔다.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찔렀다. 물에 닿지 않았는데도 손가락 끝이 젖는 것 같았다.

팔찌가 조여들었다.

샘 기호가 뜨거워졌다.

물의 표면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원이었다. 그 원이 넓어지고, 다시 갈라졌다. 등불빛이 물 위에서 길게 찢어졌다. 서하는 그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벨-에테르의 얼굴을 보았다.

짙은 눈, 어린 턱선, 햇빛에 그을린 피부. 나부 신전의 견습생. 이 시대의 기록에 적힌 아이.

물결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이번에는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윤서하.

박물관 수장고의 창백한 형광등 아래에서 밤을 새우던 얼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 눈 밑이 어둡고, 손가락 끝에 현대의 펜 자국이 묻어 있던 얼굴. 이 도시의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얼굴.

서하는 숨을 들이켰다.

그때 물소리가 말이 되었다.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웅얼거림이었다. 오래된 배수로를 지나는 바람 소리, 항아리 속에 갇힌 파도 소리 같았다. 그러다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다.

벨-에테르.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은 다시 속삭였다.

벨-에테르.

사제가 옆에서 숨을 멈춘 것이 느껴졌다. 그는 아마 그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이 도시가 아는 이름. 신전 장부에 적힌 이름.

그러나 세 번째 속삭임은 달랐다.

윤서하.

그 이름이 지하 방에 떨어지는 순간, 등불 세 개가 동시에 꺼졌다.

어둠이 물처럼 차올랐다.

사제가 처음으로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누가 그 이름을—"

말이 끝나기 전에 검은 물 위로 푸른 선이 떠올랐다. 신-이딘이 준 유약 조각이 서하의 손안에서 뜨겁게 빛났다. 용의 비늘 무늬가 손바닥에 그림자를 찍었다. 팔찌의 샘 기호와 점토 파편의 기억, 다섯 번째 판의 검은 결락이 한순간에 서로 맞물리는 느낌이 들었다.

물속에서 또 다른 소리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속삭임이 아니었다.

아주 먼 곳에서, 거대한 점토판 위에 갈대가 눌리는 소리.

사각.

사각.

사각.

그리고 물이 말했다.

윤서하.

잃어버린 줄을 읽어라.

서하는 손을 거두려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힘이 손목을 붙잡았다. 물에 닿지도 않았는데, 차가운 손가락들이 그녀의 피부를 감싸는 것 같았다. 검은 수면 아래에서 별 없는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그 하늘 한가운데에 다섯 번째 판의 결락이 떠올랐다.

불에 탄 자리가 아니었다.

문이었다.

그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웃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아니, 너무 오래 잊힌 이름들이 한꺼번에 숨을 쉬고 있었다.

서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대답하면 안 된다. 이름을 내주면 안 된다. 하지만 물은 이미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윤서하. 이 세계의 어느 장부에도 없는 이름. 그 이름이 에사길라의 지하, 압수의 물소리 속에서 불렸다.

그 순간, 봉인된 다섯 번째 판의 천 위로 검은 얼룩이 번졌다.

사제는 뒷걸음질쳤다.

서하는 물속의 자기 얼굴을 보았다. 벨-에테르와 윤서하가 겹쳐지고, 다시 갈라졌다. 두 얼굴 사이로 낯선 쐐기문자가 떠올랐다.

나부의 붓이 거짓을 쓸 때, 왕의 해는 피로 시작되리라.

문장은 물결에 흔들리더니 사라졌다.

위쪽 어딘가에서 북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번에는 축제 연습이 아니었다.

에사길라 전체가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마르둑의 아침을 먹인 사제들도, 서고의 서기관들도, 문 앞의 경비들도, 지구라트 계단 위의 사람들도.

서하는 마침내 손을 거두었다. 손바닥에는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대신 푸른 유약 조각의 비늘 무늬가 살갗에 새겨져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인장처럼.

어둠 속에서 사제가 낮게 말했다.

"그 이름..."

서하는 그가 어떤 이름을 말하려는지 알았다.

벨-에테르일까.

윤서하일까.

아니면 물속에서 아직 완전히 올라오지 않은, 잊힌 어떤 이름일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지하 깊은 곳에서 다시 물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웠다. 마치 에사길라의 바닥 아래에서 거대한 강이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물소리 사이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다섯 번째 판은 타지 않았다.

누군가 먼저 읽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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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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