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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포함된 노트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균열의 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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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흔들리지 않는 아침

아침의 바빌론은 놀랄 만큼 평온했다.

서하는 그 점이 오히려 두려웠다. 지난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본실에서 무슈후슈의 눈이 깜박이고 점토판의 푸른빛이 심장처럼 뛰었던 그 순간 이후, 세상은 당연히 달라져 있어야 했다. 하늘이 뒤집히거나, 신전 벽이 갈라지거나,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문장을 중얼거리는 일쯤은 일어날 법했다.

하지만 창밖에서는 평소처럼 물장수가 지나갔다. 당나귀 목에 매단 방울이 딸랑였고, 빵 굽는 냄새가 골목을 채웠다. 햇볕은 흙벽돌 지붕 위에 얇은 금가루처럼 내려앉았다. 멀리 지구라트의 층계는 어제와 다르지 않게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문제는 모든 것이 너무 멀쩡하다는 데 있었다.

서하는 작업대 앞에 앉아 젖은 점토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몸은 벨-에테르의 습관을 기억했다. 손가락은 적당한 두께를 알고 있었고, 손목은 갈대 필기구를 어느 각도로 세워야 쐐기가 깔끔하게 찍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기묘했다. 윤서하의 머릿속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현대 연구자의 의심으로 가득한데, 벨-에테르의 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의 과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부-주쿱은 아침 내내 말이 적었다.

그는 원래 잔소리가 많은 사람이었다. 점토가 너무 질다, 갈대를 너무 깊이 눌렀다, 글자는 사람의 숨과 같으니 흐트러지지 말라.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는 서하가 쓴 점토판을 훑어보고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꾸중보다 무거웠다.

"스승님."

서하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나부-주쿱의 손이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오늘은 사본실 이야기를 하지 마라."

서하는 갈대 필기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주변을 살폈다. 같은 방 안에는 다른 견습생 둘이 앉아 있었고, 문가에는 신전에 바칠 보리 장부를 들고 온 하급 관리가 서 있었다. 그들은 각자 일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서하는 그들의 귀가 이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제까지는 아무도 벨-에테르를 이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

벨-에테르는 그저 어린 견습생이었다. 글자를 배우는 아이, 가끔 실수하고 꾸중을 듣는 아이, 대추야자를 좋아하고 긴 찬가 베끼기를 싫어하는 아이. 그런데 지금 방 안의 눈빛은 조금 달랐다. 서하가 고개를 들면 사람들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손을 움직이면 누군가 숨을 삼켰다. 마치 그녀가 실수로 귀한 그릇을 깨뜨릴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릇 안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올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때 나부-주쿱이 낮게 말했다.

"벨-에테르. 오늘 네 이름이 몇 번 불렸는지 세어 보았느냐?"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이상하다고 느낀 것의 정체가 그제야 선명해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직접 부르지 않았다. 물을 가져오라는 말도, 판을 옮기라는 말도, 가까운 견습생을 통해 전했다. 이름을 불러야 할 때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다른 말로 바꾸었다.

아이야. 너. 거기.

벨-에테르라는 이름이 방 안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윤서하라는 이름은, 이 도시에서 그녀 혼자만 알고 있었다.

유프라테스 강가의 낯선 몸

달라진 눈빛들

점심 무렵, 서하는 심부름을 핑계로 신전 바깥에 나갔다.

나부 신전의 문턱을 넘자 도시의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시장은 아키투 축제를 앞두고 더 북적였다. 새해의 의례를 위해 바쳐질 양들이 끌려가고, 향유를 파는 상인들은 작은 항아리의 마개를 열어 향을 맡게 했다. 염색한 천들이 줄에 걸려 바람에 흔들렸고, 구운 생선과 납작빵 냄새가 뜨겁게 섞였다.

서하는 한동안 그 풍경에 압도되었다.

책 속에서만 보던 도시가 살아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신화 속 배경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세금을 걱정했고, 누군가는 빚을 갚지 못해 얼굴이 어두웠고, 누군가는 축제 때 입을 새 옷을 만지며 웃었다. 신들의 이름이 모든 거리 위에 걸려 있었지만, 사람들의 하루는 빵과 물과 거래와 소문으로 굴러갔다.

그러나 평온은 얇았다.

서하가 시장 골목을 지날 때,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이 이상하게 일렁였다. 낮인데도 물속에는 별이 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별빛은 곧 사라지고, 흙탕물에는 지나가는 염소의 다리만 비쳤다.

조금 뒤에는 유약 벽돌을 파는 가게 앞에서 같은 문양을 보았다. 푸른 벽돌 위에 새겨진 무슈후슈가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장식품이라고 하기에는 용의 눈이 지나치게 깊었다. 서하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눈동자처럼 보이는 홈 안에서 아주 작은 푸른빛이 스쳤다.

벽돌 가게 주인이 서하를 흘끗 보았다.

"그건 손대지 마라, 나부의 아이야. 용의 눈을 다시 칠하는 일은 장난감 고르는 일이 아니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가 칠합니까?"

주인은 대답을 피하려는 듯 푸른 안료 항아리의 뚜껑을 닫았다. 그러나 바로 옆 수레에서 벽돌을 나르던 장인이 무심코 말했다.

"신-이딘이지. 이슈타르 문의 용 눈을 고치는 손은 그 사람뿐이야. 오늘도 문 쪽으로 불려 갔다던가."

신-이딘.

서하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 눌러 두었다. 용의 눈을 만지는 사람이라면, 무슈후슈의 눈에 어째서 푸른빛이 도는지 알지도 모른다.

"그건 사지 마라."

등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서하가 돌아보니, 같은 신전의 견습생인 일루-타비가 서 있었다. 벨-에테르보다 두어 살 많은 소년이었다. 이 몸의 기억 속에서 그는 늘 장난스럽고 말이 많았다. 글자보다 소문에 밝고, 꾸중을 들어도 웃어넘기는 아이. 그런데 오늘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왜?" 서하가 물었다.

일루-타비는 벽돌 가게 주인을 흘끗 보더니 그녀의 팔을 잡아 골목 안쪽으로 끌었다.

"너 정말 모르는 척하는 거냐?"

"무엇을?"

"어제 사본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하는 몸을 굳혔다.

일루-타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빠르게 떨렸다.

"밤이 되기 전에 소문이 돌았어. 나부 신전의 어린 견습생이 이름 없는 판을 읽었다고. 에사길라에서 온 봉인 없는 판을 건드렸다고. 그 뒤에 북이 세 번 울렸다고."

"북은 축제 준비 때문에 울린 것일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하늘의 별지기들은 오늘 새벽에 이상한 기록을 남겼대. 달의 위치가 장부와 맞지 않았고, 북쪽 하늘의 별 하나가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고. 왕궁의 기록관들이 그 장부를 가져갔다더라."

서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왕궁에서?"

일루-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빌론에서는 글자가 신전의 것이지만, 봉인은 왕의 것이야. 신전 서기관이 무엇을 적든 왕궁은 그 기록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 알고 싶어 하지. 특히 아키투가 가까울 때는 더."

이 몸의 기억이 그 말을 보충했다.

도시는 신들의 이름으로 움직였지만, 실제 힘은 여러 손에 나뉘어 있었다. 에사길라의 마르둑 사제들은 축제와 의례를 쥐고 있었고, 나부 신전의 서기관들은 기록과 해석을 맡았다. 왕궁 관리들은 곡물, 군사, 세금을 관리했다. 어느 한쪽도 홀로 도시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서로 협력했고, 동시에 서로를 감시했다.

서하는 이제야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단지 이상한 점토판을 읽은 아이가 아니었다. 이름 없는 판본을 읽은 나부의 견습생이었다. 그것도 마르둑의 축제를 앞둔 시기에.

이 도시에서 그런 일은 개인적인 사건으로 남을 수 없었다.

이름을 적는 도시

일루-타비는 더 말하지 않으려 했다. 겁이 난 듯했다. 그는 서하에게 시장의 남쪽길로는 가지 말라고만 하고, 신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서하는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골목을 따라 걸으며 도시를 관찰했다. 어제까지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낯선 몸, 낯선 언어, 낯선 시대. 그러나 이제는 봐야 했다. 이곳이 어떤 규칙으로 움직이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무엇에 휘말렸는지, 누가 그녀를 이용하려는지 판단할 수 있었다.

바빌론은 이름을 적는 도시였다.

상인은 항아리 목에 진흙 표식을 달아 누구의 기름인지 표시했다. 세금 관리들은 곡물 자루의 수를 점토판에 찍고, 빚을 진 사람은 자신의 인장을 굴려 약속을 남겼다. 신전 문 앞에는 오늘 바쳐진 제물의 목록이 걸렸고, 왕궁에서 나온 명령은 봉인이 깨지기 전까지 아무도 읽을 수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과 비슷했다.

그 사실이 서하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윤서하는 이 도시의 어느 점토판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의 출생, 가족, 학위, 연구실, 모든 것이 이 세계의 기록 바깥에 있었다. 반면 벨-에테르는 신전 장부 어딘가에 적혀 있을 것이다. 나부 신전의 견습생. 스승은 나부-주쿱. 배급받는 보리의 양. 맡은 과제. 어쩌면 부모의 이름까지.

이 도시가 그녀를 인정하는 방식은 벨-에테르뿐이었다.

윤서하라는 이름을 지키려면, 먼저 벨-에테르의 자리를 이용해야 했다.

그때 거리 끝에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축제 때 부르는 노래 같았다. 가락은 밝았지만, 가사는 묘하게 불길했다.

"이름 없는 물이 올라오면, 누가 하늘의 문을 닫을까. 용의 눈이 세 번 뜨면, 낡은 왕좌가 흔들리네."

서하는 걸음을 멈췄다.

아이들은 뜻도 모르고 부르는 듯했다. 서로 밀치며 웃고, 마지막 구절에서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괴물 흉내를 냈다. 하지만 서하의 귀에는 그 노래가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 노래 누가 가르쳐 줬니?"

그녀가 묻자 아이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가장 키가 작은 아이가 대답하려다가, 옆의 아이가 팔꿈치로 찔렀다. 그러고는 모두 좁은 골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서하는 그들이 사라진 길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소문은 대개 아이들의 노래가 되어 살아남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제는 부정하고, 왕궁은 금지하고, 서기관은 기록하지 않는 말들이 아이들의 입에서 장난처럼 이어진다.

이름 없는 물.

용의 눈.

낡은 왕좌.

그 단어들은 우연히 겹친 것이 아니었다.

서하는 손목의 낡은 끈 팔찌를 만졌다. 벨-에테르의 기억 속에서 그 팔찌는 오래전부터 차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매듭의 모양이 이상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작은 기호처럼 보였다. 두 줄이 교차하고, 한 줄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모양.

운명의 서판 문양의 귀퉁이에 있던 표식과 닮아 있었다.

서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 몸도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나부-주쿱의 경고

신전으로 돌아왔을 때, 나부-주쿱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서하를 작업실 뒤편의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말린 점토와 갈대 필기구를 보관하는 창고였다. 문이 닫히자 바깥 소리가 둔하게 멀어졌다.

나부-주쿱은 한동안 서하를 바라보았다.

"시장에 갔더구나."

"심부름이 있었습니다."

"심부름보다 눈이 먼저 갔겠지."

서하는 변명하지 않았다. 나부-주쿱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는 꾸중보다 피로가 많았다.

"벨-에테르, 잘 들어라. 어떤 글자는 읽는 순간 네 것이 된다. 그리고 어떤 글자는 네가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것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것이라니요?"

"사제들은 그것을 계시라 부를 것이다. 왕궁은 징조라 부를 것이다. 별지기들은 하늘의 오차라 부를 것이고, 장사꾼들은 축제 전의 소문으로 팔아먹을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는?"

그는 서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너에게는 목에 걸린 돌이 된다."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부-주쿱의 말은 냉정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걱정이 있었다. 이 사람은 무엇인가 알고 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름 없는 판본이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판본은 무엇입니까?"

나부-주쿱의 얼굴이 굳었다.

"묻지 마라."

"이미 읽었습니다."

"그래서 묻지 말라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오래전부터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마르둑께서 티아마트의 혼돈을 가르고 세상에 자리를 주셨을 때, 모든 이름이 제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고. 불리지 못한 이름, 지워진 이름, 불렸으나 누구의 것인지 잊힌 이름들이 어둠의 틈에 남았다고."

서하는 몸을 움츠렸다.

"그게 신들의 전쟁과 관련이 있습니까?"

나부-주쿱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 문장까지 읽었구나."

대답은 필요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들의 전쟁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강이 피로 변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조용히 온다. 장부의 숫자가 하나 어긋난다. 왕의 이름을 새긴 봉인이 깨진다. 제물 명단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사라진다. 어제까지 아들이던 사람이 오늘은 아무 기록도 없는 사람이 된다."

서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본실에서 본 푸른빛보다 더 차가운 공포를 느꼈다.

이 세계에서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가 흔들린다는 뜻이었다. 윤서하에게 그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두 이름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한쪽은 이 도시의 기록에 있고, 다른 한쪽은 오직 그녀의 기억에만 있었다.

나부-주쿱은 벽의 작은 틈으로 바깥을 확인한 뒤, 품속에서 작은 점토 조각을 꺼냈다. 손톱만 한 파편이었다. 표면에는 제대로 된 문장 대신 세 개의 기호만 찍혀 있었다.

용.

문.

샘.

서하는 그것을 읽자마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내 스승이 남긴 것이다. 그는 평생 이름 없는 판본을 추적했다. 그러다 어느 해 아키투 전에 사라졌다. 기록에는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나는 그의 장례를 본 적이 없다."

나부-주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다. 용의 문 아래, 물이 이름을 기억한다고."

용의 문.

서하는 시장에서 본 푸른 유약 벽돌과 아이들의 노래, 그리고 신-이딘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무슈후슈가 새겨진 성문. 바빌론의 북쪽으로 이어지는 큰 길. 축제 행렬이 지나가는 길.

"이슈타르 문입니까?"

나부-주쿱은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벨-에테르라면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하는 현대의 지식과 이 몸의 기억이 뒤섞인 덕분에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함부로 가까이 가지 마라. 그곳은 왕궁의 눈이 많은 곳이다. 그리고 축제 전에는 에사길라의 사제들도 그 길을 살핀다."

"그런데 왜 제게 이것을 주십니까?"

나부-주쿱은 한참 침묵했다.

"네가 이미 문장을 깨웠으니까."

그 말은 꾸중도 원망도 아니었다. 인정에 가까웠다. 서하는 작은 파편을 손안에 감쌌다. 점토 조각은 놀랄 만큼 따뜻했다.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나부-주쿱이 말했다. "그때 네가 지키려는 이름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네 이름인지, 네가 빌린 이름인지, 아니면 아직 불리지 않은 누군가의 이름인지."

서하는 심장이 한 번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나부-주쿱은 알고 있는 걸까. 그녀가 벨-에테르가 아니라는 것을. 아니면 그저 오래된 소문을 너무 많이 들은 늙은 서기관의 직감일까.

그녀가 묻기도 전에 그는 문을 열었다.

"오늘 밤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 특히 혼자 움직이지 마라."

그 말은 경고였다.

그리고 서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위험한 경고는, 대개 지키기 어려운 순간에 주어진다는 것을.

단서를 정리하는 밤

그날 밤, 서하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신전 견습생들이 쓰는 좁은 방에는 갈대 매트가 줄지어 깔려 있었다. 아이들은 하루의 피로에 눌려 금세 잠들었다. 누군가는 코를 골았고, 누군가는 꿈속에서 스승의 꾸중을 듣는지 작은 신음을 냈다. 달빛은 벽의 틈으로 들어와 바닥에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

서하는 매트 위에 앉아 작은 점토 조각을 앞에 놓았다.

머릿속의 혼란을 그냥 두면 공포가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연구자였던 방식으로 돌아갔다. 단서를 나누고, 관계를 살피고, 아직 모르는 부분을 표시했다. 노트북도 펜도 없었지만, 젖은 점토 조각 하나와 갈대 끝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작은 판 위에 조심스럽게 기호를 찍었다.

무슈후슈. 운명의 서판. 이름 없는 판본. 하늘 위에 이름이 없을 때. 이름을 기억하는 자. 신들의 전쟁. 용의 문. 물이 이름을 기억한다. 신-이딘.

단어들이 점토 위에 놓이자, 사건은 조금 덜 괴물처럼 보였다. 아직 알 수 없는 것이 많았지만, 적어도 흐름은 있었다.

첫째, 그녀는 현대의 연구실에서 빈 구절을 채웠고 그 직후 이곳으로 왔다. 둘째, 이곳의 고대 점토판에는 그녀가 적은 문장이 이미 새겨져 있었다. 셋째, 그 문장을 읽은 뒤 도시 곳곳에 작은 이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넷째, 신전과 왕궁, 에사길라의 사제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그 판본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다섯째.

벨-에테르의 몸에는 처음부터 이 일과 연결된 흔적이 있었다.

서하는 손목의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낡은 끈은 평범해 보였지만, 매듭의 표식은 우연으로 넘기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 모양을 점토판 한쪽에 따라 찍었다. 그러자 파편 위의 세 기호 가운데 '샘'을 뜻하는 기호가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서하는 숨을 멈췄다.

빛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사본실에서 보았던 푸른빛과 같은 색이었다.

바깥에서 북소리가 한 번 울렸다.

축제 연습일 수도 있었다. 야간 경비의 신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하는 이제 우연이라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나부-주쿱은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경고였다. 그는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그도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의 스승, 이름 없는 판본, 용의 문 아래의 물. 숨긴 것이 너무 많았다.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설명해 줄까?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 이름은 적는 자의 것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대신 적게 두면, 그 순간부터 그녀의 운명도 다른 사람의 점토판 위에 놓일 것이다.

서하는 마지막으로 점토판 아래에 두 이름을 나란히 찍었다.

벨-에테르.

그리고 이 도시의 글자로 옮길 수 없는 이름, 윤서하.

두 번째 이름은 정확한 쐐기문자가 아니었다. 한국어의 소리를 억지로 이 세계의 기호에 맞춘 어색한 표기였다. 그래도 서하는 그것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나는 아직 여기 있어."

그 순간 손목의 팔찌가 아주 미세하게 조여들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누군가 멀리서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는 것처럼, 짧고 분명한 압력이었다. 동시에 점토 파편의 세 기호가 다시 떠올랐다.

용.

문.

샘.

서하는 결정을 내렸다.

날이 밝으면 그녀는 이슈타르 문으로 갈 것이다. 왕궁의 눈이 있든, 에사길라의 사제들이 지켜보든, 그곳으로 가야 했다. 푸른 유약 벽돌에 새겨진 무슈후슈의 아래, 오래된 물이 정말 이름을 기억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시장 골목에서 장인이 무심코 흘린 이름. 축제 행렬을 위해 용의 눈을 다시 칠한다는 장인, 신-이딘. 그는 이슈타르 문의 유약 벽돌을 손본다고 했다. 무슈후슈의 눈에 푸른빛이 도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일 것이다.

서하는 점토판을 천 조각에 싸서 품 안에 숨겼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서하는 몸을 굳혔다. 잠든 줄 알았던 일루-타비가 반쯤 눈을 뜨고 있었다.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서하를 바라보다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의 문에는 혼자 가지 마."

"왜?"

일루-타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사람처럼 입술만 떨었다. 한참 뒤에야 그는 이불을 끌어올리며 속삭였다.

"거기서는 이름을 부르면 안 돼."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서하는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창틈으로 들어온 달빛이 조금씩 기울었다. 도시의 밤은 평온해 보였고, 멀리서 들리는 북소리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하는 알았다.

균열은 이미 생겼다.

아직 벽이 무너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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