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울린 뒤
종이 한 번 더 울릴 것처럼, 마을은 밤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낡은 종탑의 그림자는 광장 한가운데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다. 낮이면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노인들이 햇볕을 등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 광장에는 발자국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처마 끝의 작은 금속 장식 소리, 멀리 개가 한 번 짖고 곧바로 입을 다무는 소리만이 서로의 눈치를 보듯 흩어졌다.
서윤은 회관 앞 계단에 서서 그 침묵을 들었다. 침묵에도 모양이 있다면, 오늘 밤의 침묵은 금이 간 그릇 같았다. 겉으로는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손끝 하나만 닿아도 조각조각 흩어질 것 같았다.
어젯밤, 경계선 근처의 봉인석이 갈라졌다.
정확히는 갈라진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돌이 낡아서 생긴 자연스러운 균열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누가 일부러 손을 댄 흔적이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불길하다며 입을 막았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봉인석의 표면에 새겨져 있던 오래된 문양 일부가 사라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앞에서 발견된 낡은 천 조각이 마을 사람 중 누군가의 것이라는 것을.
문제는 천 조각만이 아니었다.
회관 보관함에 있던 경계 기록부가 사라졌다. 마을의 가장 오래된 약속, 경계선 너머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맹세의 첫 문장이 적힌 기록이었다. 그 기록부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빈 자리에는 먼지가 남아 있었고, 누군가 급하게 꺼내 간 듯 모서리가 쓸린 자국도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처음에는 불안이었다. 그다음은 의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의심은 각자의 입술 뒤에 숨어 서로를 찌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윤은 계단 아래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낮에는 서로의 안부를 묻던 이들이었다. 감자를 나누고, 지붕 수리를 도와주고, 아픈 아이의 약을 대신 받아다 주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어깨와 어깨 사이에 밤보다 더 짙은 거리가 생겨 있었다.
"이렇게 모여 있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말을 꺼낸 사람은 방앗간 주인 태오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회관 문에 기대 서 있었다. 입가에는 비웃음인지 피로인지 모를 선이 잡혀 있었다.
"기록부가 없어진 건 사실이고, 봉인석에 손댄 흔적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찾아야죠. 누가 가져갔는지. 누가 그 밤에 경계선에 있었는지."
"말은 쉽지."
이번에는 약초상을 하는 은주가 낮게 말했다. 그녀는 두 손을 앞치마 안에 묻고 있었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감추려는 듯했다.
"누굴 의심하자는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한 명씩 세워 놓고?"
"그게 싫으면 그냥 기다립니까? 다음엔 뭐가 사라질지 모르는데?"
태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광장 끝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말리는 순간 자신이 어느 편에 서는지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서윤은 그 사실이 더 무서웠다. 사람들은 아직 서로를 향해 크게 소리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선을 긋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우리, 저기부터는 너희.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마을 한복판에 새로 그어지고 있었다.
그때 회관 안쪽에서 이장 한재가 나왔다. 그는 평소보다 더 늙어 보였다. 늘 단정하게 빗어 넘기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손에는 오래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열쇠들이 서로 부딪치며 작고 건조한 소리를 냈다.
"그만들 하게."
한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광장을 가로질렀다.
"지금 필요한 건 소란이 아니야. 기록부는 찾을 것이고, 봉인석도 아침이 되면 다시 살필 걸세. 밤이 깊었으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
"집으로 돌아가서 뭘 하라는 겁니까?" 태오가 물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이웃 발소리를 세라는 겁니까?"
한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했다. 서윤은 그 순간 태오의 얼굴에 스친 감정을 보았다. 분노가 아니었다. 실망에 가까웠다. 오래 참고 있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손잡이를 놓친 표정이었다.
"이장님은 알고 계시죠."
광장 뒤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도윤이었다. 그는 그림자 속에 서 있었고, 얼굴 절반이 종탑의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기록부가 왜 중요한지. 봉인석의 균열이 단순한 돌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요."
사람들이 도윤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너무 곧았다. 조용한 칼날처럼 모두의 귀에 닿았다.
한재의 손에 들린 열쇠 꾸러미가 한 번 더 흔들렸다.
"쓸데없는 말을 보태지 마라."
"쓸데없는 말이면 좋겠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하지만 어젯밤 누군가 종을 울렸습니다. 경계선의 종을요. 그 종은 아무 때나 울리는 게 아니잖습니까."
광장에 있던 노인 몇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젊은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경계선의 종. 그 말은 마을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로만 남아 있었다.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이야기, 어른들이 술잔을 비우며 낮게 꺼내는 이야기. 경계가 흔들리면 종이 울리고, 종이 울리면 오래된 약속이 다시 사람을 부른다는 이야기.
서윤은 그 이야기를 싫어했다. 너무 많은 금지가 그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 말라. 묻지 말라. 기억하지 말라. 마을은 늘 그렇게 말해 왔다.
그런데 이제 그 금지의 이유가, 단순한 미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관 안의 낮은 불빛
사람들은 결국 흩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정말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두세 명씩 모여 속삭였고, 몇몇은 회관을 떠나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광장 끝 우물가에 서 있던 아이 하나가 어머니 손에 끌려가며 서윤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질문이 있었다. 어른들이 숨긴 것을 아이들이 먼저 알아챌 때가 있다.
서윤은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등잔 하나만 켜져 있었다. 긴 탁자 위에는 어젯밤 조사하다 만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깨진 봉인석 조각 몇 개, 흙이 묻은 발자국 본을 뜬 종이, 경계 숲에서 주운 마른 나뭇가지, 그리고 문제의 천 조각.
천 조각은 작았다. 손바닥보다도 작고, 가장자리가 거칠게 뜯겨 있었다. 색은 짙은 남색. 마을에서 흔히 입는 작업복 천과 비슷했지만, 자세히 보면 실의 결이 달랐다. 조금 더 촘촘하고, 조금 더 낡았다.
서윤은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 밀고 가면 누군가의 이름에 닿을 것 같았고, 그 이름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곳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이제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아직도 여기 있었구나."
문가에서 미라가 말했다. 서윤의 오랜 친구이자, 마을 학교의 기록 담당이었다. 그녀는 늘 말이 빠르고 걸음도 빨랐지만, 오늘은 문턱을 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잠이 안 와." 서윤이 대답했다.
"누구도 못 잘 거야."
미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회관 안의 공기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아까 태오 아저씨가 네 이름을 말하려다 그만둔 거 알아?"
서윤은 천 조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알아."
"왜 가만히 있었어?"
"뭐라고 해야 했는데?"
미라는 대답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된 습관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서로의 거짓말을 가장 빨리 알아차리고, 서로의 상처를 가장 늦게 건드리는 사이이기도 했다.
"네가 어젯밤 경계선 근처에 갔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어." 미라가 말했다.
서윤의 손끝이 천 조각 위에서 멈췄다.
"누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해."
"서윤아."
미라가 한 걸음 다가왔다. 등잔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눈 밑이 붉었다. 울었거나, 울지 않으려고 오래 버틴 얼굴이었다.
"네가 왜 갔는지 나한테라도 말해 줘. 그래야 내가…"
"네가 뭘?"
미라는 숨을 삼켰다.
"그래야 내가 널 믿는다고 말할 수 있지."
그 말은 조용했지만, 서윤에게는 광장 한복판에서 외친 소리처럼 들렸다. 믿음이라는 말은 이상했다. 보통은 따뜻해야 하는데, 오늘 밤에는 차가운 돌처럼 손에 쥐어졌다. 누군가 믿는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심을 지나와야 했다.
서윤은 천 조각에서 손을 뗐다.
"나는 종소리를 들었어."
"우리도 들었어."
"아니, 그 전에도."
미라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뜻이야?"
"어젯밤 종이 울리기 전, 낮에도 들었어. 아주 작게. 바람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경계 숲 쪽에서 났어."
"왜 말 안 했어?"
서윤은 대답 대신 탁자 모서리를 바라보았다. 손톱으로 오래 긁힌 흔적이 있었다. 회의 때마다 누군가 지루함을 견디며 남겼을 상처였다. 별것 아닌 흔적도 시간이 지나면 기록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이 외면한 것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증거가 될 것이다.
"말하면 내가 그 소리를 따라갔다는 것도 말해야 했으니까."
미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너 혼자?"
"응."
"왜?"
서윤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가 아니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며칠 전부터 반복되던 꿈 때문이기도 했다. 꿈속에서 누군가 경계선 너머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서윤은 경계선을 두려워하면서도 늘 그곳을 궁금해했다. 마을 사람들이 금지한 곳. 오래된 약속이 닫아 둔 곳. 누구도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 곳. 그곳에 대한 질문을 할 때마다 어른들은 표정을 바꾸었고, 대답 대신 다른 일을 시켰다. 그런 침묵 속에서 서윤의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뿌리를 내렸다.
"알고 싶었어."
그 말은 너무 단순해서, 말하고 나니 더 부끄러웠다.
미라는 웃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았다. 다만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럼 봤어?"
"뭘?"
"경계선에서."
서윤은 어젯밤을 떠올렸다. 달빛이 낮게 깔린 숲길. 축축한 흙냄새.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봉인석 앞에 서 있던 그림자.
사람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종이 울렸다. 그 소리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깊고 낮았다. 서윤은 균형을 잃고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림자는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봉인석에는 금이 가 있었다.
"누군가 있었어." 서윤이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못 봤어."
"남자였어? 여자였어?"
"모르겠어."
"마을 사람이었어?"
서윤은 그 질문 앞에서 멈췄다.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자신이 외면해 온 단서. 그림자의 어깨에 걸쳐 있던 천. 짙은 남색, 촘촘한 실결. 낡았지만 단단한 옷감.
탁자 위 천 조각과 같은 것.
"아마도."
미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군지 짐작해?"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이름이 둘 사이에 놓였다. 미라는 그것을 알아차렸고, 서윤도 미라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았다.
각자의 책임
회관 뒤편 작은 방에서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서윤과 미라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문이 열리고, 도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까부터 안에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어 나왔다. 손에는 낡은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엿들은 거야?" 미라가 날카롭게 물었다.
"문이 얇았어."
"그걸 변명이라고 해?"
도윤은 미라의 화를 받아 내는 데 익숙한 사람처럼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에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지금은 서로 기분 상할 말을 아낄 때가 아니야."
"누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데?" 미라가 쏘아붙였다. "넌 아까 광장에서 일부러 이장님을 몰아세웠잖아. 사람들 앞에서."
"몰아세운 게 아니라 물은 거야."
"그 질문 때문에 다들 더 불안해졌어."
"불안해진 게 문제야, 아니면 불안해야 할 일을 계속 모른 척한 게 문제야?"
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서윤은 그들을 말리려다 멈췄다. 어느 쪽도 완전히 틀린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어려웠다.
도윤은 오래전 마을을 떠났다가 몇 달 전 돌아왔다. 돌아온 이유에 대해 그는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밖에서 실패하고 돌아왔다고 수군거렸고, 도윤은 그 수군거림을 일부러 듣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서윤은 가끔 그의 눈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 실패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러 온 사람의 눈빛.
"이게 뭐야?" 서윤이 물었다.
도윤은 탁자 위 종이를 펼쳤다. 오래된 필사본이었다.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가장자리는 부서질 듯했다. 글씨는 고르지 않았다. 어떤 줄은 급하게 적은 듯 삐뚤었고, 어떤 단어는 잉크가 번져 읽기 어려웠다.
"기록부가 사라지기 전에 베껴 둔 일부야."
미라가 숨을 들이켰다.
"네가?"
"전부는 아니야. 몇 장뿐이야."
"왜 그런 걸 몰래 했어?"
도윤은 미라를 보았다.
"누군가는 해야 했으니까."
그 말에 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책임이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직접 발음되지 않을 때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서윤은 종이 위 글씨를 읽으려 몸을 숙였다.
첫 문장은 익숙했다. 마을 아이들이 명절마다 외우던 맹세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경계를 지켜 서로를 살리고, 잊어야 할 이름을 다시 부르지 않는다.
그다음 줄은 서윤이 처음 보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경계는 벽이 아니라 약속이니, 약속을 세운 자들이 거짓을 품으면 돌은 먼저 기억한다.
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런 문장이 있었어?"
미라도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학교 기록 담당이었지만, 이 문장을 본 적 없는 듯했다.
"기록부 원본에는… 없었어. 적어도 내가 본 사본에는 없었어."
도윤이 낮게 말했다.
"삭제됐거나, 일부러 빠진 거겠지."
"누가?"
그 질문에 세 사람 모두 같은 이름을 떠올렸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이장 한재. 기록함의 열쇠를 가진 사람. 봉인석 보수 일을 감독했던 사람. 경계선에 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말을 끊던 사람.
그러나 그가 모든 일을 꾸몄다고 단정하기에는, 그의 침묵이 너무 오래되고 너무 지쳐 보였다. 악의라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침묵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감당하지 못해 침묵한다. 겉으로는 둘 다 입을 다문 모습이지만, 그 안쪽의 무게는 다르다.
서윤은 한재의 손에 들린 열쇠 꾸러미를 떠올렸다. 그 소리는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 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오래 잠가 둔 사람이기 때문일까.
"도윤아." 서윤이 말했다. "너는 뭘 알고 돌아온 거야?"
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 뭉치 중 한 장을 더 펼쳤다. 거기에는 마을의 옛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의 지도와 거의 같았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경계선 너머, 누구도 표시하지 않는 빈 공간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첫 마을.
미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다.
"첫 마을?"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뜻이야."
등잔불이 작게 흔들렸다.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불꽃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서윤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을에는 늘 기원 이야기가 있었다. 조상들이 이 골짜기에 들어와 땅을 일구고, 경계선을 세우고, 서로를 지키기로 맹세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단순했고, 단단했고, 의심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오래된 지도는 그 단단한 이야기 아래에 다른 층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럼 경계선은 밖의 무언가를 막기 위해 세운 게 아니라…"
서윤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도윤이 대신 말했다.
"우리가 두고 온 것을 잊기 위해 세운 걸 수도 있어."
미라는 종이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런 말, 사람들 앞에서 하지 마."
"언제까지?" 도윤이 물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사람들은 이미 겁먹었어. 이걸 들으면 더 무너질 거야."
"그럼 계속 모르게 해? 기록이 사라지고 봉인석이 갈라져도?"
"모르게 하자는 게 아니야. 순서가 있다는 거야."
"그 순서라는 말로 얼마나 많은 게 미뤄졌는지 알아?"
미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쳐. 내일 아침이면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물을 거야. 어젯밤 종소리가 뭐냐고. 봉인석이 왜 깨졌냐고. 어른들이 왜 서로를 무서워하냐고. 그때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데?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로 아이들을 흔들어 놓으라고?"
도윤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미라는 계속 말했다.
"넌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하지. 맞아. 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것과 진실을 사람들 위에 던지는 건 달라. 던져진 진실에 맞아 다치는 사람도 있어."
회관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서윤은 그제야 알았다. 책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랐다. 태오는 당장 범인을 찾는 것이 책임이라고 믿었다. 미라는 사람들을 무너지지 않게 붙드는 것이 책임이라고 믿었다. 도윤은 숨겨진 것을 밝히는 것이 책임이라고 믿었다. 한재는,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막는 것이 책임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서윤은 지금까지 알고 싶다는 마음을 책임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궁금하다는 이유로 경계선에 갔고, 두려웠다는 이유로 본 것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침묵하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자신이 말하지 않은 빈칸을 누군가의 불안과 분노가 대신 채웠다.
그 사실이 가슴 한복판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래된 약속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한재였다.
그는 세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탁자 위에 펼쳐진 필사본과 지도를 보았고, 마지막으로 서윤의 얼굴에 시선을 멈췄다.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깊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여기까지 봤구나."
도윤이 종이를 접으려 하지 않았다.
"이장님이 숨긴 겁니까?"
한재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걸음은 느렸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숨겼다고 말하면 쉽겠지. 하지만 어떤 일은 숨긴다기보다, 버티는 것에 가깝다."
"그 말로 다 설명되진 않습니다."
"나도 안다."
한재는 탁자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처럼 보이는 하얀 선들이 있었다. 서윤은 그 손을 여러 번 보았지만, 오늘 처음 제대로 본 것 같았다.
"기록부를 가져가신 건가요?" 서윤이 물었다.
한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누가 가져갔는지 아세요?"
"짐작은 한다."
"왜 말하지 않으셨어요?"
한재는 서윤을 오래 바라보았다.
"말하면 너희가 그 사람을 쫓아갈 테니까."
도윤이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거칠게 새어 나온 소리에 가까웠다.
"그 사람. 결국 마을 사람이라는 뜻이군요."
한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미라가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
"누구예요?"
"이름을 말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게 있다." 한재가 말했다. "경계선은 벌을 주기 위해 세운 게 아니었다. 누군가를 가두기 위해 세운 것도 아니었어. 처음에는 돌아오지 않기 위한 표시였다."
"어디서요?" 서윤이 물었다.
한재는 지도 위의 작은 글씨를 손끝으로 짚었다.
"첫 마을에서."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야기 속 단어가 현실의 무게를 얻는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한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등잔불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오래전 밤들이 비친 듯했다.
"기록에는 다 적혀 있지 않다. 적지 못한 일도 있고, 적으면 다시 시작될까 두려워 지운 일도 있다. 우리 조상들은 첫 마을을 떠나 이곳에 왔다. 그리고 약속했다. 남겨 두고 온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고. 그 이름을 부르면, 사람들은 다시 돌아가고 싶어질 테니까."
"돌아가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겠죠." 도윤이 말했다.
"있었다."
한재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유보다 금지만 남았다. 금지는 설명을 잃으면 사람을 병들게 한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그는 말을 멈췄다.
서윤은 그가 처음으로 이장이라는 자리 뒤에서 한 사람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알면서도 막으셨어요?"
"그래."
"왜요?"
한재는 서윤을 보았다. 그 시선에는 미안함이 있었다. 서윤은 본능적으로 그 미안함이 자신을 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을 전체를 향한 것이고, 오래전 누군가를 향한 것이고, 어쩌면 자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향한 것이었다.
"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내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서윤은 숨을 멈췄다.
회관 밖에서 바람이 처마를 스쳤다. 아주 짧은 소리였지만, 서윤에게는 멀리서 다시 종이 울린 것처럼 들렸다.
"우리 엄마요?"
서윤의 어머니는 서윤이 어릴 때 경계 숲 근처에서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사고라고 불렀다. 누구도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서윤은 자라면서 그 침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받아들인 게 아니라, 묻어 둔 것이었다. 오늘 밤, 그 묻어 둔 것이 젖은 흙을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한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는 기록부의 일부를 알고 있었다. 첫 마을에 대한 것도, 경계선이 왜 흔들리는지도. 그리고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언젠가 종이 다시 울리면, 서윤에게 선택하게 하라고."
"무슨 선택을요?"
"경계 안에 남을지, 경계의 이유를 보러 갈지."
미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런 걸 왜 이제 말해요?"
한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잃을까 봐. 무너질까 봐. 자신이 아는 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 봐.
서윤은 분노가 올라올 줄 알았다. 왜 숨겼느냐고, 왜 자신에게서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빼앗았느냐고 소리칠 줄 알았다. 그러나 처음 찾아온 것은 분노가 아니라 공허함이었다. 너무 오래 닫혀 있던 방의 문이 열렸을 때 먼지 냄새가 먼저 밀려오듯, 감정도 아직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어젯밤 경계선에 있던 사람은…"
한재가 눈을 감았다.
"네 어머니의 기록을 찾던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도윤이 물었다.
"마을 안에 그 기록을 아는 사람이 더 있습니까?"
한재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긍정이었다.
말하지 않은 이름들
회관의 작은 창으로 광장이 보였다. 대부분의 집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들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그림자가 빠르게 오갔고, 어떤 집에서는 창문 틈으로 불빛만 흔들렸다. 저 불빛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불안이고, 누군가의 두려움이고, 누군가의 숨겨진 계산이었다.
서윤은 한재에게서 더 많은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는 문을 하나 열 때마다 또 다른 문을 드러냈다. 어머니. 첫 마을. 사라진 기록부. 경계선에서 본 그림자. 모든 것이 한 줄로 이어지는 듯했지만, 그 줄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기록부를 가져간 사람이 누구든, 그냥 숨기려고 가져간 건 아닐 거예요." 미라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차분했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붙잡을 말을 찾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 사람도 뭔가를 찾고 있는 거겠죠."
"또는 뭔가를 막으려는 걸 수도 있어." 도윤이 덧붙였다.
태오가 아까 광장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찾아야 한다. 누가 가져갔는지. 누가 그 밤에 경계선에 있었는지. 그 말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지만, 그 안에도 두려움이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무서워하고 있었다.
서윤은 자신이 본 그림자의 어깨선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 천, 어디서 본 적 있어요."
세 사람의 시선이 서윤에게 모였다.
"어디서?" 도윤이 물었다.
서윤은 망설였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말들이 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그 사람을 의심의 가운데로 밀어 넣는 일이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미 마을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왔다.
"성준 아저씨의 창고에서요."
미라가 놀란 듯 숨을 삼켰다.
성준은 마을의 목수였다. 말수가 적고 손재주가 좋았다. 오래된 문이나 지붕을 고칠 때면 누구보다 먼저 불려 갔다. 서윤에게는 어린 시절 나무 피리를 깎아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늘 경계선 이야기를 싫어했다. 싫어한다기보다, 그런 말이 나오면 자리를 피했다.
한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확실하냐?"
"비슷한 천을 봤어요. 오래된 덮개였어요. 창고 안쪽에 걸려 있었고… 그때는 그냥 낡은 천이라고 생각했어요."
"성준 아저씨가 기록부를 가져갔다는 뜻은 아니야." 미라가 급히 말했다.
"나도 그렇게 말한 건 아니야."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름이 한 번 입 밖에 나오면, 그 이름은 더 이상 이전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
도윤은 지도를 접었다.
"성준 씨는 첫 마을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한재가 그를 매섭게 보았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확실한 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찾은 기록에 성준 씨의 집안 이름이 나왔습니다. 경계선을 세울 때 마지막까지 반대한 집안으로요."
미라가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럼 이 마을에서 그걸 아는 사람이 또 있었던 거야?"
한재는 지친 듯 이마를 짚었다.
"알았다기보다, 짐작한 사람들이 있었지. 오래된 집안에는 말로 전해지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요?" 서윤이 물었다.
한재의 대답은 작았다.
"말하면 책임져야 하니까."
그 말은 방 안에 오래 머물렀다.
말하면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르는 척한다. 모르는 척하면 당장은 조용하다.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지나고, 아이들이 자란다. 그러나 사라진 말은 정말로 사라지지 않는다. 문틈에 먼지처럼 쌓이고, 우물 바닥의 돌처럼 가라앉고, 어느 밤 종소리와 함께 다시 떠오른다.
서윤은 자신이 그 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어젯밤 자신도 말하지 않았다. 오늘 밤에도 말하기를 망설였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어쩌면 자신이 다치고 싶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다.
그 깨달음은 쓰지만 필요했다.
경계선으로 가는 길
"새벽이 되기 전에 성준 아저씨를 만나야 해요." 서윤이 말했다.
미라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밤에?"
"아침이 되면 늦을지도 몰라."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래서 가야 해."
도윤이 조용히 서윤을 보았다.
"혼자 갈 생각은 아니겠지."
"혼자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 말은 이제 그만하자." 미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 가서 뭐가 나아졌는데?"
서윤은 반박하지 못했다. 미라의 말은 아팠지만 맞았다.
한재가 천천히 말했다.
"성준의 집으로 간다고 해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그 깊은 곳이 어디인지 이제는 봐야 해요."
서윤의 목소리는 자신이 듣기에도 낯설었다. 떨리고 있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저는 어젯밤 경계선에서 도망쳤어요. 본 것을 말하지 않았고, 들은 것을 숨겼어요. 그 사이에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게 됐어요. 제가 전부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본 것에서 시작된 일이라면 제가 다시 가야 해요."
"네 책임만은 아니다." 한재가 말했다.
"알아요."
서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 책임이 없다는 뜻도 아니죠."
그 말에 한재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다른 열쇠보다 오래되어 보였고, 손잡이 부분에는 희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봉인석의 문양과 닮아 있었다.
"성준의 집 뒤편에 오래된 목재 창고가 있다. 겉문은 낡았지만 안쪽에 또 하나의 문이 있어. 이 열쇠가 맞을 거다."
도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장님이 그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까?"
한재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희가 묻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늦었구나. 하지만 그 질문들이 늦어진 건 너희 탓이 아니다."
서윤은 열쇠를 받아 들었다. 차가웠다. 단순한 금속 조각인데도 손바닥 안에서 맥박처럼 무게가 느껴졌다.
미라는 벽에 걸린 외투를 집어 들었다.
"나도 갈 거야."
"미라야."
"말리지 마. 아이들에게 내일 뭐라고 말할지 알아야겠어. 모른 채로 안심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도윤도 종이 뭉치를 품 안에 넣었다.
"나도 같이 가."
서윤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혼자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길이었다. 어쩌면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혼자 가려 했고, 어쩌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기 싫어 혼자 가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계선은 혼자 넘는 선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제는 그렇게 느껴졌다.
한재는 등잔불을 낮췄다.
"성준을 만나거든 몰아세우지 마라. 그는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었다. 짐을 오래 진 사람은 누가 손을 뻗어도 빼앗기려 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미라가 물었다.
"듣거라."
한재의 대답은 짧았다.
"먼저 듣고, 그다음에 물어라."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듣고 싶지 않은 말이 기다리고 있을 때는 더 그랬다. 하지만 오늘 밤, 마을을 이렇게 만든 것은 너무 오래 듣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회관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광장의 불빛은 더 줄어 있었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마을은 잠든 척하고 있었다. 사람도, 집도, 나무도 모두 눈을 감은 척하며 귀를 열고 있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성준의 집이 있는 북쪽 골목으로 걸었다. 발밑의 흙길은 낮 동안의 발자국들로 어지러웠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서로 겹쳐 있었다. 서윤은 그 위를 밟으며 생각했다. 흔적은 늘 남지만, 그것만으로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진실은 흔적과 기억, 그리고 말하지 못한 마음이 서로 얽힌 자리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골목 끝에서 경계 숲이 보였다. 검은 능선처럼 마을 뒤에 누워 있었다. 그 너머에 첫 마을이 있는지, 어머니의 기록이 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는지 서윤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성준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세졌다. 창고 지붕의 낡은 판자가 삐걱였고, 어디선가 천이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서윤은 손안의 열쇠를 꽉 쥐었다. 차갑던 금속이 조금씩 체온을 얻고 있었다.
그때, 멀리 경계선 쪽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다.
종소리였다.
아주 작고 깊은, 그러나 이번에는 분명히 서윤의 이름을 알고 있는 듯한 소리.
미라가 서윤의 팔을 붙잡았다. 도윤은 말없이 숲 쪽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 모두 걸음을 멈췄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선명한 두려움 속에서 길이 보였다. 회피할 수 없는 길. 선택하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 선택하게 될 길. 그리고 그 결과가 자신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에 닿을 길.
서윤은 성준의 창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낡은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열쇠를 끼웠다.
"열게."
그 말은 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미라와 도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으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열쇠가 천천히 돌아갔다.
오래 잠겨 있던 밤이, 안쪽에서 조용히 풀리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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