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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포함된 노트푸른 유리의 계절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

Views 80약 10분생성형 AI 활용
Summary

몇 달 뒤의 빛

봄은 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겨울 내내 굳어 있던 가지 끝에서 연둣빛이 올라오고, 성당 담장 아래에 누군가 잊고 간 화분에서는 작은 잎이 두 장 더 늘었다. 푸른 창은 아직 복원 중이었다. 새로 끼운 통영의 조각 주변에는 보강재가 더해졌고, 온도와 습도를 기록하는 작은 장치가 하단부에 붙었다. 관람객들은 이제 그 장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창이 계속 돌봄을 받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윤은 한 달에 두 번 성당으로 올라왔다.

오전에는 창의 상태를 확인하고, 오후에는 복원 기록을 정리했다. 납선의 긴장도, 빛이 들어오는 각도, 유리 표면의 미세한 변화 같은 것들을 하나씩 적었다. 오른손의 보호대는 이제 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 작업하는 날이면 손목 안쪽이 묵직하게 아파왔다. 그녀는 예전처럼 그 통증을 이겨내려 하지 않았다. 통증이 오면 멈췄고, 멈춘 시간에 물을 마셨고, 가끔은 창 앞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처음에는 가장 어려웠다.

일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자기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손이 쉬면 마음이 먼저 달렸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자료, 아직 보내지 않은 보고서, 아직 답장하지 않은 메일들이 머릿속에서 흩어진 유리 조각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나 서윤은 이제 그 조각들을 맨손으로 주워 담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천천히, 필요한 만큼만.

준오는 그런 서윤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도 바빴다. 전시가 끝난 뒤 그의 소리 작업은 작은 화제를 남겼고, 몇몇 미술관과 도시 기록관에서 연락이 왔다. 사라지는 풍경의 소리를 남기는 프로젝트, 오래된 시장이 철거되기 전 마지막 새벽을 기록하는 일, 폐교가 되기 전 교실의 소리를 담는 일. 그는 예전보다 더 자주 지방을 오갔다. 왼쪽 귀의 이명은 사라지지 않았고, 피곤한 날에는 사람의 말이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려졌다. 그래도 그는 더 이상 모른 척 웃지 않았다.

"다시 말해주시겠습니까."

그 문장은 그의 작업 도구가 되었다.

녹음기, 헤드폰, 예비 배터리, 그리고 다시 말해달라는 부탁. 준오는 그것들이 모두 같은 무게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빠짐없이 붙잡는 일이 아니라, 놓친 것을 인정하며 다시 가까이 가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났지만 매일 함께 있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겼다. 십 년을 돌아 다시 만났으면, 이제는 당장 같은 집에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더 늦기 전에 확실한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느냐는 충고도 들렸다. 연인인지, 동료인지, 가족이 될 사람인지. 사람들은 관계에 이름표를 붙이면 마음도 그 안에서 얌전히 정리될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서윤과 준오는 서두르지 않았다.

서윤은 통영과 서울, 여러 작은 도시를 오가며 유리와 빛을 다루는 일을 계속했다. 준오는 소리가 사라지는 장소들을 따라 움직였다. 어떤 주에는 서울에서 만났고, 어떤 주에는 통영 바닷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느 날은 서로의 일정이 맞지 않아 전화로만 안부를 물었다. 전화가 잘 들리지 않는 날이면 준오는 솔직히 말했다. 오늘은 목소리가 멀다고. 그러면 서윤은 메시지로 다시 적어 보냈다. 오늘은 비가 왔어요. 손목은 괜찮아요. 당신은 밥을 먹었나요.

짧은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그 문장들은 전보다 오래 남았다.

과거의 두 사람은 긴 침묵 속에서 서로를 짐작했다. 지금의 두 사람은 짧은 문장으로 서로를 확인했다. 짐작은 때로 아름다웠지만, 자주 잔인했다. 확인은 덜 낭만적으로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더 다정했다.

봄이 깊어질 무렵, 서윤은 지방의 작은 학교에서 워크숍을 시작했다.

처음 제안이 왔을 때 그녀는 망설였다. 아이들에게 유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날카로운 재료는 쓸 수 없었고, 색을 단순한 놀이로만 다루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학교의 미술 교사가 보낸 메일 끝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이들이 빛을 만질 수 있다고 믿게 해주고 싶습니다.

서윤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좋습니다. 대신 유리보다 먼저, 빛이 지나갈 자리를 함께 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

작은 학교의 오후

학교는 기차역에서 버스로 다시 삼십 분을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정문은 낮았고, 운동장은 크지 않았다.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가 교실 창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복도 끝에는 아이들이 만든 종이 바람개비가 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개비는 제각기 다른 속도로 돌았다. 누군가는 너무 빠르게 돌고, 누군가는 거의 멈춘 듯하다가 뒤늦게 움직였다. 서윤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바람 속에서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

워크숍은 3학년과 4학년 아이들 열세 명과 함께했다.

서윤은 진짜 유리 대신 얇은 색 필름과 투명 아크릴 조각, 둥근 모서리의 플라스틱 판을 준비했다. 햇빛이 드는 창 앞에는 흰 종이를 펼쳐두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색 필름을 얼굴에 대고 서로를 보며 웃었다. 빨간 세상이 됐다, 노란 사람이 됐다, 파란 귀신이다. 교실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서윤은 그 소란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빛과 색은 원래 조용히 시작되지 않는다. 특히 아이들에게 색은 먼저 장난으로 온다. 손에 쥐고, 눈에 대보고, 친구 얼굴에 비춰보고, 책상 위로 미끄러뜨려보는 동안 색은 단어가 되기 전의 감각으로 몸에 들어온다.

한 아이가 파란 필름을 창에 붙이고 물었다.

"선생님, 왜 바닥이 파래져요? 필름은 여기 있는데."

서윤은 아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빛이 지나가서 그래."

"빛이 지나가면 색을 데리고 가요?"

그 질문에 서윤은 잠시 웃었다.

"응. 그렇게 말해도 되겠다. 빛은 혼자서는 잘 보이지 않는데, 무언가를 지나가면 자기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줘. 색 필름을 지나가면 파랗게, 노란 필름을 지나가면 노랗게."

"그럼 사람도 지나가면 색이 생겨요?"

교실 뒤에서 누군가 그렇게 물었다.

서윤은 대답하기 전에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햇빛이 창을 지나 아이들의 머리카락과 손등에 얹혀 있었다. 어떤 아이는 집중하면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어떤 아이는 말을 하기 전 손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어떤 아이는 색 필름을 겹쳐 보며 초록이 생기는 순간에 눈을 크게 떴다.

"사람도 그럴지 몰라."

서윤이 말했다.

"혼자 있을 때는 잘 모르는 색이, 누군가와 만나거나 어떤 시간을 지나면서 보이기도 해. 좋은 색만 생기는 건 아니야. 어두운 색도 있고, 흐린 색도 있어. 그래도 그 색들이 모이면 그 사람만의 창이 되는 것 같아."

아이들은 그 말을 전부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말도 잠시 간직할 줄 알았다. 한 아이가 보라색 필름을 햇빛에 대며 말했다.

"저는 보라색 창 할래요. 슬픈데 예뻐서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유네."

아이들은 각자의 작은 창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그란 해와 삐뚤어진 집, 바다처럼 긴 파란 면, 이름 모를 꽃, 반으로 갈라진 무지개, 검정 필름을 아주 작게 잘라 붙인 밤의 새. 서윤은 아이들의 손을 하나하나 살폈다. 가위질이 어려운 아이에게는 손의 위치를 알려주고, 필름을 너무 많이 겹쳐 빛이 통과하지 않는 아이에게는 창가에 가져가 보자고 했다.

"빛이 안 보여요."

한 아이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아이의 작은 창은 색 필름을 너무 촘촘히 붙여 거의 검게 변해 있었다.

서윤은 그 창을 들어 햇빛에 비추었다.

"완전히 안 보이는 건 아니야. 아주 조금 보여."

"망했어요."

"망한 게 아니라, 빛이 들어올 길이 조금 좁은 거야."

서윤은 아이에게 투명한 조각 하나를 건넸다.

"여기 하나만 비워볼까? 다 뜯지 않아도 돼. 한 군데만."

아이는 망설이다가 가운데 부분의 어두운 필름 하나를 떼어냈다. 그 자리에 투명한 조각을 붙이자, 흰 종이 위로 작은 빛이 내려앉았다. 아주 작았지만 분명했다.

아이는 숨을 삼키듯 웃었다.

"됐다."

그 말에 서윤은 오래전 성당에서 임화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됐네. 완성이 아니라, 이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 아이의 작은 목소리 안에도 같은 뜻이 들어 있었다.

워크숍이 끝날 무렵, 아이들은 교실 창문에 자기 작품을 붙였다. 햇빛이 옆으로 기울면서 교실 바닥에는 여러 색의 조각들이 흩어졌다. 빨강, 노랑, 초록, 보라, 그리고 여러 겹을 지나 조금 탁해진 파랑. 아이들은 자기 색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다가, 결국 서로의 색을 밟으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윤은 생각했다.

빛은 누구의 것도 아니구나.

내 창을 지난 빛이 다른 사람의 발등에 닿고, 다른 사람의 색이 내 그림자 위에 겹친다. 우리는 각자의 창을 만들지만, 바닥에 내려온 빛은 서로를 피하지 못한다. 그래서 함께 있는 시간이 생긴다.

수업이 끝난 뒤 미술 교사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선생님, 다음 학기에도 와주실 수 있을까요?"

서윤은 창가에 붙은 아이들의 작은 작품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하나에는 푸른 조각이 비스듬히 붙어 있었다. 모양은 서툴렀지만, 빛을 받아 바닥에 맑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네."

그녀는 천천히 대답했다.

"가능하면요."

예전의 그녀라면 정확한 일정을 먼저 확인했을 것이다.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서윤은 알았다. 확답할 수 없는 마음도 진심일 수 있다. 반드시 온다는 약속보다, 오기 위해 삶의 방향을 조금씩 맞추겠다는 말이 더 오래 지속될 때가 있다.

그날 저녁, 서윤은 준오에게 사진을 보냈다.

아이들의 작은 창들이 교실 유리창에 붙어 있는 사진이었다. 빛은 조금 흔들렸고, 사진 한쪽에는 어느 아이의 손가락이 찍혀 있었다.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소리가 들리는 사진이네요.

서윤은 웃으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준오의 답은 조금 늦게 왔다.

가위질하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누군가 자기 색을 발견하고 숨을 멈추는 소리.

서윤은 휴대전화를 들고 한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그가 정말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상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소리는 귀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알아차린다.

남은 소리들의 마지막 장

준오의 작업실에는 여전히 선이 많았다.

책상 위에는 녹음기와 외장 하드, 낡은 헤드폰, 라벨이 붙은 메모리 카드들이 놓여 있었다. 벽에는 장소 이름과 날짜가 적힌 종이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폐교 운동장, 새벽 5시 40분. 시장 철거 전날, 비닐 천막 아래. 성당 푸른 창, 보강 작업 후 첫 비. 그 사이에 작은 종이 하나가 새로 붙었다.

남은 소리들 — 마지막 장.

그는 그 제목을 오래 비워두었다.

처음에는 성당의 종소리를 마지막에 넣으려 했다. 그다음에는 통영 유리온실의 바람 소리를 다시 써볼까 생각했다. 혹은 포르투에서 서윤이 보냈던 오래된 음성 메시지의 공백을 편집해 넣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마지막이 되기에는 너무 분명했다. 마지막 장이라는 말에는 끝이 들어가 있었고, 준오는 이제 끝나는 소리보다 남는 소리를 알고 싶었다.

그는 서윤에게 부탁했다.

"녹음 하나만 해도 돼요?"

그때 두 사람은 학교 근처 작은 숙소에 있었다. 서윤은 다음 날 두 번째 워크숍을 앞두고 재료를 정리하고 있었고, 준오는 근처 폐역의 소리를 기록하러 내려왔다가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다. 숙소 창밖으로는 낮은 논과 비닐하우스가 보였고, 멀리 산의 능선이 흐리게 접혀 있었다.

서윤은 색 필름을 봉투에 나누어 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요?"

"당신 숨소리요."

서윤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건 좀 이상한 부탁인데요."

"알아요."

준오는 웃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싫으면 안 해요."

서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몰래 녹음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몰래라는 말보다 더 애매한 방식으로. 기록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그러나 지금의 준오는 허락을 먼저 구했다. 소리는 붙잡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운 사람처럼.

"왜 내 숨소리예요?"

서윤이 물었다.

준오는 대답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오래전에는 당신이 말한 문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어요. 젖은 편지, 놓친 전화, 들리지 않았던 말들. 그래서 계속 문장만 찾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문장보다 먼저 오는 소리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창가 쪽을 보았다.

"말하기 전에 들이쉬는 숨. 울지 않으려고 참는 숨. 웃기 직전에 새는 숨.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을 때의 숨. 그런 것들이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많이 보냈던 신호였는데, 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어요."

서윤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마지막 장에 그걸 넣고 싶어요?"

"네. 당신 숨소리랑, 유리창을 지나는 바람 소리."

"왜 같이요?"

"둘 다 보이지 않는데 지나간 자리를 남기니까요."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비가 오기 전의 바람이 창을 건드렸다. 오래된 창틀은 아주 낮은 소리를 냈다. 나무가 조금씩 마르고 부풀며 만든 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완벽하지 않은 창이어서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내 숨을 너무 예쁘게 만들지 말아요."

준오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편집해서 고요하고 안정된 사람처럼 만들지 말라고요. 중간에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웃음이 섞이면 섞이는 대로 둬요."

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당신 숨도 같이 들어가야 해요."

그는 예상하지 못한 듯 그녀를 보았다.

"내 숨이요?"

"네. 혼자 듣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있는 사람의 숨도 있어야죠."

준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말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그가 오래 피해온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늘 기록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장면 바깥에 서서, 소리의 뒤편에 숨어서, 타인의 삶이 흔들리는 순간을 붙잡는 사람. 그러나 서윤은 이제 그에게 장면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도 여기 있다고. 당신의 숨도 이 시간의 일부라고.

"좋아요."

그가 말했다.

그들은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준오는 녹음기를 책상 위에 놓고 전원을 켰다. 빨간 불이 작게 들어왔다. 아무 음악도 없었다. 어떤 질문도 없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어색해서 숨을 고르게 쉬려고 애썼다. 그 어색함 때문에 서윤이 먼저 웃었다. 아주 작게, 참다가 새어 나온 웃음이었다. 그 웃음 뒤에 준오도 웃었다.

녹음기에는 그 웃음까지 들어갔다.

그다음에는 바람이 왔다.

창문 가장자리의 아주 좁은 틈으로 바람이 지나가며 낮은 휘파람 같은 소리를 냈다. 멀리서는 트럭이 지나갔고, 어느 집 개가 두 번 짖었다. 숙소 냉장고가 갑자기 작동하며 낮게 떨렸다. 서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준오의 숨은 그보다 조금 늦게 따라왔다. 두 사람의 호흡은 처음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연히 겹쳤고, 다시 어긋났다.

준오는 그 어긋남이 좋았다.

완벽히 맞는 박자는 기계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살고 있는 소리는 늘 조금씩 늦거나 빠르다. 한 사람이 먼저 들이쉬고, 다른 사람이 뒤따라 내쉰다. 누군가 말을 하려다 멈추면, 다른 사람의 침묵이 그 자리를 받친다. 사랑이 음악이라면, 그것은 한 번도 틀리지 않는 합주가 아니라 틀린 음을 듣고도 다시 이어가는 연주에 가까울 것이다.

녹음은 길지 않았다.

준오는 전원을 끄고도 한동안 기기를 만지지 않았다. 서윤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하늘이 낮아지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공기 속에 물 냄새가 섞였다.

"이제 끝난 거예요?"

서윤이 물었다.

"녹음은요."

"작업은요?"

준오는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요. 마지막 장이라고 붙였는데, 마지막 같지는 않아요."

서윤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장도 남은 장일 수 있죠."

준오는 그 말을 메모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다면 바로 적었을 문장이었다. 잊을까 봐, 문장의 형태가 변할까 봐, 자기 작업 속에 넣고 싶어서. 그러나 그는 그냥 듣기로 했다. 어떤 말은 기록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 안에 더 오래 남는 말도 있다.

그날 밤, 준오는 작업 파일의 제목을 조금 바꾸었다.

남은 소리들 — 마지막 장 뒤에 작은 괄호를 붙였다.

계속.

같이 살지 않는다는 약속

여름이 시작될 무렵, 두 사람은 서울의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성당 창의 정기 점검을 마친 날이었다. 서윤은 손목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긴 하루 뒤에는 젓가락질이 조금 느려졌다. 준오는 그걸 알아차렸지만 바로 돕지 않았다. 대신 반찬 그릇을 그녀 가까이 밀어주었다. 서윤은 아무 말 없이 그 배려를 받았다.

식당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의 첫 비였다. 굵지는 않았지만 오래 내릴 것 같은 비. 길 건너 가로수 잎들이 젖어 더 진해졌고, 우산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종종 뛰어갔다. 식당 안에서는 된장국 냄새와 젖은 우산 냄새가 섞였다.

식사가 거의 끝날 때쯤, 준오가 말했다.

"서윤 씨."

"네."

"우리, 같이 살지 않는다고 해서 덜 사랑하는 건 아니겠죠."

서윤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질문은 갑자기 나온 것 같았지만, 사실 오래 둘 사이를 걸어 다니던 질문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뒤 사람들은 자꾸 다음 단계를 물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오가며 만날 거냐고. 서로의 집에 칫솔을 두었냐고. 결혼은 생각하냐고. 사랑을 증명하려면 생활을 합쳐야 한다는 듯이.

서윤은 창밖을 보았다.

비가 유리 위를 타고 내려왔다. 물줄기는 서로 다른 높이에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만나 더 굵어졌다가 다시 갈라졌다. 같은 창을 지나면서도 끝까지 하나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따로 흘렀다고 해서 같은 비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내 방이 필요해요."

서윤이 말했다.

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아침에 혼자 일어나는 시간도 필요하고, 재료를 펼쳐놓고 아무 말 없이 생각하는 밤도 필요해요. 어느 도시로 가야 할지 갑자기 결정하는 일도 있을 거예요. 학교 워크숍이 계속되면 지방에 머무는 날이 많아질 수도 있고요."

"네."

"당신도 그렇잖아요. 소리를 따라가야 하잖아요. 새벽 시장이든, 폐역이든, 누군가의 집이든. 그걸 나 때문에 줄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준오는 그녀의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가끔은 당신이 없는 방이 싫을 수도 있어요."

그가 말했다.

"나도요."

"보고 싶어서 화가 날 수도 있고요."

"그럼 화났다고 말해요."

"그 말까지 해야 해요?"

"네. 그래야 내가 당신을 기다리게 만든 건지, 그냥 당신이 나를 보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으니까요."

준오는 웃었다. 그 웃음에는 오래전 정원에서 나누었던 말이 조용히 섞여 있었다. 기다림이 아니라 그리움. 두 사람은 이제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기다림은 때로 상대를 빚진 사람으로 만들지만, 그리움은 상대를 살아 있는 사람으로 남겨둔다.

"그럼 우리 어떻게 해요?"

준오가 물었다.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각자의 일을 계속해요. 서로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쓰고요. 대신 사라지지는 않기."

"사라지지 않기."

준오가 낮게 따라 말했다.

"바쁘면 바쁘다고 말하기. 못 들었으면 못 들었다고 말하기.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기.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기."

서윤은 손가락을 접으며 하나씩 덧붙였다.

"화가 나면요?"

"그것도 말하기."

"말하기 싫으면요?"

"말하기 싫다고 말하기."

준오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말이 많은 관계네요."

"예전엔 너무 말이 없었으니까요."

그 말에 둘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말이 없었던 시간은 이미 지나갔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몸에는 아직 그 침묵의 습관이 남아 있었다. 서윤은 힘들 때 문을 닫고 싶어졌고, 준오는 두려울 때 듣지 못한 척하고 싶어졌다. 그 습관들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서로에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또 문을 닫으려 한다고. 내가 또 도망치려 한다고.

사랑은 어쩌면 그런 경고를 주고받는 일인지도 몰랐다.

나 지금 무너질 것 같아. 나 지금 당신 말을 오해하고 싶어져. 나 지금 혼자가 편하다는 말 뒤에 숨어버리고 싶어. 그러니 잠깐만 기다려줘. 아니, 기다리지 말고 여기 있어줘.

식당 주인이 빈 그릇을 치우러 왔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주인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비가 좀 그쳐야 할 텐데요."

서윤은 대답 대신 웃었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통영역이 먼저 떠올랐다. 젖은 편지, 놓친 기차, 도착하지 못한 말. 그러나 이제 비는 그것만을 데려오지 않았다. 성당의 푸른 창에 맺힌 물방울, 학교 교실 창에 붙은 아이들의 색 필름, 숙소 창틈을 지나던 바람 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비는 과거를 지우지 않았지만, 과거만 데려오지도 않았다.

식당을 나설 때 준오는 우산을 펼쳤다.

둘이 함께 쓰기에는 조금 작은 우산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한 사람의 어깨가 젖지 않도록 억지로 몸을 붙였을 것이다. 혹은 괜찮다고 말하며 한 사람이 비 속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서윤이 말했다.

"편의점에서 하나 더 살까요?"

준오는 우산 아래에서 그녀를 보았다.

"그게 낫겠죠?"

"네. 젖지 않으려고 꼭 같은 우산을 써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들은 편의점에서 투명 우산 하나를 더 샀다. 문을 나서자 두 개의 우산 위로 같은 빗소리가 떨어졌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우산과 우산 사이에는 좁은 틈이 있었고, 그 틈으로 비가 조금씩 떨어졌다. 그래도 이상하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같은 비를 맞지 않아도,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그날 밤 두 사람에게는 충분했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

가을이 오기 전, 서윤의 워크숍은 네 번째 학교로 이어졌다.

준오는 그중 두 번을 함께 갔다. 그는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늘 교실 뒤쪽에 앉았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를 촬영 기사로 오해했고, 다음에는 음악 선생님으로 불렀다. 준오는 그때마다 웃으며 말했다.

"소리를 모으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상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소리를 왜 모아요?"

준오는 대답했다.

"사라지니까요."

"사라지면 못 모으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사라지기 전에 잠깐 빌려요."

아이들은 그 대답을 좋아했다. 어떤 아이는 쉬는 시간에 준오의 녹음기에 대고 자기 이름을 속삭였고, 어떤 아이는 운동장의 바람 소리를 녹음해달라고 했다. 준오는 가능한 한 아이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단, 늘 먼저 물었다.

"녹음해도 될까요?"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싫다고 하거나, 잠깐 고민했다. 준오는 그 모든 대답을 존중했다. 싫다는 말도 하나의 소리였다. 세상에 남겨야 하는 것은 허락된 소리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제 잘 알았다.

서윤은 아이들에게 빛을 가르치며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안전과 순서, 재료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아이들이 자기 방식으로 빛을 발견할 시간을 더 많이 남겨두었다. 어떤 아이는 색 필름을 모두 사각형으로 잘랐고, 어떤 아이는 아무 모양도 없이 찢어 붙였다. 어떤 아이는 검은색을 많이 쓰고 싶어 했고, 어떤 아이는 투명한 부분을 넓게 남겼다.

서윤은 더 이상 아름다운 창을 만들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빛이 지나갈 곳을 하나만 남겨두면 돼."

그 말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몇 달 사이 서윤과 준오의 관계는 극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함께 산 것도 아니었고, 거창한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가족을 모두 만나 정해진 절차를 밟은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서윤은 어떤 날 갑자기 말수가 줄었고, 준오는 피곤하면 대답이 늦어졌다. 작은 오해도 있었다. 메시지를 읽고 답하지 못한 밤, 통화 중 끊긴 문장, 일정이 겹쳐 취소된 만남. 그런 일들은 사랑이 돌아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이전과 다르게 행동했다.

서윤은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짧게라도 말했다. 지금은 말하기 어렵지만,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준오는 그 문장을 받으면 바로 답했다. 알겠어요. 나는 여기 있어요. 준오가 소리를 놓쳐 엉뚱하게 대답한 날에는 웃어넘기지 않고 다시 물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아요. 그러면 서윤은 다시 말했다. 때로는 같은 문장을 두 번, 세 번. 두 사람은 그것을 귀찮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랑은 때로 반복 설명을 견디는 일이었다.

어느 날 밤, 준오는 완성한 작업을 서윤에게 들려주었다.

장소는 성당도, 작업실도 아니었다. 서윤이 워크숍을 마치고 하루 더 머무른 지방의 작은 학교 교실이었다.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 교실은 비어 있었고, 미술 교사는 열쇠를 맡겨두고 갔다. 창문에는 아이들의 작품 몇 개가 아직 붙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색 필름 가장자리가 아주 작게 떨렸다.

준오는 작은 스피커를 책상 위에 놓았다.

"제목은 그대로예요?"

서윤이 물었다.

"네. 남은 소리들."

"마지막 장은요?"

"마지막 장이면서, 계속되는 장."

서윤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처음 들린 것은 아주 낮은 바람이었다. 숙소의 오래된 창틈을 지나던 바람 소리. 그 위로 멀리 지나가는 차, 냉장고의 낮은 떨림, 어디선가 닫히는 문소리가 얇게 겹쳤다. 그리고 숨소리가 들렸다. 서윤의 숨.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게 고르려 애쓰는 숨이었다가, 곧 웃음 때문에 흔들리는 숨. 그 옆에 준오의 숨도 있었다. 조금 늦게 따라오고, 가끔은 멈추고, 다시 이어지는 숨.

서윤은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정말 안 예쁘게 뒀네요."

"조건이었으니까요."

"좋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들었다.

소리는 화려하지 않았다. 커다란 고백도, 절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게 많은 시간이 들어 있었다. 통영역에서 서로를 놓친 뒤의 긴 침묵, 포르투의 푸른 방에서 혼자 삼켰던 숨, 성당 창 앞에서 울지 않으려던 숨, 학교 교실에서 아이들과 웃던 숨. 그리고 지금 이곳에 함께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숨.

작업의 마지막에는 아무 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바람이 조금 더 지나갔고, 창문이 아주 낮게 울렸다. 그런 다음 소리는 천천히 사라졌다. 완전히 끊긴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계속 이어 듣게 되는 방식으로 멀어졌다.

서윤은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준오는 기다렸다. 이번의 기다림은 초조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감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작품이 좋았는지, 자신을 이해했는지, 어떤 말로 돌려줄 것인지 묻지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이 소리를 지나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그는 알았다.

마침내 서윤이 눈을 떴다.

"준오 씨."

그는 그녀를 보았다.

"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건, 이런 건가 봐요."

그녀는 스피커를 바라보며 말했다.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상처를 없애주는 것도 아니고요."

교실 밖에서 바람개비가 희미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계속 돌아보는 것. 놓치면 다시 묻는 것. 멀리 있어도 같은 방향인지 확인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숨이 흔들릴 때, 그 흔들림을 고치려고 하기 전에 곁에서 같이 숨 쉬는 것."

준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많은 소리를 모아온 사람이었지만, 어떤 말 앞에서는 여전히 조용해졌다. 서윤은 그 침묵을 불안해하지 않았다. 침묵도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도망이 아니라 머무름이 될 수 있었다.

잠시 뒤 준오가 말했다.

"나는 아직도 가끔 무서워요."

"나도요."

"또 놓칠까 봐."

"그럼 다시 찾으면 돼요."

"또 늦으면요?"

서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늦었다고 말하면 돼요. 그리고 가능한 만큼 빨리 오면 돼요. 완벽하게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보다, 늦었다는 걸 숨기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니까."

준오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은 곳에 내려놓았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비어 있던 자리였다. 미안하다는 말과 보고 싶었다는 말, 못 들었다는 말과 다시 말해달라는 말이 차례로 지나가며 만든 자리. 그 자리에 이제 새로운 문장이 앉았다. 늦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기.

그는 손을 내밀었다.

서윤은 잠시 그 손을 보다가 잡았다. 이제 그들의 손잡음에는 처음처럼 조심스러움만 있지는 않았다. 익숙함이 조금 생겼고, 동시에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손목의 통증을 아는 조심스러움, 놓친 시간을 아는 조심스러움, 그러나 다시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 익숙함.

사랑은 완성된 집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단단한 집이 아니라, 날마다 조금씩 고쳐야 하는 창에 가까웠다. 어떤 날은 틈이 생기고, 어떤 날은 빛이 너무 강하게 들어오고, 어떤 날은 비가 새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함께 들여다보고, 닦고, 덧대고, 때로는 가만히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것이 그들이 지금 사랑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었다.

비가 그친 창가

저녁이 되자 비가 내렸다.

예보에 없던 비였다. 운동장은 금방 어두워졌고, 교실 창문에는 둥근 물방울들이 맺혔다. 아이들이 만든 색 필름 작품들은 비 때문에 조금 흐려 보였다. 종이 가장자리가 들뜬 것도 있었고, 테이프가 약해져 한쪽이 떨어진 것도 있었다. 서윤은 그것들을 떼어 정리하려다가 멈췄다.

"그냥 둘까요?"

준오가 물었다.

"내일 아이들이 보면 좋아할 것 같아요. 비 오는 날 자기 창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럼 두죠."

두 사람은 창가에 나란히 섰다.

비는 오래 내리지 않았다. 한동안 세차게 유리를 두드리던 소리는 점점 가늘어졌고, 어느 순간 빗방울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운동장 끝의 플라타너스 잎에서 물이 떨어졌다. 멀리 산 아래로는 희미한 안개가 내려앉았다. 교실 안에는 젖은 나무 냄새와 색 필름의 희미한 플라스틱 냄새, 오래된 분필 냄새가 함께 머물렀다.

준오는 녹음기를 켜지 않았다.

서윤도 그에게 왜 녹음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어떤 순간은 남겨야 하고, 어떤 순간은 지나가도록 두어야 한다. 지나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빛처럼, 바람처럼, 누군가의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은 때로 몸 안에 더 정확히 남았다.

비가 그치자 구름 사이로 늦은 빛이 들어왔다.

해가 낮게 기운 시간이었다. 빛은 교실 창에 붙은 여러 색 필름을 지나 바닥으로 내려왔다. 빨강은 조금 흐렸고, 노랑은 따뜻했으며, 초록은 젖은 잎처럼 깊어 보였다. 그리고 창가 한쪽, 어느 아이가 비스듬히 붙여놓은 푸른 조각을 지나온 빛이 천천히 번지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처음에는 아주 작았다.

책상 모서리에 걸려 있다가,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방향을 따라 길게 늘어났다. 비가 남긴 투명한 자국 때문에 빛은 고르게 퍼지지 않았다. 중간중간 끊기고 흔들리며 바닥에 닿았다. 그래서 더 살아 있는 빛처럼 보였다.

서윤은 그 푸른빛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성당의 창이 있었고, 통영의 유리온실이 있었고, 포르투의 푸른 방이 있었다. 젖은 편지와 놓친 기차, 첫눈 대신 내린 비와 밤의 온실, 무너진 전시회와 다시 끼워 넣은 마지막 조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들은 더 이상 그녀를 과거로만 끌고 가지 않았다. 그것들은 지금 이 교실 바닥 위에서 아이들의 작은 창을 지나온 빛과 함께 있었다.

준오가 낮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요?"

서윤은 잠시 후 대답했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요."

"멀리 왔나요?"

"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런데 아직 가는 중이에요."

준오는 그 말에 웃었다.

"좋네요."

"뭐가요?"

"끝난 게 아니라서요."

서윤도 웃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가에 서 있었다. 밖에서는 비가 그친 뒤의 물 냄새가 올라왔고, 복도 어딘가에서 오래된 시계가 느리게 움직였다. 준오의 왼쪽 귀 안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이명이 울렸고, 서윤의 손목은 긴 하루 끝에 조금 저렸다. 그들은 완전히 낫지 않았다. 완전히 알지도 못했다. 완전히 하나가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서로의 곁에 있었다.

각자의 일을 가진 채로, 각자의 방과 길과 침묵을 가진 채로, 그래도 같은 방향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오늘 못 한 말은 내일 다시 해보기로, 오늘 놓친 소리는 다시 물어보기로, 오늘 흐린 빛은 다른 시간에 다시 바라보기로.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기까지 두 사람은 오래 걸렸다.

충분하다는 말은 작아지는 말이 아니었다. 포기하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가진 것을 정확히 바라보겠다는 말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손, 다 듣지 못하는 귀, 금이 간 창, 비에 젖은 교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푸른빛. 이것들을 모자람으로만 부르지 않겠다는 결정.

서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준오는 그 손을 잡았다. 너무 세게도, 너무 약하게도 아니었다. 그들은 창밖이 아니라 창가에 번지는 빛을 함께 보았다. 비가 그친 유리 위로 마지막 물방울 하나가 천천히 내려왔다. 물방울이 푸른 필름 앞을 지나는 순간, 빛은 잠시 더 깊어졌다.

교실 바닥에 푸른빛이 조용히 퍼졌다.

두 사람의 신발 끝에 닿고, 서로 잡은 손의 그림자 아래로 스며들고, 아직 마르지 않은 창가의 작은 물기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서윤은 아주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준오는 그 숨을 들었다.

그리고 설령 언젠가 다시 놓치게 되더라도, 이제는 다시 물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가 그친 창가에 푸른빛이 번지고 있었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

계속, 빛을 통과시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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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유리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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