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온다는 말
아침 뉴스에서는 첫눈을 말했다.
출근길 라디오의 진행자는 들뜬 목소리로 오늘 저녁 서울 곳곳에 약한 눈발이 날릴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첫눈이라는 말 앞에서 늘 조금 관대해진다. 아직 내리지도 않은 흰 것을 먼저 상상하고, 젖은 길보다 반짝이는 지붕을 떠올리며, 작년의 겨울보다 이번 겨울이 조금은 덜 쓸쓸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성당으로 가는 길의 공기는 눈보다 비에 가까웠다.
준오는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은 희기보다 짙은 회색이었고, 목덜미에 닿는 바람은 차갑지만 건조하지 않았다. 어딘가 물을 머금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전의 도시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먼지와 쇠, 젖기 직전의 아스팔트, 사람들의 외투에서 올라오는 오래된 섬유 냄새. 그 냄새는 통영의 여름과 닮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그에게 한 장소를 떠올리게 했다.
깨진 유리 지붕 아래.
오후 네 시.
비가 온실을 악기처럼 두드리던 날.
준오는 발걸음을 늦추었다. 전날 서윤과 함께 들은 통영역의 녹음이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었다. 기계에서 흘러나온 젊은 서윤의 목소리. 오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말. 그 문장은 밤새 그의 잠을 여러 번 깨웠다. 깨어날 때마다 그는 방 안의 어둠 속에서 오래된 테이프가 아직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성당 문 앞에는 서윤이 먼저 와 있었다.
그녀는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한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담긴 종이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 있지는 않았다. 이미 들어갈 수 있는데도 잠시 바깥에 머무르는 사람 같았다. 준오가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오늘 눈 온대요."
그녀가 말했다.
"하늘은 안 믿는 것 같은데요."
서윤은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전날의 눈물 뒤에 남은 것이었다. 완전히 밝지는 않았고, 완전히 어둡지도 않았다. 사람은 큰 진실을 알게 된 다음 날 갑자기 새로워지지 않는다. 어제까지의 몸으로 오늘의 사실을 견뎌야 한다. 서윤의 얼굴에도 그런 피로가 있었다. 그러나 준오는 그녀가 다시 성당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커피를 두 잔 사왔다는 사소한 사실만으로도,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계속되고 있음을 느꼈다.
"하나는 준오 씨 거예요."
"고마워요."
준오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종이컵의 따뜻함이 장갑을 끼지 않은 손바닥에 닿았다. 그는 그 온도를 잠시 쥐고 있었다. 오래전에는 이런 작은 친절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자주 농담으로 넘겼다. 고맙다는 말이 너무 맨몸처럼 느껴져서, 다른 말로 덮어버리곤 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푸른 창은 전날보다 조금 더 맑아 보였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빠진 조각들은 여전히 빠져 있었고, 보강해야 할 납선도 그대로였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마음이 어제와 달라졌을 뿐이다. 같은 창도, 통과하는 사람이 달라지면 다른 빛을 낸다.
서윤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묶었다. 준오는 녹음 장비를 꺼내며 습관적으로 성당의 소리를 확인했다. 멀리 난방기가 켜지는 소리, 천장 쪽에서 목재가 미세하게 수축하는 소리, 작업대 위에 놓인 금속 자가 아주 작게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서윤이 보관 상자의 잠금장치를 여는 소리.
"오늘은 유리 가장자리 정리부터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
"어제 분리한 조각들요?"
"네. 납선에 가려져 있던 부분을 조금 더 봐야 해요. 이상한 표시가 하나 있었거든요."
"표시?"
"확신은 못 해요. 너무 희미해서."
그녀는 푸른 유리 조각 하나를 흰 천 위에 올려놓았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조각이었다. 창의 가장자리 쪽에 끼워져 있던 것이어서, 앞면의 푸른빛보다 옆면의 낡은 흔적이 더 중요했다. 서윤은 확대경을 가져와 조각의 절단면을 비추었다.
준오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기다렸다. 복원가는 유리의 작은 흠집을 읽는 사람이고, 그는 소리의 작은 흔들림을 듣는 사람이다. 두 일은 닮아 있었지만,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각자의 집중이 있었다.
서윤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낮게 숨을 들이켰다.
"준오 씨."
그 목소리 때문에 준오는 고개를 들었다. 놀라움이 아니라, 놀라움을 조심해서 다루려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거… 봐요."

푸른 유리의 출생지
확대경 아래의 글자는 거의 글자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유리의 옆면, 납선에 감춰져 있던 좁은 부분에 바늘 끝으로 긁은 듯한 흔적이 있었다. 먼지와 산화물, 오래된 접착제 자국이 섞여 있어 처음에는 금 간 선처럼 보였다. 그러나 빛의 각도를 바꾸자 짧은 문자들이 떠올랐다.
T.Y. GLASSHOUSE.
그 아래에는 숫자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87인지, 81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작은 점과 함께 한글의 일부 같은 획이 보였다. 온전하지 않은 이름, 혹은 작업자의 표시.
준오는 그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T.Y.면…"
"통영일 가능성이 높아요."
서윤이 말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준오는 그 떨림을 보았다. 유리를 다루는 사람의 손은 감정을 숨기기 어렵다. 너무 힘을 주면 깨지고, 너무 힘을 빼면 놓친다. 서윤은 지금 그 중간 어딘가에서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글래스하우스."
준오가 천천히 읽었다.
"유리온실."
두 사람 사이에 그 이름이 놓였다.
오래전에는 장난처럼 말했던 이름이었다. 우리 온실. 폐쇄 안내문이 붙은, 녹슨 철골과 깨진 유리와 제멋대로 자란 식물들 사이에서 둘만 잠시 소유한 것처럼 불렀던 장소. 그런데 지금 그 이름은 성당의 푸른 창 가장자리에서, 아주 작고 완고한 글자로 살아남아 있었다.
서윤은 곧바로 자료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성당 측에서 넘겨준 옛 문서들은 대부분 불완전했다. 기증자 명단, 보수 기록, 1990년대에 교체된 납선의 영수증, 오래된 사진 몇 장. 원 제작자에 관한 내용은 그동안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창은 아름답게 남아 있었지만,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오래도록 흐려져 있었다.
그녀는 낡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지난주에 재단 창고에서 추가로 온 자료였다. 바쁜 일정 탓에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봉투 안에는 얇은 종이 여러 장과 변색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서윤은 그중 세로로 접힌 납품 명세서 같은 종이를 펼쳤다.
종이는 손만 대도 바스러질 것처럼 마르고 누렇게 변해 있었다. 글씨는 일부 번져 있었지만, 몇 줄은 읽을 수 있었다.
푸른 창 상단부 색유리 12매.
제작 및 광선 시험: 통영 유리온실.
운송: 부산 경유 서울.
그 아래 서명란에는 이름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낯설었고, 하나는 서윤에게 익숙했다.
임화자.
서윤은 그 이름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임 선생님…"
준오도 그 이름을 알아보았다. 통영의 바다유리공방. 그들이 처음 만난 곳. 서윤에게 유리의 결을 가르쳐준 사람. 유리는 힘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결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
"그때는 말 안 하셨는데."
준오가 말했다.
"아마 우리도 묻지 않았으니까요."
서윤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흑백에 가까울 만큼 색이 빠진 사진이었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온실이었다. 그들이 여름에 걸어 들어갔던 바로 그 철골. 지금보다 덜 무너졌고, 유리도 더 많이 남아 있었지만 형태는 분명했다. 사진 속 온실 안에는 작업대가 놓여 있었고, 여러 사람이 큰 유리판을 세워 빛을 확인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젊은 임화자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머리를 짧게 묶고, 팔짱을 낀 채, 누군가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연필 글씨가 남아 있었다.
통영 유리온실. 푸른 창 시험. 겨울빛.
겨울빛.
서윤은 그 단어를 읽고 눈을 감았다. 그들이 기억하는 온실은 여름의 장소였다. 뜨거운 공기, 비에 젖은 덩굴, 오후 네 시의 돌아온 빛. 그런데 그보다 훨씬 이전의 누군가에게 그곳은 겨울빛을 시험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서울의 성당에 걸릴 푸른 창이, 통영의 바다와 겨울빛 속에서 먼저 숨을 쉬었다.
"그 온실이 그냥 버려진 식물원이 아니었나 봐요."
준오가 말했다.
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방이 좁으니까 큰 창을 맞추거나 빛을 볼 때 그곳을 썼던 것 같아요. 사방에서 빛이 들어오니까. 식물을 키우던 온실이었고, 나중에는 유리를 보는 방이 되었고, 다시 버려졌고…"
그녀는 말을 멈췄다.
"우리는 그걸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네요."
준오는 사진 속 온실을 보았다. 과거의 사람들이 푸른 유리를 세워 빛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그 사진의 바깥에서, 십 년 전 자신과 서윤이 비를 피하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같은 장소가 여러 시간의 사람들을 품고 있었다. 누군가는 창을 만들기 위해 그곳에 섰고, 누군가는 사랑을 말하지 못한 채 그곳에 섰다. 그리고 지금 그 창의 조각이 서울의 성당에서 다시 그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우연일까요?"
서윤이 물었다.
준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예전의 그는 우연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운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연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이 남기고 지나간 흔적이 너무 오래 지나 한곳에서 만날 때, 그것을 우연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쓸쓸했다.
"우연이라도…"
그가 말했다.
"우리가 이제는 모른 척하면 안 되는 우연 같아요."
서윤은 그 말에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성당의 푸른 창은 갑자기 현재의 작업물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통영에서 서울로 온 빛이었고, 임화자의 젊은 손을 지나온 물질이었고, 버려진 온실의 겨울빛을 기억하는 조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이 한때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던 장소가 여기까지 보내온 작은 증거였다.
유리 조각은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때로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가장 오래 부른다.
통영에서 걸려온 전화
서윤이 임화자에게 전화를 건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그녀는 성당 뒤편의 작은 마당으로 나갔다. 겨울의 나무들은 잎을 거의 잃었고, 가지 끝에는 아직 내리지 않은 눈처럼 흐린 빛이 걸려 있었다. 준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장비 가방을 정리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서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엿들으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중요한 소리가 지나갈 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린 뒤, 임화자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서윤의 표정이 먼저 변했다. 놀람, 반가움, 그리고 곧 조심스러운 긴장.
"선생님, 저 서윤이에요. 네, 서울요. 성당 창 복원 중인데요… 혹시 예전에 통영 유리온실에서 성당 창 작업하신 적 있으세요?"
잠시 침묵.
서윤은 전화기를 귀에 더 바짝 붙였다.
"네. 푸른 창이요. 가장자리에서 표시가 나왔어요. T.Y. 글래스하우스라고…"
그녀의 얼굴에서 피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준오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철거요?"
그 한 단어가 마당의 찬 공기 속에 선명하게 떨어졌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 들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 몇 올을 흔들었다. 성당 안에서는 누군가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고, 멀리 도로에서는 버스가 물기 없는 길 위를 지나갔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준오는 이미 무언가가 젖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언제요?"
서윤이 물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
"다음 주면… 너무 빠른데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전화기 너머의 임화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준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서윤의 어깨가 아주 작게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어떤 소식은 몸에서 먼저 도착한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서윤은 한동안 전화기를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준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서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당의 빈 화단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유리온실이 철거된대요."
준오는 이미 들은 말이었는데도, 그녀의 입으로 다시 들으니 다르게 아팠다.
"안전 문제 때문에요?"
"네. 몇 년 전부터 말이 있었는데, 이번에 언덕 정비 사업이 확정됐대요. 낡은 철골이 위험하고, 주변 개발도 같이 들어간다고… 다음 주 초부터 펜스를 치고, 그다음 바로 철거한대요."
그녀는 마른 입술을 한 번 눌렀다.
"임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우리가 찾은 성당 창은 그곳에서 빛을 맞춘 게 맞대요. 선생님 스승이 주도했고, 선생님은 조수였고요. 바다 쪽 빛이 좋아서 큰 창은 늘 그 온실에서 확인했대요. 낮에는 너무 강하고, 오후에는 색이 깊어져서."
오후.
준오는 그다음 말을 마음속으로 먼저 들었다.
네 시.
서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손에 쥔 전화기를 내려다보며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슬픈 표정이었다.
"우리가 그때 본 빛이… 그냥 우리만의 착각은 아니었나 봐요."
준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은 어떤 기억을 너무 오래 혼자 품고 있으면,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의심하게 된다. 비 오는 온실, 푸른 유리, 돌아온 빛,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약속. 너무 오래 아무에게도 증명하지 못한 것들은 마음속에서 조금씩 꿈처럼 흐려진다. 그런데 오늘 그 기억이 낡은 문서와 유리 옆면의 글자, 그리고 한 노인의 목소리를 통해 현실의 무게를 되찾았다.
"기록해야 해요."
서윤이 말했다.
이번에는 복원가의 목소리였다.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이 너무 커서, 그녀는 그것을 일로 붙잡아야 했다.
"성당 창의 제작 배경이 거기에 있어요. 색유리를 어떤 빛에서 맞췄는지, 남아 있는 유리 파편이나 틀의 흔적이 있는지, 작업대나 보관 흔적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요. 철거 전에 사진을 찍고, 위치를 기록하고, 가능하면 현장 소리도 남겨야 하고요."
준오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현장 소리.
그 말이 자신에게 건네진 것임을 알았다.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보았다.
"같이 가줄 수 있어요?"
질문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복원 프로젝트의 필요, 성당 창의 출처, 임화자의 기억, 철거를 앞둔 장소.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십 년 전의 약속이 있었다. 언젠가 다시 여기서 만나자. 여기가 없어지면, 없어졌다는 걸 확인하러 와요. 그때는 쓸쓸한 농담처럼 지나간 말이 지금은 실제가 되어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다.
준오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통영.
그 이름만으로도 그의 왼쪽 귀 안쪽이 미세하게 조여왔다. 통영역의 비, 금속음, 젖은 편지, 닫히는 문. 그리고 유리온실. 그는 그곳을 사랑했지만, 그래서 더 돌아가지 못했다. 어떤 장소는 그리워서 갈 수 없고, 어떤 장소는 미안해서 갈 수 없다. 통영은 준오에게 두 가지 모두였다.
서윤은 그의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녀라면 그 침묵을 거절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표정이 굳는 순간, 이미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하고 먼저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서윤은 기다렸다. 침묵이 늘 도망은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은 너무 늦게 배웠다.
준오는 성당 안쪽을 바라보았다.
푸른 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창은 이제 통영으로 이어지는 문처럼 보였다. 깨진 조각 하나가 길을 만들고 있었다.
"무서워요."
그가 말했다.
그 말은 그 자신에게도 낯설었다. 십 년 전의 준오라면 절대 먼저 꺼내지 않았을 말이었다. 무섭다는 말은 약해 보이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는 안다. 말하지 않은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가운 얼굴로 전달된다.
서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도요."
그녀가 대답했다.
준오는 그녀를 보았다.
"그 온실이 정말 없어지는 걸 보면… 내가 붙잡고 있던 게 다 끝났다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무서워요. 그리고 반대로, 아직 남아 있으면 그것도 무서울 것 같아요. 그렇게 가까운 데 있었는데, 왜 십 년 동안 한 번도 가지 않았는지 봐야 하니까."
서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래요. 포르투에서도 가끔 그 온실을 생각했어요. 말도 안 되게요. 낡고 위험하고, 제대로 된 약속 장소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곳을 생각하면 하루를 넘길 수 있었어요. 오늘이 너무 길어도, 언젠가 오후 네 시가 다시 올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사랑인지 미련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만든 환상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더 말하지 못했어요."
준오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오래된 약속은 때로 바깥에서 보면 유치해 보인다. 비 오는 날, 오후 네 시, 폐허가 된 온실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 젊은 날의 감상,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붙잡는 장식 같은 문장. 그러나 그 약속을 품고 긴 밤을 지나온 사람에게 그것은 장식이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손바닥 안에 숨겨둔 작은 불빛이었다.
서윤에게도 그랬고, 준오에게도 그랬다.
그는 그 사실을 이제야 받아들였다.
"나도 그랬어요."
준오가 말했다.
"어딜 가든 녹음이 끝나고 혼자 숙소로 돌아오면, 가끔 생각했어요. 아직 언젠가가 안 왔다고. 그러면 조금 덜 끝난 것 같았어요."
서윤의 눈이 젖었다.
준오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요."
그가 말했다.
서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네."
준오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원 기록 때문이기도 하고, 성당 창의 출처를 확인해야 해서이기도 하고…"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우리가 한 약속 때문이기도 해요."
그 말이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이번에는 빗소리에 묻히지 않았다. 정류장의 소음도, 역의 안내 방송도, 젖은 편지도 없었다. 성당 뒤편의 작은 마당, 아직 내리지 않은 첫눈 예보 아래에서, 준오는 처음으로 그 약속을 현재형으로 불렀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번에는 날짜를 정해야겠네요."
"그래야 못 도망가죠."
준오가 말했다.
그 말에 서윤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내일 오후에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재단에 현장 조사 신청하고, 임 선생님께 통영시 담당자 연락처 받아볼게요. 철거 전 출입 허가가 필요할 테니까."
"장비 챙길게요. 소리 기록도 하고, 필요하면 영상도 같이 남길 수 있어요."
"오후 네 시에는…"
서윤은 말을 멈췄다.
준오가 이어 말했다.
"온실에 있어요."
그것은 계획이었고, 약속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둘 다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유치한 약속의 쓸모
오후의 성당은 조금 바빠졌다.
서윤은 재단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통영 현장 조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행정적인 목소리로 말하던 담당자도, 성당 창의 원 제작지가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태도가 달라졌다. 오래된 유리의 출처는 복원에서 단순한 부록이 아니었다. 어떤 빛에서 만들어졌는지, 어떤 재료를 썼는지, 제작자가 무엇을 보려 했는지 알면 복원의 방향이 바뀐다. 빠진 조각을 채우는 일은 색을 비슷하게 맞추는 것만이 아니라, 그 색이 태어난 조건을 이해하는 일이니까.
준오는 장비 목록을 적었다. 휴대용 녹음기 두 대, 지향성 마이크, 주변음을 담을 스테레오 마이크, 예비 배터리, 메모리 카드, 방수 커버, 낡은 카세트테이프를 옮긴 파일이 담긴 작은 저장 장치. 마지막 물건을 적을 때 그는 잠시 멈췄다.
통영역의 녹음.
그 파일을 가져가야 할지 망설였다. 유리온실 기록에는 필요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통영으로 돌아가는 일은 성당 창의 출처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이 듣지 못했던 시간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파일을 두고 가면 안전할 수는 있겠지만, 안전하다는 이유로 중요한 것을 두고 오는 일은 이미 충분히 했다.
그는 목록 맨 아래에 작게 적었다.
테이프 파일.
그리고 그 옆에 괄호를 쳤다.
필요하면.
필요하면.
사람은 늘 그런 말을 붙인다. 아직 용기가 부족할 때, 그러나 완전히 도망치고 싶지는 않을 때.
서윤은 오래된 자료를 스캔하고, 임화자에게 받은 이야기를 작업 일지에 적었다. 그녀의 글씨는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통영 유리온실은 원래 일제강점기 말 한 개인 정원에 딸린 온실로 지어졌고, 이후 버려졌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지역 유리 장인들이 빛을 확인하는 임시 작업장으로 사용했다. 큰 판유리나 스테인드글라스는 좁은 공방에서 전체 색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방에서 자연광이 들어오는 그 온실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정식 명칭도 아닌데 그곳을 통영 유리온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서울의 이 성당 창 일부가 그곳을 거쳐 왔다.
서윤은 그 문장을 쓰고 오래 멈추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십 년 전 두 사람이 자신들만의 장소라고 믿었던 곳은 사실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빛을 품어온 장소였다. 그래서 더 사적인 장소가 되었다. 사람의 기억은 혼자만의 것이라고 해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자신보다 먼저 그곳을 지나간 손들과 마음을 알게 될 때, 그 장소는 더 넓고 오래된 의미를 갖는다.
서윤은 작업 일지 한쪽에 적었다.
성당의 푸른 유리는 통영의 바다빛을 직접 닮은 것이 아니라, 통영에서 겨울빛을 통과한 푸른색이다.
그녀는 그 문장을 보고 잠시 미소 지었다. 복원 보고서에 쓰기에는 너무 문학적인 문장이었다. 나중에 지워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지우고 싶지 않았다.
준오가 다가와 말했다.
"통영시에서 연락 왔어요?"
"네. 임 선생님이 담당자에게 먼저 말해주셨대요. 내일 오후부터 모레 오전까지 제한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안전모 쓰고, 지정 구역 밖으로 나가면 안 된대요."
"온실 안까지 들어갈 수 있어요?"
"일부만요. 상태가 많이 안 좋대요."
그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많이 안 좋다.
사람에게도, 장소에게도 쓸 수 있는 말이었다. 무너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밖에서 보기에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도 안쪽에서는 오래전부터 조금씩 금이 간다. 온실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비는 내렸고, 유리는 더 깨졌고, 철골은 더 녹슬었고, 덩굴은 더 깊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약속과 상관없이, 장소는 자기 방식으로 늙어갔을 것이다.
"혹시…"
서윤이 말했다.
"가서 아무것도 못 찾을 수도 있어요. 이미 다 치워졌거나, 위험해서 가까이 못 갈 수도 있고."
"그래도 가요."
준오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없어졌다는 걸 확인하러 가자고 했잖아요."
서윤은 그 말을 듣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 기억하고 있었어요?"
"기억했어요."
"나는 당신이 잊은 줄 알았어요."
"잊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적은 있어요."
준오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잊은 척하는 것과 잊는 건 다르더라고요."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흰 천 위의 푸른 유리 조각을 조심스럽게 보관 상자에 넣었다. 뚜껑을 닫기 전, 그녀는 다시 한번 유리 옆면의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T.Y. GLASSHOUSE. 너무 희미해서 조명 없이는 보이지 않는 표시. 그러나 그 작은 글자가 두 사람의 내일을 바꾸었다.
사랑도 그와 비슷한 것인지 모른다.
겉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다가, 어떤 각도에서 빛을 받으면 아직 남아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
서윤이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
"예전에는 그런 약속을 붙잡고 있는 내가 한심한 줄 알았어요."
준오는 그녀를 보았다.
"왜요?"
"너무 어리게 느껴져서요. 비 오는 날, 오후 네 시, 유리온실. 그런 말을 마음속에 두고 사는 게… 현실을 못 받아들이는 사람 같았어요. 포르투에서 일도 해야 했고, 엄마 일도 정리해야 했고, 내 삶을 어떻게든 살아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온실이 떠오르면 내가 아직 거기서 한 걸음도 못 나온 것 같았거든요."
그녀는 손끝으로 상자의 모서리를 쓸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약속이 있어서 버틴 날들도 있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믿을 수 없을 때,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 오후 네 시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유치한 미련이라도, 나한테는 마지막 불빛 같았어요."
준오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마지막 불빛.
그 말이 그의 안쪽에도 닿았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불빛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저 일을 하고, 소리를 모으고, 이동하고, 잠을 자고, 다시 일을 했다고. 그러나 사실 그의 가방 깊은 곳에는 늘 테이프가 있었다. 서윤에게 들려주지 못한 소리들. 온실의 비와 그녀의 웃음. 그는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버리면 그녀가 정말 없었던 사람이 될까 봐.
그것 역시 불빛이었다.
작고, 닳고, 자주 부끄러워 숨겼지만, 완전히 꺼뜨릴 수 없었던 것.
"한심하지 않아요."
준오가 말했다.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야 할 때가 있잖아요. 남들이 보면 별것 아닌데, 그게 없으면 하루가 안 넘어가는 것들."
서윤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오 씨한테는 뭐였어요?"
그는 잠시 생각했다.
"소리요."
그 대답은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어진 말은 조금 달랐다.
"정확히는, 사라지기 전에 남길 수 있다는 믿음. 내가 놓친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적어도 다음 것은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아니면 그냥 내 죄책감을 달래는 일인지 오래 헷갈렸는데…"
그는 푸른 창을 보았다.
"이제는 둘 다였던 것 같아요. 죄책감에서도 시작할 수 있고,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아주 틀린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서윤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대화는 예전보다 느렸다. 더듬는 시간이 많았고, 대답이 늦었고, 때로는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진실했다. 젊은 날의 그들은 마음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지금의 그들은 서툴어도, 그 서투름을 숨기지 않으려 했다.
성당의 시계가 네 시를 알렸다.
겨울의 네 시는 여름의 네 시와 달랐다. 빛은 이미 낮아지고 있었고, 창밖의 나무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그러나 푸른 유리는 그 시간에 가장 깊어졌다. 통영에서 그랬듯, 서울에서도 그랬다. 완전히 같은 빛은 아니었다. 그래도 서윤은 오래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같다고 믿으면 같은 빛이 되는 거죠.
그녀는 아주 작게 말했다.
"내일도 네 시쯤이면 빛이 돌아올까요?"
준오는 창밖을 보았다.
"비가 오면 더 좋겠죠."
서윤은 그를 보며 말했다.
"첫눈이 온다는데요."
"예보는 자주 틀리잖아요."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은 짧았지만, 성당 안의 공기를 조금 바꾸었다.
첫눈 대신
저녁이 되자 눈은 오지 않았다.
대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당 계단에 작은 점들이 생겼다. 어두운 돌 위에 하나, 둘, 셋. 곧 점들은 서로 이어져 얇은 물막이 되었고, 가로등 아래로 비의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첫눈을 기대하고 목도리를 둘렀다가, 예상과 다른 축축함에 얼굴을 찡그리며 우산을 펼쳤다. 거리의 카페 유리창에는 김이 서렸고, 버스 정류장 앞에는 젖은 발자국들이 겹쳤다.
서울의 겨울비는 통영의 여름비와 전혀 달랐다.
통영의 비는 따뜻한 공기 속에서 갑자기 쏟아져 온실을 두드렸고, 잎을 흔들었고, 바다 냄새를 데려왔다. 서울의 비는 낮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코트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고, 아스팔트를 검게 적시고, 사람들의 걸음을 서두르게 했다. 그런데도 준오는 그 두 비가 어딘가에서 겹친다고 느꼈다. 닿는 표면은 달라도, 비는 늘 숨겨진 소리를 깨운다.
그는 성당 현관 아래에서 녹음기를 켰다.
서윤은 옆에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지금도 녹음해요?"
"첫눈 대신 내린 비니까요."
"그게 이유가 돼요?"
"충분한데요."
준오는 마이크를 비 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빗방울이 돌계단을 때리는 소리, 우산 천에 닿는 소리, 성당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가 물을 가르는 소리. 그 모든 소리 사이에 서윤의 숨이 아주 작게 섞여 있었다. 그는 예전 같으면 그녀의 숨소리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들켰다고 생각할까 봐,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러나 이번에는 솔직히 말했다.
"당신 숨소리도 들어갔어요."
서윤은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지워야 해요?"
"아니요."
그녀는 잠시 비를 바라보았다.
"남겨요."
그 말은 작았지만 분명했다.
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녹음기의 빨간 불빛이 빗속에서 아주 작게 깜빡였다. 십 년 전에는 의도하지 않은 녹음이 그들의 진실을 뒤늦게 돌려주었다. 오늘은 의도해서 남기는 소리였다. 첫눈 예보가 틀리고, 비가 내리고, 두 사람이 통영으로 돌아가기로 한 저녁. 언젠가 누군가 이 소리를 듣게 된다면, 이 비가 어떤 결정을 적셨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았다.
서윤이 우산을 펼쳤다.
"내일 아침 기차표, 제가 예매할게요."
"같이 봐요."
준오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두 사람은 성당 현관 아래 좁은 공간에서 나란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서울에서 통영으로 가는 길은 예전보다 편해졌지만, 여전히 한 번에 닿는 길은 아니었다. 기차를 타고, 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택시를 타야 했다. 오래된 약속으로 가는 길은 늘 조금 번거롭다.
"이 시간 괜찮아요?"
서윤이 물었다.
"네. 도착하면 오후 두 시 조금 넘겠네요."
"임 선생님 공방에 먼저 들르고, 허가서 받아서 온실로 가면…"
"네 시."
준오가 말했다.
서윤은 화면에서 눈을 떼고 그를 보았다.
"네. 네 시쯤."
그들은 표 두 장을 예매했다. 결제 완료 화면이 뜨자, 이상하게도 둘 다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단지 표를 산 것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표는 이동 수단이 아니라, 오래 피했던 시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정말 가네요."
준오는 비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도망가고 싶으면 지금 말해요."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완전히 농담은 아니었다.
준오는 우산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도망가고 싶어요."
서윤이 그를 보았다.
그는 이어 말했다.
"그런데 안 갈 거예요."
서윤의 표정이 천천히 풀렸다.
"나도 그래요."
둘은 성당 계단을 내려갔다. 하나의 우산을 같이 쓰지는 않았다. 서윤에게는 서윤의 우산이 있었고, 준오에게는 준오의 우산이 있었다. 두 우산은 가끔 부딪힐 만큼 가까웠지만, 서로의 공간을 무리하게 침범하지는 않았다. 그 거리감이 지금의 두 사람에게 맞았다. 가까워지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같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서로의 위치를 살피며 걷는 일은 가능했다.
길 위의 물웅덩이에 성당의 푸른 창이 희미하게 비쳤다. 실제 창의 색은 빗물 속에서 더 어둡고 깊어 보였다. 준오는 그 반사를 보며 통영의 온실 바닥을 떠올렸다. 유리 파편 사이로 흐르던 물, 그 위에 흔들리던 푸른빛. 여름의 비와 겨울의 비가 한순간 같은 표면 위에 겹쳤다.
"준오 씨."
서윤이 불렀다.
"네."
"그때 우리가 온실에서 했던 말요. 여기가 없어지면 없어졌다는 걸 확인하러 오자고 했던 말."
"기억해요."
"그때는 너무 쓸쓸한 약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듯 걸음을 늦추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느껴져요. 없어졌는지 확인하러 간다는 건, 그게 있었다는 걸 인정하러 가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준오는 그 말을 마음속에 조용히 받아들였다.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사랑도, 약속도, 상처도, 장소도. 사라졌다고 해서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그것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남기는 방식일 수 있다.
"그럼 가서 확인해요."
그가 말했다.
"무엇이 없어졌고, 무엇이 남았는지."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는 조금 더 굵어졌다. 첫눈을 기다리던 도시는 실망한 듯 보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 비가 맞는 날씨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기억 속 가장 중요한 약속은 눈이 아니라 비와 함께 태어났으니까. 흰 눈처럼 모든 것을 덮는 것이 아니라, 비처럼 오래된 자국을 다시 드러내는 날씨. 젖으면 글자가 번지기도 하지만, 어떤 먼지는 씻겨나가고, 어떤 색은 더 선명해진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두 사람은 잠시 멈췄다.
서윤의 버스는 오른쪽으로, 준오의 버스는 왼쪽으로 갔다. 예전 같으면 이 짧은 갈림길조차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일 다시 만날 시간과 장소가 있었고, 그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
"내일 역에서 봐요."
서윤이 말했다.
"늦지 않을게요."
준오가 대답했다.
서윤은 그 말에 아주 작게 웃었다.
"나도요."
그 짧은 대답 안에 십 년 전의 통영역이 있었다. 왔지만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오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던 목소리. 이번에는 늦지 않겠다는 말이 단순한 시간 약속을 넘어섰다. 서로의 앞에 도착하겠다는 뜻이었다. 두려움이 있어도, 오래 걸렸어도, 이번에는 도착하겠다는 뜻.
버스가 왔다.
서윤은 우산을 접기 전,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눈은 없었다. 가로등 불빛 속에는 비만 촘촘히 내려오고 있었다.
"첫눈은 아니네요."
그녀가 말했다.
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왜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눈 오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서윤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우산 아래에서 그를 한 번 오래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아직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도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지나온 빛이 있었다.
서윤이 버스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빗속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준오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았다. 십 년 전의 플랫폼에서는 놓쳤던 장면이었다. 떠나는 사람을 보고도, 이번에는 끝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일. 같은 도시의 다른 방향으로 잠시 헤어지지만,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아는 일.
그는 녹음기를 꺼내 아직 켜져 있는지 확인했다.
빨간 불빛은 계속 깜빡이고 있었다.
첫눈 대신 내린 비가, 서울의 저녁을 오래 적시고 있었다.
준오는 녹음기를 끄지 않았다. 조금 더 남기고 싶었다. 버스가 멀어지는 소리, 빗물이 배수구로 흘러드는 소리, 누군가 우산을 털며 웃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숨이 조금씩 안정되는 소리까지.
내일이면 그들은 통영으로 간다.
오래된 약속이 있는 곳으로.
유치한 미련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오래 그들을 살게 했고,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운, 그러나 분명히 꺼지지 않았던 마지막 불빛을 확인하러.
비는 계속 내렸다.
여름의 온실에서 그랬듯이.
겨울의 서울에서도 그랬듯이.
그리고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오래전 돌아온 빛이 아주 천천히 다시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