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상자
다음 날 서윤은 성당에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상자는 낡은 푸른색이었다. 처음부터 푸른색이었던 것은 아닌 듯했다. 모서리는 닳아 종이의 속살이 드러나 있었고, 뚜껑 한쪽에는 포르투의 우체국에서 붙인 듯한 오래된 항공 스티커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비행기를 여러 번 타고, 이삿짐 상자 속에서 눌리고, 책장 깊은 곳에서 오래 숨을 참은 물건만이 가질 수 있는 피로가 그 상자에 남아 있었다.
서윤은 그것을 작업대 아래에 내려놓았다.
준오는 녹음 장비를 정리하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가벼운 종이 상자가 바닥에 닿는 소리였지만, 이상하게 무거웠다. 어떤 물건은 안에 담긴 것 때문에 소리의 무게가 달라진다. 빈 상자라면 툭, 하고 끝났을 소리가 이번에는 낮게 가라앉았다.
"그거예요?"
준오가 물었다.
서윤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상자 뚜껑을 한 번 쓸었다.
"네. 포르투에서 가져온 것들."
그녀는 편지라고 바로 말하지 않았다. 준오도 다시 묻지 않았다. 전날 어둠 속에서 그들은 많은 말을 했다. 어머니의 죽음, 통영역, 젖은 편지, 그의 왼쪽 귀. 그러나 말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에는 문이 여러 개 있고, 어떤 문은 손잡이를 잡은 뒤에도 한참 서 있어야 열린다.
성당 안은 오전의 빛으로 흐렸다. 복원 중인 푸른 창에는 아직 빠진 조각들이 있었고, 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기록지를 조금씩 흔들었다. 재단 직원들은 오후 회의 준비로 바빴고, 보조 복원가는 자재실에서 납선 보강재를 찾고 있었다. 잠깐의 빈 시간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서윤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편지들이 있었다.
봉투에 들어 있는 것도 있었고, 접힌 종이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어떤 종이는 포르투의 습기를 먹어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휘어 있었고, 어떤 종이는 잉크가 옅게 번져 있었다. 낯선 도시의 공기와 오래된 방의 먼지, 비 오는 밤의 체온이 그 종이들에 아주 얇게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준오는 손을 뻗지 않았다.
서윤의 허락 없이는 만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편지는 종이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가 너무 늦게 도착한 곳이었다.
"다 읽어줄 수는 없어요."
서윤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런데 몇 장은… 당신이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알아야 할 것.
준오는 그 말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벌써 가슴속에서 방어가 올라왔을 것이다. 알아야 한다는 말은 때로 다시 다칠 준비를 하라는 말처럼 들리니까. 그러나 지금 그는 도망치지 않으려 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듣지 못한 말을 끝까지 듣기로, 오래전 자기 노트에 적어두었으니까.
서윤은 첫 번째 편지를 골랐다.
봉투도 없고 날짜도 희미한 종이였다. 그녀는 그것을 펼치며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종이를 펴는 소리가 성당 안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접힌 시간이 펼쳐지는 소리였다.

도착하지 않은 문장들
"이건 포르투에 도착하고 열흘쯤 지나서 쓴 거예요."
서윤은 편지의 첫 줄을 한참 바라보다가 읽기 시작했다.
준오 씨, 여기는 비가 자주 와요. 이상하게도 비 냄새는 통영과 달라요. 돌이 젖는 냄새가 먼저 나고, 그다음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나요. 당신이라면 이 소리를 녹음했을까요. 창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아래층 식당의 접시 소리를 따로 분리해서 들었을까요. 나는 아직도 소리를 들으면 당신이 먼저 생각나요. 그래서 가끔은 귀를 닫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조금 흔들렸지만, 곧 낮고 고른 결을 되찾았다. 준오는 편지 속 문장보다 그것을 읽는 현재의 목소리를 더 조심스럽게 들었다. 젊은 서윤이 쓴 문장을 지금의 서윤이 읽고 있었다. 같은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그 사이에 십 년이 있었다. 포르투의 비와 어머니의 장례식, 푸른 방의 창과 수많은 작업 일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던 밤들이 그 목소리 안에서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서윤은 두 번째 편지를 펼쳤다.
"이건 성당에서 처음 푸른 유리 조각을 만진 날."
오늘 유리 조각 하나를 손에 올려놓았어요. 푸른색이었어요. 빛이 내 손을 통과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유리가 빛을 바꾸고 있었겠죠. 나는 당신을 지나오면서 어떤 빛이 되었을까요. 더 어두워졌을까요. 아니면 당신이 보기에는 처음부터 어두웠을까요.
준오는 손가락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너는 처음부터 어둡지 않았다고. 네가 지나간 자리마다 빛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그러나 그는 말을 삼켰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청취였다. 너무 늦은 위로는 때로 상대의 시간을 다시 덮어버린다. 그는 서윤이 자기 편지의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서윤은 편지 한 장을 더 골랐다.
그 편지는 여러 번 접었다 편 흔적이 있었다. 접힌 선마다 종이가 희게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이건… 비 오는 일요일에 쓴 거예요. 아마 제일 솔직한 편지였을 거예요."
그녀는 읽었다.
나는 도망친 걸까요.
그때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를 위해서, 내 미래를 위해서, 당신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 와서 생각하면,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게 정말 당신이었는지 아니면 내 자존심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가난하다는 말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엄마가 아프다는 말을 당신 앞에서 꺼내면, 당신 눈빛이 달라질까 봐 무서웠어요. 동정받는 것이 싫었어요. 아니, 사실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걸 구분할 자신이 없었어요.
서윤의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희미하게 갈라졌다.
준오는 고개를 숙였다. 그 문장은 그가 십 년 동안 몰랐던 방의 문을 열었다. 그는 서윤이 떠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손을 거절했다고, 더 넓고 밝은 곳으로 혼자 가고 싶었던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편지 속 서윤은 밝은 곳으로 달려간 사람이 아니었다. 어두운 방을 들키지 않으려고 문을 닫고 서 있었던 사람. 기대고 싶은 마음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 먼저 뒷걸음질친 사람.
그는 그때의 자신도 떠올렸다.
합격 소식을 말하며 일부러 담담했던 목소리. 서윤이 포르투에 간다고 했을 때 "좋네"라고 너무 빨리 대답했던 순간. 축하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방어였던 말들. 붙잡고 싶으면서 붙잡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멀쩡한 얼굴을 했던 어리석음.
두 사람은 서로의 꿈을 존중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삶에서 짐이 되지 않으려고, 서로에게 가장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서윤은 다음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작은 종이에 짧게 적힌 글이었다.
"이건 미겔이 에그타르트를 사다 준 날이에요."
준오는 그 이름을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미겔. 포르투의 누군가. 그녀가 너무 오래 혼자가 되지 않도록, 사소한 다정함으로 곁에 있었던 사람. 준오는 질투보다 먼저 고마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 시절의 자신은 서윤 곁에 없었으니까. 누군가는 있어주어야 했으니까.
서윤이 읽었다.
오늘 누군가 내게 따뜻한 것을 사다 주었어요. 나는 그게 무서웠어요. 내가 아직도 누군가의 다정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당신에게 기대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 마음을 들키면 당신이 도망갈까 봐 무서웠고, 내가 먼저 도망갔어요. 그래서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나를 지킨 건지, 우리를 망친 건지.
편지는 거기서 끝났다.
성당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빠진 창 조각 사이로 불어온 바람은 흰 천 위의 유리 가루를 아주 조금 흔들었다. 준오는 그 가루가 햇빛을 받아 순간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너무 작아서 입김 하나에도 사라질 것 같은 조각들. 그러나 그 조각들도 한때는 창의 일부였을 것이다.
"왜 보내지 않았어요?"
준오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
서윤은 편지들을 내려다보았다.
"답을 기다리게 될까 봐요."
그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 긴 밤들이 있었다.
"답이 오지 않으면 정말 끝이라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그리고 답이 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무서웠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한다고 해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
준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윤은 마지막으로 한 장을 꺼냈다. 다른 종이보다 조금 더 두꺼웠고, 글씨가 안정되어 있었다. 아마 포르투에 익숙해진 뒤의 글씨일 것이다. 한때 무너질 것 같던 손이 다시 자기 힘을 배운 뒤 쓴 글씨.
"푸른 방의 창을 복원하던 날 쓴 거예요."
그녀는 천천히 읽었다.
나는 오늘 푸른 방의 창을 떼어냈어요. 창이 사라지자 방이 갑자기 낯설어졌어요. 그제야 알았어요. 어떤 것은 없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많은 빛을 바꾸고 있었는지 드러난다는 걸.
당신도 그랬어요.
나는 당신에게 기대지 않으려고 떠났어요. 당신의 삶에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내 삶의 어두운 방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기대는 일과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일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걸. 그걸 그때 알았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요.
서윤은 거기서 읽기를 멈췄다.
편지의 뒷부분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더 읽지 않았다. 준오도 요구하지 않았다. 어떤 문장은 읽히지 않은 채로도 충분히 전해진다. 오히려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남는 문장들이 있다.
준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네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처럼 젊은 확신은 없었다. 대신 오랜 시간 자기 오해를 품고 살아온 사람의 피로와, 이제라도 그것을 내려놓고 싶어 하는 사람의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젖은 편지에 남은 몇 줄만 보고, 그게 전부라고 믿었어요. 아니, 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야 내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이유가 생기니까. 네가 먼저 나를 밀어냈다고 생각하면, 내가 겁이 나서 연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지 않아도 됐으니까."
서윤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도 당신이 답하지 않은 걸 보고 같은 생각을 했어요. 당신은 내가 없어도 괜찮구나. 내가 떠난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렇게 믿으면… 내가 당신에게 기대지 못한 걸 정당화할 수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같은 작업대 앞에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푸른 상자와 오래된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 십 년 전에는 도착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문장들은 젊지 않았다. 종이는 낡았고, 잉크는 옅어졌고, 읽는 사람들도 더 이상 그때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랑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는 것은 사람보다 진심일 수 있다.
그리고 너무 늦게 도착한 진심은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슬펐다.
테이프의 끝
그날 밤, 준오는 작업실로 돌아와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꺼냈다.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에는 여전히 작은 금이 가 있었다. 라벨에는 흐린 글씨가 남아 있었다.
서윤에게 들려줄 것.
그는 그 글씨를 오래 보았다. 오래전의 자신은 이 테이프를 서윤에게 건네며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으면, 이 소리들이 대신해줄 거라고 믿었다. 통영의 온실, 해성극장의 골목, 항구의 새벽, 그리고 우연히 녹음된 서윤의 웃음. 그 모든 것이 그의 고백이었다.
하지만 테이프는 끝내 건네지지 못했다.
대신 십 년 동안 그의 짐 속을 따라다녔다. 들려주기 위해 만든 소리가 들려주지 못한 소리가 되었고, 고백은 기록이 되었으며, 기록은 상처와 부적 사이 어딘가에 놓인 물건이 되었다.
준오는 낡은 플레이어를 책상 위에 올렸다.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기계였다. 버튼을 누르면 스프링이 늦게 반응했고, 재생 중에는 작은 마찰음이 났다. 그는 테이프를 넣고, 동시에 디지털 녹음기를 연결했다. 복원 작업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오래된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사실은 다른 이유였다.
오늘 서윤의 편지를 들은 뒤, 그는 자신의 말하지 않은 소리들도 더 이상 서랍 안에만 둘 수 없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사각거리는 잡음이 흘렀다. 곧 통영의 비가 나왔다. 유리온실 지붕 위로 떨어지던 여름비. 깨진 유리와 온전한 유리 위에서 조금씩 다르게 울리던 빗방울들. 젊은 준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여기랑 저기는 소리가 달라."
젊은 서윤이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도 그렇게까지 구분해요?"
준오는 눈을 감았다.
그 다음은 그가 너무 잘 아는 구간이었다. 서윤의 짧은 웃음. 유리구슬처럼 맑고, 그래서 들을 때마다 더 아픈 웃음. 그는 예전처럼 그 지점에서 정지 버튼을 누르려 했다. 손가락이 버튼 위에 올라갔다.
그러나 누르지 않았다.
오늘은 끝까지 듣기로 했다.
웃음이 지나가고 비가 계속되었다. 한동안 온실의 소리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테이프가 늘어진 듯 낮은 소음이 끼어들었다. 준오는 그것이 손상된 구간이라고 생각했다. 오래된 테이프에는 그런 일이 흔했다. 자성층이 약해지고, 이전 녹음의 흔적이 새 녹음 아래에서 유령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그는 헤드폰을 조금 눌러 썼다.
잡음 속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아니, 바람이 아니었다.
빗소리였다.
온실의 비가 아니었다. 더 거칠고, 더 넓고, 더 많은 표면을 때리는 비. 철제 지붕, 역 바닥, 우산, 사람들의 옷자락, 멀리 지나가는 자동차. 준오는 몸을 굳혔다. 오른쪽 귀로 먼저 소리가 들어왔고, 왼쪽 귀 안쪽에서는 오래된 이명이 희미하게 일어났다.
통영역.
그는 바로 알았다.
그날의 비였다.
준오는 숨을 멈춘 채 테이프를 들었다. 처음에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폭우로 일부 구간이 지연된다는 말, 승강장 변경을 알리는 말, 그러나 스피커의 잡음 때문에 문장의 끝은 뭉개졌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우산을 접는 소리, 누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시간을 묻는 소리도 들어 있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날 자신은 녹음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동안, 불안을 달래려고 테이프를 한 번 재생했을 것이다. 서윤에게 줄 소리를 확인하려고. 그리고 사고 소리에 놀라 뛰어나가며, 기계를 완전히 끄지 못했거나, 가방 안에서 녹음 버튼이 눌렸을지도 모른다.
기록하지 않았다고 믿었던 순간이, 기계의 실수로 조금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두려웠다.
사람이 외면한 시간도 물건은 가끔 기억한다.
테이프 속에서 젊은 준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었다. 아마 역 밖이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금방 와요. 눈 감지 말아요."
그는 배달원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의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준오는 왼쪽 귀 뒤가 다시 아려오는 것 같았다. 피와 빗물, 구급차 불빛, 미끄러운 도로. 그는 정말로 서윤을 기다리다 자리를 비웠다. 떠난 것이 아니었다.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가 쓰러졌고, 그는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었다.
테이프는 계속 돌아갔다.
그다음에는 긴 잡음이 있었다. 가방 안에서 천이 마이크를 스치는 듯한 소리, 누군가 물건을 내려놓는 둔탁한 소리, 급하게 뛰는 발소리. 준오는 정지 버튼에 손을 올렸다. 더 듣는 것이 두려웠다.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빗소리 사이로 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저기요."
준오는 손을 멈췄다.
아주 작고, 숨이 찬 목소리였다. 주변 소음에 거의 묻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아들었다. 십 년이 지나도, 비와 잡음과 낡은 테이프의 손상 속에서도, 그 목소리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윤이었다.
"혹시… 이준오 씨 못 보셨어요?"
테이프 속 서윤은 젖어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숨이 가빴고, 문장 사이마다 물을 삼키는 듯한 떨림이 있었다.
"검은 배낭 메고… 키가 크고… 아까 여기서 기다린다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겹쳤다. 역무원인지, 지나가던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오늘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서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더 가까워졌다.
"오면… 이것 좀 전해주세요. 꼭요. 제가 왔다고… 아니, 그건…"
그다음 문장은 빗소리에 묻혔다.
준오는 헤드폰을 두 손으로 눌렀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소리를 방해하는 것 같았다.
테이프 속 서윤이 다시 말했다.
"오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전해주세요."
준오는 눈을 감았다.
방 안이 사라졌다. 책상도, 장비도, 밤의 창도 사라지고, 그는 다시 통영역 대합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젖은 사람들 사이, 어긋난 안내 방송 아래, 한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그는 거기에 없었다. 그러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불과 몇 걸음, 몇 분, 몇 개의 빗줄기만큼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녹음은 거기서 크게 흔들렸다.
열차 출발 안내가 들어왔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꺼번에 빨라졌다. 서윤의 목소리는 멀어졌다.
"준오 씨…"
그 말은 거의 숨이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테이프는 한동안 빗소리만 남겼다. 그 뒤로는 날카로운 금속음, 누군가의 짧은 비명, 그리고 갑작스러운 끊김. 아마 그때 충격이 있었을 것이다. 오토바이의 금속 상자였는지, 흔들린 간판 조각이었는지, 이제 와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테이프의 소리는 거기서 한쪽이 찢긴 듯 일그러졌고, 곧 긴 무음으로 넘어갔다.
준오는 재생 버튼이 올라올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십 년 동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날을 사실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 못했고, 마음으로는 더더욱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의 한 조각이 낡은 테이프 끝에서, 먼지와 잡음과 함께 살아남아 있었다.
서윤은 왔었다.
그녀는 그를 찾았다.
그리고 오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말했었다.
준오는 책상에 두 손을 짚었다. 숨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울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은 소리를 내지 않았고, 방 안에는 테이프가 멈춘 뒤의 고요만 남아 있었다.
고요 속에서 그는 아주 늦게 이해했다.
그들이 잃은 것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었다.
사랑을 확인할 용기의 부재였다.
우리가 듣지 못한 우리
다음 날 오후, 준오는 서윤에게 테이프 이야기를 꺼냈다.
성당 작업은 일찍 끝났다.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낮았고, 푸른 창의 빈자리로 들어오는 빛은 유난히 흐렸다. 서윤은 분리한 유리 조각들을 보관 상자에 넣고 있었다. 번호표를 붙이는 손이 익숙하고 조용했다.
"서윤 씨."
준오가 불렀다.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사람은 아주 오래 아끼던 물건을 꺼내온 얼굴을 알아본다. 두려워하면서도 더는 숨길 수 없는 얼굴.
"무슨 일 있어요?"
"들려주고 싶은 게 있어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듣기 힘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원하지 않으면 안 들어도 됩니다."
서윤의 손이 아주 조금 굳었다.
준오는 가방에서 작은 디지털 녹음기를 꺼냈다. 밤새 낡은 테이프에서 옮겨온 파일이었다. 그는 원본 테이프를 가져오지 않았다. 너무 약해진 테이프가 다시 끊어질까 봐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그 물건을 그대로 꺼내는 일이 아직은 너무 생생했기 때문이다.
"통영역이에요."
그 말에 서윤의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갔다.
"그날… 녹음한 거예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녹음한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테이프 끝에 남아 있었어요. 아마 기계가 켜진 채 가방 안에서 돌아간 것 같아요."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당 밖에서 바람이 문을 밀었다. 오래된 나무 문이 낮게 울렸다. 준오는 녹음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지, 들려주고 싶지 않은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진실은 때로 사람을 구해주지만, 먼저 한 번 더 찢는다.
서윤이 조용히 말했다.
"들을게요."
두 사람은 작업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준오는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빗소리가 흘렀다. 서윤의 어깨가 아주 작게 움찔했다. 그날의 비는 두 사람에게 같은 비가 아니었다. 준오에게는 왼쪽 귀를 닫아버린 비였고, 서윤에게는 마지막 약속을 삼켜버린 비였다. 하지만 지금 그 비는 하나의 작은 기계에서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내 방송이 지나갔다.
준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금방 와요. 눈 감지 말아요."
서윤이 그를 보았다.
"당신 목소리…"
"역 앞 사고 현장이에요. 내가 잠깐 나갔던 것 같아요. 부상자가 있었고…"
준오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서윤은 녹음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천천히 깨달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가 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돕고 있었던 것. 자신을 기다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고 속으로 끌려 들어갔던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둘 다 몰랐던 것.
녹음기에서 젊은 서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이준오 씨 못 보셨어요?"
현재의 서윤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를 알아듣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십 년 전의 자신이, 젖은 옷과 뛰는 심장과 거의 꺼져가는 휴대전화를 쥔 채, 성당 안의 작은 기계 속으로 돌아와 있었다.
"검은 배낭 메고… 키가 크고… 아까 여기서 기다린다고…"
서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목소리가…"
그녀는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테이프 속 서윤은 계속 말했다.
"오면… 이것 좀 전해주세요. 꼭요. 제가 왔다고… 아니, 그건…"
잡음.
빗소리.
그리고 거의 묻힌 문장.
"오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전해주세요."
현재의 서윤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가 더 이어졌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 열차 안내, 빗속의 금속음이 지나갔다. 녹음이 끝났을 때도 두 사람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성당은 너무 조용했다.
준오는 녹음기를 껐다.
서윤의 눈물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울음을 참으려 하지 않았다. 그 눈물은 통영역의 대합실에서 울지 못한 눈물 같았고, 포르투의 푸른 방에서 삼킨 눈물 같았고,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끝내 나오지 못한 눈물 같았다. 너무 늦게 도착한 눈물은 조용했지만 깊었다.
"나는…"
서윤이 겨우 말했다.
"정말 말했네요. 그렇게 말했네요."
"응."
준오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너는 왔고, 나를 찾았어."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부정이 아니라, 너무 늦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짓이었다.
"당신도 있었어요. 당신도 떠난 게 아니었어요."
준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문장이 그를 무너뜨렸다. 십 년 동안 그는 자신이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그런데 사실 그는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서윤도 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를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같은 역에서, 같은 비 속에서, 각자의 두려움과 우연과 침묵에 밀려 서로의 등 뒤로 지나간 사람들.
서윤이 낮게 말했다.
"우리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네요."
"응."
"그런데…"
그녀는 말을 멈췄다.
준오는 그 뒤에 올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플까.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죄를 줄여주지만, 상실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누군가 악의를 품고 떠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그가 없는 밤들을 다시 살 수는 없다. 편지가 젖은 이유가 비였다는 걸 알아도, 그 비가 지운 문장들이 저절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준오가 대신 말했다.
"그래도 십 년은 없어지지 않아요."
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없어지지 않아요."
그 말이 성당 바닥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오해의 가운데까지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환한 출구가 아니라 또 다른 빈방이 있었다. 그 빈방에는 십 년 동안 각자 살아낸 삶이 놓여 있었다. 서윤의 포르투, 준오의 전국을 떠돈 녹음들, 어머니의 죽음, 그의 청력, 그녀의 친구들, 그의 영화, 두 사람이 서로 없이 배운 습관들.
이제 와서 서로가 일부러 떠난 것이 아니었다고 확인해도, 그 시간들이 갑자기 하나의 길로 합쳐질 수는 없었다.
사랑은 오해가 풀리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해가 풀린 뒤에도 남아 있는 현실 앞에서 다시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늦게 도착한 진심
그날 그들은 오래 앉아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서윤의 편지 몇 장과 준오의 녹음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종이와 소리. 하나는 너무 많이 말했지만 보내지지 못했고, 하나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남아 있었다. 사람보다 정직한 것들. 혹은 사람이 너무 두려워 말하지 못한 진심을 대신 품고 있었던 것들.
서윤이 먼저 손을 뻗어 편지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이상해요."
"뭐가요?"
"오해가 풀리면… 조금은 가벼워질 줄 알았어요."
준오는 그녀를 보았다.
"그런데요?"
"더 무거워요. 내가 미워했던 시간이 전부 잘못된 방향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녀는 편지를 상자에 넣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당신을 원망한 밤들이 있었거든요. 답하지 않았다고. 나를 쉽게 놓았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당신도 아무것도 몰랐고,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나도 그랬어요."
준오가 말했다.
"네가 나를 밀어냈다고 믿으면 편했어요. 아프긴 했지만, 적어도 이유는 단순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내가 겁이 많았다는 걸 봐야 하네요."
서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 다 겁이 많았어요."
"응."
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 예전에는 좀 과장된 말 같았어요. 그냥 좋아하면 되는 줄 알았고, 마음이 있으면 언젠가 전해질 줄 알았어요."
그는 녹음기를 손끝으로 가볍게 눌렀다.
"그런데 마음은 저절로 도착하지 않더라고요. 누군가는 들고 가야 하고, 누군가는 문을 열어야 하고, 늦으면 늦었다고 말해야 하고."
서윤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마음을 들고 있었는데, 서로 문 앞에 두고 돌아선 것 같아요."
그 말에 서윤의 눈이 다시 젖었다.
준오는 이번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물을 자기 방식으로 멈추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십 년 전의 그는 상대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말을 삼켰고, 그 침묵이 더 큰 아픔이 되었다. 지금의 그는 배워야 했다. 곁에 있는 일과 대신 해결하는 일은 다르다는 것을.
서윤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준오 씨."
"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은 정직했다. 그래서 준오는 조금 아팠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도망치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예전의 그들이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서윤은 천천히 이어 말했다.
"우리가 서로를 오해했다는 건 알겠어요. 일부러 상처 준 게 아니라는 것도. 그런데 그걸 안다고 해서, 바로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알아요."
"예전이 남아 있긴 한 걸까요?"
준오는 대답하기 전에 복원 중인 푸른 창을 보았다. 빠진 유리 조각들 사이로 흐린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은 아직 불완전했다. 그러나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 성당 안에 빛을 들이고 있었다.
"없을지도 몰라요."
그가 말했다.
서윤이 그를 보았다.
준오는 더 천천히 말했다.
"그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우리가 잃은 스무 살의 여름은 복원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는 말을 고르다 잠시 멈췄다.
"지금의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아요."
서윤은 그 말에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성당 밖에서는 바람이 조금 더 세졌다. 흐린 하늘 아래로 비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그날 저녁 첫눈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공기는 눈보다 비에 가까웠다. 차갑고 축축하고, 오래된 기억을 다시 데려오는 냄새.
서윤은 푸른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이 편지들, 버리려고 한 적이 있어요."
"왜 안 버렸어요?"
"버리면 내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이 될까 봐요."
준오는 그 말을 마음속에 조용히 받아 적었다.
서윤이 녹음기를 보았다.
"그 테이프도요?"
"네?"
"버리려고 한 적 있어요?"
준오는 희미하게 웃었다.
"많이요."
"왜 안 버렸어요?"
그는 잠시 생각했다.
"버리면 네가 정말 없었던 사람이 될까 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십 년이 조금 다른 모양으로 놓였다. 사라진 시간이라기보다, 각자가 끝내 버리지 못한 방식으로 지켜온 시간. 보내지 못한 편지와 지우지 못한 테이프. 말하지 못했으나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했던 마음들.
하지만 그것이 곧 사랑의 재개를 뜻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그런 식의 결론을 서두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상처를 모두 고치는 주문이 아니라는 것을. 미안하다는 말이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표가 아니라는 것을. 진심이 늦게 도착해도, 그 진심을 받아줄 몸과 마음이 여전히 현재의 삶 속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들은 각자의 물건을 챙겼다. 서윤은 푸른 상자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고, 준오는 녹음기를 끄고 케이스에 넣었다. 성당 문을 닫기 전, 두 사람은 복원 중인 푸른 창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빈자리는 여전히 빈자리였다.
그러나 이제 그 빈자리가 왜 생겼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어떤 조각이 깨졌고, 어떤 조각이 너무 늦게 발견되었고, 어떤 조각은 제자리에 돌아갈 수 없지만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도.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어두웠다.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목도리를 여미며 빠르게 걸었고, 카페 창 안에서는 따뜻한 빛이 흘러나왔다. 공기 중에는 눈이 올 듯한 차가움과 비가 올 듯한 습기가 함께 있었다.
준오가 우산을 꺼내려다 멈췄다.
아직 아무것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서윤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올까요?"
준오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왼쪽 귀 안쪽에서는 오래된 빗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 귀로는 현재의 도시가 들렸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는 소리, 누군가 웃으며 지나가는 소리, 멀리서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
"모르겠어요."
그가 말했다.
"비가 올지도요."
서윤은 그 대답에 아주 작게 웃었다.
그들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손을 잡지는 않았다. 사랑을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로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저녁이 있었다.
몇 걸음 뒤, 서윤이 말했다.
"준오 씨."
"네."
"그 테이프… 나중에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준오는 그녀를 보았다.
"원하면요."
"무서울 것 같아요."
"나도요."
"그래도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준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들어요."
그 말은 약속처럼 들렸지만, 약속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두 사람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걸었다. 성당의 돌계단을 내려와, 젖지 않은 길 위를, 곧 젖을지도 모르는 저녁 속으로.
하늘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어떤 것은 내리기 전부터 이미 사람을 젖게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편지들처럼.
지우지 못한 테이프처럼.
그리고 너무 늦게 도착했지만, 끝내 도착하고 만 진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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